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ing over 2011

2011_0304 ▶︎ 2011_0317 / 일,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0304_금요일_05:30pm

참여작가 김선림_김은_박찬길_백도희_신지혜_유윤주_이수아 이지수_장종현_정지원_정지윤_조영진_최재천_한형록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B,C공간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Crossing Over 2011 ● 유난히도 춥고 길었던 겨울도 어느새 그 끝을 알리고 있다. 모든 생명들이 새롭게 탄생하는 이 봄에 인터알리아에서는 작가로서의 새 출발을 시작하는 역량 있는 신진작가들의 전시를 준비했다. 『Crossing Over 2011』은 2010년과 2011년에 전국 10개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14인의 작가들을 소개하는 전시이다. 우리는 각 대학의 졸업전시를 방문해 1차적으로 작가를 선별하였고, 선별된 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수집해 면밀한 검토를 하였다. 이후 스튜디오 방문을 통해 해당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나누었으며 이 과정을 모두 거친 후 최종 14인의 작가를 선정하게 되었다. 인터알리아 기존의 연례전 『IYAP』이 젊은 작가들의 상업적 완성도와 독창적인 예술관을 소개하는 자리였다면 『Crossing Over 2011』은 매해 새롭게 제도권 미술계에 진입하는 젊은 학생들이 어떠한 생각과 고민으로 작가로서의 길을 맞이하는가 엿보기 위한 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들이 고민한 결과로 내놓은 작업들이 얼마 뒤 대한민국의 미술계를 구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여작가들은 대부분 80년대 중반 이후 출생으로 이들의 감수성이 정립된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우리나라가 인터넷 신드롬과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사회는 격앙된 목소리로 IT 강국으로 발돋움 할 것이라는 공약과 더불어, 과잉된 정보화에 노출된 청소년들이 자칫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그것의 책임은 부모들의 소명인양 떠넘기는 무책임한 이중적 논리를 내세우곤 했었다. 당시 교차로에 서있던 바로 그들은 과연 지금 어떻게 성장했을까. ● 결과는 사뭇 흥미롭다. 그러한 잉여 된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성장한 이들이 지금은 그것들의 폐단에 대해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제되지 못한 미디어의 과도한 방출, 그로 인해 고립된 인간관계, 무분별한 개발과 시장 개방으로 인해 잃어가고 있는 소중한 가치 등 이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들은 폭넓다. 예술가의 사회적 참여라는 거창한 담론은 논외로 놓고라도 학교라는 틀 안에만 갇혀있던 어린 학생들이 사회의 시스템이나 집단의 부조리함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괄목할 만 한 부분이다. 전시 제목 'Crossing Over'는 단순히 참여 작가들이 학생의 신분을 벗고, 화단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작가로 변했다는 입장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염색체의 교차지점'을 일컫는 Crossing Over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현상을 대하는 감각, 작품에 대한 철학 등과 관련한 입장이 정리 되거나 혹은 변화되어야 하는 지점에 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교차'를 통해 '유전적 재조합'이 이루어 지듯이 인터알리아의 『Crossing Over 2011』을 통해 제도권 미술 공간으로 내딛는 이들의 첫 걸음이 무게가 실리는 움직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김선림_Episode I- Obviously showing menace Uzmaki Naruto?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1 김은_君子可佩(군자가패)-그 향기, 군자의 몸에 지닐만 하다_CRC보드, 스틸_117×75cm_2011

김선림은 자아정체성을 상실한 오타쿠 문화를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소비주의 사회의 의도된 폭력으로 본다. 미디어가 개인에게 지속적으로 가하는 프로파간다는 꿈을 좇는 행위를 단순히 미디어적 영웅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는 변질된 영웅주의에 빠지게 하고 결국 이것은 사회적 패배주의의 원인이 된다. 결과물만을 놓고 본다면 작품 속 모델이 꿈꾸는 시대의 영웅을 매치 시켜 그들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듯 볼 수도 있겠으나 사실 그의 작품은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현대인들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 시멘트 판과 재단된 철을 이용해 부조 형태로 재탄생 된 김은의 작업은 동양화의 조형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리듬감 있게 돌출되거나 침강된 입체감이 더해져 있다. 과거 사대부나 문인화가들에게만 한정적으로 다루어졌던 사군자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서 현대 산업사회를 대변하는 재료들로 치환되어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일상적인 대상으로 재탄생 되었다. 이것은 동양화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미(美)를 재료적 특성을 이용해 새롭게 재해석하는 시도이면서 동시에 동양화를 진부한 대상으로 치부하는 현대미술에 대한 작은 저항이기도 하다.

