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 바빌론 Neo_Babylon

안수영展 / AANSUYOUNG / 安壽永 / photography   2011_0719 ▶ 2011_0729

안수영_경기도 김포시_디지털 C프린트_76×97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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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719_화요일_05:00pm

후원 / 한국예탁결제원

관람시간 / 09:00am~07:00pm

KSD 문화갤러리 KSD CULTURE GALLERY 서울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4길 23 한국예탁결제원 1층 Tel. +82.31.900.7449 gallery.ksd.or.kr

재현(再現)과 현시(顯示)사이 ●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화두로 대두대고 있는 단어는 친환경이다. 우리가 섭취하는 먹거리의 경우는 친환경 재배니 친환경 농산물이니 하는 말이 붙어있는 제품의 경우 일반 식품에 비해 높은 가격이 매겨져 있어 친환경이라는 단어의 프리미엄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 건축물도 역시 이러한 트랜드에서 비껴가지 않는다. 친환경 건축물이라는 말로 포장된 건축물들이 이젠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 건축물은 애초에 친환경과는 거리가 먼 단어이다. 아니 오히려 非자연, 非인간적인 단어이다. 건축을 뜻하는 한자 '建築'은 땅을 두드리고 세운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인공적인 힘을 가해 변형을 시킨다는 말이다. 또한 건축을 뜻하는 영어 'Architecture' 는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archi'에서 나온 말이다. 결국 동양이나 서양이나 건축이라는 단어는 자연을 통제하고 인간을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유래한다고 하겠다. 이를 지식인들이 곱게 볼 리 만무하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서 건축의 신인 헤파이토스는 인간 세상을 어지럽힌 단초를 제공한 판도라를 만들었다고 씌여졌고, 이집트 신화에서 건축의 신인 이모텝(Imhotap)은 그 명성과는 다르게 '미이라(Mummy)'라는 영화에서는 악인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 것이리라. ● 사실 건축과 환경파괴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친환경 건축자재를 사용하여 건축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을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친환경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더욱이 그러한 건축물이 철거될 때 생길 분진이며 엄청난 폐기물들을 고려한다면 친환경 건축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모순적 조어(造語)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안수영_경상남도 함양군_디지털 C프린트_102×129cm_2011

고대 바빌론은 아무르인이 이곳을 기점으로 국가를 세운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특히 함무라비왕 때에는 번영의 상징이었다. 아시리아에 의해 바빌론이 점령당했을 때에도 아시리아 제국의 남부 요충지 역할을 하였고, 칼데아 왕조 신바빌로니아 시대에는 명실상부한 세계의 중심의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바빌론은 주위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에 의해 주인이 자주 바뀌었지만, 번영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 관련 유적을 통해 웅장한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공중 정원, 유적은 비록 발견되지 않았지만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어 인류 최초의 마천루 프로젝트로 평가받는 바벨탑 등이 대표적인 바빌론의 건축물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대규모 건축물은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어야 했다. 바빌론은 '바빌론 유수'라 칭해지는 유대인 강제 이주자를 필두로 근동 이웃 국가에서 끌려온 강제 이주민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온 슬픔과 그리움을 바빌론 강물에 흘려 보내고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다. 바빌론은 외형적으로는 비록 인류의 문명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라 할 수 있으나, 실상은 그 역사에 동원된 인간들에게는 참혹과 슬픔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 왜 바빌론을 점령한 세력들은 이처럼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바빌론에 건축물을 세우려고 했을까? 바로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자신들의 문명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건축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대규모 건축물을 바빌론에 건설하였다.

안수영_충청남도 태안군_디지털 C프린트_102×129cm_2011

사진은 본질적으로 기록이라는 행위가 전제되는 예술이다.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는, 기록을 하고 향유를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예술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아니, 사진에 의한 기록과 복제는 그 대상에 대한 재현을 일반화시켜 오히려 예술적 유일성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던 카보우르 백작 사진 재판, 사진의 발견 초기에 사용되던 연초점 효과 등은 사진의 재현성이 전통적 예술이 갖는 특징과는 다른, 기술 내지 기교에 보다 친연성이 높다는 것을 사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인지한 결과로 발생한 사건이라 하겠다. 사진이 피사체를 재현한다는 점은 사진이 사실주의와 근대주의에 바탕을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주의와 근대주의의 미덕인 정직성, 객관성, 합리성 등을 사진이 이미 태생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안수영_충청북도 제천시_디지털 C프린트_132×157cm_2007

