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는 과거

이진용展 / LEEJINGYONG / 李辰龍 / painting.installation   2012_0611 ▶ 2012_0707 / 일요일 휴관

이진용_The Accumulation_캔버스에 유채_200×30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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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611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 Gallery Bundo 대구시 중구 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53.426.5615 www.bundoart.com

이진용 : 쓸모 있는 과거 ● 모든 물건들은 처음과 끝이 정해져 있다.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것들은 주인을 만나고, 아낌을 받다가, 쓰임새가 다 하면 대부분 버려진다. 간혹 어떤 물건은 그것이 가진 기능이나 가치에 따라 일반적인 숙명을 넘어선다. 거기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우리는 그것을 보물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단계 직전까지 이른 물건을 골동품이나 빈티지라고 이름 붙인다. 화가 이진용에게는 이런 물건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그 고색창연한 물건들을 그리는 게 그의 일이다. 일과 취미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가진 취향은 매우 생산적인 편이다. 이처럼 극사실적이면서도 그윽한 스타일의 회화 작품들을 쏟아내는 노동과정이 자신의 취미에 준거해 있으니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런저런 수집벽이 있다. 모으는 욕구는 대상을 수중에 넣는 순간 또 다른 대상에게 옮겨 간다.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의 욕망 이론은 우리의 이성적 주체 너머에 자리 잡은 불합리한 심리적 작동 방식을 설명한다. 연인인 그/그녀보다 사랑 그 자체를 누리기 위한 에로스의 영역, 구매하는 상품보다 소비하고 소유하는 행위 자체에서 기쁨을 얻는 컬렉션, 이 모두는 욕망하는 나와 욕망의 대상, 욕망의 근원, 이렇게 세 꼭짓점을 이루며 끝없이 벌어지는 과정이다.

이진용_The Silence_캔버스에 유채_93×145.5cm_2012
이진용_The Accumulation_캔버스에 유채_53×72.7cm_2011

예술 창작의 동기론에 관한 여러 견해 가운데에는 예술가의 병리적 특성에서 비롯된 인과관계로 풀어내는 경우도 많다. 지라르의 욕망 이론 또한 바닷물을 마심으로서 갈증을 부추기는 어리석은 행태를 객관적으로 기술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비합리적인 욕구가 어떤 예술에서는 예컨대 엄청난 작품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상식적인 선에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 예술 창작이다. 화가 이진용의 경우에는 하루에 최소한의 시간만을 의식주 등 기본적 활동에 할애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림 그리기에 쓴다. ● 그의 그림, 단순한 대상의 조합으로 설정된 정물화도 아니고, 사진적인 특성도 찾을 수 없다. 놀랍도록 세밀한 묘사는 다른 하이퍼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들이 스크린에 비추어 완성해내는 작업들과는 구분되는 붓질의 능숙함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의 생각, 그림 그리기가 손놀림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마치 이 글쓰기와도 비슷하게, 한 번의 붓질은 그보다 더 긴 숙고의 기간들이 필요하다. 관객인 우리 또한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그림 속 낡은 물건들을 응시해보자.

이진용_The Magnification_캔버스에 유채_130c×194m, 97×194cm_2012
이진용_The Magnification_캔버스에 유채_89×130cm_2012

