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복展 / LEEYUNBOK / 李允馥 / sculpture   2011_0713 ▶︎ 2011_0728

이윤복_Flower_스테인레스 스틸_6×93×93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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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71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cafe.daum.net/gallerydam

투명한 덩어리, 강하면서 유연한… ● 이윤복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비정형의 형태와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가 스테인리스스틸이라는 점을 경이롭게 받아들였다. 스테인리스스틸은 조각에서 더 이상 새로운 재료가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익숙한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은 입방체인 까닭에 이 기이한 형태에 흥미와 관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의 작품에서 표면의 투명성은 재료가 지닌 강도(强度)를 잠시 잊어버리게 만든다. 사실 재료를 연마하여 거울처럼 빛을 내도록 만드는 것은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의 작품에서 특징적인 것이므로 이 또한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이윤복의 작품은 중력의 지배를 받으며 바닥 위에 바로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에 반사되는 이 거울효과 때문에 중량이 거의 제거된 투명한 풍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작품 앞에 서면 표면의 특이한 울퉁불퉁함으로 말미암아 반영된 대상은 그 굴곡을 따라 일그러지거나 함몰과 돌출을 반복한다. 그것은 분명 낯선 경험이고, 그의 제작방법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인이다. ● 그는 자신의 작품이 '만드는 과정을 통해 진화'한다고 믿는다. 물론 작품 자체가 진화할 리 만무하다. 그럼 그 진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는 밑그림(esquisse)이나 드로잉을 바탕으로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업의 과정에서 그 형태가 자기발생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진화'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윤복의 작품은 상당한 양의 금속판을 자르고 망치로 두드려 형태를 만든 후 용접하여 붙이는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교한 도면과 계산을 필요로 하는 공정의 결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작업하는 순간의 우연한 결정과 직관에 따라 형태를 만들어간다. 이 과정은 전개도에 따른 조립이라기보다 상황에 따른 선택의 결정이기 때문에 작품은 자기발생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 비정형의 형태는 이렇게 형성된다. 따라서 그가 만든 작품이 특정한 대상, 무엇보다도 인체를 연상시킨다고 하더라도 그것과는 상관없는 자율적인 형태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비록 그의 작업과정이 많은 노동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적 정신과 방법에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아니면 초현실주의보다 그것을 받아들인 추상표현주의와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윤복_Heart_스테인레스 스틸_5×6×17cm_2011

그러나 엄청난 노동의 양은 자동기술적인 방법이 지닌 해방의 자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닫힌 형태로 귀결되게 만든다. 비정형이지만 자기완결성이 강한 형태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노동에의 강박이 만들어낸 다소 억압된 덩어리이기 때문에 공간은 형태의 외곽선에 의해 엄격하게 차단된다. 만약 재료가 스테인리스스틸이 아니라면 이러한 차단은 형태를 답답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투명한 표면은 이 차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빗장이기도 하다. 작품 자체가 지닌 닫힌 공간이 외부공간을 흡수하고 있으나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표면에 충돌하는 빛은 정착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표면 위에서 어지러이 튕겨나가거나 미끄러진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지닌 폐쇄성을 해소하는 장치이자 또한 작품을 경직된 것으로부터 유연한 것으로 지각되도록 만드는 힘이며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강하면서 유연한 특징을 지닌다. 강하다는 것은 재료인 금속의 속성에 주목한 결과가 아니라 그 형태의 견고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유연하다는 것은 거울효과뿐만 아니라 그 형태의 비정형성이 지닌 불규칙성, 자유로운 상상을 유도하는 비균제성(asymmetry)으로부터 파생한다. ● 때로는 지구로 떨어진 운석이 되었다가 때로는 마법의 거울이 되기도 하는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투명한 덩어리이며, 노동의 승리를 알리는 증거이자 우리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그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경험이다. 언젠가 그의 작품 앞에 섰을 때 나는 내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 분해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은 적 있다. 만약 그의 작품이 마력을 지닌 것이라면 바로 이러한 자기상실을 유혹한다는 데 있지 않을까. 현실세계에서 나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비록 그것이 찰나에 일어나는 '지각의 착오'일지언정 이 마법의 공간 속으로 빨려 드는 것은 흥미진진한 모험임에 분명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실재와 가상을 매개하는 통로일지 모른다. 무거우면서도 금방 날아가 버릴 것처럼 가볍고, 견고하면서도 마치 투명한 젤라틴 덩어리처럼 부드러운 그의 작품은 모방을 거부하는 '이상한 나라'의 자기복제적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포분열을 하지만 동일한 형태로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그런 생명체. 그래서 나는 그가 말하는 진화란 말을 다른 방식으로 수긍한다. 그것은 형태의 진화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 최태만

이윤복_Man in Space_스테인레스 스틸_45×32×24cm_2011
이윤복_Body(Adam)_스테인레스 스틸_73×27×27cm_2010

