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EET DRAMA 스트리트 드라마

쉰스터展 / Schinster / photography   2012_0323 ▶ 2012_0413 / 주말 휴관

쉰스터_핑크강림_잉크젯 프린트_최대 237×20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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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23_금요일_06:3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 휴관

아트스페이스 휴 Art Space Hue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68 성지문화사 3층 302호 Tel. +82.31.955.1595 www.artspacehue.com

삶과 극(劇)이 교차하는 곳 ● 쉰스터의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군중, 시민이라고 해도 좋은 그냥 사람들이 거기에 존재한다. 같은 장소,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다. 그리고는 하나의 장면을 연출한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디지털이미지의 마술이다. 디지털 사회의 삶은 무차별적 시간을 다른 계열로 엮어낸다. 그렇게 하나의 드라마가 완성된다. 대도시의 한 지점, 특히 그 사회의 계급성, 정치성, 심미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장소는 한편의 드라마가 구성되는 좋은 장소이다. 미술관이나 광장 등 시민들이 빈번히 존재하고 부유하는 장소는 겉으로는 아무런 사건이 벌어지지 않아도 출현한 익명의 사람들의 표정과 시선과 몸짓의 분위기로 구성되는 드라마의 무한수열.

plan
wall A

쉰스터가 제시하는 이미지들은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우리가 반복하는 삶을 재현하는 이미지는 무엇 하나 투명한 것이 없다. 삶은 짙은 우윳빛 안개가 영속하여 깔린 듯,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첨단 디지털 기술의 진보와 아무 상관없이 삶을 재현하고 이미지화하는 것은 좌절되는 것이다. 대상의 기계적 혹은 전자적 재현은 단지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조건을 재배열하고 개인의 의식과 주파수를 맞추는 것은 기술이 아닌 사람의 문제이다. 그러니 그것은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의 복잡성이 포함되는 문제이자 심미적 차원의 것이다. 쉰스터의 이미지는 마치 쌍둥이처럼 유사한 이미지들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쉰스터를 포함한 디지털이미지를 활용하는 작가들에게 이미지의 자체의 조형적 언어로서 또는 그 독창성의 문제는 그리 중심 이슈는 아니다. 오늘날 무한이 재생산되는 복수의 이미지들을 보고 그것이 얼마나 새롭고 낯설었는지 또 얼마나 경탄스러웠는지 놀라는 경험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첨단 기술과 거대자본으로 거듭 진화하는 문화산업으로서 거대한 상권과 유통망과 배급망을 구축하고 번쩍이는 디지털이미지의 화려한 시각적 안마기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한 개인, 하나의 이미지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wall B
wall C

도시와 군중의 이미지들은 주위를 돌아다니는 익숙한 풍경처럼 낯설지 않다. 대도시와 그 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19세기말 이미 대도시의 출현과 시민과 군중과 대중의 출현이 낯선 세계관과 인간관을 선보인 후 그 만큼 충격적인 새로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근대라는 혜성이 길게 늘어놓은 꼬리의 어느 한 지점에 있을 뿐이다. 시각이미지의 유사성과 동일성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딜레마와 긴장은 디지털 이미지시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미학의 중심문제로 다뤄졌다. 대량생산, 유통 소비의 시대에 동일하다고 여겨지는 사물과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어쩌면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유일성의 파국이 낳은 개별자의 불안과 맞닿는다. 그러니 사람들이 몇몇이 아닌 다수가 모이면 누구는 안정감을 느끼나, 오히려 불안을 느끼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개별자의 이미지를 무한히 생산하고 재현하는 메트릭스의 삶.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만, 또 앞으로도 결코 사건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사건과 이야기가 솟기를 기다린다.

wall D

"그러므로 사진 속의 한 사람은 한 '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사진은 그런 '순간'들의 집합인 것이다. 공간(무대)은 고정된 상수이고, 시간은 변수인 것이다. 즉, 고정된 공간 속에서 시간의 비선형적 혼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의 비선형적 혼합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면, 그것이 바로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단순히 모든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인상 깊은 사건들만 선택하여 창의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기록의 재구성인 것이다."_쉰스터 작가노트 중 재현의 문제를 벗어난 전자정보사회의 디지털 시민은 어는 누구도 자신의 독립성과 원본성을 주장할 수 없다. 자의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하나의 기호나 코드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꾸며낸 이야기와 이미지의 기술이 진화하다, 어느 경계를 넘어서면 자연법칙이나 섭리처럼 작동한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이런 세계에서는 드라마가 끝없이 재생산되어 유통되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시선을 현실로부터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바로 드라마이고 드라마가 바로 현실이라는 것을 망각시킨다. 드라마가 현실이 아닌 허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심미적으로 반응한다. 심미적 중독 상태에서 사람들은 도시를 거닐고 삶을 영위하며 서로를 바라본다. 사람들이 사실처럼 연출된 허구의 이미지에 반응하는 것은 그 이미지의 허구성과 실재성의 진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이야기되는 방식 때문이다. 사람들의 대화와 행위의 묶음으로써 드라마는 사건과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쉰스터의 드라마는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간과 다른 존재의 이야기를 교묘한 묶음으로 제시한다. 복수의 시간과 이미지의 중첩이 한 장소에서 교묘하게 벌어지는 사건이 그의 사진에 담겨있다. 그것이 드라마인지 아니면 실제 현실의 한 장면인지, 허구인지 실재인지, 우리는 진위문제를 넘어서는 감정과 정서가 반응하는 경계에 서있다. ■ 김노암

Vol.20120323b | 쉰스터展 / Schinster / photography

@ 60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