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개의 프롤로그 Five Different Prologues

갤러리 스케이프 기획展   2012_0113 ▶︎ 2012_0225 / 월요일 휴관

정수진_Drawing_종이에 펜, 크레용_36×26cm×2_2000~2

초대일시 / 2012_0113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안규철_이명호_김성수_정수진_김명범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스케이프 GALLERY skape 서울 용산구 한남동 32-23번지 Tel. +82.2.747.4675 www.skape.co.kr

프롤로그를 위한 프롤로그 ● 전시의 막을 올리기 전에 있었던 이 전시의 '프롤로그'는 김성수 작가의 오래된 드로잉을 우연히 보게 된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십년이상의 시간을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채 시공간의 변화에도 상관없이 작가의 작업실 한 구석에 돌돌 말린 모양새로 남겨진 그 드로잉을 펼쳐 보게 된 것이다. 드로잉을 펼치자 낡은 종이에서 풍기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며 근 몇 년간 보았던 작가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무언의 정수가 머릿속을 꿰뚫으며 지나가 버렸다. 그것은 익히 알고 있던 중심된 세계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작품 내부의 완성미가 구속하는 힘으로부터 벗어난 주변부, 즉 외부로부터 일어난 프롤로그였다. ● 프롤로그(prologue)는 연극, 오페라와 같은 무대용 작품과 소설에서 서막, 서곡이라 불리 우며 작품 전체의 줄거리나 머리말, 개막사로 주로 기능한다. 또한 프롤로그는 본격적으로 작품에 진입하기에 앞서 작품 안에서 서술되지 않은, '앞서서 진행된 이야기'로 독립된 구성을 취하기도 한다. 본 전시에서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의미에 주목하여 작품의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부의 구조를 프롤로그로 보고, 이를 통해 작품을 보는 다른 시각을 발견하고자 한다. 사실 프롤로그는 독자가 알지 못한다 해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별 지장은 없다. 허나 작품의 순수한 완성미, 완벽한 구성, 그 승화된 감흥만을 계속하여 좇는다면, 우리가 영원히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작품에 따라서는 초기의 단상들, 비하인드 스토리나 연출의 의무로부터 벗어난 생각의 잔여물들이 프롤로그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안규철, 이명호, 김성수, 정수진, 김명범의 작품을 소개하는 각각의 프롤로그는 익히 알고 있던 작가들의 중심된 작품에서 외부로 시선을 돌린 주변부의 단편들이다.

안규철_겨울작업 IV_종이에 펜_54×39.5cm_2011
안규철_Snowballs_혼합재료_50×50×7cm_2011

안규철의 프롤로그 : 녹지 않는 겨울의 농담 ● 관념의 허를 파고드는 아이디어와 가설적 재료가 주는 가벼움으로 개념미술의 무게감을 떨쳐낸 안규철의 작업은 주변의 세계와 끝없이 교감해왔다. 「얼어붙은 농담(Frozen jokes)」은 별 관심을 두지 않던 계절, 온도와 같은 외부의 조건에 반응한 작업이다. 겨울의 한기는 공간 속으로 자꾸만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내부의 거처를 좇는 겨울의 상념으로부터 작가는 이 생각의 잡동사니들을 외부 공간인 겨울 속으로 다시 이끌어낸다. 무관심할 수 있는 계절적 상황에 재치 있게 대응한 이번 작업은 그가 매일 한두 개씩 끄적여 온 일상의 단상들로부터 출발한다. 미완의 스케치들로 구성된 몇 십 개의 아이디어들은 후에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으로 제작될 초기 드로잉으로 무한한 변모의 에너지를 품은 것들이다. 게 중 몇 개의 아이디어를 추려 드로잉 후 설치 작업으로 구체화한 「얼어붙은 농담」은 작가 특유의 가볍고 재치 있는 화법이 겨울의 상황을 풀어낸 것이다. 점토로 빚은 녹지 않는 눈사람과 눈싸움 공, 앞뒤 굽이 뒤바뀐 구두, Love 빙판 등 겨울 작업은 그 엉뚱함이 현실적으로 무용할 수 있지만 권태와 무의미함을 유희적으로 사고하는 농담을 선사한다.

