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죽은 자들_묶인 사이 Half Dead Things_The Tracing Rope

이해민선展 / LEEHAIMINSUN / 이해旼宣 / painting   2011_0813 ▶ 2011_0911 / 월요일,명절 휴관

이해민선_그렇고 그런 사이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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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민선 블로그_blog.naver.com/moolbaab

초대일시 / 2011_0813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주말,공휴일_11:00am~08:00pm / 월요일,명절 휴관

닥터박 갤러리 Dr.PARK GALLERY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19-1번지 Tel. +82.31.775.5602 www.drparkart.com

사물들의 정점(頂點) ● 기술이 의지의 연장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맥루한(Marshal McLuhan)이 말한 것처럼 기술의 역사는 곧 인간의 의지의 역사이며 도구는 의지에 의한 신체의 연장(extension)이라는 명제를 가리킨다. 두 번째는, 기술 혹은 기계는 물리적 대상이나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을 점유하고자 하는 의지의 연장이다. 동일한 의지의 실현이 반복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앞의 이 두 가지 명제는 세계에 대응하며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 끊임없이 획득하고자 하는 기술과 기계적 속성을 요약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 먼저, 의지의 연장이란 팔이나 손이 몸에서 튀어나오게 된 물리적 진화의 단계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눈이나 뇌, 털은 모두 피부가 진화한 결과라고 한다. 여기서 의지는 주체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의 대응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관철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환경이나 세계에 대한 주체의 욕망이 비록 오랜 시간에 걸쳐서이지만 진화를 통해 성취되어 왔다는 것은 스스로 세계가 제시하는 조건들에 맞는 신체를 만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팔, 다리, 손이 세계의 물리적 현전 즉, 딱딱함-부드러움, 가벼움-무거움, 위-아래, 물이나 공기의 저항, 개별적 사물들의 크기나 모양 등에 대한 대응의 욕망을 가리키는 것인 반면, 눈은 광선의 존재에 대해, 뇌와 신경은 세계의 복잡성과 움직임, 공격성에 대해, 털은 온도의 차이와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 대해 대응하면서 피부를 변형시켜 왔다. 한때는 윤곽이나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 장치로 변용된 것이다. 도구는 이러한 자가-변형의 힘과 속도가 한계점을 넘어서는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도구는 신체의 연장을 대체한다. 두들기거나 자르거나 던지거나 묶는 따위의 행위들은 신체가 담당할 수 있는 '욕망의 한계치'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해민선_앉아서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1
이해민선_앉아서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11