안수영 작가의 이번 『네오 바빌론』 전시회는 문명의 본질에 대한 고민과 사진의 예술성에 대한 자기반성의 결과물이다. ● 그는 작품에 건축물을 담고 있다. 건축물은 앞서 밝힌 바 대로 인류가 고안해 낸 것들 중에 가장 비자연적이고 비인간적인 인공물이다. 그러나, 건축물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건축물은 인간의 생존 요건인 衣•食•住를 이루는 한 가지 필수 조건이다. 건축물이 비록 자체의 속성이 아무리 비인간적이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건축물에 필연적 합리성을 부여한다. 사진의 예술 철학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는 발터 벤야민 조차도 "건축의 역사는 다른 어떤 예술의 역사보다 오래되었고, 살아 있는 생생한 힘이라는 건축의 자기주장은 대중과 예술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에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며 건축이 지니는 예술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 안수영은 건축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합리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가 건축물과 인간에 대한 관계에 대해 고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 그의 이전 전시인 『다큐먼트』에서는 과거의 건축물인 사진관-비록 사진관이 건축물 이상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긴 하지만, 이 역시 건축물이다-을 대상으로 하여 현대의 시간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드러냈고, 이후 작품전인 [眩/迷/景]에서도 이런 시도를 꾸준히 지속하였다. 『다큐먼트』에서나 『현/미/경』의 피사체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당시 우리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과거의 피사체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다큐먼트』), 현대에 세워진 건축물이라도 사실은 과거 문화적 관습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현/미/경』). ● 이전 전시 작품들은 사회적 가치를 가진 피사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으며, 만약 시간의 치환이 일어나면 이들의 사회적 내지 예술적 가치가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는 사진이 가지는 재현성의 특징을 피사체에 투영하여 재현된 피사체가 시간성이라는 판단 기준이 개입될 때 어떤 예술적 성취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시도였다면 이번 전시회는 전혀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안수영_강원도 평창군_디지털 C프린트_132×157cm_2007

이번 전시 작품에서는 시간을 찾아 볼 수 없다. 시간이 없고 단지 장소만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에서 보이는 풍경이 이질적이지 않다. 작품의 피사체가 되는 건축물(혹은 건축행위)들은 1970년대이라고 하든, 1980년대이라고 하든, 아니면 바로 오늘인 2011년이라고 하든,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차이가 없다. 이 점에서 이전 그의 작품에서 시도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 이번 작품이 시간성을 배제한 시공간의 초월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브레송의 작품 세계와 일맥상통한다. 브레송의 작품은 '결정적 순간'으로 대표되듯이 연속된 시간 속에서 결정적 재현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네오바빌론』도 시간을 초월하려는 자세를 취한다는 점에서 브레송과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안수영은 브레송과 다른 입장을 취한다. 브레송이 연속된 시간 속에서 한 순간의 피사체에 초점을 맞췄다면, 안수영은 애초에 시간을 거세한 상태로 피사체에 접근한다. 시간성을 제거함으로써 시간 속에서 피사체가 갖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피사체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세는 엘리아데의 방법론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엘리아데의 방법에 의지하고 있지도 않다. 안수영은 엘리아데와는 다르게 피사체의 신성성을 부정한다.

안수영_경기도 안성시_디지털 C프린트_102×129cm_2010

그동안 안수영은 '이야기하기'방식을 통해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의 이미지에서 텍스트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미지와 이미지 안의 텍스트를 병치시켜 최대한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텍스트는 없이 이미지만 오롯이 존재한다. 텍스트를 통한 어떠한 설명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동안 그의 작품에서 사용하였던 '이야기하기'방식에서는 시간성이 중요한 요소이다.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술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세한 이야기는 더 이상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가 없는 안수영의 작품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사실 재현만이 남아 버렸다. 이제 그는 사진의 본질적 기능인 기록에 집중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에게는 사진의 사실성, 정직성, 객관성, 합리성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사진의 기록성 위에 구축하고 있다. 작품에서는 비록 시간성이 배제되고 장소만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는 역사의 시간이 곧 탈(脫)역사의 시간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역사란 그 당시의 특정된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인 인간이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언제든지 계속 반복될 수 있는 무한 회귀성의 성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진의 본질 역시 기록이지만, 시간성이 제거 되어도 언제든지 피사체의 '원형'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작품에서 보여준다. ● 안수영은 피사체의 '원형'을 찾기 위한 목적만을 위해 이번 작품에서 시간을 거세한 것이 아니다. 그의 탈시간성에 대한 시도는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존재의 의미를 최대한 배격하여 그 자체가 갖는 실존적 가치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는 어떤 사물에 대한 평가는 그 사물의 원형이 가지고 있는 '신성성'도 아니고, 인간의'필요성'에 따른 것도 아닌, 사물 자체의 실존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그의 작품에서 시간성을 거세한 것이다.

안수영_경기도 김포시_디지털 C프린트_102×129cm_2009

안수영에게 바빌론이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특정 지어진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바빌론은 과거의 한 번영한 장소를 뜻하는 추억의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문명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갖고 있는 이상 언제든지 우리 역사에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또 다른 문명을 건설하다는 것은 새로운 바빌론을 세우는 것과 동일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바빌론의 완성을 보게 된다면 과거의 그 때와 마찬가지로 건축물을 통해서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이제 안수영은 인류 문명의 번영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번영이란 과연 무엇이냐고. 번영의 상징물이 건축물이고, 건축물이 非자연적, 非인간적 본질을 지니고 있다면 결국 번영이란 비자연적, 비인간적이란 말과 동일어가 될 수 있지 않냐고. ● 그렇다고, 안수영은 문명의 상징인 건축물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역시 인간은 기본적으로 문명을 의지하여 발전해 왔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건축물은 살아있는 인간뿐 만 아니라 죽은 인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에포케(epoché) 자세로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인간-건축-문명, 자연-인간-건축-문명으로 순환되는 현실을 재현하고, 앞으로 다시 반복될 자연-인간-건축-문명에 대한 전망을 현시(顯示)함으로써 우리의 미래에 대해 우리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 김준범

Vol.20110719d | 안수영展 / AANSUYOUNG / 安壽永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