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Border

안성규展 / AHNSUNGKYU / 安盛圭 / painting   2012_0912 ▶︎ 2012_0918

안성규_경계(Border)12-31_캔버스에 유채_60.6×90.9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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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91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채움과 비움의 표정 ● 도시는 존재들을 인위적인 장으로 재편집한다. 그렇지만 거대한 하늘은 자연의 모습으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항상 있다. 하지만 도시에 살면서 하늘을 보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번잡한 도시의 높게 들어선 건물들은 사람들의 자연스런 시선마저도 차단하여 소유를 향한 욕망의 체계에 가두려고 지상에 묶어 두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채우려는 그러한 도시의 탐욕은 하늘이 제공하는 비움의 미덕을 잊게 한다. 어느 것을 채우려면 거기에는 비워짐이 전제되어야하고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비우기 위해서는 차있음이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삶에서 채움과 비움은 적절히 안배된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들의 균형이 무너지면 삶은 허망하게 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차있기를 바라고 그 차있는 것이 더욱 커지기를 원하도록 몰아간다. 끝없는 욕망의 갈증이 거기에서 생겨난다. 빈틈없이 꽉 채우고 나서 비울 것이라 하지만 이미 그 때는 비울 곳이 없어 비울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쉴 새 없이 변하는 하늘은 우리들의 만족을 모르는 욕망의 무상함을 알려주는 곳이기도 하고 염원을 담는 희망의 그릇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빛과 구름과 대기가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모습은 감상의 대상으로서도 비길만한 것이 많지 않다. 흐린 하늘이나 맑고 투명한 모습에서, 새벽이나 노을이 지는 하늘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감회에 젖기도 한다. 이렇듯 매번 하늘은 생각한 것 이상을 전해준다. 하지만 건물들이 탐욕스럽게 차지한 도시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건물들 사이에 머물고 하늘은 자그마한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안성규_경계(Border)12-32_캔버스에 유채_60.6×90.9cm_2012

안성규의 그림에는 도시에서 소외된 열려진 하늘이 풍성하게 포섭되어 있다. 낭만주의적 풍경화가 영웅적이고 숭고한 하늘을 담고 있는데 반하여 그는 명상적인 모습을 화면에 담는다. 슬쩍 고개를 내민듯한 건물들은 그러한 모습에 사소한 도시적 일상의 정서가 결합되게 한다. 매일 대할 수 있는 도시적 하늘풍경이지만 화면에 그려진 하늘과 건물들이 아우르는 풍부한 표정들은 정중동(靜中動)의 투명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무심히 지나쳤던 것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도시를 표현의 대상으로 삼는 그의 그림은 우디 앨런의 영화만큼이나 도시적이지만 복잡다단한 도시의 형태들과 다양한 상태의 하늘은 미묘한 긴장 속에서 목가적인 명징함을 선사한다. 거기에서 스멀스멀 밀려오는 관조의 여흥은 한가하고 여유롭다. 때문에 대단히 정결하고 섬세한 도회적 미적감흥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그의 풍경은 세련되고 호사스러움보다는 서민적인 안락함에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이질적 상태를 갖고 있는 다중적 면모로 인해 그의 그림은 친숙하면서도 삶에 감추어진 이면을 튕겨낸다.

안성규_경계(Border)12-34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2

충일하게 차 있으면서도 허전하게 비워있고 공허하게 열려 있으면서도 촘촘히 채워져 있는 그의 그림은 그 같은 호혜적 전환으로 인해 감상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현실적 상황을 드러낸다. 화면에서 차지하는 하늘의 크기는 세상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반영한다. 현실에 대한 자각이 커져갈수록 하늘은 화면에서 점차 작아지고 밀려난다. 이와는 반대로 현실의 고단함이나 인간의 무력감이 증가되면 하늘은 점차 화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늘이 위주가 된 안성규의 그림은 불안정한 사회의 존재적 모습에 대한 노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여유롭게 바라보게 하는 그의 그림을 단순한 볼거리로만 있지 않게 하는 것은 배면적 현실에 대한 암시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사적 면모에 동조할 때 그의 그림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자기반성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하면서도 그의 그림은 풍경이 제공하는 감상의 쾌락을 누리게도 한다. 촉각적 요소를 도입하고 있는 최근 작업에서 더욱 강화된 시각적 묘미는 감상자가 관조적 욕구를 충족하면서 그림 속 공간을 즐겁게 노닐 수 있게 한다.

