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태백미술'

2011_0701 ▶︎ 2011_0707

초대일시 / 2011_0701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정철규_신하정_김덕환_허강일 이경훈_오가영_김지혜_박종화

주최 / 태백미술작가협회 주관 / 태백시

관람시간 / 09:00am~06:00pm

태백문화예술회관 전시장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49-225번지 Tel. +82.33.550.2781

다시 일어나는 태백미술 ● 미술작품의 형태와 색채 아름답거나 흥미로운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을 합니다. 인터랙티브 미술과 인터넷 예술의 영향력 그리고 미술과 과학이 중첩되는 최근의 수많은 전시회 작품들이 경계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문자를 통하거나 오직 미화를 하기위한 미술은 정말로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미술이 무엇에 개입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태백미술에는 다른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1984년 즈음에 태백미술동우회를 시작으로 2011년 태백미술작가협회로 이어져 왔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렇게 태백미술은 잘못 해석 되고 오해 되어지는 것에 맞서야 했는지, 시작에 황재형 선생님의 태백미술정신을 이어 받고자 이 전시를 끝으로 사단법인 민족미술인협회 태백지부로 다시 세웁니다. 이제 젊은 작가들이 태백의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를 바랍니다. ■ 허강일

정철규_Lingering Moment–태백에서잃어버리다._캔버스에 유채, coal_50cm×7, 100cm_2010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잊으려 해도 잊혀 지지 않는다. 다시 되새기고, 자기도 모르게 또 다시 끄집어내어 생각하려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반복된다. 그러다보면 어떤 것이 사실이었고, 어떤 것이 사실이 아니었었는지 조차 혼미해지게 된다. 길 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볼록거울은 왜곡된 현상을 반영하고, 내비친다. 그곳에서 움직일 수 없이 단지 앞에서 겪는 사건들을 여과 없이 왜곡시키고 있다. 볼록거울에 다가가 나를 보여준다. 볼록거울은 친근해지다가 어느 순간 불편한 존재가 되어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이라 할 수 없는 내가 겪은 혹은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하찮은 사물'이 되어 버린다. 바람에 날려 언제든지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곳에 놓인 화분이고, 철조망에 매달아 놓고 사라진 검은 풍선이고, 축제는 시작됐지만 네트에 모가지가 걸려 죽어가는 검은 새이고, 찢겨져 어디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낙하산이고, 심지어 이제는 내가 볼록거울이 되어 버렸다. 본인에게 있어 유년기의 가장 큰 기억영상색채는 '검정색'이다. 검은 풍경 그 자체이다. 검정색은 내가 살던 곳이 강원도 태백이라는 곳이었기에 삶에 있어 '탄광'이 지대한 영향을 끼침으로써 나온 색이다. 어려서부터 내 눈에 인지되고, 뿌리 깊게 박힌 색은 검정색이었다. 주변의 산과 하천을 비롯하여 집마저도 모두 검정색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곳의 검정색을 좋아하기는커녕 싫어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살았다. 그러던 중 16세가 되던 해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곳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본인이 그토록 싫어했던 검정색의 의미는 '심적인 어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본인을 감싸고 있던 검정색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검정색은 부정하고 싶지만, 충족되지 않는 삶의 상징 이었다. 검은 땅에서의 생계유지를 위해 매일 땅속 깊은 곳을 오가며 가정을 꾸린 아버지의 삶이 녹아 있는 색이다. 또한 유년기의 밝지 않은 환경 속에서 깊이 남아 있는 것은 외로움이다. 홀로 오래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 동안 보이지 않게 쌓이던 결핍된 사랑의 감정이 검정색으로 표현되어 화면에서 습관적인 색상으로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유년기의 지배적인 색상으로써 검정색으로 시작된 자아의 형성은 무의식 속에서 자아를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 정철규

신하정_움틈Ⅲ_견에 채색_40×50×세겹_2009

태백이라는 소도시를 둘러싼 산의 풍경과 그 산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광산에서 관광레저산업으로 탈바꿈한 과정 속에서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심상적 표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내 집주변에서 볼 수 있는 버려진 산업시대의 석탄이라는 잔재를 재료로 하여 스스로의 치유이자 회화로서의 승화를 기대하며 이뤄진 작업이다. 광부의 도시로서 존립했던 도시의 거대함은 내 작품 속에서 헐벗은 소녀의 등장과 까칠한 석탄 나무줄기로 이질적 공간을 드러낸다. ■ 신하정

김덕환_겨울의 끝에서_아크릴, 혼합재료_53×40.9cm

나의 작업은 자연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자연 풍경은 사실 그대로 드러나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심코 인간에 의해 소멸해 버릴 수 도 있다. 이런 소중한 자연은 여러 시점에서 관찰하고 재해석 할 수 있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순간 느끼는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여러 이미지를 생각해 가며 캔버스 위에 자연과의 소통을 위한, 내안의 무언가를 나타내기 위한 나 자신만의 이상적인 행동을 시작한다. ■ 김덕환

