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 of sight

한지석展 / Jokk Han / 韓知錫 / painting   2010_1001 ▶︎ 2010_1024 / 월요일 휴관

한지석_untitled100927-729001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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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1001_금요일_06:00pm

UNC 갤러리 기획전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월요일 휴관

UNC 갤러리 UNC gallery 서울 종로구 사간동 126-1번지 Tel. +82.2.733.2798 www.uncgallery.com

현상과 가상의 상보성 ● 'out of sight'라는 전시 부제는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 너머의 것, 또는 세밀하게 다가가야 보이는 것에 대한 이 전시의 의도를 압축한다. 칠해졌거나 그려졌다기 보다는 뿌려지거나 죽죽 흘러내리는 형상들은 무엇인가의 흔적이나 잔여물로 보인다. 그것은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깝다. 중첩되는 색선들은 팔렛트나 화면이 아닌, 눈에서 섞이게 되어 있다. 조형요소들은 정밀하게 조정되기 보다는 날것들로 병치된다. [무제-일련번호]로 건조하게 매겨진 제목이 붙은 그림들은 대체로 중심에 밀도가 높고, 얇게 펼쳐진 상태가 여러 겹 겹쳐져서 관객이 찾아내야 할 미지의 형상을 드러낸다.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제시이다. 가끔 나타나는, 수평선이나 각진 형태의 흰 공백인 기하학적 선을 제외한다면 화면에서 명확한 형태를 발견하기 힘들다. 선적 요소는 건물이나 집 같은 모습인데, 그 조차도 완결되지 않고 어떤 터전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 위에도 어김없이 잡초 같은 야생적인 선들이 자라나 있다. 물감 흔적들은 얼굴이나 몸의 일부들로 갈래지어지며, 때로 십자가에 못 박힌 날개달린 존재(천사)같은 동체가 드러나는 작품도 있다. 관객이 애써 형상을 찾아내야 하듯이, 작가 역시 형상을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

한지석_untitled100923-329001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0

그려가면서 화면이 모종의 질서를 잡아가고, 무엇인가가 발견되는 것은 추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한지석은 처음이 아니라, 그리는 과정 속에서 구체화되며 마지막에 가서야 바라는 형상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의식보다는 무의식이 중시되는 그의 작품은 중첩된 화면의 층들이 이후의 붓질에 의해 완전히 덮이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이고 처음 붓질부터 마지막까지 다 보이므로 작가를 관통하는 어떤 힘의 변화들이 감지된다. 어느 것도 무화되지 않지만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 않다. 그는 사람의 감정과 마음을 흐르는 것으로 본다. 다양한 갈래를 가지는 (무)의식의 흐름은 고정적이지 않으며, 언제라도 전면으로 떠오를 준비가 되어있다. 한지석은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작가이지만, 정작 작업 과정 속에서는 스스로를 수동적인 상황 속에 놓는다. 그의 그림은 형상화나 구축이 아니라 지우기와 해체처럼 보이며, 이 모든 과정을 관할하는 주체의 관점 역시 모호하다. 메를로-퐁티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말하듯이, 한지석의 작품 속 주체는 진정 그 누구도 아닌 나, 무명씨이다. 거기에는 동일성도 비동일성도 또는 불일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서로의 주위를 회전하는 내부와 외부이다.

