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e the line 출발선에 서다

고창선展 / KOHCHANGSUN / 高彰鮮 / video.installation   2010_1223 ▶︎ 2011_0109 / 신정 휴관

고창선_혼자 그러나 둘이 함께_가변 설치, 혼합매체, cc카메라 빔 프로젝터, 관객 퍼포먼스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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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본 전시는 인천문화재단 일반공모 지원사업으로 지원받은 사업입니다.

관람시간 / 09:00am~10:00pm / 주말,공휴일_10:00am~07:00pm / 신정 휴관 2011년부터 월요일 휴관

인천아트플랫폼 INCHEON ART PLATFORM 인천시 중구 해안동1가 10-1번지 Tel. +82.32.760.1000 www.inartplatform.kr

toe the line / 출발선에 서다. (부제: 혼자 그러나 둘이 함께)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 (시 「저녁에(1969년 작)」(怡山 金光燮, 1905∼1977) ■ 김광섭

고창선_Underground_3D 영상, 단채널 비디오_00:10:35_2010

'불과'1년 만에 다시 고창선의 작품론 또는 작가론을 쓴다. 여기서 '불과'란 표현은 말 그대로 작가의 세계가 변화를 겪기에는 꽤 짧은 시간이란 뜻이다. 작년 이맘 때 그의 작업을 "우리시대의 미디어아트 또는 세기말 세대의 독백"이란 제목으로 해석해본 바 있다. 무엇보다 당시 이 글에서 주목한 것은 미디어아트의 예술론상의 문제보다는 작가가 한 인간으로서 겪는 심리적 상태 그리고 미디어아트라는 형식 또는 미적 태도에 그가 어떻게 적응하고 표현하고 있는지 등이었다. ●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게는 여전히 많은 해석의 길이 열려있기도 하다. 작가의 한 마디, 하나의 행위, 표현은 문득 세계사적 의미와 접촉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소우주와 대우주의 대응관계로 보자. 그것을 단지 형이상학적, 또는 신비주의적인 몽상으로 치부하지 않는다면 고창선의 작업은 개별적인 행위, 단순한 장치에서 무수한 상징과 의미가 함축된 복잡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것으로 우리는 새로운 해석의 입구를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그의 작업은 이런 생각 또는 알리바이와는 별도로 감각적으로 흥미를 끄는 요소가 있다. ● 세기말이 지나면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근대 추상화가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라는 작품을 떠올린다. 이 제목은 시인 이산(怡山) 김광섭(金光燮, 1905∼1977)의 「저녁에」(1969)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시는 후에 그룹 유심초에 의해 대중가요로도 불리기도 했다. ●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그가 뉴욕으로 떠난 지 7년 만에 그린 작품으로, 뒷면에 김광섭의 시가 적혀 있었다. 그림을 본 사람은 화면의 점들이 모두 별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다가 여명과 함께 사라지는 별은 인간의 고독과 운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여 어둠 속 별과 같은 숙명적인 삶의 영웅적 인물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 비약일까? 고창선의 단순하면서도 경쾌한 연출의 미디어작업 「혼자 뛰기」(2009)과 「혼자 뛰기 그러나 둘이 함께」(2010) 등을 보면서 문득 오래전 김광섭이나 김환기와는 다르면서도 동일한 귀적을 그리는 감각의 운동이 오버랩된다. 이 과거와 현재의 겹침, 시 이미지와 그림 이미지와 미디어아트의 겹침은 우리에게 어떤 은유적 도약을 가능하게 한다. ● 한 시기에서 다른 한시기로 넘어갈 때, 즉 전환기의 문턱에서 우리가 매 순간 숨이 턱 막히도록 느끼는 것. 그것은 완전한 고립, 자존(自存)의 과제를 떠안은 상태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고 생을 영위한다. 고창선의 작업은 경쾌한 미디어아트 또는 키네틱아트의 사이를 왕복하면서 동시에 매우 시적이고 성찰적이다. 작가는 조금씩 전진한다. 진화한다는 표현은 다소 거칠지만 어째든 변화의 결을 만들어내고 있기에 이미 지나버린 세기말을 떠올린 후 바로 그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질문으로 나아간다.

