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 · 세로 · 깊이 - 海印

안정민展 / ANJEONGMIN / 安貞敏 / printing   2010_1029 ▶︎ 2010_1109

안정민_가로·세로·깊이-海印 10_우드컷, 피그먼트, 실리콘 캐스팅_244×61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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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0_1029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_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폭포, 성찰을 위하여 ● 안정민 근작 소재인 물은 고요하지 않다. 수직으로 빠르게 하강하며 내리꽂히는, 엄청난 속도와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폭포다. 뽀얀 포말이 일고, 차고 시린 듯 정신을 맑게 만든다. 고여 있지 않고 유동하는 것만으로도 기운은 생동하는데, 놀라운 속도와 힘과 무게로 급강하하는 폭포는 참으로 강하다. 뿐인가, 형상을 묘사하지 않으며 전체적인 느낌과 이미지를 드러내는 화면 구성은 자연스럽고 대범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빠른 속도는 역설적으로 영화에서의 슬로우 모션처럼 꾸물거리는 느림을 동반한다. 오래 지켜보면 한결 여유 있어지는 호흡을 느낄 수 있다. 의식은 긴장을 유발하는데 감수성은 편해진다. 묘한 경험이자 매력이다.

안정민_가로·세로·깊이-海印 11_우드컷, 피그먼트, 실리콘 캐스팅_244×61cm_2010

도구라고는 넓고 평평한 칼, 단 하나만을 옥죄듯 쥐고 나무판면을 내리찍으며 판각한 화면은 활력적이고 싱싱한 날 것의 맛이다. 거기에 세로로 2.5m에 이르는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형상은 다이나믹하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서술할 언어가 없다. 육체를 통한 물리적 힘의 무작위적이고 불규칙적인 판각행위가 나무판면위에 흔적으로 남은 그녀의 목판화 이미지는, 그래서 원시적인 표현성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자그마한 체구의 50대 후반 여성작가 작품이라기엔 놀랍도록 거칠고 그 몸짓과 응집된 힘의 발산이 강건하다. 이 작가의 작품에서, 특히 근작에서, 점점 더 잘 정제된 유연한 조형성과 야성적인 미감의 어울림으로 드러나는 에너지와 맛은, 박제된 패턴만을 반복적으로 생산해 내는 여타의 '이미지 기술자'들에 비하면 싱싱한 역동성을 건져 올리게 한다. ●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격렬한 동세가 두드러지는 화면의 시각성에만 안정민이 머물러 있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폭포와 물을 통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과정의 단면이나 감정의 바탕에 대한 성찰이 보이는 지점에서,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표현의 쾌감에만 머물지 않고 그녀의 내면을 반영해 준다. 시각예술이 매력 있는 것은, 눈으로 즐기기만 하는 단순한 이미지 놀음이 아니라, 작가의 이런 열림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노출시켜 주어서다. 누구나 살면서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필(개)연성의 공통분모에 대한 접점을 만들어 주는 배려 같은 것으로 말이다. 작가는 그런 존재다. 자신의 내면을 드러냄으로 관객과 독자가 그 지점으로 오게끔 유도하며 소통하려는 존재 말이다. 작가의 내밀함과 관객의 수용이 한 차원 높아지는 이유다.

안정민_가로·세로·깊이-海印 12_우드컷, 피그먼트, 실리콘 캐스팅_244×61cm_2010

안정민의 폭포는 시원스런 시각효과의 배면에 삶에서 그녀가 경험했던 것을 다시 회화적인 언어와 판화형식으로 치환해주는 힘들고도 복잡한 작업과정을 노정함으로, 그의 작품에 깊숙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 준다. 그 통로를 보자. 이번 전시 안정민의 작업에서는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먼저 해인(海印)이란 불교적 명제처럼 만물을 포괄하며 해탈을 의미하는 물의 지혜로운 속성을 작가자신의 내면에 투영하는 내용적 진술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내용에 비례하는 목판화 형식의 실험과 창출이다.

안정민_가로·세로·깊이-海印 14_우드컷, 피그먼트, 실리콘 캐스팅_244×61cm_2010

일반적으로 목판화는 畵·刻·印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밑그림을 그리고, 파고, 인쇄하는 작업과정이 그것이다. 세계최초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 8c중반'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안정민도 크게는 이 방식을 따른다. 그런데 근작인 폭포에서 이 印(프린팅)에 대한 부분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식과 재료와 기술을 구사한다. 일종의 '떠내기 Casting'기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 재료가 종이가 아닌 실리콘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목판화라는 전통적인 장르개념에 투명실리콘에 은색 안료를 첨가해서 돋을 면의 색을 처리한 점은 판화를 통한 또 다른 영역에의 가능성을 함유한 것이기도 하다. 주로 한지나 판화지에 찍은 판화들은 재료의 한계로 인한 제약이 많았다. 그런데 실리콘이란 재료를 통해서 스케일이나 보존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판화도 설치의 방식, 환경미술이나 공공미술의 영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 그러나 이 기법은 지루하고 노동 집약적인 과정을 단서로 한다. 목판 면을 판각하고 프레스에서 찍기만 하면 완성되는 일반적 방식과 달리, 프린팅이 오히려 작업의 시작점이 될 정도로 수공의 장인성이 요구된다. 제판이 된 판을 바닥에 놓고, 주변으로 틀을 만들고, 은색안료와 혼합한 실리콘을 돋을 면에 잉킹한 뒤, 다시 판면 전체에 실리콘 액을 붓으로 엷게 칠하는 반복적 과정이 대략 6~7회 정도이니 한 작품을 떠내는 시간만 해도 만만치 않다. 거기에 작품의 길이가 2.5m에 이르니 이 육체적 작업과정은 그야말로 '고생'이란 말로밖엔 서술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거침없이 도전하며 새로운 목판화의 문맥을 개척하는 작가의 지난한 작업과정은 한국현대판화에 제공하는 또 다른 가치 중의 하나라 볼 수 있겠다.