박찬길_관계를 꿈꾸다_스테인리스 스틸_75×90×40cm_2010 백도희_Empty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11

박찬길은 본래의 목적성을 상실하여 보 잘 것 없게 된 작은 볼트들을 모아 하나의 주체적 인간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작업의 형태는 어린 시절부터 잦은 이사로 인해 안정적인 대인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던 작가의 편집증적 습관 - 예컨대, 구슬이나 몽당 연필 따위를 모으는 형태의 – 에서 비롯되었다. 육면체의 볼트 머리들이 치밀하게 맞물려 철저하게 계산된 관계에 의해 표현된 그의 인물은 사실적인 인체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광택까지 더해져서 마치 이상적인 인간상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속은 텅 비어있거나, 부분부분 관계의 틈새가 벌어져있는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표면적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현대인들이 실제 삶 속에서는 대인관계에 대한 불안정성을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간 카페의 공허함을 테이블과 의자, 유리잔 따위가 대신하고 있으며 늘어지는 재즈의 선율과 매캐한 담배연기, 그리고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음은 사라지고 따뜻한 조명이 카페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인간관계의 덧없음과 외로움은 원래부터 혼자여서가 아니라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문득 내가 혼자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배가 된다. 백도희의 작업은 단순히 사진의 재현으로서의 회화가 아니라 공간에 대한 사유적 의미로서의 회화이며 동시에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중심이 되지 못하고 맴도는 주변인에 대한 깊이 있는 은유이다.

신지혜_Picnic_순지에 채색_180×200cm_2010 유윤주_Living room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8×148cm_2010

연일 계속되는 사건사고는 더 이상 작가에게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인식 되어진다. 신지혜의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던 일련의 사건들은 그녀가 여행지에서 마주하게 되는 특정 풍경들과 겹쳐지며 구체적인 형태를 띄게 된다. 화면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기호들은 감상자로 하여금 마치 스토리가 진행중인 무대의 한 장면처럼 인식하게 만드는데, 작가의 상상으로 재구성된 이러한 미장센은 감상자의 추리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고 때론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단서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신지혜의 작업들은 단순한 시각적 유희로서의 활동이라기 보다는 읽고 추리해 나가는 텍스트적인 작업이며, 작가에 의해 연출된 하나의 연극이라고 볼 수 있다. ●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숲 속에 자리한 작은 거실은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공간이다. 동시에, 거대한 상처만이 존재하는 삶 속에서 잠시 피해있기 위한 도피처이다.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작가 유윤주가 소망하는 것들을 배치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치유한다. 그러나 사방이 열려 있는 공간에서 온전히 피신해 있기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모든 이들에게 낱낱이 파헤쳐진 그녀의 삶은 여전히 눈발이 휘날리고 있으나 머지않아 겨울의 끝이 오리라는 것을 암시라도 하듯 화면은 온통 파스텔 톤이다.

이수아_무지개 빛을 넘어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10 이지수_needless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0

이수아는 기존의 회화작품이 가지고 있던 보편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규칙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그것들을 해체한다. 이를테면, 수족관 속에서 토끼나 호박이 물고기와 함께 공존하는 식의 실현 불가능한 상황부여가 그런 식이다. 물론 그녀의 작업 앞에서 감상자들은 그것이 허구임을 지적한다. 캔버스에 그려진 사과 그림은 진짜 사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려진 상태에 따라 감상자는 '사과다' 혹은 '사과가 아니다'를 판단하듯 말이다. 작가는 한낱 물감과 천으로 이루어져있는 오브제일 뿐인 회화 작품 안에서 감상자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기준이나 체계에 적용시키는 방식에 혼란을 부여한다. 작가가 창조해 낸 매트릭스적 세계는 이러한 이유로 기존의 틀에 박힌 방식으로는 전혀 읽혀지지 않는다. ●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는 개발되고 외국의 문화와 자본은 끊임없이 유입된다. 그것은 트렌드라는 가면을 쓰기도 하고, 선진문화라고 포장되기도 하며, 때로는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자연스러운 형태라고 정당성을 피력하기도 한다. 외국 자본의 유입은 국내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환경을 파괴하기도 하며, 개인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에 발생하는 문제점을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가 이지수는 단순하게 국수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한 개발과 개방에 따른 잃어가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장종현_응결-caramel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0 정지원_beyond landscape 3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10

