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Clothing-Passage, Gaze

전성규展 / JEONSEONGKYOO / 全成圭 / painting   2010_0901 ▶︎ 2010_0914 / 월요일 휴관

전성규_Clothing-Passage10-6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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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0901_수요일_05:00pm

본 전시는 경기문화재단의 기금에 의해 열리는 것입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이노_SPACE INNO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2층 Tel. +82.2.730.6763

2010년 베를린 비엔날레의 주제는『저기 밖에 기다리는 무엇』이었다. 여기서 '밖'은 으르렁거리며 존재를 물어뜯으려 덤벼드는 현실이다. '현실'은 거의 언제나 위협적인 공간으로, 그 안에서는 인간을 구석으로 몰고, 억압하고, 회유하는 온갖 소외와 상실의 조건들이 쉴 새 없이 만들어진다. 사르트르는 이 공간이 출구조차 없는 숨막히는 곳임을 적시했다. 오웰은 그곳을 집단 농장에, 주제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수용소'에 견주었다. 수많은 실존주의자들에게 현실은 꿈꾸는 것조차 부조리에 지나지 않는 절망의 늪지에 다름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술은 '저 밖에서 결투를 기다리는 현실'과의 한판승부를 위해 결연하게 나서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이 결투의 대단원은 좌절과 고립, 상실과 상처다. 결국 끝없이 어리석고, 부질없는 짓에 몰입하고, 쉽게 속아 넘어가고, 버림받거나 배신당하고, 협박당하고, 억울한 사건에 연루되며 사형대에 서는 것으로 끝나는 당사자는 인간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맥락에서라면 이러한 귀결은 발버둥을 친다한들 별도리가 없는, 일테면 운명의 소관이다. 거침없는 고백과 감정토로의 장인 현대미술이 전례없는 탄식과 절규의 분출, 일탈의 형식, 혼돈의 어법이 범람하는 장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을 터이다. ● 현대미술의 저변을 흐르는 상실의 담론은 그 부분적인 진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론 존재와 현실에 대한 충실한 담론적 심오함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현실이 파국(catastrophe)의 관문일 수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 파국이 궁극적인 끝은 아니며,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제 2의 관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반지의 제왕』의 저자이기도 한 톨킨이 말한 바 있듯, '좋은 신호(good sign)'로서의 파국, 곧 선파국(eu-catastrophe)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파국은 종말이지만, 선파국은 새로운 출발의 씨앗을 그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은 파국이다. ● 선파국(eu-catastrophe)의 개념은 전성규의 회화가 기대고 있는 존재의 담론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하다. 전성규의 존재와 예술담론의 지향점은 '저기 밖에 기다리는 무엇'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 저 깊은 곳에서 부르는 무엇'이다. 그에게 구체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사건들의 공간은 존재의 '밖'이 아니고 '안'이며, 함정을 파놓고 결투자를 불러내는 비열한 현실이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을 초대하는 심연으로부터의 음성이다. 하지만 이 심연의 부름으로 나아가기 위해 현상계의 구체성은 반드시 파국을 맞아야만 한다. 곧 선파국의 계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구체성이 꿈틀거리는 유기적 비구체성으로 대체되고, 형상은 산포적인 비형상으로 파산되는 듯한 전성규의 회화적 소산은 다른 세계, 곧 심연으로 나아가는 경계선 현상, 곧 선파국의 시각적 이정표인 것이다.

전성규_Clothing-Gaze1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100cm_2010
전성규_Clothing-Passage10-8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12.1cm_2010
전성규_Clothing-Gaze1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116.8cm_2010

부분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성규의 회화는 이제껏 축조해왔던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의 회화는 여전히 별도의 주석이 필요해 보이는 기호들, 점으로 형태가 이루어진 옷, 집, 파장들, 그리고 끊임없이 불명확한 방식으로 상호연관되는 자유롭고 임의적인 곡선부와 다소 과도하게 유기적인 구성들로 마치 넘칠 듯하다. 이러한 포화상태의 회화는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일반적인 조화, 통상적인 수준의 절제나 적절한 요약으론 담지해내기 어려운 복잡한 세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 그 세계는 우리의 통상적인 현실인식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저 너머의 세계다. 우리의 유한한 인식의 범주 안에서는 다만 비현실이거나 비밀이라고 불리어지지만, 적어도 도스토예프스키와 전성규에게는 진정한 현실이요 진실인 그러한 세계다. 도스토예프스키의『카라마조프씨의 형제들』에서 조지마 장로가 알로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지구상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려져 있다. 그러나 그 대신 우리는 비밀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다른 세계, 더 높은 세상과의 신비하고 생생한 결속감이다. 우리 생각과 감정의 뿌리는 이곳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있다." '다른 세계', '더 높은 세상'과의 결속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것은 각각의 레이어들을 서로 구속하고 서로에게 구속되는 방식으로 부단히 중첩시켜나가면서 결속의 시각적 알레고리를 만들어나가는 전성규 회화의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어떤 레이어도 다른 레이어로부터, 어떤 요인도 다른 요인들로부터 자율적이지 않다. 화면은 주(主)와 부(附), 주제와 배경의 이분법을 용납하지 않는다. 선은 어느새 면을 생성하고, 면들은 돌연 색으로 채워진다. 원인과 결과가 한 점에서 출발하고 다시 한 점으로 모인다. 여기서는 현실과 비현실, 세속과 초월이 공존하고, 범속과 영원, 저주와 구원이 뒤섞여 있다. 그의 회화행위가 진행되는 현실과 현상계의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초월의 음성이 더 이상 유리된 두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 현실,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구체성이란 존재와 우주를 설명하기에는 허상에 가까울 만큼 국부제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나라의 진실은 우리의 인식체계-현상계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로서는 터무니없는 비현실이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혼돈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전성규의 표현이 현재의 비현실성으로 부단히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동시에 형식주의적 의미의 추상으로 오독되어선 안 될 이유이기도 것이다. 그것은 추상화가 아니라, 다른 세계의 구체화라 해야 오히려 근접한 표현일 것이기에 그렇다.

전성규_Clothing-Passage1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10
전성규_Clothing-Pasage10-1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72.5cm_2010
전성규_Clothing-Pasage10-1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72.5cm_2010

전성규의 회화전략은 내적인 세계나 보이지 않는 차원을 다루는 통상적인 표현적 조치들, 예컨대 시적 압축이나 암시, 은유, 암시 등과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표현들에 있어 핵심사안은 현상계와의 간섭효과를 유발할 개연성이 있는 구체성을 어떤 식으로든 소거하는 것이다. 최대한 우회하거나 베일의 뒤로 은폐시킴으로써 다른 세계가 자리할 빈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 반면 전성규의 회화는 그러한 빈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매우 꼼꼼한 설명적 차원이 동반됨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그의 회화는 시(詩)적인 빈 공간을 설계하거나, 암시의 유격을 계산해내는 것보다는 훨씬 덜 계획적인 과정의 산물이다. 그의 회화적 행위는 묘사나 해석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떠올려야 할 만큼 '받아적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의 회화를 무의식의 분출이 남긴 흔적 같은 비인격적 차원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회화는 다만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산문(散文), 직관으로 채워져 나가는 에세이에 가깝다. ■ 심상용

Vol.20100907d | 전성규展 / JEONSEONGKYOO / 全成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