한지석_untitled100908-809001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0

나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있으며, 누구도 아닌 자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있는 것과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자기로부터의 탈출을 통해 자신으로 돌아가는 역설적인 선택이다. 한지석은 유아론의 벽에 균열을 내고, 타자의 시선이 통과할 수 있을 틈새들을 만든다. 그의 그림에서는 주체든 객체든, 실체 자체가 틈새들로 이루어져 있다. 흐름들이 층위를 이루는 화면은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각 시간성의 갈래들이 각 서사의 줄기를 이룬다. 이야기들은 갈래짓기의 방식에 따라 다르게 들려온다. 한지석의 그림은 층이 여러 겹이지만 물감 층이 매우 얇아서 거의 울퉁불퉁한 면이 없다. 화면 중심에서 그리기 때문에, 화면 가장자리로 갈수록 더욱 투명하고 얇아진다.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작가는 그 안에서 형상을 보고 집어넣기 때문에 관객 또한 이러한 과정을 공유할 수 있다. 확실한 형태는 본질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보는 한지석은 자신의 그림이 추상같이 보여 지는 구상으로 여겨졌으면 한다. 이전 작품에서 상상적 풍경 안에 있던 작은 형상들은 모두 빠져서 지금은 뭔지 모를 것들만 남아있다.

한지석_untitled100973-379001_캔버스에 유채_100×80cm_2010

풍경의 미소한 부분을 차지하던 인물은 이방인의 시점을 암시했는데, 그는 명확하게 시각으로 인지되는 작은 부분마저 삭제함으로서,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규정짓는 시각성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이러한 질문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일견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형상과 메시지가 내재하며 그림이 잉여적인 것이 되어 세상의 일부를 장식하는 것에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 한지석의 그림은 자폐적이고 비극적인 분위기까지 느껴지지만, 그는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작가이다. 각종 정보기기의 잡다한 소음에 둘러싸인 요즘 사람들은 잘 읽지도 않는 신문이 작업실 한켠에 가득 쌓여있고, 관심 가는 기사는 손수 스크랩도 한다. 물론 그것은 작품에 직접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 속에 가라앉혀 놓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어느 순간에 표현형으로 발현된다.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것들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그림은 보다 장기 지속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는 이 문제를,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발휘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로 맥락화한다. 물론 그가 다루는 크고 작은 문제 안에는 스스로에 대한 부분이 많이 차지한다. 그는 작업 안에서 일상의 소소한 삶이 해결하기 힘든 역할, 즉 스스로를 정리하고 방향성을 정립하고자 한다. 그 점에서 작업은 고통이자 즐거움이고, 상처이자 치유이다.

한지석_untitled100951-159001_캔버스에 유채_112×146cm_2010

자신이 나아갈 바에 대한 확신이 없는 채 가늘게 흐르는 선들은 공간에 드리워진 얇은 Rm나풀처럼 보인다. 관객은 눈을 통해 하늘거리는 끄나풀들을 제치면서 그 내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스케일이 커질수록 진입의 문턱은 낮아질 것이다. 수많은 층위와 중첩을 통해 화면은 원근감이 부여되지만, 전체 형상은 밑도 끝도 없는 공간 속에 둥 떠 있는 듯 뿌리가 없다. 아니, 형상 전체가 어디선가 통째로 뽑혀진 뿌리 같다. 뿌리 뽑힌 존재, 즉 이방인의 시점은 수 년 동안의 영국 유학 생활에서 절감한 것이지만, 한국에 왔다고 해서 근본적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중심 줄기와 곁가지가 구별되는 전형적인 뿌리라기보다는 뿌리줄기처럼 느슨하면서도 다방향성으로 뻗어 있다. 견고하고 닫혀 있는 형식과는 거리가 멀어도 그의 그림은 강렬한 파토스에 물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지석의 작품은 바로크적이다. 마틴 제이는『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에서 뵐플린의 구분대로, 르네상스의 명료하고 선적이며 견고하고 고정된 그리고 평면적이며 닫힌 형식과는 대조적인, 회화적이며 깊이 감을 주고 초점이 모호하며 복합적이고 열려있는 바로크 양식을 대조한다. 그의 작품에는 안정된 원근법을 거부하는 시각의 폭발적인 힘이 존재한다. 여기에서는 세계를 재현하는 주체의 명료한 관점은 사라지고, 주객관적 실재의 불투명성이 전면에 나타난다.

