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신세계

2011_1022 ▶︎ 2011_1130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1022_토요일_04:00pm

참여작가 김범수_안두진_양민하_이상진_임선이_최종운

관람료 어른_3,000원(단체 2,500원) / 청소년_2,000원(단체 1,500원) / 어린이_1,500원(단체 1,000원) 만 70세 이상, 장애인 1,2,3급 본인, 국가유공자 다둥이 행복카드 소유자_무료

관람시간 / 09:30am~06:30pm / 월요일 휴관

모란미술관 MORAN MUSEUM OF ART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246-1번지 Tel. +82.31.594.8001 www.moranmuseum.org

빛의 신세계, 예술적 가능태의 문 1. 빛이 가져다 준 새로운 세계 ● '빛의 신세계'展은 빛이 인간의 지각을 변화시킨 새로운 경험들을 예술의 장에서 확인해보고자 기획되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전자 빛은 초월적인 자연의 빛과 대비되는데, 그것은 단순히 자연의 미메시스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지각 자체를 증명하는 함축적인 빛으로 사용되었다. 인간에게 빛이란 과연 무엇이었는가? 인류의 시작에 빛은 결코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제우스의 영역이었고,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고자 하는 도덕 그 자체였다. 그러다 인간이 횃불을 가짐으로써 어둠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가이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후 인간이 신화를 벗어버리고 인간 스스로를 빛으로 밝히게 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바로 인간을 위한 세계, 새로운 스크린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빛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늘의 위대한 빛은 여전히 눈부신 빛을 밝히고 있었고, 인간은 초월적인 빛에 의지하고 있었다. 빛의 신세계는 자연의 빛과 인간의 빛이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빛이 가져다 준 새로운 세계에서 예술의 빛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빛에 의해 생성되는 그림자의 스크린이 허상이기에 때문에 인간은 동굴 밖의 참 세계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신플라톤주의의 문을 연 신비주의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os)는 세계를 향해 비추는 빛의 유출에 관심을 가졌다. 그에 의하면 빛은 형태의 외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행태의 내적 구성원리이자,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즉, 빛을 통해 절대적이고 순수한 정신적 세계가 드러나며, 인간은 그 빛을 통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근원, 진리를 확인 할 수 있는 이러한 빛을 예술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인식하고 지각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빛과 연관된 색채를 통해서다. 빛은 사물이 지닌 색채를 드러냄으로써 사물을 형상화한다. 빛은 색채에게 광채를 주고 색채는 빛에게 형태에 투영된 깊이를 가져다 준다. 이러한 빛과 색의 관계는 예술작품의 가치를 정신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빛을 통해 예술가들은 단지 예술의 감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진실한 지성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다. 빛은 바로 예술과 지성을 증명하고 지향하는 원동력이었다. 2. 예술을 위한 빛의 발견 ● 역사적으로 빛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였다. 철학자들은 정신적 이데아의 세계를 빛의 세계로 상정하였고, 신화에서는 절대적인 힘을 드러냈다. 절대 암흑시대에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성함 그 자체였다. 그러다 과학적 입장에서 빛을 증명해낸 것은 10세기 물리학자 알하젠(Alhazen)에 의해서였다. 알하젠은 태양과 같이 밝은 사물을 본 후 눈을 감으면 잔상이 보이는 것에 주목하여 빛을 설명하였다. 그는 태양빛이 사물에 반사되어 인간의 망막에 맺힘으로써 인간이 빛을 지각한다는 사실을 카메라 옵스쿠라를 통해 증명하였다. 그러나 알하젠의 광학이론은 빛을 인간의 지성과 영혼의 세계라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다. '빛은 만물의 창조원리'라고 생각한 중세시대 교회는 신플라톤주의에서 통찰력을 얻어 정신적인 빛에 색채를 입혔다. 바로 스테인드글라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중세의 이러한 시대정신에 의해 알하젠의 업적은 600년이나 지난 후에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원근법의 창안은 바로 이러한 알하젠의 빛의 연구에 기초한 것이다. 빛은 단지 정신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물을 비추는, 그리하여 사물을 빛나게 하는 지각의 원천이 된 것이다. 