두 번째 의지의 연장으로서의 기술은 하이데거의 '테크네' 혹은 들뢰즈의 '기계' 등을 떠올린다. 언어는 부재하는 것을 호출하는 탁월한 '기술'이며, 기계는 도구에 '반복'을 접합시킨 것이다. 언어는 시간 속에서 욕망이 동일하게 반복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기계다. 반복은 '동일성(sameness)의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반복을 통해서만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가시적인 것, 예측과 파악이 가능한 것, 언어화할 수 있는 것 나아가 점유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기계는 반복을 생산함과 동시에 세계에 대한 소유의 의지를 생산한다. 기계는 물리적인 조합 뿐 아니라 관계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언어 뿐 아니라 가족이나 공동체, 제식, 의례, 종교 등을 포함한 모든 관습이나 제도들은 반복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기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투, 눈짓, 차림새 등에 숨어있는 기계들을 추출해 낼 수 있는 것처럼 가족적 위계, 정치적 수사, 자본주의적 가치체계들 안에서도 역시 기계들을 추출한다. 여기서 욕망의 한계치는 신체와 세계와의 관계가 아닌 주체와 세계의 이미지 사이의 관계로부터 파생한다. 나에게 세계는 무엇인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것인가? 등등. 일반적으로 세계의 이미지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의 범위 내에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이 한계치를 넘어서는 것은 탈-의미화 된 세계를 다루는 것인 동시에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대상들을 조작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 이해민선은 2001년부터 '도면-드로잉'을 다양한 변주를 통해 보여주어 왔다. 여기서 '도면-드로잉'이란 건축 도면, 설계도, 기호 등을 인용하여 그것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파트, 상가, 갤러리 등의 평면도는 전형적인 굵고 가는 단속적인 선들과 빈 공간들, 창호나 출입구를 의미하는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어 축소할 경우 마치 기판의 회로나 금속장치의 불규칙적인 이음매를 연상시킨다. 이해민선은 유사(similarity) 혹은 연상(association)에 의거해 드로잉들을 매우 높은 위치에서 바라본 도시의 단면처럼 다루고 있다. 그것은 흡사 유기체의 표피나 껍질이 벗겨나 드러난 내부의 조직처럼 보인다. 「덜 죽은 자들 Half Dead Things」이라는 제목을 지닌 이 연작에서 도시는 이빨을 드러낸 피라니아와 같은 괴물들의 몸체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하고 당나귀나 강아지와 같은 동물들의 골격이나 움직임을 가리키는 간결한 기호들의 집합체가 되기도 한다. 이런 평면적인 조합은 초기의 컴퓨터 통신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스키(ASCII) 기호를 이용한 문자 드로잉을 떠올린다. 아스키 드로잉이 선형적인 단일 문자열 대신 수많은 문자열을 통합적으로 활용한 그래픽 이미지를 통해 문장에서 이미지로 도약했다면, 이해민선의 초기 드로잉은 기술적 교환의 기호인 개개의 도면들을 좀 더 깊은 심리적 일탈의 단위들로 전환하고 있다. '덜 죽은 자들'이라는 다소 시니컬한 제목은 작가에 따르면 실험실의 쥐들처럼 살아있지만 오직 죽음의 과정에만 놓이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경계가 성립되지 않는 이 대상들의 생명은 그것들을 유지시키는 장치와 기계들에 의존할 뿐이다. '덜 죽은 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의존'(dependence)의 형식을 띠는 삶을 가리킨다. 자연 상태의 생태계가 거대한 먹이사슬이라는 의존적 구조를 나타내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엄청나게 가속화된 인공적 상호의존 체계를 가리킨다. 거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상호의존의 구조는 수없이 많은 반복의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거대한 기계이다. ● 기계는 곧 로봇 즉, 인물화(portrait)의 형태를 띠게 된다. 「임대공간 변이체」는 수없이 많은 셀(cell) 단위의 아파트와 임대주택들의 도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무수히 작은 셀들은 모여서 간담이나 에반게리온에서처럼 거대한 로봇이 된다. 이 로봇들은 단지 다양한 기능을 지닌 공간들을 연결해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배치와 연결을 통해 더 새롭고 흥미롭게 진화하는 상품들이기도 하다. 이 집-로봇들은 손으로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린 평범한 인물들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흐릿하게 뭉개진 이 얼굴들은 정확히 자신의 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이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인물들 역시 로봇이 된 자신의 신체에 의존하는 것 외에는 다른 삶의 방식을 취할 수 없는 존재들로 제시되어 있다. 작가는 '정체성이란 무엇이 어떻게 접합되고 작동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라고 말한다. 이해민선의 많은 작품들이 인물화로 분류된다. 사물들을 그릴 때조차 그것은 어떤 고립된 존재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가 그리는 대상들은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중간적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거의 모든 이항적 관계들의 중간에 걸쳐져 있다. 삶-죽음, 생체-기계, 개인-익명, 유용한 것-무용한 것, 강력함-무력함, 공격성-수동성, 아름다움-추함, 실제-가상, 유혹-혐오감, 평면-입면, 진짜-가짜 등등... 이 이항식(binomial)들은 단순한 대립항이 아니라 어중간한 상호의존적 조건들을 나타낸다. 예컨대, '덜 죽은', '좀 더 살아있는', '덜 잊혀진', '좀 더 쓸모없는', '덜 알려진', '조금 공격적인', '아주 추하지는 않은', '완벽하게 실제는 아닌', '약간 혐오스러운', '덜 진짜인', 등등의 것들이다. 이것들이 존재하는 장소들은 언제든지 부분이나 전체가 다른 것들로 대체될 수 있는 (inter-changeable) 영역이자 동시에 개체의 완결성(integrity)을 보장하지 않는 텅 빈 공간들이다.

이해민선_수돗물 과_종이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11
이해민선_대기압 과_종이에 아크릴채색_91×334cm_2011