안정민_가로·세로·깊이-海印 15_우드컷, 피그먼트, 실리콘 캐스팅_122×61cm_2010

자연인으로서의 감정 뿐 아니라 작가적 입장에까지 접근할 수 있게끔 만드는 감성과 세상살이에 대한 인식은 공고한 시각적 결과로 연결된다. 폭포는 그런 삶의 과정의 한 단면이자, 지금 그녀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하나의 상징 기제이다. 불현듯 김수영의 '폭포'가 떠오른다. 시적 진술과 열린 인식이 교직된 정직한 반성의 세계.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그리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는 시처럼 깨어 있으려는 모더니스트의 자기경계 의식이 안정민의 폭포에서도 오버랩 되어 보인다. 얼마나 견고하고 치열한 자기 갱신의 과정인가. 얼마만큼 날마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자유인의 성찰인가. ● 안정민의 작품에서 김수영의 시가 연상된 것은 소재가 폭포라서만은 아니다. 부박한 시대의 흐름에 편승치 않고 온통 작업으로만 삶을 견인해 가는 작가의 미적 태도와 근성이 이 시의 이미지와 유사하게 겹쳐졌기에 그렇다. 맞다. 60년대 정치적·일상적 자유를 노래한 시인과, 2000년대를 장년기로 살고 있는 50대 후반의 모던아티스트 안정민은 그 어떤 시간·공간·주제·일상의 문제도 공유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작업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직진하는 태도는 닮았다. 조금 더 편하고 쉬운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몸에 무리일 정도의 스케일과 힘든 작업과정을 스스로 견인함으로 몸과 정신의 흔적을 작품에 남기는 것의 유사점으로 말이다. 그래서 시각적인 광경 뿐 아니라 내리 꽂히는 폭포의 뽀얀 포말에서 역설적으로 깨어 있는 날 선 자극을 내가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격렬하게 보이는 형상 이면엔 물(폭포)을 관조하는 안정민의 냉정함도 동시에 있다. 세계를 바라보며 그것을 작품으로 연결해 가는 과정에서의 깊어진 시선과 오버하지 않는 형식적 태도가 그것이다.

안정민_가로·세로·깊이-海印 16_우드컷, 피그먼트, 실리콘 캐스팅_122×61cm_2010

안정민이 명제로 택한 '가로, 세로, 깊이-해인海印'에는 폭포에 대한 작가의 감수성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물의 현상을 통하여 존재를, 그것도 주체인 자신을 사유하려는 입장이 숨어있다. 철학적인 자세이자 작가로서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폭포라는 소재를 넘어 궁극적으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 옛 부터 성현들의 물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제법 많았다. '上善若水', 노자 도덕경의 첫 구절이다. 장자는 '明鏡止水'라 하여 고요하고 담담한 심정을 물에 비유했다. 뿐인가, 공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無爲) 넓게 퍼져 나가며 생명의 원천이 되는 물을 '水哉!, 水哉!'라고 찬탄했다. 그리고 또 맹자는 흐르는 물을 인생에 비유하며 '水至淸則無魚 人至察則無徒',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살지 않고, 사람이 너무 살피게 되면 인재가 모여들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물은 철학적 태도에도 또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 바탕으로도 찬미가 된 것이었다. ● 안정민에게 있어서 물은 이처럼 철학적인 의미항도 되지만, 한편 인생사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의 상태를 상정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살면서 겪게 되는, 천변만화하며 어떠한 형상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 마음의 상태가 물의 성질과 같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 거기에서 가장 격렬한 물의 상태인 폭포를 선택함으로 자신의 현재를 추상(秋霜)처럼 반성하고자 시도한 것이기도 하다. 그 반성적 사유가 명제로 언어화 된 것이 불교 용어인 해인(海印)이다. 해인, 지혜로 우주만물을 깨닫는 것. 만상(萬象)을 비추는 바다를 하나의 경지로 비유한 것. 폭포는 물의 여러 모습 중 한 단면일 뿐, 이와는 다른 상대적인 세계가 또 다른 지점에 있음도 은유한다. 그러니까 물을 통해서 삶을 바라보는 안정민에겐 이 거친 폭포는 결국 고요하게 고여 있는 물과 이음동의(異音同意)라는 뜻도 된다. 물도 사람처럼 온갖 형태와 성질로 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 단면을 안정민은 이번 작업에는 수 억년간 단 한순간도 같은 상태일 수 없이 변화하는 폭포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안정민_서울서설!_우드컷, 피그먼트, 실리콘 캐스팅_244×61cm_2010

기실, 폭포를 소재로 하기 전까지 안정민의 다색 목판화작업들은 자연에 대한 부드러운 서정적 결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았음을 상기해 보면 50대 후반, 그녀의 성찰은 더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작 '은골단심'연작이나, 그 이전의 자연풍광을 정서적으로 재해석한 작업들에서의 고요한 서정성과 비교하자면 폭포연작은 지금 이 시기 안정민이 지향하는 바 작품의 조형적 실험과 내면과 사유가 성공적으로 결합된 것이며, 한편으로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반영임에도 틀림없어 보인다. 그것은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온전하게 작업으로 증명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 작가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런 머무르지 않는 태도가 우리가 그의 작품을 지켜보게 만드는 동인이라 하겠다. ■ 김진하

Vol.20101028k | 안정민展 / ANJEONGMIN / 安貞敏 / pr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