이명호_작업 전경_2011
이명호_작업 전경_2011

이명호의 프롤로그 : 사진에 앞서서 일어난 과정 ● 이명호가 「사진 행위」 프로젝트의 첫 번째로 선보인 「나무(Tree)」연작은 재현을 위한 무대를 완벽하게 수행하며, 캔버스 앞에 놓인 사물의 재현을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저울질해 낸다. 흰 캔버스를 뒤에 두고 말끔히 재현된 나무는 본래 위치한 장소로부터 분리된 채 대상화 되어 즉물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정감을 동시에 준다. 이렇게 사진 매체가 재현하는 바에 대한 작가의 고민은 완벽에 가까운 연출력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철저히 재현된 대상 그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사진 행위에 앞서, 대상을 잘 재현하기 위해 그가 준비했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완성된 사진을 보는 방식에 다른 관점을 제시할 가능성을 지닌다. 영상 다큐멘터리에 담긴 과정의 내러티브는 결과물이 주는 절제된 시각적 조형미와는 역설적인 장면들로 가득하다. 사진 촬영을 위한 단계들은 장소와 나무가 선정되고, 스탭들과 크레인 등 중장비가 모이고, 다함께 천을 들어 세운 다음,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소란스런 퍼포먼스의 연속이다. 나무 한 그루를 카메라 앞에 세우기 위해 시간, 바람, 온도, 빛 등 환경적 조건을 인내한 과정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장대한 프롤로그로 사진 행위를 보다 확장된 시공간 속에서 인식하게 하고 결과물의 범주를 여러 각도로 열어 놓는다.

김성수_Facade 30_종이에 유채, 왁스_270×675cm_2001
김성수_Window_크래프트지에 목탄_100×109.5cm_2000~1

김성수의 프롤로그 : 투영되지 않는 창의 파노라마 ● 매끈한 표면 처리를 통해 투영될 수 없는 현대인의 실존감, 그 고독과 소외의 정감을 회화로 풀어내고 있는 김성수의 「메탈리카(Metallica)」연작은 색과 선만의 조직으로 표면성이 극대화된 작업이다. 현대인의 정서를 도시의 전경으로부터 접근하고 있는 현 작업의 단초는 프랑스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작가에게 '거리감'에 대한 감각을 몸소 체감케 하였으며, 외부로부터 그는 삶의 주거지인 건물의 내부를 욕망하게 된다.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양에 가려진 창은 외부인에게는 내부를 투영할 수 없는 장벽이자, 경계선이었다. 이렇게 2000년 초반에 진행된 「파사드(Facade)」연작은 창이 빼곡한 건물의 입면을 여러 조각으로 분할하여 그린 드로잉으로, 컴컴한 창들이 연속된 파노라마를 구성해 낸다. 내부를 투영할 수 없는 창은 더 이상 시선을 위한 창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문화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개인의 실존을 해석한 파사드 작업은 이후 그가 한국으로 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대도시의 밤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네온의 빛이 컴컴한 창을 대체한 것이다. 2007년 사루비아에서의 개인전 『에페메르(éphémère)』에서 작가는 회화의 표면을 직접 공간 속으로 개입시켜 네온의 빛깔과 건축물의 구조로 공간을 해석했다. 형광 빛의 다채로운 색감으로 위장된 도시의 그늘은 과잉된 표면 아래에 결핍과 부재를 더더욱 극적으로 드러내는 중이다. 표면의 환상을 한 꺼풀 벗기어낸 그곳에 컴컴한 어둠의 창들이 놓인다.

정수진_Drawing_종이에 잉크_36×26cm_2000~2
정수진_Drawing_종이에 잉크, 크레용_30.5×23cm_2011~12

정수진의 프롤로그 : 그리기의 유희 ● 정수진의 회화는 다양한 사물과 등장인물, 풍경, 그리고 회화의 여러 양식이 혼재된 다층적인 구성을 지닌다. 빈 틈 없이 빼곡히 채워진 화면은 무질서한 인상을 주지만 각각의 요소들을 둘러본다면 나름의 질서가 화면의 곳곳을 치밀하게 조직한 시각적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화면의 복합적인 레이어를 하나씩 벗겨내다 보면 회화의 완고함과 동시에 이를 비켜나가는 가벼운 필치를 동시에 엿볼 수 있다. 거칠은 선, 만화적 필치가 색과 형상들과 함께 공존하는 그의 화면은 다차원적이다. 얇은 종이에 스윽스윽 가벼운 필치로 구성된 드로잉은 캔버스의 진중한 논리로부터 한결 자유로운 모습이다. 종이 위를 부유하는 선과 형상들은 그리기 자체를 충분히 유희해 보인다. 드로잉에는 자주 만화의 형식이 등장하는데, 이때는 회화에서 볼 수 없었던 순차적 내러티브까지도 발견된다. 어릴 적 만화가의 꿈을 꾸기도 했다던 작가의 만화 드로잉은 기본적 형식만을 취할 뿐 이 안에서도 시각적 언어에 대한 실험은 계속된다. 자신이 직접 고안한 문자들이 기성 문자를 대체하며 읽을 순 없으나 볼 수 있는 내러티브를 구성한 것이다. 회화에서 거부된 일련의 연상들과 순차적 내러티브는 작가만의 시각언어로 변형되어 읽을 수 없는 텍스트를 시각적 형상을 통해 유희하는 묘미를 준다.