박종화_에이스벤츄라-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5×100cm_2011
허강일_20110502_지지리골 코코스공장_오브제_설치_부분

기억의 부분, 광산 공장의 벽 부분과 노동을 표현하기 위해 삽을 설치 지나간 시간과 사람들의 자리, 빈 찻잔과 말로 대화하는 것으로 다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실험 - 설치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유도한다.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 - 광산촌 아이들 도화지가 온통 껌정 칠이 되어야 풍경화가 되었던 시간들의 기억 광산막장의 아버지 - 늘 술에 취하셨던 힘든 퇴근시간 늙어가는 아버지의 등 뒤에서, 어른이 된 나와 광산촌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광산촌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 보이는 것 보다, 알아야 하겠는데. 아는 것이 많이 없다. 아버지를 알고 싶다. 알아야겠다. ■ 허강일

오가영_산_종이에 유채_35.2×27.5cm_2010

산 ; 그리다 ● 스물셋, 어느날 문득 꿈속에서 뛰어 놀던 나를 보았다. 나의 산 그림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넓은 들판에 있는 논두렁을 거닐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한참을 헤매다 지쳐갈 즈음 눈앞에 계곡이 나타났다. 그 계곡이 나를 향해 무너져 내렸다. 편안함과 두려움, 공포가 엇갈리는 복잡한 감정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계곡이 무너지는 장면에서 꿈은 끝나지만, 그 때 느꼈던 공포는 마냥 무섭기만 한 악몽이 만들어내는 공포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공포지만 짜릿하면서도 편안했다. 그런 느낌이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논두렁, 들판, 계곡 그리고 산. 이것들이 어우러져 내 그림의 원초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어딜 가나 산은 풍경 속에 자리하고 있다. 지나가며 스치듯 바라보는 산은 별 의미 없는 덩어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길이 있고, 나무가 있고, 계곡과 물이 있고, 온갖 생명이 있다. 그곳에는 도시 속 내 삶에서 결여된 어떤 것이 있다. 그것들은 내 마음의 풍경 속에서 때로는 험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결합되고, 흩어지며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 흐름은 내 그림이 된다. 원초적 풍경을 되살리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그리는 흐름들은 원초적 풍경으로 가까이 가기 위한 노정일까? 아니다. 스물셋에 보았던 풍경. 그 풍경은 이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리는 산 그림들은 원초적 풍경으로의 접근이라기보다 접근 할 수 없음, 즉 그 상실의 표현들이다. 꿈속의 계곡에서 바위와 나무들이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듯, 원초적 풍경은 완성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내가 그리는 선들은 상실의 재현이다. 내 그림은 원초적 장면을 그리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선들을 통해 끊임없는 상실을 그리는 것. 그것이 내 그림이다. 우리는 하나씩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선. 때로는 선이고 때로는 면이며, 때로는 운동이며, 때로는 시간을 감내한 공간인 바로 그 선은 불가능한 원초적 장면의 틈이며, 균열이다. 틈과 균열을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작업은 나를 숙성시키는 작업이며, 상처받은 내 마음을 치료해 나가는 작업이다. (2007년 작업 노트中) 풍경속 공간의 흐름 ● 작품에서 보여지는 미적 시간의 흐름은 다채롭다. 인간이 볼 수 있는 자연의 모습은 한정되어져 있다. 그러나 미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한 화면에 이끌어 내며 과감한 생략을 덧 붙어 사용하며 보다 풍부하고 다채로운 화면을 구성해 내었다. 작업을 할 때엔 작업의 배경에 축적된 이미지 끄집어 내어 자유로이 펼쳐내어놓고 선택한 어느 한 부분의 풍경의 이미지를 작품속에 그려 낸다. 작업의 배경이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억의 단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그 현장에서 선택되어진 어느 산의 한 부분은 나의 기억 외 사진 또는 스케치를 통해 재조합된다. 이 작업은 나를 통한 인식의 재생산이며 나의 시지각적 내부로부터'밖'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럼과 동시에 개인적 풍경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본인의 작업인 '산' 연작은 태어나서 자라며 보고 느꼈던 '산'의 감성적 체험 표현이며 상상의 장소이다. (2006년 작업 노트 中) ■ 오가영

김지혜_fl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33.3cm_2010

「 flow 」 ● 흐르듯이 움직이다. 오늘도 나는 캔버스 위에 무수한 점을 반복하여 찍는다. 수천 개 아니 수만 개 수억 개는 넘을 법한 이러한 점들은 본인 자신의 인내와의 싸움이며, 노동의 결과물이다. 이렇게 무수히 반복하여 찍은 점들은 뭉치고 흩어져서 흐르듯이 움직인다. 이 움직임은 우주, 자연(또는 자연현상) 그리고 나 자신을 만들어 낸다. ■ 김지혜

Vol.20110704c | 2011 '태백미술'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