이러한 빛은 신화적 상징에서 벗어나 대상 자체로 바라보게 하는 근대적 주체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이후 19세기 말 에디슨이 발명한 백열전등은 빛에 대한 대혁명을 가져왔다. 빛은 더 이상 자연의 초월적 힘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창조한 인공적인 발명품이 된 것이다. 이 혁명적인 새로운 전자 태양은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이 빛을 통해 밤을 낮처럼 밝혔고, 손바닥 안에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온전한 전자 빛으로 유희하기 시작했다. 바로 빛이라는 스크린을 인간이 자유자재로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자 빛은 빛과 어둠을 통합시켰고, 컴퓨터의 스크린이라는 시뮬라시옹의 이데아를 실재화시켰다. 이제 빛은 외부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자체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평면적인 스크린이자 공간적 깊이를 증명하는 전자 빛은 스스로 발화하는 태양이기에 무한한 세계, 바로 빛의 신세계가 가진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3. 예술을 지각하는 빛 ● 스크린은 허상의 이미지이지만 인간의 지각 속에서 실재한다. 이제 스크린은 허상과 실상의 구분이 없는 파노라마로 우리들의 감각을 둘러싸고 있다. 전자 빛은 더 이상 동굴 안에 고정되어 있는 스크린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들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파노라마가 되었다. 빛이 가져다 준 새로운 세계는 초월적인 번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상징 속에 들어있는 예술의 조건을 밝혀줄 가능성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때론 어둠 속으로 우리 스스로를 몰아넣지만 어둠을 통해 빛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듯이, 자연의 신비한 빛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인간이 횃불을 가짐으로써 인간의 영역을 확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전자 빛은 인간 사고의 지평을 특별한 공간으로 확장시켰다. 전자적 빛은 어둠을 밝히는 차원이 아니라 특별한 목표로 향해 달려간다. 바로 실재하는 가상의 스크린 속으로 말이다. 그 스크린은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한 시공간을 가진다. 빛은 이제 무엇인가를 비추는 것에서 스스로 의미화되는 것으로 나아간다. 빛은 환상과 환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인간에게 의미를 확인하게 한다. 21세기 디지털 사회의 전자 빛은 이렇게 인간의 관심을 토대로 살아간다. 빛에 대해 끊임 없이 질문을 던지고, 빛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인공적이고 예술적인 전자 빛을 살아 숨쉬게 만든다. 바로 예술적 행위를 통해서 말이다. 전자적 빛이 자연 빛의 대척점이 아니듯 빛의 신세계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 아니라, 빛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성찰의 과정과 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세계로 여행하는 것이다. 이제 예술의 잠재적 스크린은 빛이라는 눈부신 색채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밝힌다. '빛의 신세계'는 바로 이러한 잠재적 스크린을 확인하는 전시이다. 그 스크린은 단지 빛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 아닌, 빛이 열어준 새로운 세계에서 빛에 대해 사유하게 하고 그 빛을 통해 예술의 정신성을 지각하게 만든다. 자연의 빛이 주는 숭고함과 초월적 세계관은 전자에너지의 힘을 얻어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었다. '빛의 신세계'를 열어 예술을 지각하게 하는 빛은 환상을 드러내거나 환영의 이미지를 드러내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확인하게 하거나, 빛을 바라보는 사람의 내면으로 다시 빛을 반사시켜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또한 자연의 빛을 재현하여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하거나 반대로 빛을 통한 어둠의 깊이를 확인하게 한다. 그리하여 자연의 막강하면서도 숭고한, 인간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위대한 한계점을 체험하고 인식하게 만든다. 다름아닌 정신적이면서도 눈부신 빛을 통해서 말이다. 빛에 대한 이러한 메시지가 이번 전시에 참여한 여섯 작가 김범수, 안두진, 양민하, 이상진, 임선이, 최종운의 작품으로 펼쳐진다. 애초의 물음, 빛이 가져다 준 새로운 세계에서 예술의 빛은 인간의 감성과 정신을 직접적으로 발현한다는 점에서 의미의 대상이 아니라 의미 그 자체로 함축된다. 예술의 빛은 가능태의 새로운 세계를 활짝 열고 스스로 빛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빛의 신세계는 언제나 열려진 예술의 신천지인 것이다. * 신세계를 여는 여섯 작가의 빛 ● 『빛의 신세계』展에 참여하는 여섯 작가 김범수, 안두진, 양민하, 이상진, 임선이, 최종운이 말하는 빛의 의미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범수_beyond description_영화필름_가변크기_2008

