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서다

박종필展 / PARKJONGPIL / 朴鍾弼 / painting   2011_0711 ▶ 2011_0817

박종필_세상의 모든 꽃들 part.1_캔버스에 유채_100×20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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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비앤빛 갤러리 B&VIIT GALLERY 서울 서초구 서초 4동 1317-23번지 GT 타워 Tel. +82.2.590.2353 www.bnviitgallery.com

박종필 회화론 - 아이러니와 마스크라드 ● I. 화가 박종필은 2006년 즈음부터 실재와 가상 사이의 경계에 놓인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다. 실재와 가상, 두 영역의 공존이란 애매한 상태에 관심을 둔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캔버스 위에 유화로 그려지지만, 간혹 오브제 제작과 설치도 이루어진다. 2000년대 신진작가들의 네오팝 경향과 맞물린 작업 성향과 탁월한 사실주의 능력 때문에, 하이퍼리얼리즘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은 이 분류를 정중히 사양한다. 기계에 의존한 기능적 회화인 하이퍼리얼리즘에서 발견된 차가운 비인간적 성질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박종필은 오히려 구상회화의 구성적 복잡성과 심리적 의미 부여를 선호한다. 이를 위해 오브제 제작과 설치를 시도하고, 그 파생 효과를 회화에 취합하기도 한다. ● 실재와 가상은 본질적으로 상반된 개념어로서 상호 모순된 가치를 나타낸다. 하지만 이 둘은 작가의 작품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양면적 특성으로 공존하고 있다. 대립된 두 요소가 이루는 부조화의 상황이 곧 아이러니이다. 작가는 후기산업사회 현실이 지극히 모순된다는 점을 가리키기 위해, 이 아이러니를 작품의 중요한 지표로 선택한다. 문학에서 아이러니가 종종 진리를 강조하는 비유나 풍자의 한 형태로 사용되듯이, 작가는 이를 자연인인 인간의 본성과 과학기술의 인공적 상황이 충돌하는 현실을 은유하기 위해 사용한다. 현대 매스미디어 사회에는 실재와 가상이 뒤섞인 기묘한 환경이 형성되어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광고계에서는 가상세계가 오히려 현존하는 실재계를 구축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작가가 선택해 온 소재들도 다름 아니라 이 같은 후기현대사회의 기묘한 상황을 반영한 이미지들이다. 이를테면 매스미디어가 유통시킨 쾌락적 소비대상의 이미지들로, 상품화된 케익과 인위적으로 장식된 사탕 그리고 온갖 꽃들의 이미지가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서 거의 강박적으로 화면 위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박종필_between the fresh_캔버스에 유채_189×259cm_2010

작가의 케익, 과일, 사탕, 꽃의 이미지는 너무도 먹음직스럽고 싱그러워서, 즉각적으로 우리 욕망을 일깨우고, '주이상스'(쾌락적 즐거움)의 환영이 되도록 한다. 하지만 실재의 허상인 이미지는 우리의 갖고 싶고 먹고 싶어 하는 욕망을 실제로 채워주지는 못한다. 이미지에는 실재가 풍기는 달콤한 향기도 부드러운 맛도 없다. 더욱이 작가의 화면을 잘 살펴보면, 그 이미지는 기대와 달리 즐거운 쾌락의 향연이 아니다. 클로즈업된 광경 속의 케익과 과일들은 온통 질퍽한 붉은 색 시럽으로 뒤범벅되어 있고, 인간 머리 모양을 한 사탕들이 여기저기에 수상한 광채를 번득이며 불쑥 튀어 나와 있다. 이 당혹스러운 느낌이란... 게다가 쾌락의 상징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뭉개어지거나 흘러내릴 것 같아 보인다. 시각을 포화시키는 강렬하고도 모호한 비정형의 형상들은 결국 탐닉과 동시에 혐오의 이미지로 확인된다. 처음 유혹적이었던 이미지가 상식을 깬 정반대된 모습으로 확인되는 과정은 감상자를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한다. 그런 맥락에서 작가의 작품을 초현실주의자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신'이란 미적 태도와 동일화시켜도 무방하리라 본다. ● 작가는 전통적 관례대로라면 정물화가로 불릴 수 있다. 17세기 서양미술사에서 죽은 자연(nature morte), 정지된 삶(still life)을 의미하며 등장했던 정물은 본래 삶과 죽음, 활기와 정지, 환영과 자기반영, 실재와 가상의 이율배반적 요소가 함께 어른거리는 장르였다. 그런 역설적 사색의 분야인 정물을 선택함으로서, 작가는 삶과 실재 옆에 죽음과 가상이 깃들어 있다는 아이러니의 메시지를 효과 있게 전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근대 화가들이 풍요의 정물을 그리면서도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기)의 알레고리를 즐겨 암시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새삼 초점을 맞추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정지된 자연 이미지 안에 현대사회의 과도한 인위성이 공존함으로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본질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은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종필_between the fresh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10

