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기_원성원_박현수展   2011_0224 ▶︎ 2011_0305 / 일요일 휴관

박선기_Traning space_혼합재료에 채색_119×100×9cm_201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 휴관

123갤러리 123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81-1번지 세화빌딩 2층 Tel. +82.2.3445.5123 www.123gallery.co.kr

박선기 사물들은 결코 실재가 아니면서 실재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전복시키고 우리의 시점을 뒤흔든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이나 사물들을 실눈으로 보면 달리 볼 수 있음을 경험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포착하여 재구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선기_Point of view_혼합재료에 채색_62×97×15cm_2010

일상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대상들은 정상적인 볼륨을 상실한 채, 압축·변형됨으로써 실재성(reality)을 박탈당한 듯이 보이지만 관람객이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 불완전함이 완전함으로, 완전함이 불완전함으로 뒤바뀐다. 결국 대상은 하나이지만 시점이 그것을 달리 보이게 만들 수 있음을 작품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박선기

원성원_일곱 살_엄마의 고향바다_C 프린트_125×195cm_2010

원성원 「1978년 일곱 살」 연작에서 작가는 꿈에서처럼 기억이 초현실주의적으로 짜집기된 이미지들로 공상과 꿈의 다른 기능을 표현하고 있다. 일곱 살의 꼬마는 1978년의 어느 날 늦잠을 자고 깨어보니 엄마가 사라졌다. 내가 잠들었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엄마가 집에 없는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고 엄마가 사라진 것을 인식한 순간 집은 안락과 포근함의 공간에서 무시무시한 야생의 공간으로 바뀐다. 엄마가 좋아했던 아담한 화초들은 무성하게 자라 집안 곳곳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원시림의 나무가 되어 있고, 넘치는 싱크대 물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시퍼런 호수까지 만든다. 두렵고 당황한 일곱 살 꼬마는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다. ● 일곱 살의 꼬마는 엄마를 찾아 길을 나섰다가 어떤 낯선 마을에 도착하지만, 마을은 아이의 불안을 반영하듯 텅 비어 있다. 그곳에서 엄마에게 전할 소식을 담은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산동네 마을의 집과 어지럽게 널려 있는 빨래들, 집 앞에 놓인 작은 화분, 들에 핀 꽃 한 송이까지 세세한 소품들로 구성된 한국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골목 풍경들이 비행기의 동선을 따라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 각각의 장면 조각들은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장면일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바라본 순차적인 장면들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11개의 '일곱 살' 연작들은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하고, 한 장의 사진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혹은 동시에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하나의 프레임이 한 가지 표상체계를 갖는 사진 이미지의 형식적 한계를 꼴라쥬 형식을 통해 뛰어 넘는다. 하나의 프레임이지만 그 속에 시공간의 흐름을 꼴라쥬로 담아냄으로써 1초에 24프레임으로 연속된 움직임을 통해 이야기를 서술하는 영화처럼 시간을 따라 흐르는 이야기narrative를 갖게 된다. 사진 프레임은 멈춰 있지만, 관람객은 이 연작들 앞에 서면 자신의 경험이 덧붙여져 되살아나는 영상들이 영화처럼 영사映寫된다. 비록 관람객의 머리 속에서이지만, 여러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어 내러티브가 흐르고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작가는 한 장의 사진 프레임으로 영화적인 움직이는 영상 프레임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꼴라쥬는 하나의 프레임에 속박된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을 해방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 ● 「1978년 일곱 살」 연작에서 갖는 아이의 두려움은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무심한 엄마가 아이에게 홀로 남겨놓은 두 세시간을 갖가지 불길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상들로 채우고, 이 두려움의 시간은 엄마의 초인종 소리가 들릴 때에만 끝나게 된다. 프레임을 메우는 각각의 동네 전경과 세세한 소품들은 실제로는 엄마를 찾아 나서지 못한 작가의 꿈을 실현시키며 머리 속으로 엄마를 찾고자 헤매던 소망을 실현시키는 보상이기도 하고, 그러나 세세하게 묘사된-세세하게 찾아 헤매진- 동네 전체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엄마에 대한 절망적 기억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영화 「Cinema Paradiso시네마 천국」의 연속적으로 이어진 카메라워크는 내가 이불에 오줌을 싸서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생각한 어린 꼬마가 이불을 깨끗이 빨아 널고, 진달래밥과 들국화국을 만들고 혼자 뜨개질하며 고독하게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사실은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세상 전체가 하나로 이어져 엄마가 있는 곳까지 닿아 있음을 암시한다. ● 탁월한 영화적 카메라워크가 사진적 프레임으로 변용된 이구성은 마을 전체의 전경을 마치 조감도처럼 종이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조망을 통해 마을 전체가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꼴라쥬를 통해 구현된 이 시각은 하나의 소실점과 시점을 갖는 서양화의 일인칭 관찰자적 구성이 아니라, 여러 시점을 갖는 동양화의 삼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작가가 가진 기억들을 어린 시절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하나의 객관적 이야기로 담담하게 회상하는 형식을 통해 작가는 어렸을 적의 기억 또는 상처와 어렸을 적의 또 다른 나를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원성원_일곱 살_엄마를 찾는 종이비행기_C 프린트_80×110cm_2010

