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공성훈展 / KONGSUNGHUN / 孔成勳 / painting   2012_0315 ▶ 2012_0425 / 월요일 휴관

공성훈_눈바람_캔버스에 유채_227.3×181.8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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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15_목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12_0330_금요일_03: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OCI 미술관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자연 속의 역사, 또는 묘사 속의 서사 ● 앞이 안보일 정도로 폭설이 휘몰아치는 날, 일산의 작업실에서 본 공성훈의 바다풍경은 더욱 냉랭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태풍이나 폭설 같은 대규모 기상현상은 인간을 더욱 자신 안으로 움츠러들게 하고, 인간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미소한 일부임을 뼛속 깊이 느끼게 한다. 제어할 수 없는 대자연의 힘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스스로의 자율성을 구가하는 듯 질주하는 현대문명 또한 대지의 얇은 표면 위에 얹혀진 취약한 존재로 상대화시킨다. 악천후를 비롯한 기상현상은 인간이 그어놓은 인위적 선들을 무화시킨다. 그것은 그의 작품「눈바람」(2011)처럼, 하늘과 땅, 또는 바다의 경계조차 사라지게 한다. 공성훈의 최근 작품들에는 우리나라에 그런 곳이 있었나 싶은 광대한 시공간의 지평을 담아낸다. 2011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 풍경들은 낯설지만 이국적이지는 않다. 풍경 안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관광객이겠지만, 장면들은 아늑한 휴양지 같은 분위기가 없다. ● 작가에게 감흥을 주었던 실재하는 장소에서 출발한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중화되어 있다. 장면 속 시간은 공간보다 더욱 불확실하다. 태종대에서 담배 피우는 남자, 제주 해안가에서 돌 던지는 아이들이 나오는 작품은 밤인지 낮인지 모호하다. 그의 바다는 푸른 바다가 아니라, 푸르게 칠해진 것 같다. 또는 시퍼렇게 멍이 든 듯 창백하다. 형상이 없는 그림에 비한다면 지시대상을 알아볼 수 있지만, 정확하게 특정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지구상, 역사상 어디에나 있는 돌, 물, 하늘, 사람들일 뿐이다. 그렇다고 추상적인 관념 속에서 꺼낸 것은 아니다. 공성훈의 작품은 현실과 밀착하면서도 현실로부터 빠져나가는 미묘한 차원, 그 경계 선상의 게임으로 인해 흥미롭다. 작품의 소재가 된 그 자체로 멋진 풍경들은, 근·현대 미술에 있어 작품의 진정성의 기준이 된 작가의 창조성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으며, 소재주의라는 상투성에 매몰될 위험을 감수한다. ● 그는 현실을 중시하지만, 그것은 그 다음을 보여주기 위한, 또는 말하기 위한 기본적인 지지대일 뿐이지, 그 자체가 전유나 탐닉, 시각적 소비의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작가가 숨겨놓았을지 모르는 의미를 찾아내 읽기 보다는, 관객의 상상력으로 다시금 씌여지도록 여백을 남겨놓는다는 점에서, 고전적이거나 키치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적이다. 드높은 하늘, 파도치는 바다, 깊은 계곡은 언뜻 보기에 그린 것인지 사진으로 찍은 것인지 모호할 정도로 정밀하게 그려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계에 충실한 고전적 미가 아닌 낭만적 숭고를 자아낸다. 그러나 관객이 무한정 감정이입하기에는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그의 풍경은 전통적 낭만주의에 내재된 종교적 초월성이나 막연한 신비주의와도 일정 정도 거리를 둔다. 전시 작품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바다 풍경은 압도적인 시공간의 힘을 전달한다. 여러 매개를 거치는 미디어와 달리, 회화적 직접성으로 구현된 바다는 상징적으로 코드화 할 수 없는 현실계와 비교될 수 있다.

