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사물들

강원제展 / KANGWONJE / 姜元濟 / painting   2011_0323 ▶ 2011_0329

강원제_Lisa simson_캔버스에 유채_180×141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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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32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2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우연히 잡동사니들이 쌓여있는 길을 지나치다 뜻밖의 경험을 하다! 작가 강원제의 그림은 바로 이 '뜻밖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폐기물의 집적에서 전혀 새로운 이미지와 느낌을 경험한 이후 그의 화두는 개념과 관념으로 오염된 사물들의 진면목, 즉 우리의 통상적 이해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

강원제_Micky mouse_캔버스에 유채_280×180cm_2010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그의 그림을 대하고 있노라면 지난 세기의 미술사를 수놓았던 주요 사조들의 방법과 수단이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화면 위에 오버랩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르네상스 이래의 환영주의(illusionism)로부터 시작해서 이중 이미지, 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아상블라주(assemblage), 場(field)에 버금가는 거대한 화면, 유명 만화의 캐릭터와 대량소비사회의 전형이 될 수 있는 소재, 감성이 절제된 극명한 사실적 묘사 등, 이 모든 것들이 -비록 어떤 것들은 피상적인 원용에 불과하더라도- 복잡하게 한데 어우러져 있다.

강원제_Micky mouse_캔버스에 유채_107×145cm_2010

그렇다면 시대사조라고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결부시켜 해석하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는 바른길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살아 움직이는 예술작품을 이즘(ism)과 수단의 틀 속에 가둬 놓고 이해하려 든다는 것은 한 인간을 이력서만으로 파악해서 덤비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강원제_Marge simson_캔버스에 유채_180×141cm_2010

우선 그림 앞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서보자. 용도를 다한 온갖 잡다한 사물들이 갑자기 우리를 둘러싼다. 좀 더 그럴듯하게 표현하자면 이 쓰레기 더미는 화폭 위에 재현된(represented) 환영(illusion)으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즉물적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면서(present) 일종의 환경 또는 영역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쓰레기 더미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조금씩 뒷걸음치다보면 화면은 더 이상 우리가 몸담고 있는 場이 아니라 눈 안에 들어오는 감상의 대상, 즉 하나의 오브제로 변모한다. 바로 이 순간 쓰레기 더미 위로 미키마우스와 같은 또 다른 이미지가 떠오른다.

강원제_Bart simson_캔버스에 유채_180×141cm_2010

이중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의 그것보다 간단명료하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이루고자 했던 원대한, 그러나 막연한 목표, 즉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들쑤셔서 '세계의 외연'을 넓힌다든지, 혹은 '현실보다 더 참된 현실'을 드러내 보이자는 등의 거창한 것이 아니다. 단지 지금 여기에 있는 사물을 아는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뿐이다.

강원제_Doraemon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1

소용가치가 다한 대량생산품들... 그 위에 겹치는 유명만화의 캐릭터... 그리고 미키마우스의 천진한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맹목적인 이윤 추구로 비난받는 대자본 월트 디즈니의 탐욕... 어떤 구체적인 연상이 꼬리를 물지만 작품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작가는 이런 해석을 한사코 경계한다. 지극히 평범한 화두라 흔하디흔한 사물을 소재로 택했고 그러한 소재에는 그만큼이나 친숙한 캐릭터가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 영상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그의 제작 행위는 분명한 의도와 함께 고도로 통제된 자연스런 행위라는 점에서 액션 페인터 폴록(J. Pollock)의 그것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로젠버그(H. Rosenberg)는 폴록의 캔버스를 표현의 장이 아닌 행위의 장으로 간주하면서 마치 행위가 그 결과인 그림보다 더 중요한 듯이 흥분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이미지뿐'이라는 단순하면서도 통렬한 루빈 (W. Rubin)의 지적과 함께 그의 작품에서 숙고된 계획과 모네보다도 더 긴 작업시간을 간파해내었던 그린버그(C. Greenberg)의 분석은 로젠버그의 '행위'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말았다.

강원제_Homer simson_캔버스에 유채_180×141cm_2010

여기서 작가가 사물들을 나열하는 행위는, 그 사물들이 결국 이미지로 모방된다는 관점에서 데생을 하는 행위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따라서 행위의 결과물인 아상블라주도 사실 작가에 의해 재배치되어 모방되기를 기다리는 정물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은 작가 스스로 '계획된 이미지가 나타날 때 행위를 멈추며, 이를 찍은 사진은 기억의 보조수단으로서의 기능 이외에는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다'고 말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 결국 그의 그림은 수많은 사조와의 어떤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것과도 결정적인 연관성은 가지지 않는다. 이 점은 작가의 독창성이 구축될 수 있는 영역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작품은 중복된 두 이미지 사이, 그리고 재현(representation)과 제시(presentation) 사이의 간극 확인을 통해 사물을 대하는 우리의 의식을 환기하고자 한다. 지향은 비교적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이토록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도록 하였을까? 아마 버리기보다는 모두 안으려하는 젊은 나이와 가슴 속에서 표출구를 찾지 못하고 들끓는 표현욕구, 수많은 실험과 좌절과 눈물 끝에 다시 가져보는 희망... 아마 이런 것들이 원인일 것이다. ■ 권기준

Vol.20110323i | 강원제展 / KANGWONJE / 姜元濟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