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노트 Blue Note

신수혁展 / SHINSOOHYEOK / 申壽赫 / painting   2011_0209 ▶︎ 2011_0306 / 월요일 휴관

신수혁_officetel #3_캔버스에 유채_131×162cm_2010

초대일시 / 2011_0216_수요일_05:00pm

기획_아트사이드 갤러리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아트사이드 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통의동 33 Tel. +82.2.725.1020 www.artside.org

신수혁의 블루 페인팅 ● 신수혁의 이번 전시회의 타이틀은 '블루 노트(Blue Note)'이다. 블루 노트는 여러 가지 메타포가 겹친 중의어인데, 첫째로 세계에 대한 작가의 감수성을 대변하는 인디고 블루로 연출하는 다이어리라는 표면적 뜻을 펼치는 것이며, 둘째 블루스 음악의 음계인 블루 노트라는 내밀한 의미를 포섭한다. 음악이란 여타 다른 장르와 다르게 가장 직접적으로 감수성을 자극하는 시공간적 마법인 바, 신수혁 회화 전반에서 수미일관되게 적용되는 지향점이기도 하다. 범부한 일상적 스토리가 몽환의 피안으로 흘러가서 형질변경되는 마법이 블루스 코드라는 사실 속에서 더더욱 적절하고 유효한 설명 방식이다. 일상의 범부함을 탈속(脫俗), 또는 일상과 피안(彼岸) 그 이원적 경계를 초극으로 인도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좁게는 한국의 예술계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는 것이 감상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의미의 'Fragile Absolute'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저서명이다. 물론 이 책에서 지젝이 말하는 것은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대립에 관한 것이지만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란 진정으로 없다는 메타포를 이렇게 잘 표현한 한마디도 없다. 절대적인 것은 없고 다만 시대를 살아가는 당대 사람들의 고민과 시대를 바라보는 방법만이 있을 따름이다. 서구에서 추구하는 진리(truth)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적법 타당한 실체와 내용을 뜻하며, 이를 가리켜 절대(絶對, absolute)라고 명명해왔다. 반면 동북아시아 문명권에서는 진리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변하는 속성을 지닌다는 깨달음을 전제하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다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아시아 문명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시간은 흐른다"라는 사실 단 한가지뿐이다. 또 한가지 서구의 시간관념은 일방적 발전도식인 진보이며 동아시아의 시간관념은 언제나 되돌아오는 평등적 순환이다.

신수혁_school #6_캔버스에 유채_131×162cm_2010

신수혁의 블루 페인팅의 근본적 주제는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 관한 것이다. 서구에서 객관적 혹은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시간과 공간은 애초에 없다. 다만 동양에서 말하는 주관적 혹은 초월적 시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각각의 시간 그리고 시대, 그 속에 부여된 의미가 내재될 뿐이다. 더구나 시간이 흐르면 의미도 변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이에 신수혁의 회화를 이해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글이 있다. T. S. 엘리어트가 1940년에 작성했던 '이스트 코커(East Coker)'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의 시초에 나의 종말이 내재한다. 가옥들은 세워지고 내려앉고 무너지고, 확장되고 이전되고 부숴지고 복원되며, 혹은 그 자리에 빈터나 공장이나 우회로가 생긴다. 오래된 석재는 새로운 건물로, 오래된 목재는 불로, 오래된 불은 재로, 그리고 재는 흙으로 돌아간다. 이미 살, 모피, 배설물, 사람과 짐승의 뼈, 밀짚과 잎이 있는 흙으로 돌아간다. 가옥들은 살면서 죽는다. 건 나의 축을 위한 때와 생존과 생성에 적합한 때가 있다. 그리고 느슨해진 창유리를 깨뜨리는 때, 들쥐가 총총걸음으로 징두리 벽판을 흔드는 때, 무언의 금언을 새겨 넣어 뜬 너덜너덜한 커튼을 흔드는 바람을 위한 때, 각자의 때가 있는 것이다."

