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의 도시 The Eye of Flâneur

김홍식展 / KIMHONGSHIK / 金洪式 / printing.installation   2011_0916 ▶︎ 2011_1025 / 일요일 휴관

김홍식_Record-since that day_서머셋용지에 실크스크린_110×320cm_2010~11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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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11_1012_수요일_05:00pm

주최, 주관/ (사)국제시각예술교류협회 CAN Foundation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일요일 휴관

2011_0916 ▶︎ 2011_0925

스페이스 15번지 SPACE 15th 서울 종로구 통의동 15번지 Tel. 070.7723.0584 space15th.org

2011_1012 ▶︎ 2011_1025

스페이스 캔 Space CAN 서울 성북구 성북동 46-26번지 Tel. +82.2.766.7660 www.can-foundation.org

플라뇌르; 도시의 산책자 ● 플라뇌르(Flâneur)는 한가롭게 거리를 거니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이다. 19세기 중반 거대한 도시 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파리는 커다란 도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중세의 낡은 도시의 모습은 사라지고, 높은 건물들과, 넓은 도로, 고급스러운 카페와 레스토랑, 극장 등이 생겨났다. 도시 전체의 외향적인 모습이 변하면서 사람들의 터전도 변하였고, 그들의 생활도 낯선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변화하는 파리의 도시적 현상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는 '플라뇌르(Flâneur, 산책하는 사람)'이라 지칭하였다. 도시 공간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터전이 아니라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되었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분리된 채 변화하는 도시 풍경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관람자가 되어 있었다. 김홍식의 작업은 이 시대의 '플라뇌르'로서 현대 도시가 겪고 있는 변화와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현대성이 실현되는 장소로서의 도시를 탐구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 김홍식의 작업은 '도시'라는 관찰의 대상과 '산책자(Flâneur)'라는 관찰의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기억과 흔적을 기록하는 과정에 있다. 현대사회에서 '도시'란 생산과 소비, 자본과 기술, 정책과 권력으로 인한 인위적 공간을 형성하며, 꾸준한 도시의 발달은 끊임없는 인구의 유입을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대단위 인구집단으로 이루어진 '도시'는 반대로 인간에 대한 이질적 요소들을 대량 내포하고 있어, 소외와 단절, 그리고 소통과 조화가 동시에 존재하며, 인간의 주체적 역할과 객체성이 교차되고 있다. 이러한 도시의 이중성은 그 안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함과 동시에 낯설음을, 소속감과 동시에 소외감을 가져다 주며,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인한 상실감과 욕망을 제공하고 있다. 이 도시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은 도시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 혹은 다양성의 미려한 경계를 읽는 일이며, 예술 행위를 통해 그 현재성을 보존하는 일이다.

