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수묵대가: 한국 장우성張遇聖·대만 푸쥐안푸傅狷夫

2010_1022 ▶︎ 2010_1128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_2010_1022_금요일_04:00pm

주최_이천시립월전미술관_대만국립역사박물관 후원_이천시_주한국타이페이대표부 문화조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이천시립월전미술관 WOLJEON MUSEUM OF ART ICHEON 경기도 이천시 엑스포길 48번지(설봉공원 내) Tel. +82.31.637.0032~3 www.iwoljeon.org

『당대 수묵대가: 한국 장우성․대만 푸쥐안푸』전을 열며 ● 장우성 선생은 2003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중대가韓中大家: 장우성張遇聖․리커란李可染』전에서 중국 국화國畵의 거장과 첫 2인 합동전을 가진 바 있다. 선생 스스로도 그 전시를 만년을 가늠하는 중요한 행사로 꼽았는데 그것은 선생의 생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번에 열리는 『당대 수묵대가: 한국 장우성․대만 푸쥐안푸』전은 두 대가의 사후에 이루어진 첫 2인 합동전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으며, 대만 산수화의 거장 푸쥐안푸 선생과의 합동전이라 더욱 의미있는 행사라 여겨진다. 장우성張遇聖(1912-2005)과 푸쥐안푸傅狷夫(1910-2007)는 20세기 초 동아시아가 처한 격동의 시기에 한국과 중국에서 예술가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90세가 훌쩍 넘는 장수의 복까지 지니고 자국의 화단에서 근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한국의 장우성과 대만의 푸쥐안푸 두 수묵대가 전이 2010년 가을 한국의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2012년 장우성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장우성과 동시대를 살면서 동아시아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를 초청하여 근현대 동아시아미술의 경향을 탐색해 보고자 한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다. 한 때는 우방이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그 관계가 잠시 소원해진 대만과의 문화교류가 이 전시를 계기로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것도 기획의도의 일부분이다. 이 전시가 열릴 수 있도록 시종일관 한결같은 마음으로 도와준 주한국타이페이대표부 문화조 차오페이린 참사관님과 귀한 소장품을 선뜻 제공해준 대만국립역사박물관에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장우성_국화_종이에 수묵담채_34×43.5cm_1998
장우성_가을부엉이_종이에 채색_64×83cm_1981

근현대 한국화단의 거목 장우성은 선산先山을 본 지관地官으로부터 후손 중에 명화가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 태어난 타고난 예술가다. 충북 충주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장우성은 유년기부터 가학家學으로 시를 익혔고 서예를 배웠다. 여느 예술가들과는 달리 부모의 든든한 지원 아래 20세 되던 해 당대의 명가였던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림을 배운지 1년 만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면서 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4년 다시 입선하게 되고 이후 조선미술전람회가 막을 내리던 1944년까지 줄곧 입․특선을 차지했다. 1941-1944년까지는 연속 특선하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림을 시작할 때보다 1년 앞선 19세에 그는 당대의 명서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에게 서예를 다시 배우기 시작하면서 훗날 서화가로서의 자질을 키우기 시작했다. 당시의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그는 시화일치詩畵一致와 서화일치書畵一致의 참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평생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한국 화단의 마지막 시서화 삼절이라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장우성은 인물화, 화조화, 영모화, 산수화, 서예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표현했다. 그의 문인화는 자신의 고상하고 우아한 문인 정신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는 스승 김은호로부터 전수 받은 초기의 일본풍의 공필 진채에서 탈피하여 간결한 필선과 담백한 담채의 화풍으로 탈바꿈한다. 이것이 그가 화필인생의 과제로 여기고 추구한 한국적 색채의 '신문인화'풍이다. 그의 신문인화풍은 오창석吳昌碩(1844-1927)의 문인화에서 시작하였지만 후에 자신만의 고유한 화풍을 형성하게 된다. 그의 문인화가 보여주는 과감하게 생략된 필선과 간결한 붓놀림은 사실적이고 세밀한 외면의 형사形寫가 아닌 내면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의사意寫의 표현이다. '회사후소繪事後素' 정신을 특별히 강조한 그의 유가적이면서 동시에 도가적인 성향의 '무위지위無爲之爲'의 정신세계가 그의 담박한 문인화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특히 대표적인 수묵 추상화인 「무극無極」, 「태풍경보颱風警報」(1999), 「광란시대狂亂時代」가 이러한 그의 내면적인 정신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죽竹과 송松은 간결하고 함축된 필선으로 묵墨의 농담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여백의 미를 한껏 살린 자신만의 풍격으로 표현되고 있다. ● 장우성의 인물화에서 특징적인 것은 성화聖畵 제작이다. 기독교인도 아닌 그는 성모자와 순교복자들을 한국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여 일약 국제적인 관심을 끌게 되고, 「한국의 성모자상」(1950), 「한국의 순교복자」(1950)가 바티칸 교황청에 걸리게 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이외에도 선열의 영정제작과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표준영정을 제작했다. 대표작에는 「이순신 장군」(1953), 「다산 정약용」, 「김유신 장군」, 「집현전학사도」 등이 있다. 장우성의 화조화는 곧 글씨의 필법으로 그린 것이다. 특히 「홍매」(1966)에서 가지와 줄기를 그릴 때는 전서의 원전圓轉의 중봉 필법을 사용하여 그의 매화는 더욱 생생하다. 화제의 "以篆隸法寫之(이전예법사지, 전서와 예서의 필법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그가 '서화동법書畵同法', '서법입화書法入畵'의 전통을 몸소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장우성은 「면벽面壁」(1981), 「회고回顧」(1981) 등을 통해 선禪적인 정신세계를 드러냄으로써 현실을 초월한 듯 보이지만, 그림을 통해서 현실적인 문제를 비판하는 시대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오염지대」(1979)에서는 산업의 근대화로 오염된 환경을 고발하고 있으며, 「황소개구리洋蛙」(1998)에서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래문화의 화禍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적조赤潮」(2003)에서 적조는 강렬한 붉은 색으로, 그 적조 때문에 죽은 물고기는 가련해 보이는 흰색으로 처리하여 바닷물의 부패로 인한 피해를 말하고 있다. 「단군일백오십대손檀君一百五十代孫」(2001)에서는 서구문명에 젖은 신세대들과의 소통의 부재를 한탄하고 있으며, 「아슬아슬」(2003)에서는 국가수장의 국정운영능력을 초보운전자의 운전솜씨에 빗대어 국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장우성의 서예는 스승 김돈희의 서풍을 벗어나 독자적인 월전풍을 구사한다. 남겨진 작품은 대부분 1990년대 이후의 것으로 행초서의 호방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국한문 혼용체와 한글에서도 행초서의 필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구애됨이 없는 자유분방한 서풍을 보이고 있다.