신수혁_Untitled #4_캔버스에 유채_116×91cm_2010

신수혁의 블루 페인팅에 등장하는 풍경의 정황에는 시간에 내재된 의미가 있다. 하나의 풍경 대상은 단순히 고정된 시간 속에서 작용하는 지각의 미적 작용도 아니며, 기능의 대상도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의미가 균등하게 내포된 종합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의 건물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현재 존재하지만 어느 미래에는 사라질 운명이다. 하나의 현상에 이미 시초와 종말이 내재하는 것이다. 세계는 엔트로피의 원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석조 건물의 풍경이 있기 위해서 황량하게 패인 석산의 처참함이 불가피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상아빛 여인의 눈부심을 보기 위해서는 또한 거칠게 튼 촌부의 나무등걸 손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로 상이하게 달라 보이는 그 둘은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는 정교하게 짜인 그물망이다. 어떤 부분이 과도하면 어떤 부분은 결핍한다. 즉 신수혁은 시간이 흐른다는 유일한 불변의 진리와 변화하는 세계, 즉 변화와 불변의 변증에 관한 시론인 셈이다. ● 신수혁의 블루 페인팅을 마주할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단상은 그것이 아주 몽환적이라는 점이다. 현실세계의 일상이 몽환적인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서구적 사고방식에서는 당연히 그렇다. 서구에서는 실재(reality)와 가상(idea)이 엄중히 분리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일상생활은 속계이며 신성한 세계(divine world)로부터 철저하게 방역되어있다. 서구는 이 신성계에 신성함을 두고 신을 모신다. 가상 세계를 설정하고 이곳에 신을 모시는 행위를 가리켜 외재 지향적 초월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교회 건축은 일상생활에서 분리된 성역이다. 우리는 헤겔의 명제 'the working days of the week' 그리고 'the Sunday of existence'라는 문구에 대해 상기해야만 한다. 주중에는 일상적이며 범속한 존재이며 주말에는 교회를 가기 때문에 진정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유토피아와 같은 세계관 역시 서구에서 발달한 것이지 동양적 가치가 아니다. 동양은 외부에 신을 따로 두지 않는다. 자기 내면에 성과 속이 이미 구유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동양은 성속구유(聖俗具有),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한 몸, 내향적 초월을 지향한다. 따라서 동양의 세계관은 세계가 나의 마음 여하에 따라서 움직이는 변화무쌍의 가변 세계다. ● 신수혁의 블루 페인팅은 일상의 대상에서 몽환적 세계, 혹은 판타지가 발현되는 매개적 세상이다. 인디고 잉크에서 발하는 푸른색, 보라색, 순백이라는 단계적 층위는 대상을 면밀히 묘사,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대상을 피안의 아른거림으로 부유시킨다. 따라서 견고하거나 딱딱하고 차가워 보여야 할 건물의 이미지는 신수혁의 블루 페인팅에서 모든 촉각적 기대가 무참히 좌초된다. 그의 세계는 분명히 지금 여기를 묘사한 것이지만 '언젠가 어디선가'라는 몽환적 피안의 경계와 걸치게 된다.

신수혁_shopping center_캔버스에 유채_131×162cm_2010

회화에 대한 서구의 태도는 언제나 축적된 역사의 상궤를 벗어난 심미적 기제(機制, mechanism)의 개발 발현을 목표로 한다. 주지와 같이 이 발현 목표를 흔히 아방가르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아방가르드의 정신이 없는 작품은 형식의 형식, 즉 맹목의 형식이며 즐거움의 향유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기법이지 엄밀한 기제가 아니다. 서구의 회화사는 언제나 이 심미적 기제를 새롭게 창출한 사람에게 페이지에 실리는 영광을 수여해왔다. 그런데 예술가가 펼쳐야 할 이 아방가르드, 즉 새로운 심미적 기제의 창출이 성립되기 위한 선제조건은 대체로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기존의 축적된 회화의 역사와 마주하면서 대화를 하다가 얻은 결론, 즉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방법이다. 나머지 하나는 자기가 속한 현재 사회의 복잡한 정황에 자기의 운명을 던져 얻은 감수성, 곧 말로 다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시각적 해석을 내리는 방법이다. 이중 신수혁은 전자와 후자의 방법을 혼용한다.

