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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봉선展 / MOONBONGSUN / 文鳳宣 / painting   2011_0209 ▶︎ 2011_0227

문봉선_매화_천수묵채색_147×475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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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20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공아트스페이스 Gong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8-31번지 제2,3,4전시장 Tel. +82.2.735.9938

매화 가지 위로 달이 뜨고 ● 입춘도 꽤 여러 날이 지났을 터이다. 남원,구례구역을 지나며 맞는 차창 밖의 바람은 여전히 쌀쌀하다. 이맘때면 섬진강 언덕에 심어진 매화나무 가지에는 한두 송이 하얀 꽃망울이 벙그러질 것이고 시절을 어기지 않는 봄이 찾아 올 것이다. 매화! 그 정갈한 아름다움에 반해 매년 3월이 되면 홀리듯 떠났던 탐매 여행도 벌써 20년을 넘겼다. 매형梅兄과 연을 맺은 것은 서른 즈음이었다. 1990년 봄날, 우연히 화실 구석에 놓인 주간지에서 선암사의 홍매紅梅 사진을 보았다. 순간 나는 '매화를 직접 현장에서 그려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고 다음날 바로 전라선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문봉선_매화_천수묵채색_145×299cm_2010
문봉선_매화_지본수묵채색_235×53cm_2010

피곤한 잠을 깨우는 안내 방송을 듣고 어렵게 찾아 간 선암사는 매서웠던 겨울의 상흔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일주문을 지날 무렵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매화향기였다. 그곳에는 완전히 만개한 매화가 눈송이처럼 하얗게 나무를 덥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날씨 때문인지 향기는 더욱 진했다. 왕안석의 시구 그대로였다. 멀리서도 눈 아님을 알 수 있음은[遙知不是雪] 그윽한 향기 들려오기 때문이라네[爲有暗香來]

문봉선_매화_천수묵채색_45×140cm_2010
문봉선_매화_천수묵채색_44×69cm_2010

검은 기와 돌담 위에 축 늘어진 이끼 낀 줄기와 풍상을 겪느라 휘어지다 못해 비틀려 감긴 가지는 옛 그림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간간이 바람에 날리는 꽃잎은 마지막 내리는 눈송이처럼 소슬했다. 객사에 짐을 풀고 마당에 심어진 고매古梅를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니 화보畵譜나 옛 그림에서 가끔 흉내 냈던 묵매화와는 사뭇 같고도 다른 독특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나는 그때의 느낌을 화첩을 펴고 이렇게 기록했다. '매화 앞에 서니 생각했던 것보다 나무가 크다. 줄기는 껍질이 거칠었는데 바위에나 붙어사는 흰 이끼와 겨우 살이 풀이 붙어 있어 백 살은 훨씬 넘어 보였다. 꽃이 핀 가지는 본 가지와 달리 녹색 빛을 띠고 있다. 늙은 줄기에서 나온 햇가지는 하늘을 향해 위로 곧게 쭉 뻗어있어 휘어진 줄기와 대조를 이룬다. 꽃은 대부분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인 듯 피어있는데 꽃잎은 아이보리색에 가깝고 꽃받침은 팥색이다.'

문봉선_매화_천수묵_46×86cm_2010

그때부터 짧게는 2~3일, 길게는 일주일씩 절에 기거하면서 관찰과 사생을 반복했는데 조계산曹溪山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풍경소리가 되어 흐트러진 붓과 정신을 가다듬어 주었다. 오랫동안 절에서 지내다 보니 스님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묘한 기분도 들었다. 새벽 예불 소리에 잠이 깨서 절 마당을 거닐 때면 달은 황금빛을 띄고 서산을 막 넘기도 했다. '매화는 밤에 향기가 깊고, 떠오른 달과 가장 잘 어울리는 벗'이라는 말이 섣부르게 나오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매화 향기는 3~4분 간격으로 절 마당 위를 스쳐 지났으니 그 옛날 임포林逋가 들었던 향기였으리라. 그윽한 매화 향기 어스름한 달빛 속을 떠도네[暗香浮動月黃昏]

문봉선_매화_지본수묵_34×70cm_2009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노스님(指墟禪師)께서 발걸음을 멈추고서는 우리나라에서 가볼만한 매화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일러 주셨다. 그 중에 한 곳이 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양이었다. 광양에는 60여년 전 김오천金午天옹이(현재의 다압면 청매실 농원) 일본에서 가져온 청매가 강 언덕과 집 언저리에 약용으로 심어져 섬진강변의 죽림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이 농원에서 사찰에서 보지 못한 어린 묘목에서부터 수십 년 성장하여 강바람에 휘어지고 부러진 노매老梅에 이르기까지 매화에 관한 많은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문봉선_매화_지본수묵_45×35cm_2009

