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id-Flexible

윤종주展 / YOONJONGJU / 尹鐘珠 / painting   2010_1202 ▶︎ 2010_1212 / 월요일 휴관

윤종주_solid-flexible_패널에 파라핀_100×70cm_2010

초대일시_2010_1202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_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진선_GALLERY JINSUN 서울 종로구 팔판동 161번지 Tel. +82.2.723.3340 www.jinsunart.com blog.naver.com/g_jinsun

존재의 얼룩, 있음을 있게 하다 ● 구조와 물성은 회화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 둘은 서로 충돌이라는 사태에 자주 직면한다. 구조를 강조하면 물성이 중성화되거나 약화되고 물성이 우세해질 때 구조가 지닌 본래적인 힘은 기울기 마련이다. ● 윤종주가 작가적 성장을 해온 환경을 보면 주변에 대체로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작가들이 우세한 편이이었다. 미니멀리즘은 구조적인 질서의 미술이다. 따라서 물성이 약화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미니멀리스트들은 구조의 질서보다는 질서에 담기려는 물성(物性) 등의 적재성(摘載性)에 더 비중을 두는 작가들이 많다. 엄격히 말해 이율배반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한때 이들의 작업을 미니멀 아트가 아닌 미니멀리스틱 아트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20년 전, 일본 오사카의 야마구치 갤러리에서 열린 'minimal, minimalistic' 이란 전시에서 힌트를 얻었음. 도널드 져드, 이우환 등이 참여.) 미니멀과 미니멀'리스틱'의 사이에는 미묘한, 그러나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윤종주_solid-flexible_종이에 파라핀_42×29.7cm_2010

섬세하게 분류해보면, 윤종주 역시 미니멀리스틱 아트의 대열에 선 작가다. 미니멀리스틱의 양가적 가치 중에서 '미니멀'보다는 '리스틱'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편이다. 그녀는 미니멀리즘이 구축하려는 수학적 질서의 구조에서 배제되었거나 '리스틱(listic)'이란 자격으로 부가적으로 얹힌 여러 가치들 즉, 재료적인 물성에 더 비중을 두려 한다. ● 구조는 무한하게 반복가능한 최소한의 질서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결국은 무한한 공간에 조형의 의지를 최대한 펼치려는 확산으로 이어진다. 반면 윤종주의 경우에서 보듯, 물성은 유한한 공간의 선택에 만족하며 그 안에서 물성을 이루는 재료들이 발효하며 밀도의 충전을 꿈꾸려 한다. 윤종주가 취한 구조는 대체로 사각형의 그리드다. 그러나 그 그리드는 반복을 통한 무한대의 확장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재료를 담거나 발효를 도와주는 데에 적절한 형태의 그릇으로 작용한다. 이 그릇에 담긴 주재료는 파라핀이다.

윤종주_compromised_패널에 파라핀_50×64cm_2009

파라핀은 묘한 이중성을 갖고 있다. 열을 가하면 액체에 가까운 유동성을 보이다가도 식으면 단단해진다. 어느 정도 투명하지만 완전히 빛을 투과하지는 않는다. 파라핀에 안료를 추가하면 당연히 빛이 보다 더 차단된다. 그러나 그것도 도포성이 강력한 일반적인 물감과는 다르게 여전히 어느 정도 빛을 머금고 품으려 한다. 파라핀은 빛과 색을 동시에 담을 수 있는 재료로 보인다. ● 빛과 색의 영역은 엄연히 다르다. 색이 질량을 가진 물질이라면 빛은 순수한 파장의 세계다. 색은 본질적으로도 현상적으로도 촉각적인 질량을 가진 '있음'이다. 빛은 언제든 픽셀로 분해되어 무한공간으로 휘발할 수 있는 불가촉(不可觸)의 '있음', 무질량인 공(空)으로서의 '비어있는 있음'이다. 빛과 색으로 분화되기 전의 상태가 색채(안료)다. 색채는 드러냄과 잠복이 동시에 가능하다. 색채는 빛의 밝음을 통해 이 세상에 드러나고 질량을 통해 자신의 내부로 잠복을 한다.

윤종주_compromised_패널에 파라핀_100×64cm_2010

구조란 '어둠 속에 있음'을 '비어있는 밝은 있음'으로 끄집어내는 장치다. 구조를 통해서 질량을 가진 물성의 '무질서한 있음'은 질서의 스펙트럼에 대오(隊伍)를 이루어 세상 바깥에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어둠 속의 있음'이라는 물성(색)의 운명은 전체적인 구조의 질서에 완전히 들어가는 순간 스스로의 생성력을 잃게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질서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물성의 '있음'은 될 수 있는 한 어둠 속에 숨으려한다. 이게 물성의 본성이다. 구조를 강조하려 하면 할수록 물성이 약화되거나 거세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조에는 질서가 따르고 질서는 선택과 배제라는 냉정하고 단호한 작업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므로. ● 그런데 윤종주의 작업에서는 구조와 질서라는 양상이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는다. '어둠 속의 있음'을 세상 바깥으로 드러내기 위해 미니멀리즘 아티스트들은 구조와 질서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배제를 통해서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물성이라는 존재가 있었음을 확인하는 셈이 된다. 미니멀리스틱 아티스트들이 별도의 수단을 통해 물성을 드러내려 한다. 물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껴안는 방식이다. 윤종주의 경우 여기에 똑같이 재료의 범주에 속하는 파라핀이 동원되고 있다.