신수혁_Builboard building_캔버스에 유채_131×162cm_2010

주지와 같이 한국 현대회화는 일본 인상주의를 도입해서 한국의 산하, 도시 신문물(新文物)에 대한 감수성을 재해석한 한국식 인상주의로 출발한다. 60년대 들어서부터 외국의 잡지로부터 힌트를 얻은 신경향의 추상표현주의나 미니멀리즘이 양분되다가 70년대 유신시절부터 정치적 침묵, 불교적 참선(參禪) 등의 논리를 덮어씌운 한국 상황적 미니멀리즘이 대세를 이룬다. 80년대는 민중미술과 기성의 미니멀리즘의 대립시기였다. 1985년 여행 자율화와 1988년 올림픽 이후 경제 가열로 비롯된 국외, 특히 북미 지역의 유학파가 90년대 대거 유입되면서 뉴욕의 개념 미술이 이 시기를 점유한다. 특히 1989년은 소비에트가 종언을 고했으며 1991년에는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되는 등 현실적 사회주의가 붕괴되었다. 한국 사회의 폐단 자체를 아방가르드의 대상으로 삼았던 민중미술 진영의 예술가들은 정신적 피로와 공황에 휩싸였으며 이때 기존의 가치나 체계를 맹목적으로 비아냥거리는 소위 '신세대 미술'이 주목을 받는다. 2000년대 진입하면서 IMF를 경험한 국내의 모든 정황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백기를 들고 만다. 한국 미술역사에 대한 진정한 성찰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며 형식과 센세이션, 전략의 유희만이 난무했다.

신수혁_architecture office_캔버스에 유채_181×227cm_2010

그런데 2009년 11월부터 시작한 신수혁 블루 페인팅 연작은 우리 역사 속 과거의 회화들과 만나서 대화를 시도하며 얻은 결과물이다. 신수혁은 회화는 인상주의의 그것과도 비슷하며, 기법 면에서는 미니멀리스트의 정신을 닮아있다. 신수혁의 회화는 확실히 인상주의, 미니멀리즘, 민중미술 등 축적된 우리 자체의 레퍼런스와 마주하며 시도한 일종의 긴 대화이다. 그것은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신수혁 회화의 기본적 목표는 일차적으로 화면에 빛을 가두려는 시도이다. 둘째, 70년대 한국 미니멀리즘이 내세웠던 '호흡'의 재해석이다. 셋째, 현재 사회의 문제점에 나름대로 대처했던 진단이기도 하다.

신수혁_restaurant_캔버스에 유채_91×72cm_2010

첫째, 동아시아 인상주의는 분명히 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반발 의식으로부터 출발했다. 당시 사실주의는 주류였으며 이 전쟁화, 식민지 기록화, 역사화에 대한 비주류가 인상주의였다. 인상주의는 소박한 정서주의이며, 비정치적 자유정신이자, 빛에 대한 인상의 즉흥적 즉석 기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더욱이 팔레트 없이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불투명 회화(opaque painting)이다. 사진의 재현이 따르지 못할 정서의 체현(embedding)이라는 최대 장점이 인상주의의 존립근거였다. 둘째, 미니멀리즘 회화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형식주의 해석으로부터 비롯된 미국 패권주의의 산물이었는데도 공교롭게도 한국에서는 정신적 수양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되었다. 동양 회화에서 일찍이 존재했던 기운, 호흡, 여백, 선비의 고고함이라는 개념들로 서구 미니멀리즘의 원래 뜻이 각색되었다. 즉 위 두 가지 키워드가 신수혁이 파악한 자기 회화의 아방가르드 성향이다. 신수혁은 빛을 포섭하려는 점에서 인상주의자를 닮았다. 그러나 불투명 회화가 아니라 투명 회화(transparent painting)이다. 또한 그의 회화 방법론은 호흡법으로 비롯된 것이다. 일관된 호흡법으로 얇게 물감을 펼쳐 중첩시키면서 빛을 포섭하고 이미지를 획득하는 방법은 한국 미니멀리스트로부터 찾았다. 이 두 가지 대화의 병합이야말로 신수혁 회화를 단순한 포토 리얼리스트와 구별 짓게 하는 중차대한 요소들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과거, 현재, 미래를 현시점에서 동일시하는 순환론적 시간관과 내재적 초월을 지향하며 현 공간을 피안으로 설정하는 감수성은 신수혁이 오랜 기간 연마한 그만의 독창적 기제일 것이다. ■ 이진명

Vol.20110210f | 신수혁展 / SHINSOOHYEOK / 申壽赫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