김홍식_The room #15_스테인리스 스틸에 돋을 새김_각 120×80, 120×70, 120×60cm_2008~10

'플라뇌르'로서 도시를 관찰하는 일은 객관성과 익명성을 요구한다. 도시에 생활터전을 가지고 일상을 경험하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있으나,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 동안 무의식적으로 거부하였던 낯선 모습들과 무심코 지나쳤던 하찮은 흔적들, 혹은 너무나 익숙하여 의식하지 못했던 매우 평범한 일상의 새로운 이면을 발견하게 된다. '플라뇌르'는 특정한 목적을 두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산책을 하듯 끊임 없이 움직이는 도시의 순간을 포착하고, 왜곡되지 않은 모습으로 기억한다. 도시는 중심의 것에서 주변의 것으로, 관찰자는 주체적 위치에서 객관적 시선으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기억과 감성의 경험을 각인시킨다. 이는 김홍식의 작업이 일련의 기억과 현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재현과 기록(다큐멘터리)이 아닌 예술로서의 가치를 갖는 이유가 될 것이다. ● 김홍식은 '도시'의 모습을 카메라를 통해 1차적으로 기록한다. 영상으로 기록된 도시 이미지들은 그 후 필름으로 감광이 되고, 스테인리스스틸 판이나 아연 판에 안착되어 금속을 부식시킨다. 부식된 금속 판은 다시 종이에 이미지를 인쇄하는 과정을 거친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의 눈으로 관찰된 도시는 영상과 필름, 금속판과 인쇄물의 형태로 제작되는 과정을 통해, 파지티브와 네가티브의 반복을 겪는데, 어찌보면 이는 '도시'의 표면과 내면을 상실과 회복을, 숨겨진 것과 드러나는 것을, 그리고 이 도시의 희망과 불안의 경계를 보여주는 듯 하다. 특히, 김홍식의 작업에서 금속판은 결과물을 얻기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도시의 기록물로서 제안하고 있다. 스테인레스스틸이나 아연과 같은 금속은 도시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기에 매우 적합한 재료로서, 표면은 차갑고 무거워 보이지만, 산화되는 과정은 매우 유연하고 흔적을 깊이 각인하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 산화된 금속 판은, 또한 서로 다른 형태의 무수한 공간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금속판이 포함하고 있는 미시적(微視的) 공간과, 표현하고 있는 거시적(巨視的)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 '도시'는 현대인에게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기회를 가져다 주며, 그로 인한 욕망과 좌절을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김홍식의 도시가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 도시 안에서의 익숙한 경험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주 작은 차이를 극복하는 일은 도시 안에 보이지 않게 이뤄진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며, 타인과 소통하는 통로를 찾는 일이며, 숨겨진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 민은주

김홍식_산책자의 도시_The Eye of Flâneur_비디오_05:39:00_2011

나타남과 사라짐의 "사이" - 여성의 장소 ● 예술이 일상적인 물건을 생산하는 기술(Techne)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예술 이후의 예술의 탈중심적인 방향성이나 운동성을 설명·정당화하는 계보학적 사실이다. 오늘날 예술은 반-예술적 움직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한다. 이런 맥락에서 판화가 줄곧 예술의 주변부적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은 예술 이후의 예술의 정체성, 정체성 아닌 정체성과 연관해서 판화의 성격을 재고해야할 필요를 요청한다. 판화는 오래전부터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첨가된 보조적 이미지로, 혹은 진품으로서의 회화의 대중적 보급을 위한 복제품으로 사용되었다. 동판, 석판, 목판과 같은 원판, 잉크와 같은 물질을 이용해 종이나 천에 이미지를 전사하는 판화의 공정으로 말미암아, 각각의 쇄(刷)는 원판의 복제품이면서 동시에 제작자의 선택과 우연성에 근거해 나름의 독립적 특성을 갖게 된다. 즉 판화는 원판(원본의 지위를 갖지는 않는)을 새기고 파고 부식시키는 일차 과정에서 '완성'에 이르지 않는다. 원판은 모든 쇄의 '기원'(origin)이고, 각 이미지들은 '원본'(original)의 지위를 가질 수도 있다. 복제와 원본이 겹친다. 판화는 예술의 주변부에서 예술의 존재방식을 횡단하면서 그것과의 차이를 드러낸다. 기원, 원본, 저자, 완성과 같은 예술의 항들(terms)은 완성과 과정, 반복과 차이 사이에서 진동하는 판화에서는 산란한다. 공정이란 단어가 함축하듯이 판화는 완성을 지연시키는 미결정의 상태를 살아낸다. 판화의 모호한 존재방식은 동시대 미술의 맥락에서 재기술될(rewrite) 필요가 있다. 예술의 주변에서 중심의 예술을 반복하고 흉내내면서 동시대 미술의 탈중심성을 선취했던 판화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무엇'보다 '어떻게', 즉 내용보다 방법과 형식에서 예술의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를 성찰하는 이들에게 급진적인 매체로 재고될 수 있을 것이다.