공성훈_돌던지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3×181.8cm_2012

그의 작품에서 파도는 형태이자 힘이다. 힘은 형태를 만들어내고 또한 형태를 와해시킨다. 그것은 고정되지 않으며 묶어둘 수 없다. 매순간 밀고 밀리는 파도는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으로 채워진 공간이 된다. 작품「파도」(2011) 시리즈는 매순간 형세를 달리하는 하얀 물거품을 내는 파도들의 면모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거친 붓질 자국이 표면에 남아있는 바다 풍경은 세계를 보는 투명한 창과 매체의 물질성이 공존한다. 그것은 쿠르베의 후기 바다 풍경화처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연결시킨다. 묶여 있는 개나 천박하게 불 밝힌 모텔촌, 진정한 밤이 없는 근린 자연 등이 담긴 그의 이전 작품이 일상적인 풍경 가운데 은유와 풍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최근 그림은 작가의 개입이 줄어들었다. 그는 장대하고 역동적인 자연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의 구경꾼 같은 작품 속 등장인물과 비슷한 태도를 가진다. 익명적인 그들은 비록 뒷모습이지만 심란한 우울함이 묻어난다. ● 거기에는 예술적인 삶은커녕, 평범한 삶을 살기에도 힘든 어두운 시대의 정서를 읽는 작가의 관점이 드러난다. 바다나 하늘은 한정지을 수 없는 현실을 표현하지만, 그 앞에 서있는 이들은 그러한 현실과 맞서 있는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인 인물들은 아니다. 그들은 현실 속에 깊숙이 들어가 얽혀있지도 않고, 현실에서 완전히 면제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한 발짝 뒤로 빠져 있다. 이전의 영상 설치작품에서 주연배우로 등장하여 자신과 세계에 대해 재미있게, 때로는 충격적으로 발언하려 했던 표현적 방식과 많이 다르다. 공성훈은'설치에서 그림으로의 여정은 내 안으로 들어오는 작업'이었지만, 그러나'내 자신을 표현의 하드 코어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적이다. 낭만주의적 예술가상에서 전형적인, 밑도 끝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창조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필터링'하고'샘플링'하며'느끼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 ● 그것은 방관자의 입장이기 보다는, 더 멀찍이 있지만 더 넓고 근본적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의지로 읽혀진다. 그의 작품을 처음 본지는 20년이 넘었지만, 세상을 보는 태도는 보다 냉정해졌고 작업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현실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으로 이동했고, 현실의 외관 뿐 아니라 그 원동력 또한 포함한다. 역동적인 자연 현상의 지배하에 있는 하늘이나 바다는 더 근본적인 현실이 표현되는 장이다.'바다'라는 전시 부제는 풍경을 이루는 구체적 대상보다는 원소의 차원을 암시하며, 그의 풍경이 단지 자연의 외관이 아닌 자연의 내재적 힘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거기에는 제주 특유의 시커먼 돌, 계곡. 물, 바람, 그리고 불꽃놀이 장면 등으로 첨가된 불까지, 자연을 이루는 근본적인 원소들이 등장한다. 작품「눈바람」(2011)이나「불꽃놀이」(2012)는 모든 것을 유동적으로 만드는 강력한 자연현상이 지배적이다.

공성훈_갯벌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08

작품「구름과 머리카락」(2012)은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화면 전경에 머리카락을 날려서 원소들의 움직임 속에 인간의 감정이나 몸 또한 섞어 넣는다. 원소들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격렬하게 상호작용한다. 그것은 질서가 태어나려는 태초의 풍경, 아니면 다시 혼돈으로 해체 되려는 묵시록적 풍경에 가깝다. 태초와 종말 사이의 가운데 토막은 생략되어 있음은, 현재의 재현보다는 전후의 생성과 소멸에 보다 관심을 쏟는 것이며, 가혹한 시간의 시험 속에서 점차 가속화된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연령대가 반영된 것이다. 물론, 자연 풍경이 압도적인 그의 작품에서 인간 및 역사는 보다 거대한 자연의 주기 속에 포함되어 있을 뿐, 생략되어 있지는 않다. 그의 작품에서 현실계는 세계 뿐 아니라, 인간의 몸과 마음도 포함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에는 바다와도 같은 원초적 무의식이 내재해 있으며, 그것이 의식과 이성을 추동한다. ● 어떤 바다 풍경에서는 절지동물로 분한 이전의 괴기스러운 자화상이 튀어나올 듯, 현실계는 계측될 수 없는 차원에 있다. 요즘 작품에서는 심해의 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풍경자체가 으르렁거리는 괴물 같다. 어떤 형태도 어떤 색깔도 만들어낼 수 있는 자연의 만능 캔버스인 하늘 또한 마찬가지이다. 공성훈의 그림은, 현실을 넘어 미혹을 낳는 미디어 지배의 사회 속에서 그 모든 것이 비롯되었을 원초적 힘을 불러낸다. 젊은 시절 공대도 다녔고 여러 미디어를 섭렵해왔던 그에게, 회화는 그 원초적 힘을 다시 끌어내는 유력한 수단이다. 그에 의하면, 작업구상과 과정의 분리와 매뉴얼화가 가능한 미디어 작업에 비해, 회화는 매순간이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그것은 매순간이 도전이며 도약이고, 또한 좌절이다. 그는 회화가 협업보다는 자기주도적인 과정이어서 그만큼 희열도 크고 절망도 깊다고 말한다. 회화는 머리나 손끝으로만 조작되는 미디어 작업과 달리, 손 아니 온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물이라는 주제와 관련시킨다면, 작가는 현실의 바다에서 헤엄치듯 그린다고 할 수 있겠다.