장우성_야매夜梅_종이에 채색_62×72.5cm_1996
장우성_폭포 Waterfall_종이에 채색_125×43cm_1982

이처럼 다방면으로 적지 않은 작품을 남긴 월전 장우성은 스스로 화노畵奴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단순히 화공畵工으로서가 아니라, 서書와 화畵를 동시에 즐긴 서화가로 남겨지기를 원했다는 것은 그의 작품 「화노畵奴」(1999)와 그의 인장 "아비화공我非畵工"과 "서화벽書畵癖"에서 감지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나기도 했지만 붓과 함께 한 70여년을 한결같이 절차탁마한 흔적을 작품의 변화과정을 통해 읽을 수 있다. 그는 전통성․창의성․시대성을 겸비한 자작自作․자서自書․자화自畵한 시서화 삼절의 문인화가로서 한국화에 정통한, 그래서 20세기 한국화단에 한 획을 그은 진정한 예술가다. 동시에 장우성은 한국미술교육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교육자다. 그는 1946-1961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1971-1974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써 한국미술교육에서 이바지했다. 1965-1967까지는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하여 동양화를 가르치면서 서방에서 한국화 알리기에도 앞장섰다. 또한 그는 "동방예술연구회"를 만들어 예술인들에게 문사철의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주기 위한 강좌를 제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예술가 양성에 힘썼다.

푸쥐안푸_쌍천합벽 雙清合璧 Bamboo and Plum_88×45cm_1989
푸쥐안푸_송천암곡 松泉岩谷 Waterfalls and Pines in the Valley_120.5×60.5cm_1968

푸쥐안푸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 서호西湖 부근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바오칭抱青이며 웨이唯一라고도 불렸다. 만년의 호는 각옹覺翁이다. 그는 거의 모든 중국의 화가들처럼 그림에 앞서 글씨를 먼저 공부했다. 청나라의 수재秀才였던 부친 푸위傅御로부터 해서를 전수받았으며, 주로 당나라 구양순歐陽詢과 안진경顏真卿의 글씨를 배웠다. 행서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를 배우다가 청나라의 총첩總帖 『삼희당법첩三希堂法帖』에서 여러 서가들의 다양한 글씨를 습득했다. 또한 김농金農, 정섭鄭燮, 하소기何紹基, 조지겸趙之謙, 강유위康有為 등 청나라 명서가들의 글씨도 두루 섭렵했다. 난징 시절(1934-1937) 오창석吳昌碩의 전서와 전각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자신만의 서풍을 창조했다. 국공내전國共內戰 이후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온 이후 그는 초서, 특히 광초狂草에 심취했다. 대만 정착 초기의 불안한 마음을 초서로 달랬기 때문에 그는 서예작품은 대부분 행초서며, 화제畵題에도 주로 행초서가 사용되었다. 장우성과 마찬가지로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푸쥐안푸는 유년기에 연습 삼아 그린 난초와 게를 그려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는 17세 되던 해에 항저우서령서화사杭州西泠書畫社의 왕천루王潛樓 문하에 입문하면서 비로소 화단에 발을 들이게 된다. 간혹 매화, 종려나무, 화초 등의 식물을 그리기도 했지만 스승이 산수화를 주로 그렸기 때문에 그의 장르도 산수화였다. 1931년 『신미화집辛未畵集』에 처녀작이 실리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1938년 난징국민정부 소속으로 쓰촨四川 지역으로 가게 되는데 이 충칭重慶시기에 가장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당대의 명서화가들이 내전을 피해 대거 쓰촨으로 이주하고, 중앙대학 예술과, 항저우예술전문학교, 베이핑[北平]예술전문학교 등 대부분의 중요한 미술학교와 미술단체들이 대거 쓰촨으로 옮겨왔기 때문에 대만 시절 유일한 사범대 예술과에 비해 활동이 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공필 중채 기법의 인물화 대가 천즈퍼陳之佛(1896-1962)에게서 색채 운용기법을 배웠지만 인물화에는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 때 푸바오스傅抱石를 만났고 아내 시더팡席德芳을 만났다. 그는 1949년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왔으며, 1959년부터 20여 년간 성전람회 중국화평가심의위원을 역임했다. 1958년에는 '육려화회六儷畵會'를, 1959년에는 '십인서회十人書會'를, 1962년에는 '팔붕화회八朋畫會', '칠우화회七友畫會' 등을 설립하여 활동했다.