김명범_무제_사슴 박제, 나뭇가지_130×130×130cm_2011
김명범_낙화_단채널 비디오_00:01:00_2008

김명범의 프롤로그 : 사물과의 기이한 대화 ●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 일상적인 삶의 문맥을 재해석하는 김명범의 설치 작업은 공간 혹은 환경과 사물과의 뜻밖의 만남을 통해 구성된다. 그가 조합한 사물들 사이, 사물과 자연물 간, 사물과 공간 사이의 관계는 일상 공간, 삶의 문맥에 낯설은 마술적 순간을 부여한다. 박제된 사슴에 나뭇가지의 뿔을 붙여 공간 속으로 확장시킨 설치 작업 「무제(Untitled)」는 생과 사의 경계를 거슬러 주검이 환생한 듯 기묘함과 애잔함을 준다. 박제 사슴 작업과 관련하여 한 조각의 뼈에서 자라나는 나뭇가지를 그린 드로잉은 생과 사 사이에서 끝나지 않는, 다시 시작될 또 다른 여정을 암시해 낸다. 삶을 통찰하는 작가의 시선은 공간과 시간적 요소를 삶의 영역으로부터 초월해 접근해 낸다. 사물은 여기서 생이 관장하는 세계를 너머선 영속적 존재를 대변한다. 이로부터 일상적인 삶의 문맥을 해체시키는 그의 작업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의 범주에도 깊숙이 관여된다. 개별 작품에 있어서는 의인화된 사물을 통해 대상 속으로 시간을 내포시키기도 하고, 운동적인 이미지로 시공간의 현전을 무상하게 초월해내기도 한다. 그간 선보인 적인 없는 영상 작업은 시공간과 사물의 관계를 해석하는 그의 직관적 시선을 살펴볼 수 있다. 천정에서 갑작스럽게 추락하는 화분을 촬영한 「낙화(Falling flower)」는 순차적인 시간 속에서의 찰나, 그 무상한 순간을 극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비디오카메라의 시간성은 그의 작업에서 삶의 속도로부터 사라진 존재를 즉흥적으로 되살리며, 상대적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 많은 작가들이 전체 작품에 앞서 프롤로그를 구상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개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수는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프롤로그에 머무른 채 수정, 반복만을 거듭한다. 전시에 모인 다섯 명의 작가들은 독자적인 방향으로 형식과 개념적 세계를 형성해 왔다. 그들의 프롤로그는 미완이거나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채로 다락방에 놓인 것도 있었고, 다이어리 한구석에 소소한 단상인 채로 남겨져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프롤로그는 완고한 작품 세계에서 볼 수 없었던 주변부의 이야기나 과거의 문맥을 이루면서도, 끊임없이 전체 작품의 의미에 다시 개입될 가능성을 지닌다. 안규철의 겨울 단상들, 이명호의 영상 다큐멘터리, 김성수의 파사드 드로잉, 정수진의 만화 드로잉, 김명범의 짧은 영상과 드로잉은 작품의 주변부 혹은 뒤편에서의 잠재적인 생성물로 작품의 내부를 다시 회자시키는 힘을 갖는다. 그것은 작품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의 전환을 가져올 문맥의 힘이다. 외부로부터 내부로 향하는 여정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작품 전체의 깊은 의미를 발견해 낼 수도 있다. 이는 통일된 작품의 구조에서 접근하지 못했던 다른 면들로, 통상적으로 알던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열린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 심소미

Vol.20120113f | 다섯개의 프롤로그-갤러리 스케이프 기획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