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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훈展 / SUNGDONGHUN / 成東勳 / sculpture   2010_1001 ▶︎ 2013_0120

성동훈_지금 여기서 이렇게 산다 Now Live here like this_용광로 금속 Metal of Smelting Furnace_ 350×200×160cm, 야외영구설치_THE PIER-2 ART CENTER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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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후원 / 대만 동호철강_카오슝시_주밍미술관

THE PIER-2 ART CENTER 駁二藝術特區 鹽埕區大勇路1號 Kaohsiung City 803 Tel. +886.7.521.4899 www.facebook.com/pier2art

주밍미술관 Juming Museum 20842 新北市金山區西勢湖2號 20842 No.2, Xishihu, Jinshan Dist., New Taipei City, Taiwan R.O.C. Tel. +886.2.2498.9940 www.juming.org.tw

재료와 의미의 균형 ● 현대 조각이라는 개념의 기원은 엄밀히 말해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 1766년에 출판한 저서『라오콘(Laocoon)』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06년에 출토된 헬레니즘 시기의 라오콘 군상은 트로이성의 제관 라오콘과 두 아들이 큰 뱀에 몸이 감겨 사투를 벌이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발굴 당시 사람들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표현력에 있어, 베르길리우스의 (Virgile, 70B.C.-19 B.C.) 같은 장면을 묘사하는 시와 아름다움을 견줄 만 하며, "회화는 시처럼" (Ut pictura poesis) 이라는 예술원리의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회화는 시처럼"의 평론방식을 뒤엎고 규범적 (normatif) 비평법을 택했다. 문자와 그림은 확연히 다른 것으로 어떤 상황하에서 같은 사물을 표현할 수 있으나, 각자의 기능과 목적에 위배되지는 않는다. 그의 질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 병치된 부호는 병치된 사물 혹은 병치된 요소로 구성된 사물 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연속된 부호는 연속된 사물 혹은 연속된 요소로 된 것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사물, 또는 사물의 요소가 서로 병치하는 것을 체(體, corps)라 하며, 체와 그의 명확한 특성은 곧 회화(조각)의 목적이다. 연속된 순서로 배열된 사물 또는 그 요소는 광의적 행동이다. 행동은 곧 시의 목적이다. ●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이와 같이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의 차이를 구분했다. 문자와 그림은 목적과 기능상에 있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회화와 조각은 정지된 것으로, 공간 내에서만 확장될 뿐, 시간 속에서는 연속될 수 없다. 그러므로 행동(서사)은 더더욱 그 목적이 될 수 없다. '조각이란 무엇인가?'는 물음에 대해, 조각은 '일종의 "실체" 가 공간 내에서 확장되는 것과 관련 있는 예술' 로 정의될 수 있다고 했다. 이로써 조각은 수 천 년 동안 지속된 텍스트와 서사의 속박에서 벗어나, 순수한 조형과 재료 물성의 연구로 진입했다. 타틀린(Tatlin)이 철, 알루미늄, 목판 등과 같은 일반적이지 않은 소재로 소위 「코너 릴리프」를 만들었을 때, 피카소의 입체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피카소 작품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쌓아 구성했으나(assembler) 여전히 현실사물의 재현이며, 미술관 전시에 사용됐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타틀린(Tatlin)이 쌓은 것은 재료의 구성원리와 공간의 연구이고, 공장에 직접 응용될 수 있다. 이토록 20세기 철조의 선천적 체질을 형성했다.

성동훈_지금 여기서 이렇게 산다 Now Live here like this
성동훈_지금 여기서 이렇게 산다 Now Live here like this_용광로 금속 Metal of Smelting Furnace_ 185×210×170cm, 야외영구설치_THE PIER-2 ART CENTER_2013
성동훈_지금 여기서 이렇게 산다 Now Live here like this_용광로 금속 Metal of Smelting Furnace_ 90×190×150cm, 야외영구설치_THE PIER-2 ART CENTER_2013