II. 박종필의 "꽃" 연작 (「Between the fresh」 연작, 2008~2010)에는 생화와 조화가 뒤섞여 있다. 하지만 두 요소들의 시각적 구분은 쉽지 않다. 대단히 명확한 사실적 구상임에도 이 초록의 향연장 안에 식별이 어려운 조화가 섞여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불현듯 가식의 스크린 앞에 선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잠시 숙고해보면, 참과 거짓이 혼합된 이 같은 상황은 실상 이중적 양면성을 내포한 현대사회의 상황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참과 거짓, 실재와 가상을 구분하고 분리하려는 태도가 더 모순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복제와 가상이 만연된 오늘의 사회에서 실재와 환영, 참과 거짓은 동시에 병존하는 필연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실재만이 유일한 가치이고 가상과 대립한 지배적 우월 요소란 주장은 더 이상 현실성이 없다. 마찬가지로 실재를 가리는 가상도 그 위장과 은폐를 통해 실재를 몰아내기보다 실재를 가리면서 동시에 은연 중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실재에 대해 가상은 마스크라드 masquerade(가리기)의 역할을 수행하며, 현실에 대한 이미지 역시 그러한 마스크라드의 기능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 거짓-모상이 참-원상을 완전히 가려서 은폐하지 않음은 일종의 풍자이고, 높은 단계의 정신적, 심리적 역설의 플레이 즉 마스크라드이다. 이 같은 마스크라드에 의해, 작가는 회화적 환영(=가면)에 틈새를 만들고 이를 통해 자기반영을 한다. 작가가 사진을 사용하지 않고 유화와 붓을 계속 고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계적 복제가 아닌 심리적 무게가 실린 손작업으로 마스크라드의 효율을 높이려는 까닭이다. 아닌게 아니라 스치고 지나간 붓질 자국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는 순간, 환영의 완벽한 가면놀이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자기반영의 마스크라드에 의해. 가상의 본래 위상이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의 미술은 대부분 실제와 가상 사이의 마스크라드 작용을 적절히 응용하고 있으며, 생화와 조화의 혼합인 "꽃" 연작은 실제와 가상을 혼합한 포스트모던의 절충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은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종필_cake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9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은 환영주의 illusionism와 반영성 reflexity 사이의 반복되는 긴장에 의해 전개되어 왔다. 이미지는 환영이란 가면으로 현실-실재를 가장하여 감추거나, 혹은 자기반영으로 도리어 자신의 마스크를 지적하고 그 가면 아래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도록 요청하기도 한다. 후자의 반영성은 이미지 자신의 허구성에 이목을 집중시킴으로서, 실재와 가상의 구조적 본질을 드러나도록 한다. 마스크가 환영이라면, 마스크라드는 바로 이러한 반영성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한데 흥미로운 점은 환영주의와 반영성이 일반의 예상과 달리 늘 대립쌍으로 양립해왔다는 사실이다. 실재와 가상이 양면가치로 공존하듯이, 환영주의와 반영성은 대립된 상극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 구조를 통해 상호침투하는 관계를 형성해왔다. 두 요소의 공존의 관계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통해 더 강화되고 있는데, 양자가 어느 비율로 서로 밀고 당기는지는 매 작품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의 작품에서는 재현과 반영이 각각 높은 비율로 존재하며 마찰을 일으키므로, 감상자는 마스크라드를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면 감상자는 작가의 작품에서 반영의 마스크라드를 어떻게 판별해낼 수 있을까? 방법은 이렇다. 작가는 극도의 사실주의 재현으로 초실재의 환영을 성취하는데, 간혹 그것의 참과 거짓 사이의 갈등이 작가로 하여금 환영의 가면을 불가피하게 내려놓게 만든다. 바로 이 순간 감상자는 그 가면 아래 혹은 뒤에 숨겨진 진실 즉 마스크라드로 시사된 진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박종필_cake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9

그렇다면 참과 거짓, 실재와 가상의 아이러니, 환영과 반영, 마스크와 마스크라드의 양면성은 박종필 회화의 고유한 특질일까? 필자는 이 속성들이 작가의 독창성인 동시에 포스트모더니티의 시대적 흐름이라고 평가한다. 이론가 린다 허천 Linda Hutcheon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과 전략』에서, 후기현대의 미술은 기존의 예술적 성취-재현과 환영-를 강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전복하려는 이중적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의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사실주의의 투명성과 모더니즘의 반영성을 동시에 정당화한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한 재현이 지닌 이중적 정치성이다". 이 같은 후기현대미술의 특질을 보여주는 작가의 작품은 특별히 자기반영적 마스크라드에 의해 이중적 혹은 절충적 가치를 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한다.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이론 이후 상당수의 이론가들이 이 마스크와 연관된 논의를 개진해왔으며, 그들 중 이프랫 칠런은 마스크가 가리는 재현이라면 마스크라드는 '착용자(=예술가) 자신의 표명이며, 유쾌하고 과도하며 때로는 전복적이고 과장되며 캐리커처가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참과 거짓의 이중성, 환영과 반영의 양면성을 지각하게 하는 마스크라드는 작가의 작품의 핵심 내용을 지적해주는 가이드라인이다.