공성훈_낚시_캔버스에 유채_115×219cm_2012

그것은 단지 관념적 시각이나 빈약한 개념, 또는 이미 조작되어 있는 인터페이스를 터치하는 손가락 끝이 아닌, 온몸으로 통과하는 현실인 것이다. 시시각각 그 방향과 속도를 가늠하며 나아가지 않으면 익사하거나 뒤로 떠밀려갈 수밖에 없는 급류의 이미지는 현실계 그 자체로 다가온다. 이러한 불확실한 흐름 속에 21세기의 화가가 있다. 회화에도 의식적 무의식적 코드화가 스며들어 날렵한 감각성은 둔탁해지고 길들여질 수 있지만, 모든 그림들이 감각적으로 한 번에 휙 잘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림 그리기는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과 비슷하다. 가령 작품「돌 던지기」(2012)에서는 전경의 아이 셋이 사나운 하늘 아래의 바다에다 돌을 던지고 있는데, 즐거운 놀이인지 무모한 도전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리기는 또한 작품「낚시질하는 남자」(2010)처럼 파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낚시하는 사람의 처지와 같다. 붓은 대어를 낚기 위해 밀고 당기는 낚싯대와 비교될 수 있다. ● 여기에서는 눈과 손가락 끝만 아니라, 온몸이 현실의 감지기가 되어야 한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파도와 그 위에 펼쳐진 불투명한 하늘은 뭐가 튀어나올지 예상할 수 없는 원초적 혼돈 그자체이다. 풍경 속 자그마한 인물상들은 일련의 이야기를 시도하면서 완전한 추상적 혼돈으로 와해되는 것을 저지하려 한다. 풍경 안에 배치된 작은 인물상들은 풍경의 일부이며, 작가나 관객이 풍경, 또는 풍경화를 보는 관점을 공유한다. 뒷모습이나 실루엣만으로 나타나는 그들은 풍경에 비해 비중이 작다. 특히 노을 풍경이 그러하다. 작품「노을-섭지코지」(2011)는 가족, 연인 등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노을을 바라보며, 지평선 부근에는 작은 십자가가 빛난다. 십자가는 반 고흐의「별이 빛나는 밤」에 나오는 교회의 첨탑처럼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기 보다는, 속세의 일부에 파묻혀 있다. 관광객들이 노을을 보는 풍경인「노을」(2012)에는 대자연이 연출하는 빛의 계열이 펼쳐진다. 공성훈의 풍경은 그의 작업실에서 그릴 수 있는 최대 크기가 150호임에도 불구하고, 기념비성을 가진다. ● 그의 풍경은 인간이나 역사에 비해 더 많은 비중을 둔 자연의 몫을 보여준다. 작품「나무」(2011)는 화면 전체를 뒤덮는 늘어진 나뭇가지와 뒷면에 희미하게 지나간 비행기 지나간 자국을 대조한다. 거기에서는 인공적 사물이 긋는 선과 자연이 긋는 다양한 선이 비교된다. 작품「형제 바위」(2011)에서 암벽으로 전경을 막아놓고 중간에 뚫린 하늘 아래의 형제바위는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지나간 흔적을 무심히 바라본다. 비행기는 전경의 큰 암벽과 대조되는 눈부신 빛으로 인해 공중 폭발한 것 같은 모습이다. 막강한 화력과 속도로 전쟁과 경쟁을 낳는 현대문명의 총아가 그어 놓은 선은 마치 바다 위로 배 지나간 자국같이 순간적일 뿐이다. 그것은 암벽이나 나무처럼 자연이 만들어낸 선보다 일시적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역사는 자연사에 포함된다. 역사는 서술되지만, 자연은 묘사된다. 공성훈의 작품은 정밀한 묘사 가운데 서사를 끼워 넣는 방식을 통해 자연주의와 리얼리즘 간의 오랜 반목과 대결을 종합하려 한다.