1967년 태어난 성동훈이 부산 공예고를 졸업하던 시기는 1980년대 말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때다. 그로 하여금 학교교육의 전통적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재료와 조형언어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도록 하였고, 이로 인해 철조로 전향했다. 하지만 철조를 다루는데 있어, 처음에는 철이 서양 모더니즘에 있어 가장 대표성을 지닌 조각소재라는 점을 경시하고 철을 서사, 상징, 우의(寓意)의 용도로 이끌어 갔다. ● 1990년대 시작된 「돈키호테 연작」은 성동훈의 대표작으로, 서양 고전문학 스페인 문학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가 만들어낸 인물인 돈키호테(Don Quixote)를 작업의 모체로 삼고 있다. 이러한 예는 성동훈이 텍스트와 서사의 의도로 돌아왔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바이다. 그가 선택한 인물 돈키호테는 미치광이이자, 시대와는 동떨어진 구제불능인 이상주의로 경직된 불공평한 사회제도에 대항한다. 결국 온 몸은 상처 투성이가 되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지만, 위험 속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돈키호테 정신은 위용 있게 다리를 벌려 올라 탄 채, 손에는 긴 창을 들고 위풍당당 하면서도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조각상에서 충분히 표출되고 있다. ● 성동훈이 이번에 전시한 2009년작「돈키호테」를 자세히 보면 단순한 영웅조각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기법이 상당히 이질적이다. 우선, 소설 속의 돈키호테가 비쩍 마른 말을 타지만 성동훈의 작품에서는 난폭한 숫소를 타고 있고, 그 자태는 투우사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러한 치환기법은 피카소가 초현실주의 시기에 푹 빠져있던 주제를 연상케 한다. 신화 속의 소 머리를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에서 격앙된 반전 작품「게르니카」(Guernica)까지, 혹은 2차 대전 시기 및 이후 끊임없이 등장했던「황소 머리」에 피카소는 민족의식을 통해 숫소에 스페인 혈통을 부여했다. 하지만 계속 거칠고 모호한 스타일과 은유, 변형의 기법으로 숫소를 남성의 상징으로 만들었고, 신성(神性)과 수성(獸性) 사이에 놓이도록 했다. 그런데 왜 성동훈은 마른 말을 숫소로 치환한 것일까? 피카소로 인한 불후의 남성적 상징과 대화를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가? 게다가 거친 숫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온 몸이 화려한 색깔의 조화로 장식되어 있고, 몸 안에 전구가 장치되어 있어 세속적인 빛을 내 뿜는다. 사실 성동훈의「돈키호테」연작에서 주인공은 소나 말을 타는 대신, 물고기, 돼지, 닭 등과 같은 농업사회의 가금류와 가축 위에 올라 앉아 믹스 매치와 해학적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성동훈은 철조사 가운데 '공업폐기물'에 대한 애정을 저버린 것은 아니다. 숫소가 영웅을 태우고 있는 것은 주워 온 금속 기성품을 쌓아 올리고, 공업기술을 통해 '직접 용접'하여 만든 것이다. 마치 산업사회의 흥망성쇠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현대화를 상징하며, 인류에게 진보와 편리함을 가져왔으나 이기주의, 냉담함, 소외, 빈부격차, 환경파괴를 야기했다. 산업사회의 여러가지 병폐는 아마 돈키호테가 맞서 싸우려는 대상일 것이다. 몸체와 확연히 다른 돈키호테의 머리부분은 마치 병마용의 석조와 같다. 전체 작품에 전통적, 역사적, 동양적 암시를 가져왔고, 차가운 공업폐기물 가운데 자연의 온기가 스며있다. 성동훈이 이번에 전시한 몇몇 소품 역시 다문화적 참고요소가 가득하다. 강철로 만든 구름 속에서 코끼리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부처는 부처 탄생 전설을 환기시킨다. 한쪽 구름은 계속 회전하는데, 마치 조개가 입을 벌린 듯한 구름 속에는 불두(佛頭)의 자비와 제트기의 침략성이 병치되어 있다. 이러한 이질흡수는 강렬한 대비를 보인다. 그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만든 작품「소리나무」는 슬러그를 이용, 나뭇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만들고 가지 끝에는 한국에서 온 전통 풍경(風磬)이 높이 매달려 있다. 문화교류의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보기 흉한 산업폐기물을 아름답게 만든 예술작품이다.

