Dreaming in Stone

박용남展 / PARKYOUNGNAM / 朴勇男 / sculpture   2010_0903 ▶︎ 2010_0929 / 월요일 휴관

박용남_팝콘과 팍스_대리석, 브론즈_27×17×17cm, 40×20×12cm, 7×20×5cm_2008

초대일시_2010_0903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이언 갤러리_EON GALLERY 서울 종로구 팔판동 137번지 Tel. +82.2.725.6777 www.eongallery.kr

돌이 꿈꾸는 사물 ● 선인들은 돌을 바라보기를 즐겨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취미중 하나가 바로 수석취미였다. 자연계를 대표하는 존재인 돌을 일상의 공간으로 끌어들여서 관조했다. 축소된 자연인 돌, 수석은 이른바 축경 縮景에 해당한다. 경관을 축소해서 실재 경관과 비슷한 형태를 남기는 일이다. 그런 돌을 그린 그림, 이른바「괴석도」등도 여럿 남아있다. 돌은 수 억년의 세월을 견디고 남은 마지막 결정이다. 그동안의 무수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껴안고 닳아지고 씻기고 지워진 흔적 그대로가 돌의 모습니다. 그래서 돌을 본다는 것은 우주자연의 순환의 질서가 새겨놓은 자취, 무늬를 보는 일이다. 인간으로는 결코 가늠하기 어려운 철리가 단호하게 새겨놓은 엄정한 상처를 만나는 일이다. 동시에 그 부동으로 침묵하는 돌은 군자의 진중해야 하는 덕목을 일러준다. 그는 돌과 같은 사람이다. 목석같은 이다 라고들 말한다. 참 듣기 좋은 말이다. 그는 자연이란 말이지 않은가? 무정하고 비정하기까지 한 침묵은 불변하는 항심을 안긴다. 그 침묵과 부동은 자아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해체시킨다. 무아지경의 평정만이 남는다. 그런가하면 돌은 배신을 모른다. 너무 입이 무겁다. 단 한 번도 돌이 입을 뗀 모습을 본 이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돌은 돌보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서 의연하다. 그래서 시인 유치환은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고 노래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들 모두는 결국 죽어 하나의 묘석 밑에 은거한다. 나를 대신해 돌 하나가 직립한다. 묘석은 세마sema라 불렀다. 사인sign의 어원이다. 그렇게 돌 하나를 남기고 다들 죽어갈 것이다.

박용남_김밥1_대리석_30×22×17cm_2010
박용남_꽃만두2_대리석_91×72×18cm_2008

모든 조각은 결국 실재의 껍질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각은 물질을 깎아나가거나 붙여나가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다. 미켈란젤로는 바위, 돌 속에 형상이 숨어있다고 여겨서 그 형상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이 그의 작업이다. 박용남 또한 돌을 자르고 갈고 닦아서 사물을 재현한다. 그러나 그는 돌 안에 숨겨진 사물을, 대상을 찾지는 않는다. 그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사물들에서 조각을 찾는다. 아니 그것들이 조각이 되는 꿈을 꾼다. 그는 김밥을 먹으면서 김밥을 조각으로 만들면 어떨까를 생각한다. 케익과 밥알(쌀)과 파와 호박, 족발 등을 돌로 만들었다. 나아가 단추도 있고 레고불록도 있으며 풍선이나 소파 등이 있다. 그것들을 단독으로 혹은 반복해서 이어붙여나기도, 또는 서로를 연결시켜 놓았다. 최근 그는 대리석을 깎고 갈아서 무척 커다란 단추를 만들었다.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조각과는 조금 다른 조각이다. 마치 올덴버그가 일상용품을 무지막지한 크기로 부풀려 확대한 것처럼 말이다. 익숙한 사물을 무척 낯설게 보여주는 한편 크기가 엄청나게 커짐으로 해서 기존에 알고 있던 사물에 대한 선입견과 인식이 균열되는 느낌이다. 그것은 쓸모없는 단추이지만 동시에 단추를 그렇게 볼 수 있고 저렇게 돌로 만들어 세우거나 눕힘으로써 매혹적인 볼거리라 될 수도 있음을 깨우쳐준다. 동시에 일상의 사물을 미적으로 전유하는 팝 적인 전략도 감지된다.