하루는 그림이 될 성 싶은 가지나 줄기를 찾아 사생에 몰두하고 있었다. 옆에서 전지(剪枝)를 하시던 농부 한 분이 화첩을 보시더니 "요 가지에는 꽃이 달리지 않을 텐데…"라며 한 마디 던지셨다. 농부의 심상한 한마디는 죽비가 되어 관념에 젖어 있던 정신을 화들짝 깨워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꽃이 핀 매화만 그렸으니 정작 개화 전의 줄기나 가지의 골격은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대상에 대한 생태적 이해가 사생의 기초임을 알게 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방응李方膺은 시 한 구절로 묵매화의 구도와 조형의 어려움을 일갈했다. 하루 종일 매원梅園을 돌아다녀도 그림이 될 성 싶은 가지하나 발견하기가 쉽지 않음을 필자는 중국 남경의 매화산梅花山에서 여러 번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매화는 혹한을 견디고 피어난 강인한 생명력과 가지 끝에 달린 꽃 봉우리 한 두 개에서 높은 운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리저리 천만 송이 눈에 띄지만[觸目橫斜千萬朶] 마음에 드는 것은 두세 가지뿐[賞心只有兩三枝]

문봉선_매화_지본수묵채색_34×46cm_2008

또한 눈을 돌려 옛 대가들의 매화 작품과 화론에 관심을 갖다보니 매화의 품종과 관찰력, 묘사력 등에서도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송대南宋代의 문인文人 범성대范成大(1126~1193)는 『매보梅譜』에서 매화는 천하에서 으뜸가는 꽃으로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어진 사람, 불초한 사람을 불문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꽃이다. 또한 매화의 운치와 품격은 줄기가 옆으로 뻗고(橫), 구불구불하게 뒤틀리고(斜), 성글고 야윈 것(瘦), 기괴하게 생긴 모양(怪)이라 하였다. 묵매화는 첫째로 '체고體高'라 하여 노매老梅에서 느끼는 오랜 세월 속에 풍상을 겪은 듯 그려야 하고, 둘째는 '간괴幹怪'라 하여 늙고 오래된 줄기가 뒤틀려 기괴한 모습으로 그려야 하고, 셋째 '지청枝淸'이라 하여 매화는 가지가 곧고 맑아야 하고, 넷째 '초건梢健'이라 하여 어린 햇가지에 힘이 있어야 하며, 다섯째 '화기花奇'라 하여 드문드문 피어있게 그려야 한다.라고 했다. 이는 결국 생태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 인문학적 의미 부여가 결합된 지점에서 탄생하는 예술의 세계일 것이다.

문봉선_매화_지본수묵채색_75×95cm_2004
문봉선_매화_지본수묵채색_95×62cm_2002

원대元代의 왕면王冕, 송대宋代의 양무구楊无咎, 명대明代의 추복뢰鄒福雷, 조선조 오달제吳達濟의 매화는 줄기와 가지가 활처럼 절도 있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선암사 선암매의 품종과 같음을 알 수 있고, 청대 양주팔괴揚州八怪의 김농金農, 나빙羅聘, 이방응李方膺의 매화는 대명매大明梅로 관념 속의 매화가 아닌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무석无錫과 양주揚州 등지에서 자생하는 매화의 한 종류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법고法古 자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당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미감으로 현대적인 운치를 창조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창신創新 없는 법고法古는 회고懷古에 불과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이유로 이번 전람회에서는 법고를 뛰어 넘는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문봉선_매화_지본수묵채색_47×67cm_1996

이래저래 3월 한 달은 씨 뿌리는 농부만큼이나 바쁘게 보냈다. 이 땅에 자라는 매화를 내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그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매화가 있는 곳이면 불원천리하고 달려가기를 20년. 기이하고 새로운 가지 앞에서 가슴 뛰던 시간들은 화첩 위에 오롯이 남았다. 나에게 탐매 여행은 새봄을 맞는 큰 기쁨이기도 했지만 화도畵道를 찾아가는 지난한 구도의 여정이기도 했다. 지금도 가만히 눈을 감으면 운명처럼 조우했던 무수한 가지와 꽃망울들이 영롱하게 떠오르고, 지난날 그렸던 매화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이제 '해마다 피는 꽃은 변함이 없건만, 해마다 꽃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은 같지 않네[歲歲年年花相似, 年年歲歲人不同]'라 노래했던 옛 시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해마다 같은 나무, 같은 장소에서 바라본 매화이지만 같은 모습을 한 번도 보질 못했으니 말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지만 여일하게 그윽한 매화 향기를 들으며 겨우네 덮어 두었던 벼루를 씻어 둔다. ■ 문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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