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Evanescing, In-evanescing

이진주展 / LEEJINJU / 李珍珠 / painting   2011_0811 ▶ 2011_0911 / 월요일 휴관

이진주_불완전한 기억의 섬_천에 채색_107×27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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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811_목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 / 2011_081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현대_16번지 GALLERY HYUNDAI 16 BUNGEE 서울 종로구 사간동 16번지 Tel. +82.2.722.3503 www.16bungee.com

그러면 아주 오래 전 기억이 떠오른다. ● 기억은 뒤틀리고 뒤죽박죽 불안정하다. 작가는 아이를 유모차에 앉혀서 서울 근교 도회지를 걷는다. 그러면 아주 오래 전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매우 어린 시절부터 위협적인 세계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 세계는 나를 압도해버렸다.(미셀 푸코)" ● 오랫동안 이진주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끔찍한 기억을 깊은 망각의 세계로 밀어 넣었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기르며 작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망각했던 체험과 기억을 다시 불러내야 한다고 느꼈다. 살아가는 힘으로서 기억을 되살리고 의식의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화해하고 미래의 삶을 통합하고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무지막지하게 현재를 과거로 밀어버리며 망각을 미래로 키운다. 그럼에도 삶은 망각의 힘을 견디는 것이고 또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삶의 힘이고 거기에서 기억은 형식이 된다. ● 더위로 가라앉는 계절, 공터에서 말을 금지 당한 소녀가 낯선 이에게 이끌려 걷는다. 함께 놀던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낯선 이와 보낸 하루 반나절의 불안과 고립은 작가가 오래도록 앓게 되는 마른 시간이 되었다. 일간지 사회란을 매일매일 채워나가는 사건들, 공포들. 한국 사회를 살아내는 소녀들, 여인들은 자신의 말과 기억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이진주_어제의 거짓말_천에 채색_150×300cm_2011
이진주_921번_천에 채색_120×90cm_2011

'베를린의 어린시절'에서 발터 벤야민은 분명치 않은 어린 기억으로 시작한다. "어젯밤 꿈에 유령이 나온 것이다. 유령이 바삐 움직이고 있던 장소는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내가 잘 알고 있는 장소와 비슷했다." ● 오랜 시간을 보낸 삶의 거주지가 갑자기 막막한 꿈처럼 생경하다. 사람들은 사라지고 사물들만이 제자리를 맴돈다. 여인은 물을 주고 머리를 감고 아이를 낳고 젓을 먹이며 동네를 산보한다. 도시의 삶이 거주이되 거주가 아닌 흔들리는 기억처럼 의식이 갑자기 자기의 형태를 갖고 성장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사람들의 삶이 도시의 삶과 통합되면서 정주하지 못한 채 도시의 안과 밖, 도시의 경계를 이리저리 회전하며 흐른다. 기억 속의 도시란 언제나 끊임없이 무언가가 거친 욕망으로 온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부서지고 만들어지는 공사장과 느리지만 영원히 성장하는 성장기 아이들의 놀이터 사이를 왕복한다. ● '성의 역사' 서문에서 푸코는 글을 쓰는 동기를 아주 집요하게 반복되는 존재의 고통에 자비를 베푸는 것은 호기심이라고 말한다. 이 호기심은 무언가 대상을 인식하고 소화해내며 탐구하는 종류의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호기이다. 호기심은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의 욕망이다.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힘이다. 애매모호한 기억은 현실을 견디기 어렵게 한다. 시적 이미지만이 그것이 있음을 드러낸다. ● 이진주의 이미지들은 이러한 삶의 경험들, 감정들,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미지들의 분위기는 고독하고 불안하다. 작가의 삶은 어쩌면 사유와 감정의 공사판을 지키는 일일노무자와 비슷하다.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표현과 노동. 새로운 기대와 지루한 반복을 내일이라도 당장 그만둘 수 있는 삶. 기억을 모으고 분류하고 다시 흩트리는 과정은 작가의 자기 의 상투성과 고유성 사이의 긴장을 만들고 내면화 한다.

이진주_침묵의 물_천에 채색_72×90cm_2011
이진주_최후의 겨울_천에 채색_148×110cm_2011

물을 주는 행위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무언가 빈자리를 채우는 행위이지만 그것은 비어있음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단절되고 분명하지 않은 또는 백색으로 비어있는 경험과 감정의 이미지들을 키우는 행위가 된다. 상처가 벌어져 피가 배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김치를 옆으로 치우고 흙을 만지는 여인은 잃어버린 기억의 회복과 이미지의 보편적인 치유를 향한다. 마치 일상의 가사에서 벗어나 존재가 가감 없이 드러나는 놀이터의 아이들처럼. 흙을 만지는 행위는 반복해서 되돌아가는 시절이고 거기엔 끔찍하게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했다. ● 사람들은 언어로 회귀한다. 모든 일상의 경험과 기억을 온전히 그려낼 수 있다고 믿기에, 이상적인 대화와 완전한 이해를 향하는 것은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다. 이상적인 대화는 처음부터 종결이라고. 왜냐하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의 근거로 되돌아가는 일은 결국 이러한 일을 미완의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진주_공기로 만든_천에 채색_53×110cm_2011

그러므로 어떤 작가에게 창작의 기원이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는 비극의 장소이다. 그런 식으로 시작도 끝도 아닌 미완의 상태에서 좌절하고 다시 일어선다. 작가는 무언가를 새롭게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해온 것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이야기하는 반복된 삶을. 이러한 일상은 평범한 현실과는 하등 상관없는 특별한 접촉이며 다른 일상이다. ● 작가에게나 다른 누구에게나 일상은 대단히 상투적인 장소이다. 이 장소는 무의미한 경험과 담론을 반복하게 한다. 작가는 반복되는 일상들 사이에서 다른 일상을 생각한다. 일상을 기억하고 불신하고 폐기하고, 다시 키우고 재배한다. 일상은 단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작가에게 일상은 팬티스타킹 하나만을 단단히 걸친 채 강제로 사유를 제거당한 민둥머리의 여인들이 현실을 꼭꼭 채워나가는 비극의 모티브이다. 존재는 언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기억해내야 하고 이미지가 되어야 하고 허상이 아닌 작가의 삶 전면에 현실로서 나타나야 한다. ■ 김노암

Vol.20110811f | 이진주展 / LEEJINJU / 李珍珠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