윤종주_solid-flexible_종이에 파라핀_42×59.4cm_2010

윤종주는 어둠 속에 잠복하려는 물성을 파라핀이란 반투명(半透明)의 재료를 통해 적당히 드러내는 한편 빛을 적당히 물성의 편으로 숨기기도 한다. 말라서 굳어버리면 부피가 확연히 줄어드는 일반적인 물감과는 다르게 파라핀은 일정한 두께를 유지하는데 유리하다. 그 두께는 레이어(Layer)를 손쉽게 연상케 한다. 통상 회화에서 말하는 레이어는 물리적인 기준으로 따질 때 실제로 그 두께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복적인 행위로 인해 상당한 두께의 시간이 스며들 수가 있다. 따라서 레이어에서 중요한 것은 공간의 실제적인 두께가 아니라 반복되는 행위와 사유의 겹이 쌓아올린 층위의 횟수다. ● 윤종주의 파라핀 작업은 풍부한 두께에 비하면 행위의 반복이 그리 많이 들어가는 작업은 아니다. 몇 번의 레이어가 얹혔을 뿐이다. 대신 재료 스스로의 발효를 끌어들인다. 작가의 행위가 반복된다라고 하기 보다는 재료 스스로가 행위하고 사유하게 하면서 그 사태들이 반복적으로 발효되어 새로운 양상이 벌어지기를 유도한다. 그 프로세스는 그리 구조적이지도 않으며 질서에 충실하지도 않다. 그 프로세스가 이루어지는 세계는 구조와 조형적인 질서와는 독립된 별도의 영역이며 매우 불규칙한 생성의 공간이다. 비교적 질서를 갖춘 전체화면의 형식과 색채의 통일성에서 벗어난 불규칙한 반점, 얼룩들은 윤종주가 배양을 기다리고 있는 '있음'이라는 이름의 '불온한 씨앗'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윤종주_solid-flexible_혼합재료_59.4×42cm_2010

이들은 어디에서 잠복되어 있다가 나왔을까? 파라핀의 안쪽, 빛이 미처 스며들지 못한 어둠의 층위에서 '불온한 조형의 씨앗'들은 통금(通禁)의 시간에 잠들지 않고 숨어있다 해금(解禁) 사이렌이 울리는 희붐한 새벽을 기다려 바깥으로 나올듯한 기세다. ● 윤종주에 있어서 파라핀은 투명함으로 불투명한 세계를 이끌어내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재료다. 모든 색채가 파라핀 속으로 들어가면 명료한 색가(色價)의 대비성이 애매해지고 만다. 색채에는 빛과 물성(색)의 두 영역이 존재한다 했을 때, 파라핀은 빛과 색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파라핀은 자신의 투명성으로 색채가 가진 빛의 무질량성(픽셀이라는 정보의 차원으로 변환되어 어디고 무한한 공간으로 이동될 수도 있는)을 물성으로 채우는 대신 원래 물성이 자리 잡을 부분의 밀도를 빛의 차원으로 희박화시킨다. 이때 더 이상 숨을 데가 없는 물성의 영역이 빛이 비교우위를 점하는 층위인 전면(前面)으로 배어나오며 얼룩이 만들어진다.

윤종주_solid-flexible_혼합재료_59.4×42cm_2010

얼룩은 빛과 색의 층위가 허물어진 사태의 흔적이다. 얼룩을 통해 캔버스의 과거의 어떤 사건이 레이어의 층위를 통과해 지나왔음을 암시받게 된다. 얼룩은 여기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 여기에 불순하게 와있는 상태를 말한다. 저편에 있어야 할 것이 이편에 와버린 사태, 저쪽의 있음이 이쪽의 있음으로 전이(轉移)된 사건이다. ● 원래 레이어의 층간(層間)에는 시간의 층위도 함께 존재한다. 이전과 이후의 사태 사이에는 불가역(不可逆)의 단단한(solid) 시간의 차단막이 존재한다. 과거의 사태는 시간을 거슬러 현재로 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파라핀이라는 느슨한 재료를 통해 화면의 내부라는 과거의 사태가 현재의 표면으로 유연하게(flexible) 빠져나오고 있다. ● 창조로서의 미술이 아닌 발견으로서의 미술을 작가들이 작업으로 받아들인지도 꽤 오래되었다. 결국 윤종주가 생성, 발효를 시키려고 하는 화면의 재료학도 따지고 보면 시간의 층위에 숨어버린 존재의 얼룩을 발견하고 이를 드러내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건 있음을 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설사 그것들이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 화면이 따스해 보이는 것도 그런 존재의 미미함을 발견하려는 배려에 있지 않을까. 미술의 구조적 설계자가 놓쳐버린 존재의 질감을, 현장에서 시공을 맡은 인부가 찾아내어 일일이 꼼꼼한 손질을 아끼지 않듯. ■ 황인

Vol.20101203f | 윤종주展 / YOONJONGJU / 尹鐘珠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