먼저 김범수는 영화필름과 라이트 박스를 이용하여 어두운 공간에 창을 만든다. 그가 만든 창은 빛이 투과되는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와 흡사한데, 화려하면서도 신비로운 문양을 통해 종교적인 엄숙함과 고요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기하학적인 문양과 색채는 만물의 창조원리이자 천상세계를 상징하는 빛의 존재론적 근원을 밝혀주는 정신성을 더욱 강조한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은 계시적인 밝음으로 인간의 성찰과 명상을 가능케 하는 선의 빛이자 어둠인 악을 물리치는 빛이다. 김범수는 이러한 종교적인 성스러움을 이루는 발원지인 빛을 영화 필름에 투영하여 작품의 메시지를 표현한다. 그의 전략은 인간의 일상적인 삶이나 욕망을 드러내는 육체적인 성행위 장면들이 담긴 필름을 가지고 스테인드글라스를 구성함으로써 빛이 가지는 숭고한 의미를 상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의 빛을 다시 인간에게 향하게 한다. 종교적인 엄숙한 빛이 인간의 정신을 깨우치듯이, 영화의 스크린은 어둠 속에서 인간에게 환상을 심어준다. 그의 작품은 빛이 내면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정신성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적 욕망을 표출하는 환상 그 자체임을 인식하게 만든다.

안두진_지평선 Horizon_종이에 아크릴채색_81.6×1252.5cm_2011

안두진의 빛은 환영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이미지들로 구성되는 색의 향연으로 볼 수 있는데, 그가 직접 명명한 이미지의 최소단위인 이마쿼크(ImaQaurk)로 이루어진 동굴을 선보인다. 안두진의 이마쿼크는 자연과 문명,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의 관계를 빛을 매개로 끊임없이 대립시키는 것이다. 그의 동굴은 빛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둠과 빛의 충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화면에서 빛은 어둠을 갉아먹고 붉은 세상을 드러낸다. 그의 동굴에는 두 개의 빛이 존재하는데 자연의 신비로운 빛과 인간이 밝히는 횃불이 그것이다. 두 빛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서로 팽팽하게 대치한다. 플라톤의 빛이 동굴로 들어와 현실의 그림자를 바라보게 하였다면 인간의 빛은 그 그림자가 환영임을, 단지 스크린임을 드러낸다. 그러한 이데아의 빛이 인간의 눈앞에 마치 없는 것이 보이는 것과 같은 환상을 만들어 낼 때, 인간은 스스로 빛을 밝히고 자신이 밟고 걸어갈 수 있는 단단한 땅을 확인한다. 안두진의 빛은 바로 이러한 이미지들의 충돌을 직접 체험하게 한다.