고창선_뭐하세요?_영상설치, PVC파이프, 빔프로젝터, CC카메라, 혼합매체_180×220×140cm_2010

미디어아트는 과학과 기술의 문제와 매우 가까운 예술분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예술가와 예술의 세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 질서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보통 과학은 일반적인 원칙에 초점을 맞추지만 예술에서는 개별적인 상황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러니 창작자의 입장은 과학과 기술의 선용(善用) 과정에도 예술적 또는 미적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영혼의 운동을 하지만 또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념과 영원성에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이중의 운동 또는 딜레마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더 크고 강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 「underground」(2010)은 객차와 객차 사이에 문이 달리지 않은 채 맨 첫 칸에서 마지막 칸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지하철 9호선을 모티브로 제작된 3D 영상이다. 이 영상에서는 달리는 열차보다 그 안의 사람들이 한 눈에 모든 이들에게 노출되는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그럼으로써 영상은 시각적으로 연결된 집합적인 상태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입체화되어 우리의 시각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단지 기술적 실험이건 또는 앞서 언급한 이상적 공동체의 은유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혼자뛰기」(2009)에서 보여주듯 홀로 치는 탁구대에서 마음먹은 대로 어디든지 탁구공을 보낼 수 있는 것처럼 작품의 해석 또한 다분히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 나는 그의 「혼자 뛰기」(2009)를 이렇게 해석했다, "그의 홀로 치는 탁구대는 오늘날 예술가가 처한 이러한 냉엄한 현실과의 부대낌과 무한 반복되는 고백과 독백의 현상학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시대의 부름 또는 세기말의 부름에 대한 응전이다.(2009.11)" 그것은 다른 가능한 세계의 존재와 타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신뢰하는 태도이다. 동시에 타자의 긍정을 통해서 비로소 내가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긍정하고 인정함으로써 나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작가에게 미디어아트는 이것이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주는 예술인 것이다. ● 이러한 해석은 단지 작가와 작품의 이해와 공감에 머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해석을 통해 나 자신과 또 해석자로서의 관객이면 누구나 자기 자신의 존재성이 확대되고 더 섬세하게 그 결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자기 이해와 자기 비평이며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론적 자리가 확고해지고 그 가치가 고양된다. ● 미디어아트 작가들은 실존, 의식, 만남, 소통 등의 문제를 중요한 화두로 삼아 과학과 기술을 예술과 연결해왔다. 고창선 또한 그 형식적 단순함과 간결함에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집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상적 만남'에 대한 다양한 조건들을 실험한다. ● 자신의 옆모습을 보도록 설계된 「뭐 하세요?」(2010)는 잔디 위에 설치된 굴곡진 파이프를 마치 망원경처럼 간단하면서도 유쾌한 미디어아트로 연출되어 있다. 작품은 주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조형적 특성을 지닌 환경조형물이지만 그 내용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는 의미에서는 단순히 유희적인 문제를 넘어서 있다. ● 그의 「중계상황」(2010) 또한 비슷한 맥락에 있다. 카메라와 모니터를 설치하여 작업과정, 관객의 모습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준다. 작가와 작업과 관객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미적 커뮤니티를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게 된다. 고립되고 파편화된 존재가 아닌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개별자를 극복한 공동체 자체가 된다. 이는 전통적으로 나와 너, 주체와 타자가 상호 긍정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작가는 혼자 놀기에서 함께 놀기로 나아가며 테크놀로지와 센서, 퍼포먼스와 영상에 기대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우리가 부정적 의미로 자의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어떤 보편성을 획득할 수 만 있다면 잃어버린 이상적 상태를 상기(想起, anamnesis )해 낼 수도 있다. 우리는 미디어아트 또는 그 기술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고 구체적으로 결합하는 효과를 통해 고독한 개체 이전의 조건에 있던 인간의 보편적 자리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창선은 미디어아트의 외양을 한 채 미디어아트의 한계상황에 서서 이리저리 모색하고 있다.

고창선_Runrun_애니메이션, 혼합매체_가변설치_2010

세기말, 우리시대의 미디어아트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 "그러므로 우리는 고창선의 고백 또는 독백이 일종의 사이비 고백인지 또는 사이비 고백을 가장한 일종의 전복의 힘을 내부에 품고 있는 것인지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작가는 주위는 온통 사이비 꿈과 사이비 환타지아(warm-up,2009)로 가득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2009. 11)" '불과'일 년 전의 이 진술은 아직 유효하다. ■ 김노암

Vol.20101223b | 고창선展 / KOHCHANGSUN / 高彰鮮 / video.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