작가가 일곱 살이었던 1978년 무렵에 나와 TV에서 빈번하게 재방송되던 소설 원작의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1976)에서 마르코가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엄마를 찾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가는 여정은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물이 가로막고 있다. 싱크대에서 넘치는 물은 아이에게 공포로 작용하고, 엄마의 고향인 바닷가 마을로 가야 하는 아이에게 가로막고 있는 바닷물은 건너편 마을을 섬으로 고립시킴과 동시에 아이가 건널 수 없는 장애를 만든다. 엄마를 찾는 것이 막막했던 작가의 무의식은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을 가로막는 물줄기로 표현된다. 이 막막했던 심정을 기억으로 떠올리고 작품으로 표현한 데에는 프로이트의 쾌락원칙das Lustprinzip이 작용한다. 이제는 커버린, 그래서 집안에서 엄마의 부재가 두려움이 아닌 작가가 다시금 이 어릴 적 기억을 회상하는 것은 트라우마Trauma에 가까운 두려움의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내어 세세하게 묘사하고 매만지는 동안 작가는 이 정신적 외상外傷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트라우마는 육체의 흉터처럼 각인된 정신의 상처이고, 그것을 극복한 성인이 된 후에도 언제든 살짝 건들기만 하면 그 때의 막막함과 두려움을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연상장치이기 때문이다. 독일어의 트라우마Trauma는 꿈이라는 단어 트라움Traum에서 파생되었다. 꿈은 결여를 메우려는 욕망의 투사이기도 하지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정신적 상처를 반복하여 충격을 줄이려는 시도이다. 언어로 구성된 상징체계 내에 기존의 체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들어오면, 무의식은 이것을 반복하여 떠올림으로써 더 이상 그 사건이 충격적이지 않은 일상적인 것으로 익숙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건이 더 이상 긴장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가 쾌락의 상태인데, 이를 추구하려는 무의식적인 경향이 쾌락원칙이다. ● 가령 아파트에서 투신한 사람에 관한 신문을 읽은 사람은 그 장면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서 떠올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투신이 더 이상 괴롭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 다시 말해서 의식의 상징체계를 깨트리는 대상이 아니라 의식체계 내에 흡수되어 긴장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이제 그 투신이라는 사건이 포함된 의식의 상징체계를 다시 형성한다. 그럼으로써 긴장이 해소된 상태인 쾌락의 상태를 되찾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꿈Traum에서 악몽적인 기억을 반복하는 것은 정신의 상처Trauma를 치유하려는 무의식의 작용이다. 일곱 살 아이가 깨어났을 때 엄마가 외출하고 없다는 것은 강한 두려움과 불안의 기억이 반복해서 떠오른다는 점에서 이 모티브에는 쾌락원칙이 작용한다. 작가는 꼴라쥬에 의한 사진적 공간이라는 꿈을 표현하고, 그 꿈을 통해 어렸을 적의 불안과 두려움에 상처받은 정신을 어루만진다. 이제 꿈과 기억의 욕망의 성취나 이데아의 표현이 아니라, 정신적 외상과 상처에 대한 치유로 작용한다. ● 작가는 주변의 일상적인 이야기와 기억들을 사진 이미지로 채집한다. 그리고 그것을 초현실주의적인 꿈의 형태로 짜깁는다. 하나의 전체를 이루도록 구성된 사진들의 조합은 각각은 실재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실재하는 것들의 총합이지만, 그들이 구성된 공간이 가상이라는 점에서는 비현실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진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대상의 부재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현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작가가 애정어린 눈으로 관찰했던 실재의 개체들은 그 '실재'하는 비현실적 공간에서 다시 살아난다. 또한 사진이 실재의 기록이라는 속성이 작가가 건설한 이미지의 세계를 어딘가에 실재하는 것으로 상기시킨다. ● 공상이나 동화 속의 이야기, 누군가의 꿈을 사진으로 실현시키는 일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작가는 작은 퀼트 천을 모아 큰 이불을 완성하듯 수백 개 사진들을 모아 자신이 얘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한다. 사진 꼴라쥬 작업은 컴퓨터로 사진을 합성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작업이다. 손으로 일일이 하는 작업은 그림만큼이나 노동집약적인 작업일 뿐아니라, 작업 자체는 그림에서 시작되고 필요한 요소들을 하나씩 더해가는 방법이 그림의 구성과 같기 때문이다. 우선 드로잉을 통해 작업의 뼈대를 만들고, 그 그림대로 장소와 대상을 물색해 일일이 수백, 수천 컷의 사진을 찍는다. 그런 다음 촬영한 사진 이미지를 하나하나 마우스로 오려 이어 붙인다고 하는데, 이는 붓 대신 마우스를 사용할 뿐 붓으로 그리는 정교함과 노력, 그리고 각각의 대상에 대한 관찰과 전체적 구성에 대한 계획이 필요하다. ● 작가 원성원은 하나의 프레임 이미지에 시간의 변화와 공간의 이동을 끌어들인 꼴라쥬라는 기법을 통해 영화적인 내러티브가 흐르는 서사구조를 만든다. 그리고 이 서사적 이미지들은 주변 친구들의 꿈Traum을 실현시키기도 하고, 자신의 트라우마Trauma를 재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버려진 것과 변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기도 한다. 그는 꿈과 기억의 편린片鱗으로 짜깁은 따뜻한 퀼트 이불 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고 따스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 문성호