2008년의 「A Scene Package」연작에는 풍경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아크릴 화에는 수족관 한 박스를 설치하는데 필요한 도구들이 열거되어 있다. 먹이 급여기, 물 배급 호스, 역류 방지기, 공기 분배기, 여과기, 산소 발생기, 모형바위 등의 수족관 악세사리들을 묘사하고 있는 이 그림들은 마치 동양의 산수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건을 팔기 위한 카탈로그의 도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풍경화'에는 물이나 물고기가 나오지 않는다. 여기 그려진 모든 것은 일종의 기술적 정보 혹은 조건들이다. 무엇을 위한 것들인가? 여기에 없는 어떤 것의 이미지를 위한 것이다. 수족관은 물고기에게는 삶의 영역이지만 기능은 전적으로 장식을 위한 장치일 뿐이다. 보다 나은 환경을 위한 부품들은 보다 흥미로운 이미지를 위한 조건들일 뿐이다. 덜 생동감이 넘치거나 덜 아름답지 않은,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거나 독립적이지 않은 어떤 것을 위한 장치들이 이 그림들 속에 펼쳐져 있다. 빠져 있는 것은 그 안에 들어갈 어떤 존재로서, 아직 조립과 배치를 마치지 않은 미래의 어떤 공간에서 이미 결정된 삶을 살아가야 할 대상인 것이다. 때문에 이 풍경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전적으로 이미지에 불과한 존재에 대한 포트레이트에 가까워지고 있다. 작가가 정물에 가까운 이 그림들을 풍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안에 들어가야 할 존재가 물고기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형바위들은 거대한 산처럼 보이며, 그 안에는 수초나 나무를 닮은 플라스틱 모형들이 놓여있다. 그것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대적 삶의 조건들과 중첩된다. 우리들 역시 동일한 모듈의 부품들로 이루어진 패키지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바라보는 것은 누구인가? 풍경이라는 부제는 우리가 들어가기에 충분히 커다란 공간을 암시한다. 물고기가 대부분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의 시선에 의존하여 존재를 유지하듯, 관객들 역시 부재하는 누군가의 의지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그것은 자본, 권력, 이념 혹은 신(神)일 수도 있으며,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기술, 다시 말해 의미화의 기술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 이해민선의 가장 최근 작업인 「직립식물」 연작은 텅 빈 황량한 풍경 안에 '웅크리고 있는' 사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 사물들은 각목, 끈, 파이프, 검거나 흰 비닐조각, 잡초나 나뭇가지 따위들로, 서로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측할 수 없다'는 표현은 이 사물들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무작위적으로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사물들은 대부분 '끈'에 의해 서로 묶여있다. 작가의 지적처럼, 사물들이 묶이는 방식은 접착제와 같은 화학적 연결이나 못, 볼트 따위의 물리적 관통에 의한 결착이 아닌, 최대한 대상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묶여 있다'는 사실은 이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 타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끈'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A Scene Package」 연작에는 파란색의 끈 혹은 호스들이 나온다. 이 호스들은 수족관 장치와 장치 사이의 공기나 물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이 호스들은 끈처럼 바닥에 쌓여 있거나 흩어져 있는데 사물들이 본질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는 것들임을 암시한다. 특히 이 호스-끈들은 물처럼 파란색으로, 흡사 이 사물들의 존재가 물속에 놓이게 될 뿐 아니라 물로 인해 연결되기 위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결(connection), 연상(association), 연쇄(enchainment)에 의한 '묶음'은 사물이나 식물과 같은 정적인 존재들을 동물로 바꾸어 놓는다. 식물과 달리 동물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바라보거나 굶주린다. 가만히 있는 동물은 고립을 나타낸다. 식물은 그렇지 않다. 동물은 가속적인 상호의존체계를 극적인 무대로 가시화한다. 사물들 역시 동물이 됨으로써 그것들이 이러한 상호의존적인 구조 안으로 들어와 있음을 보여준다. 「직립식물」은 식물이나 사물들에 내재되어 있는 동물을 드러낸다. 이것은 태어나자마자 고립된다. 여기에 사용된 기술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바라보거나 굶주리게 만드는 것이다. 「직립식물」은 존재와 기술이 최초에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보여준다.

