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풍경

최준근展 / CHOIJUNKUN / 崔俊根 / painting   2011_1102 ▶︎ 2011_1129

최준근_sea67_캔버스에 먹_150×150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협찬/주최/기획 / JJ 중정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6:00pm

JJ 중정갤러리 JJ Joong Jung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118-17번지 네이쳐포엠 305호 Tel. +82.2.549.0207

돌의 풍경-쓰여진 그림 ● 최준근은 돌을 그린다. 그가 그린 돌은 검다. 제주도의 검은 현무암 파편이기 때문이다. 그 돌들은 제주도 바닷가에 있고, 그가 그린 그림은 그 돌들이 있는 풍경이다. 흰색 화면 전체는 사실은 바다이자, 흰색이자, 하늘이다. 화면은 모든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 안에 검은 돌들은 징검다리처럼 이어진다. 그리고 한 점의 그림 속에 그려진 돌들의 풍경은 다음 그림으로 건너간다. ● 최준근의 풍경은 크고 작은 여러 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은 커다란 한 장의 그림이다. 그림 전체는 연결되어 하나의 풍경, 제주 해안의 풍경을 이룬다. 아니다. 사실 그 풍경은 제주 해안의 풍경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혹은 작가의 마음속의 풍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내부의 풍경이다. 과연 그럴까? 아무래도 좋다. 그 풍경은 결국 보는 자, 관람자의 풍경이 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 누구의 풍경도 아니면서 또한 동시에 모두의 풍경이기도 하다.

최준근_sea51_캔버스에 먹_150×150cm_2011

검은 돌들은 먹으로 그려진다. 최준근은 큰 붓이 아니라 작은 붓들을 쓴다. 한 번 칠하고 두 번 바르고 자꾸 붓질을 쌓아 돌들을 그린다. 아니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도록 지시한다. 지시 받은 돌들은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림을 이루는 것은 흰색 배경과 검은색의 단단한 돌. 최준근의 그림은 그림의 대상인 사물의 존재를 지우면서 동시에 존재하도록 허용한다. 이 모순 속의 돌들은 돌이 아니고 검은 색이다. 배경 역시 하늘도 바다도 아닌 흰색일 뿐이다. 그러면서 검은 색은 돌이 되고, 흰색은 돌의 배경이 된다. 이 두 가지 무채색 사이에 그의 그림이 있다. 사실 그의 과거의 그림들에 비하면 놀랍도록 명료하고 단순해졌다. 이 단순함이 시간의 힘이고 그의 힘이다. ● 최준근의 그림의 배경이 되는 캔버스는 흰색 배경 이상의 역할과 기능을 한다. 그는 그것을 바다라고 부른다. 그 부름에 때문에 흰색은 바다가 되지만 사실은 그것이 바다인지 하늘인지 캔버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그 물결 없는 바다, 수평선 없는 바다, 그려지지 않은 바다는 여백이자 캔버스 자체이다. 이는 동양 그림에서 말하는 여백과도 다르다. 여백은 뭔가 그려지고 난 뒤의 가능성을 지시하는 개념적 공간이지만 최준근의 그것은 그런 가능성의 공간이나 보는 사람이 상상력을 펼치는 공간 이상의 어떤 것이다. 거기에는 존재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캔버스의 존재감은 어쩌면 그려진 대상인 돌보다도 강하다. ● 그의 그림을 보면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려진 돌들의 존재감 보다는 캔버스 전체의 프레임이다. 옆으로 긴 장방형 틀 안에 놓인 돌들은 그 다음에 눈에 띈다. 그림이 걸린 공간과 흰 사각형 프레임 사이의 존재론적 긴장감이 그의 그림을 보는 열쇠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아슬아슬하다. 즉 모던한 추상회화가 갖는 평면적인 특질들과 구상적인 드로잉과 같은 재현적 묘사 사이에 다리처럼 걸려 있다. 그것이 그의 그림이 보는 이의 눈길을 잡아 끄는 힘이다. 그의 그림은 여차하면 디자인적이 될 위험과 최소한의 묘사로 이루어진 미니멀적 재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최준근_sea66_캔버스에 먹_150×150cm_2011
최준근_sea64_캔버스에 먹_50×150cm_2011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절제이다. 때문에 그의 작업들 중 성공적인 것들은 팽팽하게 균형이 잡힌 바둑판처럼 긴장이 흐른다. 돌들은 귀와 변에 알맞게 놓여 세력과 집 사이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 마치 고수들의 초반 포석처럼 보인다. 한 수가 더 놓이면 균형이 무너지고, 다시 한 수가 놓이면 또 균형이 맞아가는 기나긴 대국. 그러므로 최준근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그려진 돌을 보는 것이 아니다. ● 최준근의 그림은 늘 초반 포석 단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중반의 치열한 접전이고, 종반의 끝내기이기며 심지어는 마지막 초읽기 속의 피 말리는 계가이기도하다. 결과는 반집 승부이거나 아니면 빅.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은 한판의 바둑을 보는 것 같다. 관객은 머리속에서 돌들의 배치를 좌우로 옮겨보고 앞뒤로 밀고 당기며, 초반부터 끝내기까지의 과정을 해보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얼른 보기에는 차갑고, 계산적이지만 조금만 집중하면 한판의 바둑처럼 즐길 수도 있다. 문제는 보는 사람이 그림 앞에 얼마 동안 서 있느냐이다. ● 걷기와 바라봄의 차분한 결과물인 최준근의 그림들은 단순하다. 그 단순함은 돌의 침묵이나 바닷물의 일렁임과도 같다. 멀리서 보면 점들로 보이는 그의 그림은 가까이 가보면 돌이 된다. 그가 그린 돌들은 먹으로 그의 획들의 집적이다. 물론 서예의 그것처럼 획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획들이 쌓여 이루는 돌들은 묘사된다기 보다는 쓰여진다. 그리기가 아닌 쓰기로서의 이미지 제작은 재현으로부터 사실은 멀어진다. 그의 그림은 재현이 아니면서 재현의 효과를 내고, 엄밀하게 구성되었으면서 구성으로부터 멀어진다.

최준근_sea70_캔버스에 먹_150×150cm_2011
최준근_sea68_캔버스에 먹_65×200cm_2011

최준근의 그림 속의 돌들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언급했던 고호의 구두처럼 존재, 대상을 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점으로 사라지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 느낌은 기이하게도 원元대의 예찬이나 황공망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그가 최근 취미처럼 붓글씨를 쓰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글씨는 초보라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초보인가 능숙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시각 혹은 취향의 문제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사용하는 장방형의 캔버스 규격은 화선지나 한지의 규격과 유사하다. 혹은 기다란 두루마리 그림과도 같다. ● 동양의 옆으로 펼쳐진 두루마리 그림들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그럼 그림들은 산점 투시, 혹은 걸으면서 바라본 것처럼 그려지고 같은 방법으로 보여진다.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올 필요 없이 부분들을 보아서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는 그림들. 최준근의 돌 그림, 돌의 풍경은 한 곳에서 바라보는 서양 전통 회화의 구성과 방법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걸으면서 보아야 한다. 실제로 걷지 않더라도 마음 속으로. 그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끝없이 제주 바닷가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는 사람들 또한 그림 속을 걷기를 권한다. 느릿하고 천천히... ■ 강홍구

Vol.20111103h | 최준근展 / CHOIJUNKUN / 崔俊根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