안성규_경계(Border)12-51_캔버스에 유채_90.9×116.7cm_2012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감상자에게 내밀함이 내포된 정서적 표현으로서의 심미적인 면뿐만 아니라 조형적인 차별성을 갖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적절한 소재의 선택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요즘에는 점점 볼만한 스카이라인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고 그는 불평한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은 아파트라는 거의 고정화된 형태들에 의해 획일화되고 있어 매우 단조롭게 구성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불규칙한 톱니처럼 엇물리는 하늘과 건물들이 조성해내는 결합의 아름다움을 약화시킨다. 한마디로 그릴 맛이 안 나게 한다. 그래서 그는 그릴만한 풍경을 얻기 위해 애쓴다. 그가 찾는 것은 여러 모양의 건물들이 모여 다양하게 변화하는 들쭉날쭉한 경계선을 가진, 조형성과 감상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는 풍경이다.

안성규_경계(Border)12-52_캔버스에 유채_90.9×116.7cm_2012

안성규는 그러한 건물들의 경계 위로 펼쳐진 여백을 하늘공간으로 확장함으로써 도시에서 유리(遊離)하는 하늘이 우리들의 시선에 들어올 자리를 갖게 한다. 하지만 그는 화면이 하늘풍경으로만 매몰되지 않게 한다. 지상의 대상들을 화면의 하단에 위치시키지만 그는 세밀한 표현을 통해 끊임없이 그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도록 한다. 때문에 건물들과 하늘은 어울리면서도 경계로 인한 갈등상태를 야기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건물들과 하늘 사이를 시선이 배회하게 된다. 시선의 표류이외에 그는 대개의 작품에서 가로 방향으로 그림의 방향을 설정하여 부유적인 시선에 평행적 관계성을 파생시킨다. 이로써 새벽의 어슴푸레함도 쨍하게 맑은 상태도 어떤 순간에 맥락 지워야 할 강박을 벗어나게 하면서 개별적으로 우리들 앞에 놓여진다. 이와 같은 조형적 장치로 인해 그의 풍경은 대기와 건물들이 전달해주는 양상의 상태를 사람들은 각각 다르게 내화 할 수 있다. 각인각색의 상태로 전달되는 그의 그림은 일반적인 시각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편집적인 시각에 의거한다. 그의 그림 속에서 하늘과 건물들은 동시적으로 선명한 이미지의 상태를 갖고 있지만 이것은 일반적 시각의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이 풍경을 볼 때 하늘에 주목하면 주변부의 상들은 명확한 이미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의 그림처럼 하늘을 보려하면 아래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대상들은 존재 그 자체로는 인지할 수는 있지만 명확하고 세부적인 상태를 알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건물에 집중하면 하늘의 면적은 작아지고 지상에 위치한 대상들은 그 범위가 커진다. 따라서 그의 그림처럼 본다는 것은 인간의 생리적 시각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매우 자연스럽게 감상된다. 그것은 개별적 영역들에 대해 각기 초점을 맞추어 선명한 이미지를 얻고 그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통합적으로 인지하는 우리의 지각체계에 해당하는 상을 그가 그림 속에서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성규_경계(Border)12-121_캔버스에 유채_130.3×194cm_2012

그러한 인지적 체화에 속하는 면모는 비움과 채움의 나선적(螺旋的) 포섭을 그의 그림이 함유하게 한다. 화면에 넓게 펼쳐진 하늘은 우리의 시선을 우선적으로 이끈다. 하늘부분에 대한 집중은 우리의 심리를 비움으로 기울어지게 한다. 하지만 도시는 무한정 비우는 삶을 가질 수 없게 한다. 도시에서 살아가려면 채움은 병행되어야 한다. 건물들의 상세한 표현은 이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무한정한 비움에 대한 현실적 욕망의 보완적 채움을 의미한다. 정치(精緻)한 표현 때문에 감상자가 건물들에 집중하면 세상에서 쫒는 욕망이 채움이 되어 화면에 포화되지만 시야에서 사라진 하늘은 형질이 다른 채움적 성격이 비움의 의식을 통해 화면에 들이민다. 이로 인해 지상의 건물들은 시야에 담겨지더라도 인식 밖으로 밀려나 비움의 상태로 바뀌고 하늘은 그 자리를 채운다. 그러한 양상은 감상의 과정에서 끝없이 발생하며 상호적으로 교차한다. 그것을 통해 안성규의 그림은 볼만한 도시의 하늘풍경을 감상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시간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그림은 조금씩 모습을 바꿔가면서 비움과 채움이 쌍곡선을 이루는 공간적 표정을 보여준다.

안성규_경계(Border)12-201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2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 날은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꾸물꾸물한 바깥 날씨와는 달리 작업실 안에는 도시와 하늘이 종류가 다른 야생화들처럼 싱그럽게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다. 그만의 조형적 틀과 사변적 관점에서 담아낸 작품들은 갤러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보여 지지만 도시의 건물들과 하늘이 얽어내는 다양한 표정들은 감상의 맛과 더불어 도시의 삶을 되돌아 볼 여유를 건네줄 것이다. ■ 이영훈

Vol.20120912h | 안성규展 / AHNSUNGKYU / 安盛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