박종필_pangpang_캔버스에 유채_60×160cm_2011

2010년 말까지의 작품들을 살펴 보건대, 작가는 시선을 끌어당기는 매혹의 대상, 욕망에 손짓하는 대중적 이미지의 화려한 외형을 사용함으로서, 실재 vs 가상이란 표리부동한 이중적 현실을 전복적으로 가리켜왔다. 하지만 2011년부터 등장한 "장난감" 연작 (「팡팡」 연작)은 그런 양면성의 경계적 위치를 일탈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연작에 묘사된 장난감들-자동차, 비행기, 신호등, 키티, 펜돌이, 풍선, 유리구슬, 등-은 모두 인위적 조형물이다. 심지어 자연의 싱그러움을 내뿜으며 절정기 생명의 우월함을 발산하는 듯 보이는 각양각색의 꽃들도 짐짓 화려하기만 한 조화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본보다 매우 작게 축소된 허위실재인 장난감은 「팡팡」 연작에서 거대한 캔버스 화면 위에 확대됨으로서 실재에 육박하는 박진감을 갖는다. 우리는 새 연작에서 가상실재의 이와 같이 생기 넘치는 변화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 최근의 「팡팡」연작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에 그려진 자동차나 배, 비행기는 엊그제 소년이었던 작가를 한 없이 매혹시켰던 대상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어린 시절 욕망과 쾌감의 근원이다. 장난감 자동차의 판타스틱한 모양과 색 그리고 공중을 날아오르는 모습 등은 작가의 욕망의 순환이 지금 여기로 다시 솟구쳐 나왔음을 입증한다. 화면은 더 이상 강박적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고, 넓고 넉넉한 공간의 여유를 누린다. 이 공간 속에 작가는 자신의 상상을 자유롭게 풀어놓으며, 이리 저리 날아오르고 둥둥 떠다니는 매혹적인 사물들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불안한 심리보다 황홀한 경이감을 전달한다. 「팡팡」 연작은 작가 개인의 기억의 레미니상스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집단적 기억의 회귀이다. 여기에 재현된 이미지들은 우리 존재의 근거이자 시작이었던 어린 시절 의식의 투영으로서,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억압되어 상실되고 만 감성과 상상을 비추어준다.

박종필_between the fresh_캔버스에 유채_60×160cm_2011

작가는 이처럼 어릴 적 갖고 놀던 장남감과 욕망의 대상들을 묘사함으로서, 실재 위에 있는 혹은 그보다 앞선 기억의 초실재 hyper-reality 상황을 그려낸다. 초실재는 엄격히 말해 비실재이다. 하지만 이 초실재는 실재나 가상실재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해방된 지위을 갖는다. 마치 상상의 호사를 허용해주는 박물관 안에서 작가가 기억 속에 축적된 욕망의 대상들을 끌어 모아 세심하게 배열하는 일과도 같다. 혹은 앨범 안에 고이 간직된 기억의 이미지들을 끄집어내어 현실 공간 안으로 튕겨 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하튼 이 초실재의 힘이 작가의 조형적 상상력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최근 작품을 큰 폭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된다. 작가의 탁월한 하이퍼리얼리즘식 테크닉 구사도 초실재의 상상력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했다고 여겨진다. 구심점 없이 전면 균질의 공간으로 떠다니며 이동하는 사물들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던 앞선 정물 연작에 비해 크게 변화된 상태이다. 심지어 "팡팡"이란 의성어가 암시하듯 이미지는 무성의 시각기호가 아니라 화면 공간으로 날아오르며 터질듯 후련한 소리를 발하는 유성의 시각기호로 지각되기도 한다. ● 아마도 작가는 이 새 연작을 통해 감상자와 함께 기계화, 상품화된 후기산업사회의 틀을 벗어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실재와 가상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러한 기획이라면, 적어도 새 연작에서 작가는 감상자의 극적인 공감을 얻는데 성공할 수 있으리라 예상된다. 참과 거짓, 실재와 가상의 아이러니로 후기현대의 현실을 포용하면서, 이윽고 작가가 연출한 마스크라드로 온갖 기억의 부유물들을 비상하게 하여 그 밑에 숨겨진 원초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떠올린 화면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생동감을 선사하겠기 때문이다. 「팡팡」이란 환상의 카니발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가상이미지는 원상과의 시공간적 거리 만큼이나 증폭된 상상의 힘을 과시한다. 그런 작품 앞에서 우리 감상자는 참, 현실과 거짓, 인공의 이중 상황을 확인하며, 아이러니와 마스크라드의 반어법으로 생산된 더 없이 흥미로운 현실의 우의를 감상할 수 있다. ■ 서영희

Vol.20110711b | 박종필展 / PARKJONGPIL / 朴鍾弼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