김홍식_Record-since that day_스테인리스 스틸에 돋을 새김_210×110cm_2010~11_부분

판화는 역사적 출발지점에서 볼 때 서민 혹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밀착된 문화적 형식이었다. 글(쓰기)의 맥락에서 출발한 판화는 접근성이 높은 대중적인 매체였다. 이류, 혹은 마이너 아트라는 판화의 지위는 판화의 일상적 친근함, 겸손함을 반증한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의식과 사회에서 한 걸음 물러난 예외적 존재의 우월함에 기초한 예술과 일상에 밀착된 서민들의 (몰)취향을 먼저 배려하는 판화는 범주가 다른 문화 활동이다. 보다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형식에 연루된 판화의 존재방식은 판화가가 동시대 사회를 어디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재현하는가 역시 조건짓는다. 판화가는 반사회적인, 개인주의적인 소수의 태도에서 물러나 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그 사람만의 고유한 본질이나 내면이 아니라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고 말하는가'에 의해 구성된다고 이야기하는 오늘날 문화주의의 입장에서라면, '매체'는 작가의 '태도', 혹은 작가의 문화적 정체성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리라. 맥루한을 흉내내서 이야기한다면 매체는 태도이고 심지어 그 사람이다. ● 마이너 아트는 예술 감상의 조건인 미적이고 성찰적인 '거리'(distance)에 함축된 바, 삶과 작가, 지금·여기와 초연한 거기 사이의 '차이'를 전제하지 않는다. 사소하고 무의미한 일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일은 일상으로부터의 거리를 요구하지만 그 와중에 일상으로서의 일상은 그런 거리로 인해 사라진다. 그렇기에 일상 자체의 역학이나 시학을 그려내려는 이는 대신에 몰입과 참여의 기제를 작동할 것이다. 풍경에 참여한 사람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는 풍경에 대해 초연한 관찰자의 풍경화와 다르다. 이미 항상 자신이 풍경의 일부임을 아는 사람은 풍경 바깥에서 풍경을 관조하는 이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혹은 비판적인 재현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다. 나는 풍경의 일부이고 심지어 환경은 이미 나이다. 나는 지금 강한 자의식을 통해 시대에 초연한 예술가가 동시대성을 재현하는 방식과, 관계 속 한 부분(term)으로서의 작가가 동시대성을 재현하는 방식의 차이를 진지하게 구별하고 있는 중이다. 권태와 우울, 냉소와 같은 근대성의 언어와 서정성, 겸손함, 따듯함이라는 포스트근대성의 언어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 작가 김홍식은 줄곧 대도시 풍경을 소재로 판화 작업을 하고 있다. 본인이 직접 현장에서 찍었거나 이곳저곳에서 갖고 온 도시는 구체적 장소명('통의동'을 제외한다면)을 삭제한 채 도시라는 유사성에 근거하여 병치된다. 우리가 아는 도시, 장소성을 상실한 동일성의 공간이 역시나 작업의 소재이자 풍경이다. 