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ERSION

정서주展 / JUNGSUHJOO / sculpture   2011_0831 ▶ 2011_0909

정서주_맨홀_아크릴, 스틸, LED_100×100×7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무광 투명 접착시트와 무광 일반 접착시트 위에 새겨진 서로 다른 이미지를 중첩시킨 후 라이트 박스 안에 설치한 정서주의 전시는 마치 어두운 도시에서 빛나는 전광판 같은 분위기가 있다. 대부분 2장이지만 3장이 겹쳐진 것도 있다. 하나의 시트가 투명하여 또 다른 시트의 이미지가 섞이기 때문에 시공간이 압축되는 효과를 준다. 구분되는 시트들은 차이의 보존을 통해 상호적 변형이 이루어진다. 이미지 사이의 차이가 클수록 거기에서 발생되는 서사는 보다 시적이다. 이전 작품에서는 이미지가 새겨진 아크릴판을 버티컬처럼 겹쳐 놓기도 했다. 그 경우 쌍으로 전시를 하므로, 분리된 두 개 사건의 간극과 연결을 추리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는 공간적 차이에 의한 시간의 흐름, 그리고 시간적 차이의 압축을 통한 공시성이 두드러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벽에 16개의 정사각형 라이트박스를 걸고 전시장 바닥에는 맨홀 시리즈 6개를 설치한다. 마치 맨홀같이 바닥에 깔린 이미지들은 대지의 숨구멍을 대신하는 도시적 도상이다. 이 전시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 것이지만, 도시의 바닥에는 실로 수많은 형태와 기능을 가지는 맨홀들이 깔려 있다. 대부분 강철로 만들어진 둔탁한 그것들은 화려하고 민감한 인터페이스를 가지지는 못하지만, 지하세계에서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결절점(nodal point)들이다.

정서주_맨홀_아크릴, 스틸, LED_100×100×7cm_2011
정서주_맨홀_아크릴, 스틸, LED_2011

그것들은 평소에는 아무런 존재감 없이 있다가 사건사고가 터지면 그곳으로부터 문제해결이 시도된다. 정서주의 작품에서 맨홀은 마치 블랙홀이나 화이트홀처럼 다른 세계로 가는 구멍이면서 시공간을 단축하는 통로의 상징이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를 이 구멍들은 두려움을 주지만 고착된 지금 여기의 탈출구이자 비상구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시공간의 중첩과 압축이라는 사건을 통해 서사를 끌어낸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자신이다. 작가는 시공간의 부딪힘, 또는 간극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건에 '몰입'(전시부제)되며 관객 또한 몰입(Immersion)시킨다. 한때 뮤지컬의 분장 스텝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작가는 단지 구경꾼이 아니라, 연극적 상황속의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 그것은 자신이 서로의 분신이 되어 껴안는 이전 작품처럼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내포한다. 현대 심리학은 나르시시즘의 이면에 공격성이 있다고 본다. 유아론을 부추키면서도 익명성을 요구하는 모순된 현대적 삶이 그 역설의 배경이다. 모두가 주인공일 때(또는 주인공이고 싶을 때) 차이는 어떻게 해결되겠는가. 관료제와 상업주의가 지배하는 차가운 질서 이면에는 무정부주의적 충동이 폭발할 때를 틈틈이 노린다.

정서주_Target_아크릴, LED_50×50×7cm_2011

작품 속 주인공을 자임하는 정서주의 작품에서 총 쏘는/ 총 맞는 이미지가 빈번히 나타난다. 총은 분신이 된 자신에게 쏘기도 하고 타인에게 쏘기도 하며 그 반대도 성립된다. 총은 몰입을 요구하는 Sudden Attack 같은 게임의 산물이자, 실제로 자신을 지켜주었던 호신 무기에서 왔다. 총은 가상과 현실의 양차원에서, 도시적 삶이 가지는 극단의 익명성이 야기하는 심리적 고독과 육체적 위험을 방어해준다. 현대 작가의 필수품이 된 카메라는 총보다 평화롭고 일상적인 물건처럼 보이지만, 소유와 지배라는 욕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정서주의 이전작품에서 카메라 렌즈 안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작품 역시 나르시시즘과 공격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전시전경을 형성하는 라이트 박스나 맨홀 등에서 알 수 있듯 정서주의 작품은 도시적이다. 도시야 말로 중첩과 간극의 장이다. 기 드보르가 지적하듯이 도시의 스펙터클은 분리된 것들을 분리된 채로 합쳐놓기 때문이다. 투명도가 다른 두 개의 시트가 겹쳐진 정서주의 작품은 현실과 가상의 관계처럼 차원이 다른 두 상황을 겹쳐놓기도 한다. 샤워기를 든 손이나 쪼리를 신은 발과 대도시 풍경의 병치, 횡단보도와 화려한 무대조명을 받는 댄서들의 병치, 터널을 통과하려는 자동차들과 크게 확대된 콧구멍의 병치 등은 도시적 일상으로부터 나온 상상력이다.