영혼의 형상 ●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전염병으로 봉쇄된 뉴욕에 혼자 남아, 밤이 되면 좀비화된 주민들과 암투를 벌이는 의사의 이야기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아주 공포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이 황당무계한 영화에 전율이 흐르는 것은 주인공의 활극의 장면만은 아니다. 태평한 오후, 아무도 없는 점포 내에서 주인공이 살아있는 인형처럼 보이는 마네킹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이 있다. 그 마네킹은 지금에라도 당장 말을 할 것 같은 굉장히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을 닮은 모습이 왜 불안을 더욱 더 크게 만드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주인공은 갈 곳 없이 방황하는 것이다. ● 아마도 나는 그 부분에서 갑작스레 영혼의 문제에 직면했다. 이 정교한 인형에게(문득 피그말리온을 생각했다) 영혼이 들어가면 꽤 아름다운 여인일 텐데 하고 머리 속 한구석에서 엉뚱한 상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란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고는, 우리의 영혼은 우리에게 붙어서 거의 일체화(一体化)되어 있으며 얼굴이나 등처럼 직시할 수 없는 것인 것이다. 나무나 돌 같은 사물 안에 영혼이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혼을,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영혼을 찾아낼 것인가? 나는 이윤복의 작품에 영혼이 있는 듯이, 내겐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다.

이윤복_Body(EVE)_스테인레스 스틸_82×26×26cm_2010
이윤복_Standing Woman_스테인레스 스틸_60×22×22cm_2011

이윤복의 작품에 영혼이 담겨있는 듯한 조형을 본 것은, 실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몇 년 전, SOH(双)갤러리에서 유기적인 볼륨의 오브제를 금속판의 띠로 단단히 조인 것 같은 작품을 보았을 때, 왠지 봉인된 영혼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과 비교하면 근작에서는 영혼은 자립해, 더욱 더 확실하게 자신을 확립하고 있다. 그러나, 스테인리스의 판을 두들겨 공허를 내포한, 그 반짝반짝한 스테인리스 판은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노자가 말하는 "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有之以爲利、無之以爲用)"즉,"유(존재하는 것)가 도움이 되는 것은 무(공허)의 덕분이다"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런데, 영혼이 아무리 곁에 붙어 있다고 해서, 그렇게 간단하게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윤복은 말한다."작품은 정신과 육체의 한계의 경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몸의 아픔을 느끼면서 자고, 그리고 일어난다. … 나에게는 작업의 과정도 작품의 일부이다"라고(覚書). 자신의 분신 혹은 타자(他者)라고도 해야 할 작품과의 끝없는 대화와 갈등, 영혼은 이것들을 작가와 함께 하며, 작품 속에 무(공허)라는 요소로 작용한다. 작가에 의해서"우연"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은밀한 작업과정의 집적, 혹은 총체야말로 영혼의 궤적, 흔적 혹은 기척 그 자체이며, 마침내 작품은 "영혼의 은유"로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게 된다. ● 이윤복의 스테인리스를 굴곡시킨 경면(鏡面)과 같이 갈고 닦은 작업은 모두 기묘하게 인간적이다. 우리가 거기에 우리의 영혼이 비추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 모토에 쿠니오(本江邦夫)

이윤복_공간에서 연속성의 독특한 양식 Unique Forms of Continuity in Space_스테인레스 스틸_61×25×25cm_2011

새로운 세기, 21세기도 수년이 지나고, 20세기의 현대미술도 새로운 표현을 모색하면서, 지금과 같은 혼란한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순간 빠른 속도로 정보가 세계에 전달되는 가운데, 새로운 표현을 추구하는 일이 어딘가 무의미함을 느끼게 한다. 목적이 다르다고는 해도 고대로부터의 조형, 창조성, 만든다는 것에서 인간이 멀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라스코의 동굴벽화, 문명이 남기고 간 흔적 등,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조 형물은 지금도 존재하며, 조용한 빛을 발하고 있다. 테크놀로지가 우선시되는 지금의 시대가, 실체가 없는 것, 허상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지.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선례적인 예술은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향하여 땀을 흘리고, 만든다고 하는 본능적인 일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생각할 수 있고 만든다는 일, 조형이라고 불리는 행위를 원점으로 돌리고,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나의 작품이다. 작품은 과정을 통해 진화한다. 작품은 최초의 드로잉으로부터 작업과정을 통해 완성되기까지 수 없는 수정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작업의 특징은 비결정성에 있다. 정해져 있는 것은 몸을 사용해 생각하는 일이다. 몸과 머리가 움직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들어나는 것이 없다. 평면의 스테인리스 판을 입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작품은 단순한 형태로 보여지지만 작업의 과정 속에는 강박적인 노동과 사유의 시간이 담겨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노동의 과정 즉, 스테인리스 판을 망치로 두들겨 상처를 내고 자르고, 갈아내고, 용접을 통해 붙이고, 다시금 갈아내는 일련의 과정 중에 노동의 흔적은 사라진다는 점이다. 노동의 과정이 곧 치유의 과정이 되는 셈이다. 이음새가 없는 유기적인 덩어리로 보여지는 작품은 노동의 시간을 건너온 것이며, 영혼을 치유의 강에서 씻겨낸 것이다. ■ 이윤복

Vol.20110713e | 이윤복展 / LEEYUNBOK / 李允馥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