양민하_Meditation 1110~_인터랙티브 미디어 인스톨레이션_가변크기_2011

그런가 하면 양민하는 성찰의 빛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묵상 1110~」은 두 개의 원형 스피커를 통해 퍼져나가는 소리의 파장을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체험하게 한다. 수많은 상징들이 하나의 형상 안으로 집약되는 순간,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경종 소리가 들린다. 원형의 파장으로 확장되는 붉은 빛은 관람자의 참여에 의해 불규칙적인 빛으로 흩어진다. 빛의 에너지는 한 점으로 응축되었다가 어두운 공간으로 확장되면서 또 다른 에너지에 의해 간섭이 이루어진다. 그 간섭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시청각적 상징들이 서로 부딪쳐 혼란스러운 파동이 되고, 그 카오스의 에너지가 코스모스의 평온으로 되돌아가려는 몸부림이 바로 양민하의 빛이다. 그의 빛은 소리의 에너지가 시각화되어 평정심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내면의 성찰을 위한 명상의 길에 이르게 된다.

이상진_lighting talk, LED 및 혼합재료_200×150×205cm_2007

이상진은 전자 빛을 통해 자연의 빛을 재현한다. 그의 「Lighting Talk」시리즈는 인공적인 빛의 집합인 LED 집적물을 통해 특정한 형상을 드러낸다. 전자 빛의 집적은 태양이나 달과 같은 자연적 현상을 재현하는데, 빛이 순식간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속성을 이용하여 마치 태양이 뜨고 달이 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땅에서 거대하게 솟아올라오는 태양 빛은 끊임없이 하늘 위로 올라간다. 빛의 잔상이 사물에 맺혀지는 순간, 인간의 시각은 개별적인 작은 빛이 아니라 거대하고 둥근 3차원의 태양 빛을 지각한다. 그것은 단지 전자적 빛이 실제 태양을 재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태양의 빛 자체에 속해있음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상진은 전자 빛을 통해 태양과 달, 호수가 주는 편안함을 서정적으로 표현한다. 그에게 전자 빛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동시에 자연의 위대함 속에 속해있는 빛이다.

임선이_Trifocal sight 9_라이트젯 C 타입 프린트_155×123cm_2008

임선이의 빛은 밝음을 어둠으로 치환한다. 그녀는 특정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분산시켜 사물 이면에 있는 의미들을 파악하게 한다. 「3초점의 시선」은 인왕산의 양적인 높이를 땅속의 음지로 뒤바꾸어 놓는다. 그리하여 지도의 지면 밑으로 깊은 어둠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전략은 눈의 기능을 교정하는 안경을 조작하여 근경, 중경, 원경의 이미지를 동시에 포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등고선의 평평함이다. 그녀는 인왕산의 등고선을 음각으로 파내어 깊은 협곡을 만들고 빛의 자리에 어둠으로 대신하게 한다. 빛과 어둠의 교차는 산의 높이를 깊이로 바꾸어 놓는다. 즉, 사고의 범위를 한정하는 판단의 기준점을 변경하는 것이다. 깊은 협곡의 산 풍경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새롭게 만든다. 산의 정상을 강렬하게 비추는 빛은 협곡의 깊고 고요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녀의 빛은 어둠을 위한 다른 시선인 것이다.

최종운_virtical sea_스프링 커튼, 스테인리스 스틸, 모터, 센서_330×720×50cm_2010

빛은 최종운에겐 숭고함으로 다가온다. 그의 작품 「Vertical Sea_red」는 자연의 고요함과 긴장된 순간을 모두 경험하게 한다. 수직의 실 커튼이 장력스프링의 흔들림에 의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강렬하게 요동친다. 마치 거대한 쓰나미가 인간을 덮치는 공포와도 같이 그이 거대한 붉은 파도는 소리와 함께 관객들의 감각을 뒤흔들어 놓는다. 빛은 인간으로 하여금 대자연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느끼게 하지만, 자연과의 거리가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공포라는 어둠 속으로 한없이 빠져든다. 고요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하는 최종운은 사물의 운동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용수철이 움직이는 반복의 순간은 고요와 긴장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들에게 사물과 현상의 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붉은 파도가 잔잔한 물결이 되거나 쓰나미가 되는 것은 빛의 속성과도 같이 이중적으로 다가온다. ■ 백곤

Vol.20111022b | 빛의 신세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