박현수_Circle-Yellow_캔버스에 유채_122×122cm_2010

박현수 적어도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회화는 평면이라는 화면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방법의 천착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까 화면에 떠오르는 이미지에 앞서 평면이라는 구조에 대한 부단한 해석이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평면이 구조로 인한 그 속에 담기는 내용보다 어떻게 담을 것이냐는 방법이 먼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 박현수의 화면도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구조로서의 평면의 해석으로 먼저 접근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화면이 주는 이채로운 감각은 먼저 깊이와 넓이란 이중성에 의해 형성되는 구조에서 찾아진다. 그의 화면이 주는 일반적 회화의 맥락에서 벗어나는 신선한 역설은 이 깊이와 넓이가 만드는 다층적인 구조에서 온다는 것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단순한 이중적 대비에서만 구조적특징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대비로 인해 오는 풍요로움이 신비와 광휘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리라. ● 모호한가하면 구체적이고 동적인가하면 몹시 정적이다. 단순한가 하면 복잡하고 개념적인가하면 실체적이다. 무의식과 의식이 교차하고 무작위와 정치한 작위가 공존한다. 세부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 그것은 보다 정밀한 분자로 파편화되고 전체를 향한 거대한 질서에로 통합되어간다. 그의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이 공존하고 교차한다. 저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속에 잠겨드는 은하의 깊은 침잠이 있는가하면 화석처럼 분명하게 아로 새겨진 이미지의 파편들이 폭발한다. 우주의 창조, 시원의 공간이 이렇게 형성된 것일까.

박현수_Circle-Blue & Red_캔버스에 유채_122×122cm_2010

태초에 신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고 했다. 우주공간속에 부유하는 작은 기호들, 보석처럼 아롱지는 작은 기표들은 분명 창조의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언어의 대용물이리라. 암흑을 뚫고 표상하는 빛의 울림은 그의 화면에 정착되면서 그 고유의 형식개념이 된다. 김영호도 "박현수의 그림은 자연의 빛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 빛의 체험을 예술로 표상하는 과정에서 빛의 구조와 정신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형식개념이 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언술하고 있다. 확실히 빛은 박현수의 화면구조의 요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우학은 색을 빛으로 치환시켜갔던 인상파에 비견하고 있다. "색을 빛의 위치로 승화시킨 색의 절대가치를 드높인 인상파"와 관계지우고 있다. ● 빛의 개념을 화면에 끌어들인 현대작가들이 적지 않다. 박현수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박현수의 빛의 해석은 단순한 정신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관념의 영역에서 더 나아가 종교적 차원에로 진행되고 있음을 직관하게 된다. 빛은 창조자의 영역에서 온다는 사실을 그의 작품들이 지닌 시원의 기억들이 은밀히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 박현수의 작업과정은 깊이와 넓이의 구조에 맞게 출발한다. 먼저 화면에 무수한 색의 드리핑으로 가득 채운다. 그 위를 다시 색면으로 완전히 덮은 후 물감이 마르기 전에 고무칼로 부분적으로 걷어낸다. 그것들이 영롱한 기호의 파편으로 떠오른다. 때로는 한글자모 같기도 하고 때로는 알파벳이나 숫자모양을 띄기도 한다. 우주공간에 부유하는 성운의 신비스런 현현을 보는 느낌이기도 하다. 때로는 원환의 배경 속에 작은 빛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제의적인 공간을 만드는가하면 단위적인 원들의 유영이 알 수 없는 공간에로의 여행을 독촉한다. 거대한 울림이 뒤덮는가하면 작은 밀어들의 은밀한 속삭임이 잔잔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헤나시거라 한 다음의 언급도 이 비밀스런 구조의 역설에 대한 것이다. "그의 구성의 지배적인 구조를 형성해가는 커다랗고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들은 수많은 그리고 때로는 수백개의 정밀하게 분절된 작은 형태들의 집합이다." ● 거대공간과 그 속에 생성되는 수많은 미립자들로 언제나 드라마를 연출하는 화면은 어느덧 평면을 벗어나 현실로의 끝없는 확산을 시도한다. 작가는 그러한 현실이 주는 극적인 상황을 어떻게 수용하고 천착해갈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 오광수

Vol.20110224d | 박선기_원성원_박현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