그가 그린 가방을 보라. -그것은 한 개인의 미시사인 동시에, 한 시대 전체의 역사일 수도 있다. 신대륙으로 이주한 유럽인의 가방. 기근을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저마다 목적은 다르지만 고심 끝에 내린 그들 삶의 한 매듭은 여행 가방을 꾸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가방 안에 들어간 것들, 그리고 미처 다 넣지 못한 더 많은 것들. 우리가 버릴 수 없는 것들과 버려야 될 것들의 경계는 처연하다. 그림마다 그 시간은 각각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은 여정 끝에 닿은 지금 여기에, 우리는 호기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봉인되어왔던 그 가방 속 역사를 되짚는다. ● 그가 그린 책을 보라. -그림 속 고서들은 해석조차 어려운 활자체 형식 속에, 온갖 지혜와 고집, 희로애락의 감상과 과학적 논증, 기발함과 고리타분함을 내용으로 품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쉽게 읽을 수 없는 책들이다. 애서가들이, 애서가인 척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적인 허세 때문에 책을 쌓아두지만, 이진용의 경우는 고서 수집의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르다. 운동화를 수집하는 누군가가 두 켤레의 같은 신발을 사서, 하나는 신고 다른 하나는 포장도 뜯지 않고 보관한다. LP 음반을 모으는 누구는 바늘에 음반이 닳을까봐 딱 한 번 턴테이블에 올려 소리를 디지털 녹음하고 그렇게 복제한 mp3 파일만 듣는다. 신지 않는 운동화, 듣지 않는 음반, 그리고 읽지 않는 책. 사용가치가 제거된 그것들은 대신 사물의 경제가 포착하지 못하는 무한한 충족을 수집가에게 선사한다. 이를테면 이진용의 경우에는 유용한 예술로 가치 변환되는 식으로 말이다.

이진용_The Magnification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12

그림이 단지 벽에 걸린 채로 장식적 기능만을 맡아왔던 회화 역사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그 매너리즘의 끝에서 장식품에 불과한 그림 자체에 사람들이 진지하게 주목하면서 예술도 근대를 맞았다. 그리고 예술 그 자체를 위한 예술의 세계가 분화되어 온 현재에 이르러 유용성과 무용성의 미학적 논쟁은 이진용의 회화론 앞에서 자기순환적인 역설을 다루어야만 될 것이다. ● 그림을 그린다는 것, 앞서 말했듯이 대상을 관찰하고, 2차적인 가상의 이미지를 머리에 품고, 선을 긋고, 색을 칠하고, 이름을 붙이는 일련의 단계. 우리는 이 그림 그리기라는 개념이 오늘날에 이르러 지난 과거와 다르게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안다. 정통적인 회화의 기법은 사방에서 위협 받고 도전 받는다. 이것이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기술의 발전은 예술의 본질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이 문제 앞에 새로운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그들대로, 종래의 화가들은 그들대로 진지하게 대응한다. 내가 말하는 본질(essence)이 예술가의 혼 따위의 형이상학적 레토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장난 같은 비평보다, 허풍스러운 작가의 자화자찬보다 작품 자체를 주목할 필요가 점점 더 커지는 시기를 맞았다.

이진용_Untitled_혼합재료_44×56×30cm_2010

작가는 마치 고백과도 같은 작업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시력을 갉아먹어가면서까지, 인간관계의 폭을 좁히면서까지, 일상다반사에 대하여 무관심하면서까지 그가 성취하려고 하는 작업의 양과 질은 그와 같은 낭만주의적 예술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예술가 상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이것은 역설적인 사실이다. 한 가지 분명한 점, 그가 아무리 과거로 눈을 돌리더라도 지나간 어느 한 시점 전체를 소유할 수는 없다. 잘해봐야 흔적에 불과한 빈티지 물건을 통해 관망하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작가의 시선과, 그를 통한 그림과, 그 그림이 지시하는 과거를 아무리 열망하더라도 그 욕망의 삼각형이 우리 개인의 역사를 완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림이 가진 아름다움을 제외한다면, 남은 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묵시적 시공간이다. 작가가 예술을 통해 표현하고, 우리가 작품을 통해 이해하는 침묵과 응시가 흐르는 순간과 장소다. 전적으로 작가 혼자만이 감당해야 하는 그의 여정을 지켜보는 우리들로서는 각자 자기 안에 있는 온갖 감정의 호소에 스스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모든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은 작품 속 내재율을 능숙히 구사하고도 남는 작가의 확신에 찬 태도다. ■ 윤규홍

Vol.20120611f | 이진용展 / LEEJINGYONG / 李辰龍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