성동훈_소리나무-진산의 행복한 고목 Sound Tree-The happy tree in Jinsan_ 용광로 금속, 세라믹 풍경, Metal of Smelting Furnace, Ceramic Bells_380×150×160cm_주밍미술관_2011
성동훈_I like Duke Guan_용광로 금속, 풍경 Metal of Smelting Furnace, Bells_ 380×150×160cm_주밍미술관_2011

전체적으로 말해서,성동훈의 철에 대한 선호와 사용은 매우 자의적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산업화와 현대화를 상징하는 차갑고 딱딱한 강철에서 벗어나, 문화와 전통의 온기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철조 성질 중 물질주의와 형식주의의 순수함을 버리고, 일종의 이질흡수 기법을 채택하여 기성품, 돌, 콘크리트를 섞어 배치하면서도 빛과 동력을 운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신화, 역사, 전설 등 서사적 내용으로 돌아왔을 뿐 아니라, 강철이 어찌할 바 없이 사실 재현의 도구가 되게끔 하였다. 이러한 기법은 어쩌면 전시 좌담회 중 최태만 교수가 발표했던 내용과 상응한다 -한국 동시대 금속조각의 추세는 일종의 재료와 의미 사이의 균형에 있음- 의미가 재료에 굴복 당하지 않게끔 하려는 의도이다. ■ 천쾅이

성동훈_소리나무 Sound Tree_스텐인리스 스틸, 벨, Stainless steel, Bells_ 800×650×450cm, 야외영구설치_THE PIER-2 ART CENTER_2010