공성훈_파도(1)_캔버스에 유채_149×200cm_2011

한국 미술계에서 회화는 한 극단에 너무 큰 이야기(메타 서사)가, 다른 한 극단은 지엽말단의 소소함 사이에 자리하곤 했다. 전자는 80년대의 민중미술에서, 후자는 2000년대 미술시장을 휩쓸었던 극사실주의 계열의 그림에서 그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간의 역학관계 또한 비슷하다. 90년대에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세대가 그 중간에 있다. 공성훈의 최근 작품에서 풍경은 자연주의적 묘사에, 인물은 리얼리즘적 서사에 근접한다. 가령 바위로 둘러싸인 심연을 그린 작품「폭포」(2010)나, 움푹 파인 계곡과 폭포 가장자리에 서 있는 남자를 그린「폭포에서 담배 피는 남자」(2012), 무한한 시공간의 주름을 간직한 암벽 아래의 심연을 내려다보며 한 남자가 웃통을 벗고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작품「담배 피우는 남자-태종대」(2011)는 묘사와 서사 간의 역학관계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 심연 가장자리의 등장인물은 실연이나 파산으로 인해 자살하기 일보 직전일까? 비행기구름과 형제 바위, 또는 나뭇가지가 나오는 풍경 또한 분단의 현실 같은 것이 떠오른다. ● 공성훈의 작품은 그림을 그리는 두 가지 근본적인 태도와 형식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깊이의 문제, 다른 하나는 표면의 문제이다. 서사(narration)는 깊이와, 묘사(description)는 표면과 관련된다. 전자는 리얼리즘에서, 후자는 자연주의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의 작품은 양극 사이의 역학관계가 있다. 두 유형의 대조 항은 상호보완적이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자연적 요소에 대한 정밀한 묘사는 자연주의적이다. 사진기의 도움도 얻은 대상에 대한 과학적 관찰은 순간적인 기상현상이나 물질의 흐름을 정확하게 기록하게 한다. 그것은 자연의 한 단면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에 충실하다. 반면, 등장인물들은 자연을 무대로 하는 이야기적 요소로, 시대를 보는 작가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다. 마틴 제이(Martin Jay)는『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scopic regimes of modernty)에서, 문학이론가 루카치(Lukács, György)가 리얼리즘 소설과 자연주의 소설을 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서사와 묘사의 구별을 미술사에 적용한다.

