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dition-Light

도성욱展 / DOSUNGWOOK / 都性郁 / painting   2011_0708 ▶︎ 2011_0731

도성욱_Condition-Light_캔버스에 유채_240×20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0612e | 도성욱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708_금요일_05:00pm

관람료 / 3,000원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센터 GANA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빛, 자연의 여백 ● 도성욱은 빛을 그린다. 빛을 그린다기보다는 빛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의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빛이다. 반사, 굴절, 혹은 투영으로서의 광휘가 가득하다. 나무와 바다, 들판과 함께 빛과 대기의 기운을 흠뻑 머금고 있다. 현실이건 예술이건 인간이 대상,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 시간과 빛의 조건과 간섭이다. 그의 풍경은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는 빛과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으로부터 비롯한다. 시간과 빛의 공통점이자, 존재하는 유일한 방식은 그것이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도성욱_Condition-Light_캔버스에 유채_120×300cm_2011

도성욱의 풍경에는 빛과 시간은 물론, 바람이나 공기, 냄새, 소리, 온․습도 등과 같은 비물질적 조건들이 회화적으로 용해되어 있다. 이들은 화면 구석구석을 공명하며 울림과 떨림으로 메아리친다. 보는 이의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는 도성욱의 화면은 물감으로 가득한 물질화된 공간이 아니다. 그의 풍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빛, 공기, 소리, 온도, 습도, 호흡 등과 같은 비물질적 조건들이다. 도성욱의 풍경은 비물질적인 조건을 중심으로 풀어나간 일종의 판타지다. 주지하다시피, 비물질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주변의 물질을 통한 심리적 발현일 것이다. 그의 회화는 그러한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연관성과 연계가능성 등 제반 조건들을 조율하고 안배한 행위의 결과다. 도성욱의 회화에 있어 중요한 것은 빛과 대상으로서의 나무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다투지 않고 다만 풍경화(風景化) 되었다는 점이다.

도성욱_Condition-Light_캔버스에 유채_120×300cm_2011

이처럼 도성욱의 회화는 화면 내에서의 물질과 비물질의 평행적 포치에 대한 독특한 조율 방식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물질과 비물질, 눈과 정신 사이의 회화적 재현조건들을 면밀히 탐색하며 타자와의 소통 방식을 모색한다. 최근 제주에서 보낸 시간은 자신과 자신의 회화, 나아가 자연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 가능성을 곰곰이 되돌아보는 모처럼의 기회로 작용했다. 장기적인 피로감이 누적된 자신과 작업 모두를 총체적으로,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기회였다. 그곳에서의 세상 경험은 스스로를 재충전하고 예술가적, 사회적 존재감을 재인식하기에 충분했다. 세상의 무한함과 유한성, 시간과 공간, 물질과 비물질 등의 제한과 구분을 넘어선, 하나 된 자연풍경에 집중하는 전환의 기회로 작용했다. 도성욱은 자연이 무언가를 답해주기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접었다. 멀리서 구하려는 자신의 태도를 버리고 직접 몸으로, 마음으로 열고 들어가야 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초심으로 돌아갔다. 몸을 들어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 욕심과 자만을 내려놓으니 두 가지 풍경이 다가왔다. 그리고 싶으나 그릴 수 없었던 풍경과 그릴 수 있으나 그리지 않았던 풍경이었다. 도성욱은 이 두 가지 풍경에 천착했다. 작가 스스로의 약속이자 원칙이었다. 육화(肉化)된 자연은 이내 화면으로 이어졌다. 화면 가득 자연기운이 순환하고 자연과 주고받는 작가의 내밀한 호흡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뭐라 말하기 힘든 감각의 대상으로서 자연이 구체적인 형태와 기운으로 화답했다. 자신을 먼저 열어야 그들이 열린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에 대한, 그림에 대한,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겸손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최근의 제주도 기행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난 세월 동안 몸으로 만난 자연이 오버랩 되었다. 진정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실재하는 풍경이요, 누차에 걸쳐 밟고 다가가서 만나고 이해하고 품어 안은, 작가의 수고와 진정이 개입된 내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성욱은 관습적인, 동어반복적인 제작방식을 지양하고 자연과 현실, 예술과 자신 그리고 관객과의 소통의 장, 혹은 도구로서 기능하는 회화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도성욱_Condition-Light_캔버스에 유채_120×500cm_2011

도성욱은 오늘도 일상처럼 길을 나선다. 자연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름을 받고 따라서 들어가 그들의 얘기에 귀 기울인다. 따스한 빛의 기운과 바람소리, 바람의 결, 나뭇잎들을 간지럽히는 소리를 듣는다. 도성욱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연이 가진 치유력이나 풍요함이 아닌, 자연을 인식하고 그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으로서의 회화작업이었다. 그가 만난 자연은 도성욱의 한계를 가감 없이 지적하고 사고의 범위와 자신의 규모를 깨닫게 했다. 그것이 산이든 바다든 자신이 오랜 시간 마주했던 풍경들을 담는 그의 회화는 시각적인 단순 재현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세상에 대한 인식 또는 저항으로서의 재현이어야 함을 확인해 주었다.