도시는 일상적인 친숙함을 매번 낯선 이방인의 태도로 경험하게 만드는, 심리적 밀도나 정서적 교감의 작용이 불가능한 무차별적인 공간이다. 대도시는 강철의 발명에 근거한다. 차갑고 단단하고 견고하며 세월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풍화나 퇴화와 같은 자연적인 삶의 변화를 겪지 않는 철과 철의 집적체로서의 도시에서 인간은 도시를 반복하지만 마음, 느낌, 성장과 죽음과 같은 일종의 자연으로서의 인간적 특성은 도시를 초과하는 잔여물이자 과잉으로 공존한다. 인간은 철의 구조 안에서 철의 힘에도 불구하고 늘 벗어나 있다. ● 그러나 사진 필름과 감광제를 사이에 두고 빛이 투과한 강철판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도시는 우리가 늘 보는, 이미 알고 있는 도시가 아니다. 김홍식은 남성적인 매체의 표면을 부식시켜 그 위에 남성적인 풍경을 재현하지만, 그녀의 의도적이고 신중한 변형/왜곡의 과정에서 풍경은 남성적인 힘을 상실해간다. 선명한 윤곽이나 구도가 지워지고 재현성, 혹은 시각성(visuality)의 최소 이미지만 남은 화면은 도시의 몽환적 이미지, 낯섦과 매혹이 겹치는 익숙한 도시 체험의 방식을 비껴간다. 도시는 분명 익숙함과 낯섬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도시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간적 정서나 서정성에 환원되지 않는 잉여를 갖고 있다. 그것이 장소에 대한 편안함보다 매혹을 유발한다. 우리는 길들여지지 않는 고집센 풍경 앞에서, 마음을 열지 않는 '여자' 앞에서 그렇듯이, 매혹당하고 불안을 겪고 분리된다. 김홍식은 그런 대도시의 특성을 가급적 화면에서 최소화하려고 한다. 도시 경험은 시각에 집중되지만 작가는 도시를 촉각화하려고 한다. 인간은 시각의 '권능'을 상실하면 이성적 존재에서 몸의 존재로 변형된다. 그녀의 화면은 희미한 보기/보이기의 장면을 실현하려 한다. 선명한 보기, 즉 대상에 대한 '소유'와 '지배'의 능력은 희미하게 탈색된 화면에서는 불가능해진다. 탈색된 화면은 대신에 세월의 흐름, 풍화와 퇴화와 같은 '과정'을 재현하려는 데 집중하고 있다. ●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도시의 무시간성, 역시나 변화를 거부하는 철의 속성은 화학작용을 통해 내적 구조의 변화를 겪은 철의 표면이 일으키는 무늬,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약화되거나 무화된다. 작가는 제거하고 비워내고 탈색시키는 과정을 통해 축적과 성장에만 매진하는 도시적 삶의 회로를 끊어버린다. 사실은 강철도 흙집처럼 부서지고 마모되는 물질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사실은 도시도 마음과 마음의 무늬를 담는 장소일 수 있다는 느낌과 결합해서 작가는 차갑고 견고한 도시를 '여성화'한다. 단단한 표면이 긁히고 마모되면서 나타난 '상처'는 도시에서 들려오는 서정적인 노래, 따듯함과 슬픔에 대한 노래를 부르는 장소이다. 김홍식에게서 철은 도시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피부', 만지면 부스러질 것처럼 작고 약한 '살이'(living)의 은유로 재기술된다. 시각적 주체의 공간(살 곳)으로서의 도시는 관계적 주체의 장소로 바뀌고, 풍경은 시각적 명료성을 잃음으로써 몸의 장소로 내려앉는다.