박용남_숨겨진 차원_대리석_30×85×30cm_2010
박용남_6주간의 여행(닭)_대리석_47×22×17cm_2009

흔히 대리석이란 재료는 여성누드의 미끈한 피부, 장식적인 인물상, 혹은 대리석 자체의 물성을 그대로 노출하는 추상적 형태, 공간 속의 덩어리라는 조각의 정의에 충실한 것들로 마감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작가는 대리석이란 돌을 다르게 활용한다. 관습적인 제작에서 벗어나있다. 그는 우선 각종 재질과 색채를 지닌 돌을 바라보면서 그 돌로 형상화하기 좋은 그런 사물을 찾아 결합시킨다. 그러니까 대리석이란 재료 자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동시에 일상의 사물들을 대리석의 색채, 질감과 연관 짓는다. 대리석이 지닌 질감과 물성, 색이 실재 사물들의 피부를 닮아간다. 그렇게 그는 우리 삶과 독특한 밀착감을 지닌, 진부한 일상의 사물을 대리석으로 재현했다. 자신의 삶과 함께 하는 것들, 일상에서 우연히 만난 것들이다. 그것들을 다소 확장해서 혹은 아주 축소해서 정교하게 미끈하게 깎았다. 누구도 그런 것을 애써 조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조각관과 재료에 대한 고정 관념을 벗어난 그의 작품은 그래서 조각을 우리와 친근한 주변 환경으로 만들었다. 매일 사용하는 이 사물들을 확대하고 본래의 물성과는 전혀 다른 대리석이란 견고한 재료로 제작함으로써 현실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본래 사물이 갖고 있던 성질, 물질의 상태를 완전히 다른 상태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미술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말랑거리는 살을 돌로, 딱딱한 대리석으로 '위장'시켰다. 그리고 돌이라는 딱딱하고 견고한 재료를 다양한 일상이 사물이 지닌 질감으로 전이시켰다. 그 돌들은 망막이 아니라 보는 이의 입과 몸을 우선적으로 요구한다. 그것을 입에 넣고 싶고 먹고 싶고 씹고 싶은가 하면 앉고 싶고 더듬고 싶은 것이다. 이른바 미술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되었던 감각기관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그는 색을 지닌 돌들로 사물을 흉내 낸다. 그는 돌이 지닌 본래의 색상을 회화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물질, 돌로 공간에 그림을 그린다. 그의 조각은 강한 이미지 충동으로 이끌린다. 서사적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그는 그림을 병행한다. 조각보다 그림이 사물과 사물의 우연한 만남과 상상력에 의한 자유로운 이미지연출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편이기에 그럴 것이다.

박용남_휴식1_대리석, 브론즈_30×80×20cm_2010
박용남_예기치 않은 희생(뼈)_대리석_200×25×20cm_2010

결과적으로 색을 지닌 물질이 사물을 모방하자 실제와 유사해졌다. 그러나 그 조각은 극사실주의적인, 환영을 극대화하는 조각은 아니다. 그와 유사하기는 하나 닮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질적인 존재들끼리의 느닷없는 초현실주의적인 만남, 결합 그리고 상대적인 크기의 위상변화가 초래하는 낯설음이 그의 전략이다. 이 전략은 근작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 '환영과 허구'의 조각은 또 다른 맥락에서 우리들의 보는 방법, 시선에 대해 사유케 한다. 물리적 물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 상상에 의한 사물인식간의 거리를 생각게 한다. 망망적 시각에서 벗어난 어떤 시각적 해방이 그의 숨겨진 의도 같다는 얘기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지나치기 쉬운 친숙한 일상 사물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고 이를 미술 문맥 속에서 그것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방식이자 전략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의 시각은 일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어떤 '야성'으로 반짝인다. 유머의 함성으로 자욱하다. 신선한 발상의 정체는 자신의 삶과 풍경에 힘껏 뿌리내린 촉수들이고 이는 오랜 관찰과 숙고, 미묘한 심리와 유머와 낙관에서 길어 올려 지는 것 같다. 더구나 전통적인 조각 기법과 공들인 수공의 노동으로 인한 완결성으로 인해 우리들이 겪는 모종의 파열은 그래서 심한 편이다. 의미 없는 사물들을 이토록 힘들여 재현해 놓은 그 무모성이 '미술작품'에 막연히 기대하고 있는 관자들의 어떤 심정적인 의미망을 갑자기 거둬가 버린 것이다. 그것은 발랄한 꿈, 초현실적인 심리적 악몽으로 변형된 사물이기도 하다. 기이한 사물, 세계가 된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계와 사물은 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 관념이 아닌 촉각과 몸으로 더듬는 사물과 세계야말로 진정한 세계일 것이다. 박용남의 조각이 말하고 싶은 욕망이 그것이다. ■ 박영택

Vol.20100903g | 박용남展 / PARKYOUNGNAM / 朴勇男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