공성훈_폭포_캔버스에 유채_154×163cm_2012

마틴 제이에 따르면 리얼리즘은 전형적이고 본질적인 깊이를 다룬다. 서사는 어떤 문학적 텍스트의 단편적이고 개별적 사실들을 넘어서 있는, 의미에 대한 어떤 전형적 의식을 산출한다. 총체가 아닌, 단편에 머물러 있는 자연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은 모더니즘에 대한 대항 논리를 루카치에게서 상당부분 빌어왔던 한국의 1980년대의 진보적 문화담론의 예에서 발견된다. A. 아이스테인손(Astradur Eysteinsson)은 『모더니즘 문학론 : 그 개념에 대한 연구』(The Concept of modernism) 에서, 루카치는 모더니즘이'실재의 객관적 총체성'을 적절히 반영하는 것에 실패 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쪼개진 표면'을'매개되지 않은' 방식으로 반영했다고 본다. 따라서 모더니즘은'실재와의 모든 관계를 부인하며' 모든 내용면에서 주관적이 된다. 루카치는 모더니즘이 현실의 왜곡, 즉 세계를 묘사하면서 혼란을 창출한다는 점, 수용자들에게 지각상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루카치는 모더니스트들이 사회현실을 악몽으로 환원시키고 사회현실을 불안에 찌든 부조리한 세계로 묘사함으로서, 우리의 전망을 박탈한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리얼리즘에 입각한 루카치의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부르주아적 휴머니즘의 전망에 갇혀 있다. 그것은 리얼리즘이라기보다는 고전적이며 보수적인 양식을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문학사의 논쟁을 미술사에 적용시켜 볼 때, 미술의 중요한 장치인 원근법은 주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미술사를 살펴보면 원근법도 두 가지가 있다. 통일된 공간을 강조하는 남구의 원근법과 여러 시점을 가지는 북구의 원근법이다.『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에 의하면, 캔버스의 2차원적 표면보다는 오히려 3차원적 공간을 강조하는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와, 형태들을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 시각적 깊이에로 환원시킴 없이 그 형태들의 다양성을 묘사한다는 면에서 오로지 표면에만 관심을 두는 자연주의가 비교된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알베르티의 창문 맞은편에 있는 세계는'일종의 무대, 즉 그 위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텍스트에 근거한 의미 있는 행위들을 연기하는 공간, 그것이 서사적인 미술'이다. ● 이와 대조적으로 북구 미술은 평평한 캔버스 위에 묘사된 대상들의 세계가 우선시 된다. 이 대상들의 세계는 캔버스를 마주하고 있는 감상자의 위치에는 전혀 무관심한 세계이다. 게다가 이 세계는 알베르티의 창문이라는 틀 내에서 전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확장한다. 1980년대 비판적 리얼리즘이나 사회적 리얼리즘에 많이 사용되었던 서사적 장치는 무엇인가를 발언하기 위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전형적인 배우들을 불러들였다. 공성훈의 최근 작품에도 배우는 여전히 나오지만 화면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다. 그것은 차라리 방관자적인 관객을 더욱 닮았다. 반면 자연주의적 관심은 극대화되어 있다. 무대를 이루는 공간과 그 안의 배우보다는, 세계의 유동적인 표면들에 대한 관심이 강하다. 관객의 시선은 바위의 주름에서 주름으로, 파도의 물거품에서 또 다른 물마루로 끝없이 이동한다. 그의 작품은 기하학적으로 세팅된 공간 속 형태보다는 세계를 이루는 다채로운 질감을 중시한다.

공성훈_형제바위_캔버스에 유채_183×137cm_2011

그것에 원근법이 있다면 다중심적인 북구적 원근법이며, 특히 역동적인 바다 풍경은 바로크적 시각과도 비교될 수 있다. 마틴 제이는 같은 논문에서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rin)의'르네상스와 바로크'를 대조한다. 그에 의하면 르네상스의 명료하고 선적이며 견고하고 고정된 그리고 평면적이며 닫힌 형식, 즉 고전적인 형식과는 대조적으로 바로크는 회화적이며 깊이감을 주고 초점이 모호하며 복합적이고 열려있다. 공성훈의 작품에서 기상 현상이나 바다 같은 유동적인 표면들은 관객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데카르트적 전통의 단일시점에 의한 기하학, 즉 멀리서 신의 시선으로 본 동질적인 3차원적 공간이라는 환영을 거부한다. 이러한 시각체제에 의해 세계는 더욱 불투명해졌고, 유화 매체의 물질성은 강한 촉각성을 낳는다. 물질로 불투명해진 표면들은 해독을 요구한다. 바로크적 시각은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 했기에 멜랑콜리를 낳는다. ● 공성훈의 작품에서, 표면에서 표면으로 시점의 정처 없는 이동을 만들어 내며 형태면에서 고정될 수 없는 바다, 그리고 이름붙일 수 없는 무한한 계열을 가지는 블루는 이중으로 멜랑콜리하다. 바로크 시대의 회화처럼, 볼 수 없는 것들을 그린 흔적들인 물질적 표면은 매혹과 혼란을 동시에 야기한다. 유력한 지점에 의해 한 번에 파악되는 세계가 아니라, 반복해서 해석되어야 하는 세계는 동일자의 시각 대신에 몸을 타자로 복귀시킨다. 그러나 복귀된 몸은 화면 전체에 흩어져 있으며, 인물은 익명적이다. 경계가 불확실해진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은 수수께끼를 강화할 수도 있고, 맹목적인 유동성을 한정지어주는 어떤 은유적 이야기의 매개가 될 수도 있다. 주체는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원근법의 중심에서만큼이나 의미의 중심에서 비껴나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거나 해체되지는 않는다. 화면 속 그들은 나지막한 수평선들이 지배하는 저지대의 장면들에 작가가 소심하게 배치해 놓은 유일한 수직적 요소이다. 이 무명씨들은 매우 작지만 응집력이 있다. 그들은 여전히 자연의 일부이지만, 보다 유력한 일부이다.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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