한지석_untitled100934-439001_캔버스에 유채_117×91cm_2010

세계는 투명하게 드러나는 대신에, 오일의 끈끈한 물질성에 의존한다. 물론 세계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 한지석에게 이러한 물질성은 자족적이며 장식적인 표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베일 너머의 저곳에 대한 우회적인 지시행위와 관련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세계의 물질적 견고함에 대한 믿음은 용해되어 있으며, 시각 경험은 불투명한 촉각성으로 분해된다. 그것들을 차라리 볼 수 없는 것을 그린 흔적들이다. 부시 글룩스만은 『시각의 광기』에서 이러한 바로크적 시각에 대해, 그것이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 했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멜랑콜리를 산출한다고 지적한다. 비처럼 눈물처럼 죽죽 흘러내린 선들이 풍경을 이루고, 그 안에 작은 인간이 자리한 이전의 작품에서 멜랑콜리는 보다 분명한 서사를 갖추었지만, 그 마저도 사라진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분위기만이 남아있다. 시선은 정신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명확히 고정되지 못하며 방황하게 된다. 한지석의 그림이 요구하는 시각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육안(肉眼)이다. 육안은 고정된 시각성 보다는 시간성에 의존한다. 한 공간을 차지할 뿐인 해부학적 몸이 아니라, 시간의 지배를 받는 생리학적인 몸 말이다. 시각의 대상들은 움직이는 몸과 공존한다.

한지석_untitled100929-929001_캔버스에 유채_91×73cm_2010

시각적 공간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떨림은 시각적인 것의 육체와 관련된다. 한지석의 작품에서 시각적인 것은 육체의 맥박을 내장한다. 보여 진 것 아래에는 보여지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보려는 충동』에서 리오타르의 모체형상(matrix figure)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모더니즘 회화의 탈 신체화된 시각성을 비판한다. 크라우스에 의하면 모체는 무의식에 속해 있는 일차적 과정이며, 외적인 공간의 좌표에 동화될 수 없는 그런 공간성을 포함한다. 모체는 구조라는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차이를 정리하거나 규제하지 않는다. '하나의 위치에서 많은 위치들을 갖게 되는 게 모체의 특징이며, 그러한 위치들은 함께 블록을 형성하지만, 그 블록은 결코 조정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점이 바로 형상의 비밀로서, 담론의 구성적 간격들에 대한 위반이고 또한 재현의 구성적 거리들에 대한 위반이다'(리오타르) 환상과 무의식의 근간을 이루는 모체의 활동은 모순을 덧씌우는, 즉 조정 불가능한 상황들의 동시성을 창조하는 작용들이다. 한지석의 작품은 이러한 모체의 비가시성을 다루고 있다. 이 비가시적인 것들은 무엇과도 동일시 될 수 없는 부재의 흔적들이다. ● 그것은 삶 또는 창조의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고통과 쾌락이 명멸하는 장소를 지시한다. 미술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시각적인 현상에 민감한 화가들이 보이는 것에 대해 가지는 의혹들은 의미심장하다. 그 의혹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들이 작품의 독특한 부분을 이룬다는 사실도 역설적이다. 『out of sight』전에서 상정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관계는 메를로 퐁티가 회화의 개혁을 이끌 수 있는 영구한 자원으로 간주한 무정형의 지각적 세계, 즉 '그 자신은 어떠한 표현양식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온갖 표현양식을 불러오고 요구해서 화가들과 더불어 새로운 표현 노력이 새로이 솟구치게 하는 세계'와 가깝다.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현실적인 것은 현실적이어서 일관되고 확실한 것일 뿐, 일관적이어서 현실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상상적인 것은 상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비일관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일 뿐, 비일관적이기 때문에 상상적인 것은 아니다. 현상 없이는 가상도 없고, 모든 가상은 현상의 보완물이다. 세계와 존재, 이 둘의 관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잠재성)의 관계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한지석의 작품은 존재가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었다하는 다양한 표현들로 간주될 수 있다. ■ 이선영

Vol.20100927d | 한지석展 / Jokk Han / 韓知錫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