도성욱_Condition-Light_캔버스에 유채_120×250cm_2011

도성욱이 담아낸 풍경은 건조하지 않다. 푸석푸석하지 않은 촉촉한 기운이 넘친다. 마르지 않는 감성이 여전히 살아 있음이다. 기억에는 온도가 있다고 한다. 따뜻해지는 기억이 있고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기억이 있다. 그의 자연에 대한 기억과 체감 온도는 늘 자기 체온 이상이다. 그의 풍경은 재주와 테크닉을 뛰어 넘어 자연의 내재율을 꼼꼼히 읽어내고 진정으로 함께 호흡하려는, 뜨겁게 살아 숨 쉬는 습습한 풍경이다. 자연 속으로 보다 깊숙하게 들어가려는 노력과 몸을 깊이 적시어 받아들인 자연에 대한 사랑이 흥건하게 묻어나는 화면이다. ● 자연과의 내적 교감이 더욱 더해진 두꺼운 풍경에는 바다의 심연과도 같은 초록의 향연이 펼쳐진다. 보는 이의 마음마저 초록으로 물들이는 풍경이다. 자연을 흉내 낸, 자연의 바깥 표정을 담아낸 그림이 아니라, 자연으로 들어가 진정으로 자연을 닮고자 노력한, 자연의 원리와 자신의 나약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자기고백으로서의 풍경이다. 치밀하게 계획되고 구획되었다기보다는 몸과 마음에 와 닿는 자연의 원초적 느낌에 충실했다. 회화의 틀에 그것들을 끼우려하기보다는 회화로 풀어낸, 일종의 정신적 단계를 보이는 풍경으로 나아가고 있다. 도성욱에게는 '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비트겐슈타인)이었다. 그의 풍경이 자연의 외관을 따라 그려낸 그림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점이다. ● 천석고황(泉石膏肓)이라했다. 어릴 적부터 산과 바다가 무작정 좋았던 도성욱은 해병대에 자원입대했고 이후 세상에 젖어드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자연에 녹아들었다. 산과 들, 바다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저 푸르름을 따랐다. 그들은 언제나 대기와 함께 있었고 도성욱은 잠시도 호흡을 멈출 수 없었다. 틈틈이 산을 밟았고 온몸으로 바다를 탐했다. 자연은 언제나 도성욱을 향해 있었다. 자연으로 들어가 자연과 하나 되어 소비하는 시간은 도성욱에게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하나의 자유로운 질서였다. 어떠한 구속이나 타율로부터 자유로운 스스로 그러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찾고 구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깊은 산속에서, 천해 물속에서 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들을 그리면 그릴수록 자연의 품에 깊이 스미어 들어갔다. 자연과의 만남은 도성욱에게 있어 자신의 일탈과 이탈에의 욕망을 다스리는 일종의 심리치료과정이다. 그것이 실제풍경이든 회화풍경이든 그것은 도성욱으로 하여금 자신의 근원을 생각하게 하고 자신의 현재 위치를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도성욱_Condition-Light_캔버스에 유채_80×200cm_2011

세상의 오해는 대부분 부분적 이해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소통의 장애로 이어지고 인식의 왜곡으로 발전한다. 도성욱은 세상을 담는 회화의 한 형식으로서 풍경의 조건들을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비록 개인적 체험이며 자연의 어느 한 부분을 떠낸 제한된 풍경이지만, 세상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비물질적 조건들을 통해 풍경의 개방성과 폐쇄성을 건드리는 독특한 회화적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풍경은 세상의 모든 비물질적 존재에 대한 질문이자 회화적 상장(上場)이며, 그들을 통해 물질의 유한함을 새삼 강조하고 일깨우는 도성욱식 바니타스 풍경(vanitas landscape)이라 하겠다.

도성욱_Condition-Light_캔버스에 유채_162×97cm_2011

도성욱의 풍경은 사람의 눈으로 담고 몸과 마음으로 풀어낸 풍경이다. 그의 작업에서 주로 만나는 풍경은 촉촉하게 젖어 있는 잠깨어나는 새벽녘 숲속 풍경이다. 그가 담아내고자 한 것은 자연의 여백인 동시에 아스라한 삶의 여명과도 같은 빛이다. 삶의 또다른 시작을 알리는 새벽풍경으로부터 늦은 오후 풍광에 이르기까지 하루를 돌아볼 수 있는 조건들이 화면에 출몰한다. 풍부한 회화적 질량감이 돋보이는 도성욱의 그림에서 경험하는 숲의 하루는 어쩌면 그렇게 인생의 어느 지점을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 도성욱의 풍경은 자연의 조건에 탐닉하기보다는, 자연의 내용에 자신을 삼투하고 흡수하는 살아 움직이는, 자라나는 풍경이다. 한번쯤 보고 싶은 풍경이기도 하고 평생을 보기 힘든 풍경이기도하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문득 만날 것 같은, 현존하는 장면이기도 하고 또 실재하지 않는 창조된 장면이기도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는 이의 마음에 달려 있을 것이다. 새삼 회화의 힘, 재현의 힘, 화가의 힘을 돌아보게 한다. 그저 무심한 척 잔잔하게 진동하고 있는 도성욱의 풍경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다. ■ 박천남

Vol.20110710c | 도성욱展 / DOSUNGWOOK / 都性郁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