김홍식_통의동에서 길을 잃다_스테인리스 스틸에 돋을 새김_각 30×90cm_2009

'통의동'은 김홍식이 서울에서 찾은 몸의 장소이다. 그녀의 작품 제목은 모두 장소성을 삭제한 채 도시의 무차별적 동일성을 가리키는 방식으로 제시되지만 유일하게 '통의동'은 이름을 갖고 등장한다. 마음은 무게가 없어서 가볍지만 한번 내려놓은 마음의 무게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쉽게 마음을 내려놓는데 익숙하지 않은 작가는 통의동에서는 그렇게 한 것 같다. 그녀가 장소를 갈구하고 대도시 공간을 장소화하려는 욕망을 견지한다는 것은 '통의동'이란 지명의 예외성, 유일성에서 역설적이지만 드러난다. '통의동'이란 이름은 정착, 화해, 친밀감과 같은 반-도시적 정서의 은유이다. 그 지명은 그녀의 작업의 '중심'을 형성하면서, 길들여지지도 친숙해지지도 않는 도시와 '만나려는' 그녀의 욕망을 구조화한다. 나의 삶, 나의 상처와 고독, 기쁨을 간직한 장소는 사실 눈에 보이는 공간이 아니라 눈 없이 몸으로 더듬어 찾아내야 하는 촉각적 공간이다. 냄새와 소리, 어둠과 밀도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연상과 기억의 과정에서 반복되는 공간은 시각적 구체성의 사라짐, 보는 눈의 사라짐과 연관된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잃는다'. 통의동에서는 '길'을 잃고, 아니 '눈'을 잃고 더듬더듬 헤매이는 것이다. ● 김홍식의 화면에서는 사람들도 사라짐을 통해 현존한다. 흐리게 지워진 공간에서 사람들은 시간에 부식되고 마모되어가는 물질성을 획득한다. 기억의 존재인 인간은 이제는 '볼' 수 없음을 통해서만 지나간 시간과 관계를 맺는다. 그곳은 그곳이고 그곳은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그곳에 대한 이야기는 그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유랑한다. 기억은 장소와 마음의 관계를 가리킨다. 상처, 슬픔, 고통, 노래의 존재인 인간은 반드시 장소에서 살아가지만 장소성은 장소의 물리적 소멸을 통해 출현한다. 사랑으로서의 관계는 함께 만들어낸 바깥과 그때 형성된 안의 변주 속에서 세월을 겪는다. 시간과 세월, 마음과 느낌을 입은 장소는 인간의 바깥이면서 이미 인간의 내부, 그 자체 하나의 인간이다. ● 김홍식은 도시를 초연하게 바라보는 초역사적인 개인도 도시를 외면한 무시간적인 존재도 아닌, 변화의 한 가운데에서 그 변화에 '목숨'을 불어넣고 모든 생명의 변화를 기록함으로써 관계가 만들어내는 '풍경'의 무늬를 가시화하려고 한다. 나는 그녀가 부식된 강철을 하나의 원본으로 제시하건, 실크스크린에 전사된 이미지를 제시하건, 온도와 마음이 깃들지 못하는 철과 도시를 연약하고 수동적이고 관계에 이미 연루된 오브제, 인간화된 오브제로 변형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따듯함에서 출발해 따듯함으로 회귀하려는 '여성적인' 태도이리라.

김홍식_그 날 이후의 기록 Record- since that day 20080210_ 스테인리스 스틸에 돋을 새김, 렌티큘러 스크린_각 110×55cm_2009~11

