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김홍주展 / KIMHONGJOO / 金洪疇 / painting   2010_1202 ▶︎ 2010_1212

김홍주_무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1×236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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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_2010_1202_목요일_05:00pm

제22회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전

기획_김정은_최규성

관람시간 / 10:00am~06:00pm

조선일보 미술관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1번지 Tel. +82.2.724.6328 gallery.chosun.com

김홍주의 작품은 요즘 시각 문화의 흐름과 반대 지점에 놓여 있다. 첨단 기술과 인터넷 문화가 다양한 종류의 영상 매체를 빠르게 소통시키면서 강렬하고 매력적인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있는 이 시대에, 가장 낡은 매체인 회화마저도 첨단 기술과 디지털 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김홍주의 회화는 느리며 침묵하는 이미지를 계속 보여주고 있다. 김홍주가 본격적으로 회화 작업을 시작한 1975년부터 지금까지 그려진 모든 작품들은 모두 제목이 없다. 모두 무제(Untitled)이다. 제목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작품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내보이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무제'의 행위는 무엇보다도 관람객과의 소통이 중요시되는 요즘의 문화 풍토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홍주의 '무제'는 소통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빠르고 간편한 의미 전달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홍주의 '무제'가 지향하는 것은 느리고 에둘러가며 불편한 길을 걸으면서 무엇인가 기존의 것과는 차별되는 새로운 감각을 얻으려는 것이다. 느리고 불편한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새롭고 차별되는 어떤 것이란, 비유하자면 마트나 식당에서 파는 멋들어지게 포장된 음식 맛과 비교되는, 가정집에서 직접 만든 음식의 독특한 손맛이 갖는 색다름과 같다고 하겠다. 제22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이와 같은 '무제'를 주제로 하고자 한다. 이름 붙여지지 않고, 쉽게 알 수 없으며, 불편하고 느린 과정을 통해서 표현되는 감각이 우리 예술과 시각 문화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김홍주_무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32×144cm_1994~5

1. 무제의 풍경 ● 김홍주 회화에는 이름 없는 풍경이 등장한다. 거울에 비친 이름 모를 사람의 일상 풍경, 창문 너머 보이는 어딘지 모를 산과 들의 풍경, 누구의 꿈인지 모를 초현실적 풍경, 장난감 같은 건물이 모여 있는 어느 동네의 풍경….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즈음에는 지표면의 풍경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조망되어 그려진 풍경이 아니라 캔버스 자체가 그대로 배경이 되어 지표면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는 흙덩이처럼 보이는 것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다. 흙덩이들은 가까이 보면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데 왜 그렇게 세밀하게 그려져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장소의 지표면인지도 알 수 없고, 그 지표면이 왜 그려져야 하는 지도 알 수 없다. 2000년대 후반에 등장하는 풍경은 희미하며 부서져가는 듯이 보인다. 어느 곳의 풍경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풍경을 그린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무엇인가 산과 길의 형태가 보이는 듯도 한데, 금세 희미해지고 뿌옇게 된다. 그러나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확실히 풍경이다. 이것은 보여주고자 하는 풍경이 아니라 감추고자 하는 풍경이며, 편리하고 빠른 길 대신 불편하고 돌아가는 길로 안내하는 지도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선명하지 않은 지도를 보여주며 굳이 불편한 길을 걸을 때의 감각을 느끼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김홍주_무제_혼합매체_105×140cm_1991

2. 무제의 글자 ● 1990년대 중반에 주로 제작된 글자 그림은 90년대 초반 지표면 그림의 흙덩이가 글자 모양으로 변화한 것이다. 멀리서 보면 서예 작품이 보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흙덩이와 배설물이 보인다. 글자가 한글인지, 한문인지, 아랍어인지는 알 수 있는데,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다. 읽을 수 없는 글자, 제목 없는 글자이다. 글자 그림은 작가의 유년 시절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 어떤 글자가 써진 종이를 태운 다음 그것을 먹었던 경험, 집안의 곳곳을 둘러쳐져 있던 족자와 병풍, 제사상에 놓여있던 한문이 써진 지방에 대한 기억들이 글자 그림에 녹아있다. 작가에게 글자란, 의미 전달을 위한 매개체가 아니라 유교 문화와 샤머니즘 문화가 지배하던 현대화되기 이전의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추억이 형상화된 이미지이다. 어린 시절 그가 보았지만 읽을 수 없었던 글자들은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글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읽을 수 없는 상태로 남아있다. 3. 무제의 화면 ● 초창기 김홍주의 회화는 거울에 비친 영상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거나 머리를 빗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일상이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연출되었다. 이러한 초기 작품들은 일상의 이미지가 담겨있으나 익숙하고 친근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배경이나 맥락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두운 공간에 갑작스레 떠오른 인물의 영상은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거울을 보고 있는지,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아니라 귀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 중에서도 이렇게 맥락을 알 수 없는 화면이 등장한다. 속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희미한 이미지, 화려한 액자 안쪽에 피 흘리는 듯 연출되고 배열된 조화들, 흙덩이 아래에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과 이를 둘러싼 사각의 테두리…. 무제의 화면들은 우리에게 이름 붙일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원초적인 감각을 느끼게 한다. ■ 김정은

Vol.20101202c | 김홍주展 / KIMHONGJOO / 金洪疇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