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종완展 / CHOOJONGWAN / 秋宗完 / painting.sculpture   2011_1121 ▶ 2011_1210 / 일요일 휴관

추종완_탈(脫)-Emergence_혼합재료_145×112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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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1121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 Gallery Bundo 대구시 중구 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53.426.5615 www.bundoart.com

추종완의 탈 脫 ● 서양화가 추종완은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미술 평단에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그는 이제 현대 미술의 중심이 된 영국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로 언급되고 있다. 그의 독창적인 작품에 관해서 지금까지 여러 비평이 줄을 잇고 있다. 내가 본 평론은 모두 아홉 개지만(이 가운데에는 내가 썼던 글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고충환, 김영동, 김옥렬, 김용민, 안규식, 조은정, 하정화의 글, 그 밖에도 글쓴이 불명까지)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추종완의 작업에 이처럼 많은 평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다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만큼 전시경력이 누적되었다는 점, 둘째는 작업 방식과 주제가 뚜렷하다는 점이다. ● 그의 회화나 입체 작업은 전체적으로 검은 색이 지배한다. 숯검정이라는 표현은 여기에 적당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는 공통적인 분위기가 있다. 인물이라고 하는 게 맞을까? 속이 텅 빈 흔적에 불과한데, 어찌 되었든. 그 인물들에 관한 여러 비평은 대부분 부정적인 언술로 채워져 있다. 그 단어나 표현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 비극, 껍질만 남은 몸, 파괴적인 형태, 자아상실, 얼굴이 생략됨, 외피, 공포와 폭력, 끔찍한 거울, 폭격을 맞은 듯, 일그러짐, 잔학성, 훼손된 상반신과 멀쩡한 하반신의 대조, 정신과 육체의 괴리, 가식과 위선, 페르소나, 자기비판.

추종완_"탈"(脫) Emergence_혼합재료_225×162cm_2011
추종완_탈(脫)_Emergence_캔버스에 아크릴, 색연필_182×227cm_2009

이렇다면 분명해진다. 추종완은 이러한 일련의 '나쁨'을 현존 속에 불러들이면서 인간성의 회복을 바랄 것이다. 순수함, 진실됨, 착함, 아름다움, 자기완성, 즉 진선미로 구축된 이상은 작품 너머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작가가 잔인한 폭력 묘사로 쾌락을 얻는 취미를 가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만약 그런 성향을 가졌다면 좀 더 직접적이거나 사실적인 묘사를 했겠지만 그의 그림 속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재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것으로 유려하게 마무리된다. 사실 이것은 적당히 윤리적이며, 영리한 선택이다. 숱한 전자 게임들 속에서 유저의 총을 맞고 부서지는 적들의 몸은 주검을 남기지 않고 이내 재가 되어 사라진다. 게임을 즐기는 이들에게 죄책감을 덧씌우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 하지만 그런 게임들과 다르게, 추종완의 미술 작품을 대하는 우리들은 이상한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게임에서 희생당하는 목표물들은 악당, 적군, 괴물, 외계 생명체 같은 타자들이다. 하지만 작가의 그림 속 인물은 바로 우리들, 자아일 수 있다. 이 자아는 애당초 헛된 욕망으로 가득 찬 인격이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서로 다른 세계관의 창시자들은 후대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비판 이론으로 계승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어느 정도 일치되는 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돈이나 권력에 허위 욕구(false needs)에 사로잡히는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다. 그림 속에서 얼굴이 사라져서 생겨난 익명성 혹은 무차별성은 사람들이 커다란 사회 속에서 자기의 희미한 정체성을 그들이 소비하는 물건의 값어치로 대리 보충하는 상황으로 표현된다.

추종완_탈(脫)-Emergence_혼합재료_145×112cm_2010
추종완_탈(脫) Emergence_혼합재료_145×112cm_2011
추종완_탈(脫) Emergence_혼합재료_130×162cm_2011

물질적 풍요나 사회적 명예도 결국 껍데기만 남았다는 마르쿠제의 근대성 비판은 한 술 더 떠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에 의해 모든 대상이 원래 쓰임새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호로만 작용하는 탈근대성 비판으로 과격해진다. 근대성이 재가 되어 덧없이 탈脫해버리지만 그 포스트 모던한 존재가 그렇다고 무無는 아니다. 현실 속에서 인간은 여러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여전히 사회적 존재이며, 추종완의 작품 속에서 인간은 여전히 형상이 남아있는 재현적 대상이다.

추종완_Emergence_혼합재료_17×60×19cm_2010

여기에는 작가의 반성적인 태도가 어쩔 수 없이 들어간다. 화가 본인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다. 따라서 현실이 강제하는 욕망으로부터 초연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일기를 쓰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일기는 다른 사람들이 읽을 것이라는 상황을 염두에 둔 이중성을 가진다. 자신에게 몰두하면서 동시에 남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일기와 같이 그림 그리기라는 행위가 전시로 이어져 남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미술의 숙명이다. 여기에 작가는 자신의 작업 주제와 부딪혀 모순을 낳는다. 겉과 속이 일치할 수 없는 일기쓰기 그리고 그림 그리기를 통한 진실성의 지향?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점은 있다. 변증법으로의 탈주라면 그것은 가능하다. 작가는 내면과 외관의 합일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상태를 꿈꾸며, 자신의 미술을 통해 그러한 꿈조차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이 현실에서 같이 벗어나자고 끝없이 부추긴다. ■ 윤규홍

Vol.20111122g | 추종완展 / CHOOJONGWAN / 秋宗完 / painting.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