이해민선_궂은 날_종이에 아크릴채색_37×51cm_2011 이해민선_직립 식물_종이에 아크릴채색_91×117_2011

「대기압 과」와 「수돗물 과」는 종이 위에 아크릴로 그린 대형 회화작품이다. 제목의 '과'는 연결조사를 따로 떼어 표기한 것으로, 뒤에 이어질 어떤 것이 생략되어 있다. 이 작품들에는 배경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파헤쳐진 붉은 흙더미들로 뒤덮여 있는 알 수 없는 장소들이다. 화성의 지표면 같기도 하고 도시를 개발하기 위해 갈아엎은 택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넓은 'No Man's Land'의 표면 위로 끈으로 묶은 각목들로 이루어진 형태들이 마치 뭔가를 탐사하듯 기어 다닌다. 「대기압 과」는 커다란 두 개의 화면이 이어져 있는 이부작(diptych) 형식이고, 「수돗물 과」는 유사한 형태들의 몸체를 감은 호스들로부터 물이 흘러나와 바닥에 고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부작의 제목에서 인용된 '대기압'이 어떤 이름 모를 혹성의 대기를 연상시키는 반면, '수돗물'은 변두리 개발현장의 버려진 물건들을 떠올린다. 장소를 추측케 하는 제목의 이 단어들 외에 이 그림들의 차이점은 거의 없다. 여전히 끈들은 형태들로부터 흘러내려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각목으로 만들어진 동물은 검은 쓰레기 비닐을 뒤집어 쓴 채 어딘가에서 고립되어 있다. 사물은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사물들 사이의 연결에 의해서만 동물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또 다른 배경으로는, 노랗게 마른 풀 혹은 볏짚들이 무성하게 쓰러지거나 일어나 덮여 있는 장소들이 있다. 「그렇고 그런 사이」, 「앉아서」 혹은 「정정히 늙는」과 같은 작품들에서는 육중한 무언가가 밟고 지나간 듯 젖어 뭉개져 있는 풀들 사이로 버려진 쓰레기를 방불케 하는 호스, 비닐, 각목, 끈들이 키 큰 마른 풀들 사이에 놓여 있다. 이것들 역시 모호하게 서로 뒤엉켜 있거나 묶여 있다. 여기서 시선을 끄는 것은 배경을 그리는 방식이다. 작가는 극도로 세밀하게 퇴락한 자연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마치 사물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소가 버려지고 남겨진 장소들이라는 사실이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것처럼. ● 「기계와 기예」 연작은 소림무술과 동력분무기라는 두 개의 이슈를 '묶어놓은' 드로잉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심신의 기(氣)를 이용한 호신무술이고 다른 하나는 동력으로 공기를 압축해 내뿜는 장치다. 둘 다 커다란 에너지를 운용하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각자가 속한 범주는 문화적인 것(기예)과 산업적인 것(기계)의 차이 이상으로 다르다. 이 드로잉들에서 기계는 거대한 불그스름한 내용물을 강력하게 뿜어내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각자 자신의 무예에 담긴 힘을 과시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들은 두 가지 의미체계의 병치를 다루고 있다. 뿜어져 나가는 액체는 인물들이 구사하는 힘의 강도를 나타내며 인물들의 자세와 아우라는 장치에 내재되어 있는 힘을 통제하는 기술적 형식을 암시한다. 두 개의 의미체계는 돌연 이 그림들 속에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묶인다. 여기서는 각목이나 호스 대신 광고전단지나 정원에서 발견되는 사실들이 서로 묶이는 것이다. ● 이해민선이 '던져진' 사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두 가지 중요한 '미장센'의 원칙이 담겨있다. 첫 번째로 '인물' 혹은 '배역'은 배경으로부터 나온 존재들이다. 배경은 텅 빈 버려진 공간이다. 이곳으로부터 알 수 없는 의식이 형성된다. 그것은 사물들이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는 이 사물들을 불러내어 그것들끼리 서로 '의존'하도록 한다. 여기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존재가 그것의 무용성(uselessness)과 아름다움이 텅 비고 퇴락한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실제로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배역들은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언제든지 다시 해체되어 무의식으로 되돌려질 수 있다. 이들의 조합은 두 가지에 의존한다. 시선과 '끈'이다. 사물들은 우연히 작가의 시선에 의해 발견된 것들이며, 일시적으로 묶여있다. '끈'은 이러한 사실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구체적 단서를 나타낸다. 존재하는 것들은 '끈'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세계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끈이 묶어내는 것은 일시적인 구체성일 뿐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사물들은 이미지를 구성한다. 오이디푸스처럼 사물들은 '운명'에 의해 호출되고 곧 사라질 테지만, 지금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주체로서 무대에 서있는 것이다. 이해민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자각에 대해 운명적인 대사를 늘어놓을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배경에서 비롯되어 배경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누릴 수 있을 유일한 진화의 정점에서 이 사물들은 자신들의 자각에 몰입하고 있다. 그것들은 어떤 원시적인 기술에 의존하고 있지만, 기계가 되지 않았다. 반복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반복하지 않는 것으로 서있게 되었다. 자본이 몰고 오는 흥분도, 이념이 강요하는 이상향도, 심지어 신조차 그곳에는 도래하지 않는다. 이 그림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어떤 정점이다. 조용하고 무의미하지만 자신의 다리로 서있는 존재의 정점인 것이다. ■ 유진상

이해민선_덜 죽은 자들-직립 식물_종이에 수채_37×51cm_2011

생명의 의미라던가 생명의 유무, 생명의 기원, 가치 등을 말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체와 개체가 접하는 순간을 관찰하다보면 독립적인 개체가 자신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 상호작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상호작용이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회귀할 때 새로운 특질이 나타나는데 그 새로운 특질이 탄생하는 순간이 생명이 아닐까.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의 형상도 그 동물의 형상을 그리려고 다른 것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도면'을 '나무토막'을 '비닐봉지'의 특성을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바라보고 관찰하면, 그 특성들이 새로운 형상을 자아내게 된다. ● '묶인 사이'라고 정한 것 역시 '상호작용'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묶여 있다고 하여 수동적이거나 갇혀있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묶인다는 것은 서로의 특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고 '무엇과 무엇이 만나느냐에 따라 접속의 특질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 '끈'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끈들이 각목과 각목을 이어주어서 개체의 외부적 특성을 회손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낸다. 개체를 관통하거나 화학적 변이처럼 개체의 특성을 제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너무 매력적인 대상중 하나가 끈이기도 하다. ■ 이해민선

Vol.20110813b | 이해민선展 / LEEHAIMINSUN / 이해旼宣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