材料與意義的平衡 ● 關於現代雕塑的概念源起嚴格來講可以上溯到萊辛(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於1766年出版的『勞孔』(Laocoon)一書。於1506年出土的這組希臘化時期群像,描述特洛伊城祭司勞孔和兩個孩子被巨蛇纏身的瀕死掙扎,使當時代的人們為之驚豔不已,認為其表現足以與維吉爾(Virgile, 70B.C.-19 B.C.)描述同一情節的詩作媲美,是「詩畫一律」(Ut pictura poesis)的最佳典範。萊辛卻推翻「詩畫一律」的評論方式,改採規範的(normatif)批評法,質疑文字與圖像這兩種截然不同的媒介在何種情況下可以表現相同的事物,而不至於背離各自的功能與目的。他的質疑促使他寫下如此的結論: ● 並置的符號只能表達並置的事物,或由並置的元素所構成的事物。同樣的,連續的符號也只能表現連續的事物,或它們的連續的元素。事物,或它們的元素互相並置叫作「體」(corps),所以體與它的明顯特質即是繪畫(雕塑)的目的。以連續的次序安排的事物,或它們的元素,叫作廣義的行動。行動即是詩的目的。 ● 萊辛因此區分出時間藝術與空間藝術的差別,即是文字與圖像兩大系統在目的與功能上的差別。繪畫與雕塑是靜止的,只能在空間中延展,卻無法在時間中延續,因此行動(敘事)便不是它的目的。從此,面對「何謂雕塑?」的提問,雕塑可以被定義為「一種與『體』在空間中的延展有關的藝術」。雕塑因此脫離桎梏了它數千年之久的文本與敘事,進入純粹的造形與材質的研究。因此,當塔特林開始以不尋常的素材如鐵、鋁、木板等建構它所謂的『角落的浮雕』時,雖然靈感來自於畢卡索的立體作品,但二者最大的不同卻在於後者用隨手可得的素材堆積(assembler)成的仍是現實事物的再現,用來展示於博物館;而塔特林堆積的卻是材料的構成原理與空間的研究,可以直接應用於工廠;如此塑造了二十世紀鋼鐵雕塑的先天體質。 ● 出生於1967年的成東勳,從釜山陶瓷工藝學院畢業時,正值1980年代末南韓民主運動白熱化的時刻,使他亟欲掙脫學院傳統的束縛,尋求新的造型材料與語彙,因此轉向鋼雕。不過成東勳對於鋼鐵的運用,一開始就忽視其作為西方現代主義最具代表性雕塑素材的身分,而將鋼鐵導向一種敘事、象徵或寓意的用途。 1990年代開始的《唐吉軻德系列》是成東勳的代表作,西方經典文學中西班牙作家賽萬提斯(Miguel de Cervantes, 1547-1616 )塑造的人物唐吉軻德(Don Quixote)從此成為他主要的創作母題,此舉當然毫無疑問的表露出成東勳重回文本與敘事的意圖。他所選取的人物唐吉軻德以瘋狂、不合時宜、無可救藥的理想主義來對抗僵化不公的社會制度,即便渾身是傷,被人嘲笑甚至飛蛾撲火也在所不惜。這樣的唐吉軻德精神充分的流露在那些威武的跨坐於坐騎上,手持長矛,英姿勃發卻有點可笑的塑像身上。 ● 只不過,若細看成東勳這次展出的2009年的「唐吉軻德」,便會發現此作並非只是單純的英雄塑像,它的手法可謂相當異質:首先,小說中唐吉軻德騎的是瘦馬,此處卻是粗暴的公牛,姿態因此顯得更像是鬥牛士。這樣的置換手法,令人不得不聯想到畢卡索超現實主義時期之後熱愛的主題:從神話中的牛頭人身怪物(Minotaur),到激昂的反戰作品「格爾尼卡」(Guernica),或二戰期間與戰後不斷出現的「牛頭」,畢卡索透過民族意識賦予公牛某種西班牙的血緣,但也不斷的採用粗暴、曖昧的風格以及隱喻、變形的手法,使公牛成為男性的象徵,界於神性與獸性之間。然而為何成東勳以公牛置換瘦馬?是與因畢卡索而不朽的男性象徵對話嗎?還是另有所指?而且粗暴的公牛很矛盾的全身綴滿了色彩鮮艷的人造花,其內部裝置的燈泡,更使它通體散發著俗艷的光芒。其實在城東勳的『唐吉軻德』系列中,主角的坐騎除了牛或馬之外,也更替著魚、豬和雞等農業社會中的家禽和家畜,更強調其混搭與詼諧的作風。然而,成東勳並未忽視的是鋼雕史中對於「工業廢棄物」的情有獨鍾,公牛背上的這位英雄,是由撿拾而來的金屬現成物堆積,並且透過工業技術「直接焊接」而成,似乎也反映著工業社會的興盛與衰敗,它象徵現代化,為人類帶來了進步與便利,但卻也帶來了自私、冷漠、疏離、貧富差距和環境破壞。種種工業社會的弊病,可能正是唐吉軻德想要迎戰的對象。與身體截然不同的唐吉軻德的頭部,則是仿若兵馬俑般的石雕,為整個作品帶來了一些傳統的、歷史的、東方的暗示;也在冰冷的工業廢棄物中,滲入了一絲自然的溫潤。成東勳此次展出的另外幾件小型作品,也充滿了跨文化的參照,在鋼鐵打造的雲朵之中,佛陀面對著大象而坐,喚起了佛陀誕生的傳說;而在另一朵不斷旋轉的,仿若蚌殼般張開的祥雲中,矛盾的並置著佛頭的慈悲與噴射機的侵略性。這種異質吸納造成的強烈對比比比皆是:他的駐館作品「音之樹」則是利用融鐵殘料拼集成一株枝葉茂盛的大樹,枝頭高高掛著來自於韓國的傳統風鈴,除了忠實的肩負著文化交流的任務,也再一次的將醜陋的工業廢料化作美好的藝術作品。 ● 整體而言,成東勳對於鋼鐵的偏好與使用,可謂相當的恣意。他違背了鋼鐵做為工業化與現代化象徵的冷硬,賦予它一種文化與傳統的溫度;又摒棄了鋼雕體質中材質主義與形式主義的純粹,採取一種異質吸納的手法,拼置現成物、雜入石與水泥,還不忘記玩弄光線與動力;他並且重回神話、歷史與傳說等敘事性的內容,使鋼鐵身不由己的成為寫實再現的工具。如此的手法,也許正呼應了展覽座談會中催泰晚教授所發表的觀察:整個韓國當代金屬雕塑的走向,都在於一種「材料與意義之間的平衡」,一種不讓意義向材料屈服的意圖。 ■ 陳貺怡

Vol.20101005i | 성동훈展 / SUNGDONGHUN / 成東勳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