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각세포 synesthesia cell

김민곤展 / KIMMINGON / 金珉坤 / photography   2011_0726 ▶ 2011_0814 / 월요일 휴관

김민곤_synesthesia cell #01_디지털 프린트_84.1×59.4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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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726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월요일 휴관

류가헌 ryugaheon 서울 종로구 통의동 7-10번지 Tel. +82.2.720.2010 www.ryugaheon.com blog.naver.com/noongamgo

감각의 경계 넘나드는 '시각적 조각' ● 무늰가 하면 얼룩 같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이물감으로 부풀었는가 하면, 지극히 짜임새 있는 구조물의 형상으로 축조되어있기도 하다. 언뜻 보면 불가시적인 상상 세계를 디지털기술로 가시화한 것만 같은 이 일련의 사진들은, '낯선' 이미지 그 자체로 우리의 감각계에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synesthesia cell'. 공감각세포라는 뜻의 제목 또한 불가해하기는 마찬가지다. 하나의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인 공감각은, 세포로서 규정되어 있지 않다. 감각세포란 용어는 있어도 공감각세포란 단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으로 감각체계를 넘나드는 이 비주얼들이, 세상에는 없고 본 적도 없는 '바로 그' 공감각세포일 것만 같다. 각각의 사진 타이틀에 적힌 박희경, 이재효, 장용선, 김운용 作이라는 조각가들의 이름을 보고나서야, 이 사진들이 우리나라 현대미술작가들의 조각품들을 피사체로 한 사진임을 눈치 챌 수 있게 된다.

김민곤_synesthesia cell #02_디지털 프린트_59.4×84.1cm_2011

사진가 김민곤의 시선에 의해 조각작품에서 피사체로, 입체에서 평면의 사진으로 재단된 대상들은 더 넓고(좁아도 좋다) 더 다양한 의미로 변용, 혹은 확장됨으로써 '시각적 조각'이라는 감탄의 수식을 얻는다. 김민곤은 월간 『미술세계』에 몸담았던 1993년 이래로 지금까지 19년간을 미술현장에서 보낸 사진가다. 그 '현장'에서 화가와 조각가들이 붓과 조각도를 들 때 그는 카메라를 들고, 작가와 작가들의 작업, 작업실과 그들이 쓰는 재료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러는 사이 미술세계에 새롭게 등장한 신인작가들의 성장기를 보기도 했고, 오랜 세월 변치 않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해가는 원로작가들의 뚝심도 곁에서 지켰다. 사진가 자신도 이십대 청년에서 사십대 중견이 되었다. 오늘날, 자신이 한 작업의 이미지는 반드시 사진가 김민곤이 찍어야 작업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라고 믿으며 그와 함께 하기를 고집하는 미술계의 작가들, 또 오랜 세월 미술현장에서 동고동락하며 그를 현장 사진가로 사랑하고 추종하게 된 이들은 스스로를 '김민곤주의자'라고 부를 정도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관통하며 미술현장에서 작가들의 작업물들을 사진으로 재창조하며 '시각적 조각'이라는 독자적인 사진세계를 구축해 온 김민곤이, 처음으로 그 긴 노정의 결과물을 전시한다. 7월 26일부터 사진위주 류가헌에서 열리는 김민곤 사진전 『synesthesia cell_공감각세포』가 그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이 김민곤의 뷰파인더 안에서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듯이,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내일도 그의 카메라를 거쳐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 틀림없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연대기의 의미 있는 한 지점인 셈이다. 조각가와 그들의 작품을 찍은 'Artists & Works' 사진들도 함께 전시되니, 개별적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이는 '미술계 잔치'도 될 예정이다. ■

김민곤_synesthesia cell #03_디지털 프린트_59.4×84.1cm_2011

그는 말의 뿌리처럼, 발의 뿌리를 넓힌 사람이다 ● 그는 말의 뿌리처럼 발의 뿌리를 넓힌 사람이다. 나는 그가 그의 집에서 온전히 쉼을 내려놓은 것을 본적이 없다. 그의 집은 그와 연결된 모든 작가들의 작업실이었고, 그의 작업실은 4륜구동의 힘을 주인에게 바친 싼타페였다. 그는 한순간도 작가들의 삶으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다. 마치 벌처럼 이 꽃과 저 꽃을 잇는 '이음 길'의 존재 즉 네트워커라 할 수 있다. 아, 그러나 참 쉽지 않다. 그의 집요할 정도의 촬영에 대한 편집증은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엘 가든 그와 취재가 있는 날은 서둘러 인터뷰를 마쳐야 했다. 이것은 불문율의 법이다. 열의 이할이 자료수집과 인터뷰라면 인물과 작품촬영은 열의 팔할이거나 구할이다. 때때로 그는 열의 열 이상을 촬영에 매진한다. 숨고르기와 현장 분위기 조성은 필수다. 한참을 배회하고 뜸을 들인 뒤에야 조명을 맞추고 그런 다음에도 그는 작품을 렌즈에 넣지 않는다. 피사체에 대한 지독할 정도의 지켜보기를 통해 모종의 '교감'이 발생할 때까지 그는 인내하는 것이다. 촬영이 시작되면 그의 근처에 서 있는 것만으로 숨이 막힌다.

김민곤_synesthesia cell #04_디지털 프린트_59.4×84.1cm_2011
김민곤_synesthesia cell #05_디지털 프린트_59.4×84.1cm_2011

그의 촬영에는 두 가지가 엉켜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위해 촬영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의뢰받는 자다. 그런데 가만히 그를 보면 그는 '의뢰받은 자'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다. 그것들이 엉켜서 발산하는 기묘한 에너지는 그가 오직 '그'로 존재한다는 것의 어떤 역설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그의 시선으로 그의 사진을 박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 이 현상을 우린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와 더불어 현장에 있었던 이는 동의하게 될 것이다. 그의 사진은 그의 혼이라는 것을. 설령 모든 사진들이 청탁에 의해 이뤄졌던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전시장에서 작업실에서 그 모든 현장에서 촬영된 작가와 작품들의 '얼굴'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김민곤'이라는 그의 얼굴이다. 나는 그 얼굴이 그의 사진을 이토록 빛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또한 그 '빛남'은 모든 작가들의 것이며, 작품의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민곤_박승모와 그의 작품들_디지털 프린트_29.7×42cm_2011
김민곤_김원용과 그의 작품_디지털 프린트_29.7×42cm_2011

그의 존재는 김달진 선생의 경우처럼 한국현대미술계의 중요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그의 사진 아카이브는 1990년대 이후 한국미술계의 얼개를 구성할 정도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작가와 작업실에 대한 기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터. 나는 그의 이런 작업의 성과가 지속되어야 하고 동시에 때때로 미술사와 비평계를 위해 정리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러기 위해선 그와 함께 할 연구자들의 연구와 협업이 필요하다. 그가 있어 감사하다. 그가 있어 놀랍고 따듯하다. ■ 김종길

Vol.20110726d | 김민곤展 / KIMMINGON / 金珉坤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