정서주_택배_아크릴, LED_40×50×7cm_2011
정서주_터널_아크릴, LED_37×53×7cm_2011
정서주展_갤러리 이즈_2011

도시에서 익명의 개인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소통과 유통이다. 담사이로 자신의 분신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소통」, 분신들이 박스 안에 담긴 「택배」, 전공서적을 가득 실은 오토바이 배달부로 분한 자신을 그린 「지식의 무게」가 그렇다. 공포 또한 도시풍이다. 도시의 익명성과 밀집은 단절과 경쟁을 낳고, 이는 집단 속 개체를 한계상황으로 몰고 간다. 건너편 아파트에서 나를 겨누는 장면과 나의 창에서 총을 겨누는 장면이 중첩된 「target」, 고층 아파트와 출동한 전투기들이 중첩된 「비행」이 그러하다. 구멍들 배후의 물은 익사와 유영의 동시적 장이다. 여러 명이서 사방으로 외치는 장면과 빈 거품만이 가득한 물속의 대조를 표현한 「shout」는 메아리 없는 소통의 차단이, 벼랑 끝에선 발과 무시무시한 아가리를 가진 물고기가 병치된 「look down」에서는 긴박함이 느껴진다. 가장자리에 선자의 위기의식과 짜릿한 흥분은 맨홀시리즈에 잘 나타난다. 맨홀과 그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신을 병치한 「맨홀 6」, 맨홀과 간신히 매달려 있는 자신을 병치한 「맨홀 2」, 맨홀과 위를 향해 총을 겨누는 자신을 병치한 「맨홀 3」가 그렇다. 그러나 쇠 맨홀 아래에는 물고기가 유영하기도 하고, 나무 맨홀 아래에는 연꽃이 떠있기도 하면서 해방구 같은 면모가 있다. 그것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 지역이 가지는 이중성이다. ● 이전작품에서 머리칼로 만든 드레스나 새, 고양이 같은 것들이 주는 매혹과 공포도 같은 맥락이다. 머리칼은 몸의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몸밖에 있는, 이를테면 몸의 안팎에 걸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대를 단일지점으로 응축시키는 정서주의 작품에서 맨홀은 무대가 열릴 때 기대와 기대의 배반을 교차시키는 접면이 된다. 지각과 기억,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작품들은 공간적 중첩인 꼴라주와 시간적 중첩인 영화의 미학을 깔고 있다. 영화학자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영화가 가지는 직접적인 시간 이미지에서 간격은 더 이상 공간 내의 연속성이 아니라, 시간 내 변위(dislocation)들의 계열이라고 지적한다. 이 변위들은 현재와 과거 간의 비선형적 비연대기적 관계를 포함한다. 기억은 지각과 대조적으로 시간 내에서 한층 복잡하고 무수한 지점들을 여러 이미지와 연계하는 과정이다. 시간적 간격이 새로움과 충격을 촉발시키는 정서주의 작품에서 시간은 '새로운 것의 창조를 위해 항상 회귀하는 가능성으로 정의되는 사건'(들뢰즈)이다. 시간의 이미지에서 과거는 반드시 참일 필요가 없으며,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에 뒤따를 수도 있다. 변화 자체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정서주의 작품에는 객관적인 시간이 부정된다. 그것은 객관적 시간이 전제하는 정적이고 등질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이고 이질적인 것이다. ● 투명, 또는 불투명 시트들은 예정된 결말을 위한 인과 고리가 아니라, 예기치 않은 것을 향한 움직임을 내포한다. 그것은 움직이는 단면이 되는 것이다. 작품에 내재된 불연속 적인 시간은 고정된 진리나 사실을 시험에 부친다. 여기의 시간은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는 연속체의 공간적 절편화로 파악된다는 점에서, 영화적 시간과 유사하다. 로도윅에 의하면 경험적 속에서 시간은 운동이 측정되는 간격 또는 분화와 통합을 통해 전체로 주어진다. 지나가는 현재와 보존되는 과거와 비결정적 미래로 끊임없이 나뉘는 시간의 순수형식은 생성의 운동을 보여준다. 그것은 삶 속에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것을 출현시키는 힘이다. 영화는 운동에서 이미지를 파생시키면서 시공간 블록을 '변화하는 전체, 즉 지속 또는 보편적 생성의 움직이는 단면'(들뢰즈)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영화적 메커니즘은 공간형식으로서의 미술에 시간이라는 열린 차원을 부여한다. 정서주의 작품에서 투명한 시트와 불투명한 시트의 중첩은 잠재태와 현행태의 분리 불가능성에 대한 표현이다. 명료성이 증가하거나 희미해지는 등, 중단 없이 질적으로 변환하는 열린 전체로 대상들을 엮는 과정을 통해 재현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것은 결코 하나의 프레임으로 고정될 수 없는 운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 이선영

Vol.20110831e | 정서주展 / JUNGSUHJOO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