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rcus

심진섭展 / SHIMJINSUB / 沈鎭燮 / mixed media   2010_1208 ▶︎ 2010_1214

심진섭_발레-shim's 쑈단_나무에 드로잉, 설치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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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목인갤러리_MOKIN GALLERY 서울 종로구 견지동 82번지 Tel. +82.2.722.5066 www.mokinmuseum.com

심진섭의 판화-서커스를 통해 나를 보고 세계를 보다 ● 심진섭은 근작에서 자신이 직접 출연하는 서커스 공연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물개 쇼, 고릴라 쇼, 여우 쇼 등등. 물개는 작가와 더불어 공놀이를 하거나 링을 통과하며 재주를 부린다. 고릴라와 작가가 번갈아가며 서로를 목말 태운 자세로 외줄을 탄다. 그리고 작가와 여우가 꼬리잡기를 하며 논다. ● 이처럼 서커스에서 작가는 주연으로, 조연으로, 그리고 때론 동물 조련사로 등장하는데, 그 역할과 상황에 따라서 동물과 호흡을 맞추는 것처럼도 보이고 그렇지 않은 것처럼도 보인다. 이따금씩 재주를 넘는 동물을 관객처럼 쳐다보는 것인데,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출연하는 동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지 이처럼 관객과 하나가 되는 시선은 관객을 불편하게 하거나 최소한 서로의 역할을 헷갈리게 해 관객을 혼란에 빠트릴 수도 있다. 무슨 방관자처럼 동물을 쳐다본다거나 화면 속에는 없는 관객을 훔쳐보는, 그리고 더욱이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듯한 내면적인 눈빛은 그것이 의도되고 과장된 제스처(곧 연출된 상황)가 아니라면 관객은 이를 알아차리고야 만다. 이로써 시선(관객의 시각)과 응시(공연자의 시각)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무대 위의 연출된 상황과 무대 밖의 현실상황과의 경계도 덩달아 위협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심진섭_shim_s 쑈단1-shim's 쑈단_나무에 드로잉, 설치_2010

그 보이지 않는 선(공연자와 관객, 무대와 객석, 연출된 상황과 현실의 경계)을 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공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만, 때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작가 역시) 이처럼 그 경계를 허물어 관객과의 동일시를 시도하고, 관객을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이로써 관객이 보고 있는 공연이 한갓 연출된 허구적 상황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직접 살아내고 있는 진정한 현실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 낯설게 하기며, 소외효과며, 소격효과다. 즉 사람들은 현실을 살면서도 현실을 모르고, 일상을 보면서도 일상을 알지 못하고, 실제와 호흡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를 느끼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 관습과 관성, 합리와 이성 등 개별 주체로부터 유래했다기보다는 제도로부터 건너오고 이입되고 내재화된 덕목들이 의식을 옥죄고 있어서 진정한 현실이나 일상 그리고 실제와 맞서본 적도 없거니와 맞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현실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현실이란 진정한 삶 곧 삶의 이유와 동격일 것이다. 그러면 삶의 일반적인 경우(삶의 표면)처럼 노동이 사는 이유일 수 있으며, 경쟁이 지상과제일 수 있는가. 물론 그 자체를 쾌락원칙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심진섭_shim_s 쑈단2-shim's 쑈단_나무에 드로잉, 설치_2010

진정한 현실은 노동이나 경쟁에 의해 유도되고 견인되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면에 가려진 쾌락원칙(혹은 욕망)이며, 이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억압돼 있고, 따라서 낯설다. 서커스, 마술과 요술, 매직, 환상과 환영, 판타지, 놀이와 유희, 눈속임과 일루전 등 진정한 현실영역은 동시에 금기와 터부의 영역에 속해져 있고, 일종의 그로테스크리얼리티를 실현하는 이질적인 영역에 속해져 있고, 삶의 관점에서 볼 때 철저하게 무용한 잉여의 영역에 속해져 있고, 나아가 사실은 (피상적이고 제도적이고 관습적이고 억압적인) 삶(엄밀하게는 노동과 경쟁에 연동된 삶)을 긍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삶을 부정하는 영역에 속해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은 이런 잉여의 영역과 관련이 깊고,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된 욕망을, 의식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을 해방시키고 복권시키는 실천논리와 관련이 깊다.

