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and land

권정준展 / KWONJUNGJUN / 權正峻 / photography.installation   2010_0901 ▶︎ 2010_0915 / 월요일 휴관

권정준_tazo-영준_패널에 아크릴, 디지털 프린트_67×67×35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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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에쿼드나인_GALLERY AQUAD9 서울 종로구 사간동 90-1번지 Tel. +82.2.739.7008 www.neoartist.net

월드 엔드 랜드 ● 사진은 이미 주지하다시피 존재 하거나 존재했던 사물을 그대로 담는 역할을 한다. 이를 두고 '정지된 시간'처럼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사물을 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박제는 살아 있었던 생물이 죽었을 때 이를 부패하지 못하도록 방부하고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기술이다. 즉 표본의 일종이다. 표본은 교육이나 지도의 목적으로 생물학, 고생물학, 의학, 광물학 등에서 사용하는 자연물의 전체거나 부분이다. 이것들의 주된 목적은 재현에 있다. 얼마나 실존해 있을 때와 흡사 한가 혹은 그대로를 표현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과 같아야 하며 사실과 맞닿기를 얼마나 열망하고 있을 것인가? 어떤 종류의 작업을 하더라도 미술가들이라면 재현에의 욕구를 가질 수 있다. 사실에 대한 재현이든지. 의미에 대한 재현이든 심상에 대한 재현이던지 말이다. 그 모든 재현은 박제가 갖는 또 다른 의미와 맞닿게 되는데, 회화는 무엇인가를 재현하여 스스로 원본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작가의 작업이 과연 원본이 될 수 있을까? 원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처리 과정과 인증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 박제는 결코 원본이 아니다. 죽은 동물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원본은 이미 죽어 버린 것이다.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 쓴 부족국가 시대의 부족장이 호랑이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반대도 성립이 어려워 보인다. 복제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박제 자체가 원본이다. 이미 죽어 버린 호랑이가 남긴 것이 바로 가죽이기 때문이다. 물감 덩어리의 회화는 사진이 나온 이후로 더 이상 사실에 대한 재현은 버려야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아무리 잘 찍은 사진도 원본 앞에선 범 앞에 하룻강아지다. 드넓은 그랜드 캐니언의 사진은 그랜드 캐니언 앞에선 그냥 감광유제가 뭍은 종이 일 뿐이다. 박제는 주술적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길 바라면서 만든 미이라가 그 대표일 것이다. 미이라는 시간을 박제하길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다. 사실 표본으로써의 박제도 그러하다 주술적인 내용은 빠져 있겠지만, 시간이나 상태를 멈추기 위한 행위이다. 종교에서 신이 깃들어 있기를 바라는 성물들은 과연 신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을까? 사물이나 공간 혹은 사람이 회화에 의해 박제 되었고 회화는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서 박제가 되었으며, 사진은 시간이나 공간을 박제화 한다. 그리고 박제는 스스로를 박제 하여 원본을 누르고 재현으로써 표현된다. 영혼이 떠나간 박제는 그가 그 이전(죽기 전)에는 스스로의 원본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남긴 그 육체는 조각가의 조각이나 화가의 그림보다는 원본에 가깝지만, 스스로도 원본임을 자처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버렸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한다. 복제품이 그의 꿈은 아닐 것이다. 현재 많은 이미지들이 서로 복제하고 재생산을 하고 있다. 모든 게 섞여버려서 무엇이 원래의 '원본'인지 아무도 모르는 난해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박제의 수준에도 못 오른 것들이 자신의 지위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권정준_tazo-영준얼굴_패널에 아크릴, 디지털 프린트_35×35×23cm_2010
권정준_tazo-로티_패널에 아크릴, 디지털 프린트_57×57×35cm_2010
권정준_영준을 찾아라-01_C 프린트_171×300cm
권정준_영준을 찾아라-02_C 프린트_210×280cm
권정준_절단된 얼굴, 아크릴 박스에 디지털 프린트_3×25×20cm×8_2010
권정준_영준의 얼굴-01_디지털 프린트_27×21cm_2010

본질을 찾으려는 행동들은 어떤 과정이 수반 되어야 할까? 예전부터 사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보았다. 불쌍한 사진. 사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원본이 될 수 없었다. -'사진 스스로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원본이 될 수 없다'라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은 것들은 사진기에 담을 수 없다. 정말 만에 하나라도 담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건 사진의 특질인 '실제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재현'이라는 부분이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 사진이 스스로가 원본이 되기를 바라면서 작업을 해왔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사진만이 가능한 것들을 찾아야만 한다. 앞에서 사진의 재현력이 스스로를 단속하여 실재 사물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사진이 실재하는 사물보다 더 큰 의미가 생기려면 실재 사물에 대한 사진만의 입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많은 사진 작품들이 스스로의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한 경우는 많이 목격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사진의 재현력에 기대지 않을 수는 없는 듯하다. 어떠한 종류의 사진이든지(관광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컨템포러리 사진이나 소위 예술로써 분류 되는 사진조차도) 프로세스나 외형적으로 보여 지는 마지막 결과물은 모두 같은 형태로 보여 진다. 즉 물리적인 변형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물리적인 변형은 사진의 조작이나 덧붙이기, 휘거나 접기 등의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사진이 스스로의 재현력에 가장 크게 의지하고 있더라도 이것이 훼손 되면 사진은 그 역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의 재현력에 평면성을 부각 시키는 방법을 쓴다. 아무리 입체인 사물이라고 해도 사진은 평면이 된다. 평면을 이용한 입방체는 사진이 또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 권정준

Vol.20100919d | 권정준展 / KWONJUNGJUN / 權正峻 / photography.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