원본과 복제, 가상과 실재의 이미지들이 혼재되어 얽혀있는 이 사회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어느 부분이 거짓인지 판단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체로 우리들은 시각적으로 습득한 정보에 대해 그것의 진위 여부를 가장 크게 확신 하는 편이긴 하나 망막에 의존해 학습된 경험 또한 때론 진실을 지배하기도 한다. 장종현의 작품을 두터운 마티에르로 형성된 덩어리라고 판단하고 실제 작품 앞에 섰을 때 그것이 사실은 평면의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당혹감을 감추기 어렵듯이 말이다. 감상자는 장종현의 작품을 보며 가상이 실제보다 먼저 인식되는 일루젼으로 인한 오류를 범하게 되며, 이는 지금껏 우리가 보아오고 알아오던 것들이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는지를 되묻기 위한 작가의 의도이다. ●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정지원 작가가 목격한 다양한 자연 경관들 중에서 시각적으로 입력된 부분은 삭제하고 감성적이고 심리적으로 인지한 부분만 남겨둔다. 결과적으로 각각 다른 곳에서 마주한 풍경들이라 하더라도 시각적 특수성이 사라지고 나면 엇비슷해 지며 평균치의 풍경이 남게 되는데, 이 과정을 좀 더 객관화 시키기 위해 작가는 물감을 바르는 형식이 아니라 붓을 찍어서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은 마치 특정 대상이 추상화 되어가는 과정과도 닮아 있는데 '사물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형태를 잃지 않으면서 탈 형태화 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추상회화야 말로 순수함과 완벽함, 조화와 균형을 제공하게 된다'는 몬드리안의 주장에 부합한다.

정지윤_등사_종이에 잉크_100×55cm_2009 조영진_인간만의 파괴적 환상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11

고고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옛 그림과 고서들을 자주 접한 정지윤은 현재나 미래 보다는 항상 과거에 대한 동경과 회귀를 꿈꾸며 성장해왔다. 작품제목 「등사(騰史)」는 '산을 오르는 것이 곧 역사를 오르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예로부터 변함없이 현재의 자리를 지키며 서있는 산은 수많은 역사들의 중심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산자락을 오르면 작가의 머리 속엔 과거 그곳에서 있었음직한 스펙터클한 역사들이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한 화면에 공존하며 새로운 역사가 작가의 상상 속에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정지윤의 부유하는 산은 이상에 대한 열망이 아닌 마그리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특정 사건에 대한 기념비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감성적인 욕망을 습득하고 있고, 그것을 방치해 두면 결국 사회적 혼란이 야기된다는 조영진 작가의 논리는 중국의 유학자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과 닮아있다. 그러나 그것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완화시키는 방법으로 순자는 개인의 수양을 꼽았던 것에 반해 조영진은 사회나 조직의 명확한 태도나 책임이 필요함을 피력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자극적인 미디어에 무분별하게 노출 되어진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폭력은 위험과 경계의 대상이 아니며 시대의 반영이며 현실의 일부일 뿐이다. 악당과 영웅의 경계가 모호해진 이 시대에서 인간 잠재의 폭력성은 결국 사회적 도발로 인해 끄집어 내어지게 되는 것이다.

최재천_Frame_린넨에 유채_130×194cm_2011 한형록_Shadow 6_캔버스에 유채_130.3×194cm_2010

좋아하는 영화를 반복적으로 감상하게 되면 처음에는 눈길을 끌지 못하며 스쳐 지나갔던 화면들을 새로이 인식하게 된다. 최재천은 영화 속 스토리의 전개와는 무관하게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특정 이미지를 캡처하여 그것을 캔버스의 주인공으로 삼아 화면을 재구성한다. 조직이나 사회에서 낙오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핵심적인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관심의 대상에서 소외된 것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결국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구성원들에 대한 연민과도 닮아있다. ● 한형록의 작품이 시뮬라크르와 큰 차이가 있다면 그의 경우 원본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원본은 존재하고 있으며 복사본은 그것 자체로의 독립적인 아우라를 형성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원본의 형태가 주는 감동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대상을 대했을 때 반응하는 순수한 감정을 극대화해서 전달하기 위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확장된 복사본은 원본과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감상자에게 확대 재생산된 새로운 감동을 주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감동은, 그의 작업이 잘 만들어진 건축물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수 백 년에 걸쳐 축적된 대상의 묵직한 미(美)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윤상훈

Vol.20110221a | Crossing over 2011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