심진섭_shim_s 쑈단3-shim's 쑈단_실크스크린, 디지털 프린트, 레진_30×30cm×2_2010

심진섭이 열어 보이는 서커스는 말하자면 체스판처럼 삶의 축소판이며, 재주를 부리는 동물에 빗대어 자신을 표현한 우의적 혹은 우화적 표현이다. 우리는 그 서커스에 동물과 더불어 작가를 구경하도록 초대받았지만, 정작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작가의 초상이면서 우리 모두의 초상이며, 현대인의 보편적인 초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 동물과 더불어 노는 일련의 쇼에서 작가는 동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하고, 동물과 동떨어진 채 방관자적이고 관찰자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이런 거의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돌발적 행위는 작가의 입장에 우리를 감정 이입시킬 수 있게 해주고, 서커스를 통해 내가 속해져 있는 지금여기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 이때 작가가 말을 걸어오는 방식은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다. 그 이면에 스스로의 상처(우리 모두의 상처이기도 한)를 헤집고 들추어내는 자기비판의 매스를 숨기고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방식만큼은 설핏 웃음을 자아낸다. 과장되고 왜곡되고 부풀려진 형식을 통해 실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종의 강조화법인 셈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작가의 이면에 피에로가, 피에로의 웃음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파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피에로의 웃음은 속웃음이 아니라 겉웃음이다. 관객이 더 크게 웃을 때 정작 그는 속으로 더 크게 운다. 이처럼 그 이면에 울음을 숨기고 있는 웃음 자체는 가식적이지만(울음과 웃음이 일치하지 않음으로), 허위적이지는 않다. 그렇기는커녕 그 웃음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 관객의 아픔마저 보듬는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자신이 스스로의 상처를 들추어내는 행위가 곧 그 상처와 친해지고,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작가 역시 그 상처와 대면하고 더불어 노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그 상처를 치유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자신의 상처를 인식하고,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자신의 상처를 극화하는 작가의 행위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작업의 한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다.

심진섭_the magic-swich - the magic-switch_실크스크린, 디지털 프린트, 레진_30×30cm×2_2010

이와 함께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들, 이를테면 나비, 돼지, 물개, 고릴라, 여우는 작가와 더불어 노는 쇼 단원이면서, 이와 동시에 작가 자신의 화신이며 분신이랄 수 있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끄집어낸 무의식의 화신이며 욕망의 분신인 것이다. 이렇게 나비는 나를 설레게 하기도 하고 비상하고픈 욕망을 부추기기도 한다. 여우같은 나는 고릴라 같은 이성을 꿈꾸며, 때로 그 고릴라가 목말을 타고 나를 짓누를 때면 힘들지만 밉지만은 않다. 이렇게 나는 나의 상처와 화해하고 세상과 화해하는 것이다.

심진섭_눈물한방울-눈물 한 방울_실크스크린, 디지털 프린트, 레진_30×30cm_2010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그 이면에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고, 이를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대 재생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이 예사롭지가 않는데,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판화이면서도 판화에 대한 기왕의 선입견을 넘어선다. 회화를 방불케 하는 크기도 그렇지만, 이를 세팅하는 남다른 방식을 통해 일종의 설치판화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스텐실 기법을 통해서는 디지털프린트 위에 부분적으로 페이스트파우더를 중첩시켜 물질감을 강화한다. 또한 초상의 배경화면으로서 도입된 옵아트의 일렁이는 패턴으로써 무의식과 욕망을 유비적으로 표현하는 등, 일련의 이미지들이 어우러져 일종의 무의식적 풍경화라고 부를 만한 한 지점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 고충환

Vol.20101211e | 심진섭展 / SHIMJINSUB / 沈鎭燮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