작가의 최근작은 도시의 표면을 탈색시키고 시각적 모호성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촉각적인 삶의 장소를 드러내는 기존의 작업과는 다른 차이를 보인다. 앞서 지적했듯이 '통의동'을 제외한다면 기존의 작업은 모두 장소나 지명을 상실한 제목에 근거하고 있었던데 비해 「그날 이후의 기록」 시리즈는 남대문 혹은 국보 1호인 숭례문의 전소라는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난 '날'을 줄곧 언급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있다가 사라진 것은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서, 현존과 부재의 '간격'에서 비로소 자신의 장소성을 획득한다. 기억의 행위는 없음의 사실을 통해 있음의 집요함을 반복한다. 사라진 '그것'은 이제 영원히 기억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다. 그날 불에 타 사라진 국보의 자리는 지금은 텅 비어 있다. 물리적 실재성, 아니 시각적 권력을 상실한 대상의 자리는 대상보다 더 한 힘을 갖는다.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란 인식 혹은 깨달음에서 중요한 것은 거기가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힘을 갖고 있는 기원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훈육되어 있다. 장소성을 상실한 대상은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서 진동할 수 없고, 마음은 장소 없는 너에게는 정녕 다가갈 수 없다. 아니 모든 너는 장소에 있다. 몸으로서의 너. ● 작가는 '그 날' 이후 거기에서 사라진 그것의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그것이 세워지고 있는 현장을 방문, 기록했다. 그것을 대체할 그것의 복제품, 원본이자 원판인 그것을 반복할 쇄(刷)는 판화의 존재방식을 실현한다. 현장에서 작가는 무엇을 '본' 것일까. 사라진 원본과 나타날 복제품 '사이'를 점유한 것은 모던한 가건물 형식이다. '복원'이라는 관습은 사라진 것과 나타날 것의 차이, 간격, 사이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체(의 확신)에 대한 신화가 깔려 있다. 작가는 사라진 것과 나타날 것의 간격을 현장으로서의 가건물의 구조를 가시화하는 방식으로 집요하게 사유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원본의 지위를 대체하고 점유할 복제품에 대한 비판도, 원본에 대한 향수도 아닌, 그 둘 사이의 간격이 드러내는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은 철거됨으로써 '사이'를 사라지게 할 '가짜'건물의 현존을 통해 구체화된다. 가건물은 유목민의 ''집'처럼 지어지고 허물어지는 과정 속에서만 집으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머무름마저도 임시적일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도시적 상징이다. 가건물을 짓는데 사용된 철은 느슨하고 헐렁한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 내부를 감춘다. 그것은 안과 밖을 경계짓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안은 '과정' 중의 안이다. 가건물은 그렇게 불안정, 과정, 사이를 가리키면서 정착과 영토화의 은유에서 탈주한다. 건물이면서 건물이 아닌 그 이중성으로. ● 다른 데서는 별로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그날 이후 현장에서는 다른 이미지에서보다는 보다 시각적으로 선명한 윤곽과 함께 자주 등장한다. 견고한 내부를 가진 건물들 사이의 인간들을 떠도는 유령처럼 재현하던 작가는 가건물 앞에 배치된 사람들은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사라진 것과 나타날 것 사이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어떤 마음을 투사한 것일까? 그것은 늙어가고 사라지는 '행운'을 가진, 퇴화와 풍화의 과정을 닮아갈 인간에 대한 사랑일까? 그녀는 기억하러, 사라진 현장에 방문한 사람들과 그 현장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통의동'만큼이나 따듯한 것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김홍식_일곱 명의 맹인_아연 도금, 철 테이블에 돋을 새김, 가변설치_각 60×90×40cm×12_2010~11

그러므로 나는 작가의 젠더와 무관하게 그녀를 여성적인 작가라고 부를 것이다. 그녀에게 부착된 이름은 호명으로서의 반복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모던한 맥락에서 그녀가 '산란한' 존재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김'홍식'은 '남성'적 사회에서 여성되기의 어려움을 기표화한다. 그녀의 작업은 일차적으로는 여성적이지 않다. 그녀는 일차적으로 남성적인 매체와 남성적인 이미지를 놓고 그것을 여성적으로 변형시키는 일관성을 보여준다. 철이나 나무를 다루는 판화는 매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주체의 힘을 요구하며 도시는 여성성을 배려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 한 가운데에서 사라짐, 관계, 상처, 사랑의 장소를 만들어내는 그녀의 힘은 여성적이다. 사소한 것들은 사소하지 않은 것들의 사이에서 자라난다. 숨어 있는 것들을 가시화하고, 그것들에 다가가려면 시각보다는 촉각과 같은 '사소한'(minor) 감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작가에게서 나는 가시성(visibility)의 권력을 탈중심화려는 사라짐의 힘, 노래를 듣는다. 당신은 소멸과 죽음의 존재에게만 들리는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P.S ● 「7명의 맹인」은 글자를 읽지 않고 만진다. 눈으로 읽고 이해하는 자는 만져야 전해지는 마음의 전언을 끝내 받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깨진 글자, 뒤집힌 글자, 글자 아닌 글자, 거의 지워진 글자, 당신이 더듬어서 쓰다듬고 어루만져야 나타나는 글자이다.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에서 살아가는 마음을 읽고 보고 싶은 자의 글자 혹은 노래. 나는 눈을 감고 내가 맹인이었을 때 네가 전해준 사연을 가만가만 떠올린다.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갔을 것이다. 당신의 침묵을 나는 끝내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당신을, 당신의 마음을 알고 싶어 더듬더듬 만진다. 양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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