푸쥐안푸_고백 古柏 Old Cypress_178×96cm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화법을 구사한 장우성과는 달리, 푸쥐안푸의 주된 장르는 산수화였고 소재는 주로 이란 다리宜蘭大里의 풍경, 아리산阿里山 풍광, 중부횡관도로였다. 전통적인 산수화 기법에서 시작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창조함으로써 그는 대만 산수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는 파도를 묘사할 때는 '점지법點漬法'을, 화롄지역의 독특한 대리석을 묘사할 때는 '열하법裂罅法'이라는 독특한 준법을 사용했다. 푸쥐안푸의 산수화풍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전통필묵으로 대만 경치를 묘사하는 산수화 사생론이다. 그의 산수는 대만 경관과 기후특질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문인화 중에 문학적․역사적 요소를 주입하고 있어 대만 산수화 발전의 특색을 형성하고 있다. 전후戰後 서방문화가 예술형식의 발전에 강력하게 개입할 때 그의 산수는 수묵화의 미학요구를 활성화시켰고 참신하고 힘찬 성장역량을 주입했다. 둘째는 수묵화와 서예를 겸했다. 그는 서예에서 동방미학의 기질을 찾았는데 그가 표현한 필법과 묵법은 전통적인 임첩법臨帖法이나 서사법書寫法과는 다르다. 회화성이 있는 조형은 상형문자에 근원을 둔 한문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성질은 공간의 결구이고 현대예술에서의 추상성이 있는 필촉筆觸의 조합과 함의涵義 그리고 조형미학을 이루어 그 성과는 수묵화의 경지가 더 심화된 것이고 국제성을 띤 다양한 창작형태를 갖춘 것이다. 푸쥐안푸도 장우성과 마찬가지로 대만의 미술교육에 힘써 교육자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대만에 정착한 후 그는 예문사藝文社에서 그림을 가르쳤고 대만예술전문학교에서도 제자들을 육성하여 현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화가들 중에서 당시의 제자들이 많다. 1961-1971년까지 정공간교政工幹校 미술과 교수를, 1962-1972년까지 예술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했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어 생전에 세 차례 한국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1982년 73세에 동아일보 초청으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1987년 78세에 한중예술연합회의 초청으로 서울 신문회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88년에는 대만국립역사박물관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개최한 국제현대서예전에 참석했다.

푸쥐안푸_유당방주 柳塘放舟 Boat in a Willow Pond_70×45cm_1998
푸쥐안푸_운산첩취雲山疊翠 구름에 겹겹이 둘러싸인 산자락 Waterfalls in the Mountain_120×60cm

3년 동안 미국에 머무른 적은 있었지만 조국 한국에서 태어나 2005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장우성과는 달리, 푸쥐안푸는 1990년 미국으로 이민 가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2007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3년 만에 다시 한국에서 한국화의 대가 장우성과 대만 산수화의 거장 푸쥐안푸의 서화전을 열게 된 것은 동아시아미술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한국과 대만의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 정현숙

전시연계 특강 장우성·푸쥐안푸의 예술세계 - 발표자_박영택(경기대학교 교수, 미술평론) / 장우성- 자기 내면의 투사로서의 서화       셰스잉謝世英 박사(대만국립역사박물관) / 푸쥐안푸의 대만 산수       김상철(미술평론) / 전통의 뜰에 서서 현대의 문을 열다-부견부와 장우성의 삶과 예술 - 날짜_2010_1022_금요일_02:00pm~03:30pm - 장소_이천시립월전미술관 2F 세미나실

Vol.20101028e | 당대 수묵대가: 한국 장우성張遇聖·대만 푸쥐안푸傅狷夫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