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그 틈으로부터 Grass-From of crack

윤진숙展 / YOONJINSUK / 尹珍淑 / painting   2012_1101 ▶︎ 2012_1214 / 월요일 휴관

윤진숙_풀-그 틈으로부터_한지에 먹, 분채_37×72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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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10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월요일 휴관

2012_1101 ▶︎ 2012_1111

갤러리 자작나무 사간점 GALLERY WHITE BIRCH SAGAN-DONG 서울 종로구 사간동 36번지 Tel. +82.2.733.7944 www.galleryjjnamu.com

2012_1201 ▶︎ 2012_1214

갤러리 자작나무 수유점 GALLERY WHITE BIRCH SUYU-DONG 서울 강북구 수유 6동 535-97번지 Tel. +82.2.906.7944 www.galleryjjnamu.com

풀(草), 완전하고 천연(天然)한 소우주"내 가슴 속의 향기로운 풀, / 너에게서 모은 풀잎으로, 나는 글을 쓴다, 훗날 최고로 읽히기 위해, / 나를 넘고 죽음을 넘어 자라는 묘지의 풀잎, 몸의 풀잎, / 죽지 않는 뿌리, 키 큰 풀잎, 오 겨울도 너의 섬세한 풀잎을 얼지 못하게 하리, / 해마다 너는 다시 피어나고, 네가 사라졌던 곳에서 다시 나타나리, / 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네 곁을 지나가며 너를 발견하고, 너의 희미한 향기를 맡을지 모르지만, / 나는 몇 명은 그러리라 믿는다, / 오 가냘픈 풀잎이여! 오 내 피의 꽃이여! 나는 너만의 방식으로 말하길 허락한다, / 네 아래에 있는 심장이 원하는 대로." (Walt Whitman. 'Scented Herbage of My Breast'. edited by Emory Holloway Leaves of Grass. Garden City: Doubleday. 1957, pp. 95-96.) ● 햇빛이 약해진 오후가 되면 작가는 집을 나선다. 하늘, 산, 나무, 사람, 많은 존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얼마를 걸었을까. 시선이 길가의 풀에 멈춘다. 콘크리트(concrete)로 포장된 도로의 좁은 틈새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 이리저리 한참을 바라보다가 직접 만든 묵지(墨紙)를 펼치고 그 위에 화선지를 올려놓는다. 사기(沙器)로 만든 도구를 손에 쥐고 꾹꾹 눌러가며 풀을 그린다. 마치 흙을 비집고 풀잎이 머리를 내밀듯 화선지 뒷면으로부터 형상이 올라온다. 이제 작가는 붓을 들고 풀이 생(生)을 유지하는 작은 공간에 흙을 메워 넣는다. 화폭은 이내 담담하고 자연스러운 생명의 기운으로 채워진다. 작가가 처음부터 풀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산책을 하며 마주치는 세상-풍경과 사람들-을 그리다가 작은 존재에게 감흥을 받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 때부터 풀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작가는 점점 더 작고 연약한 풀을 그리게 되었다. 작을수록, 약해 보일수록 작업의 절정에서 더 애잔한 생명의 기운이 전달된다.

윤진숙_풀-그 틈으로부터_한지에 먹, 분채_37×143cm_2012
윤진숙_풀-그 틈으로부터_한지에 먹, 분채_43×143cm_2012

윤진숙에게 풀은 인간, 세상 모든 존재들의 생명을 은유하는 것이자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역사를 담고 있는 비문(碑文)이다. 작가는 관조(觀照)의 과정을 통해 풀잎과 자신-인간-의 유사성을 깨달았다. 풀은 뿌리가 땅에 묻혀 있어 밟혀도, 제초제가 뿌려져도 피하지 못하고 견뎌내야 한다. 그러다 생명의 힘이 다하면 사라진다. 오늘날의 인간 역시 그러하다. 작가는 힘겨운 삶을 견뎌내는 풀을 보면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이 떠올라 애처로움의 감정을 느낀다. 현대 사회는 인공적으로 통일성과 보편성을 찾아내고 그 틀에 모든 것들을 균일하게 집어넣었다. 그리고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추방해왔기에 우리는 그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스스로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 믿으며 이러한 삶이 최선이라 자위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 인간과 풀의 차이점이 있다면 천연(天然)함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모습을 간과한 채 모든 타자(the other)에게 오만한 지배자로서 군림하고자 한다. 인간은 작은 풀잎마저 제어하고 규격화시킨다. 인간은 스스로 생겨나고 살아가는 풀-다른 존재들-의 가치를 결정하고 그것의 생사를 좌지우지할 권한을 갖지 못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착각은 인간의 교만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인간이 풀을 무의미한 잡초로 전락시킨다고 말한다. 인간과 달리 풀은 그 자체로 지극히 자연스럽고 자유로우며 제어당하지 않는다. 제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또한 스스로 모양을 만들어간다. 풀은 장소에 대한 편견 없이 어디에서나 흙과 물이 있으면 자란다. 넓은 초원에서도, 콘크리트 사이에서도, 공원에서도, 누군가의 정원에서도 풀은 그 환경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키며 자발적으로 어우러진다. 자신의 의미를 찾으려하지도, 소유에 대한 욕망을 갖지도 않으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존재했음만으로 이미 그것은 의미를 갖는다. 풀은 그 자체로 충만한 우주의 운행과도 같다.

윤진숙_풀-그 틈으로부터_한지에 먹, 분채_48.5×37cm_2012

"삶의 극치를 이루는, 그리고 삶의 극치를 넘어선 황홀경이 있다. 이런 황홀경이 가장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살아 있다는 사실마저 완전히 망각했을 때 찾아온다는 것은 분명 삶의 모순이다." (Jack London. 1903. The Call of The Wild: White Fang, and Other Stories. New York: Penguin Classics. 1981, p. 76.) ●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윤진숙은 풀의 모습과 위치, 전체 화면의 구도를 인위적으로 각색하지 않는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그는 오랜 시간동안 풀을 관찰하고 결정적인 풍경을 찾아낸다. 그런 다음 스케치(sketch)나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 없이 화선지에 직접 그려나간다. 작품이 완성될 때쯤에는 여러 번의 손자취로 인해 종이가 너덜너덜해지고 모서리는 닳거나 뚫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리저리 밟히는 풀의 표면, 닳고 닳은 길과 비석, 바위, 전각 등을 연상시킨다. 공간이 나뉘어 경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작가는 닳고 찢어진 상태 그대로 표구하여 화폭의 사면(四面)을 열어 둔다. 이제 풀내음 가득한 천연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하나로 공감을 이룬다. ● 사람들은 –작가가 그리는-길 위의 풀들을 잡초라 부르지만, 윤진숙은 풀들이 자신의 작품 안에서만큼은 존재의 의미를 갖는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풀은 작가의 상상력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또 그 바탕이 되는 주인공이다. 사실 지구-그리고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역시 인간이 보는 잡초처럼 미물(微物)이다. 식물-자연-은 단지 인간이 느끼고 알 수 있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고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윤진숙의 화폭에 그려진 풀은 잡초가 아니며 우주적 섭리와 질서가 내재되어 있는 경이로운 존재이다. 이처럼 윤진숙은 가장 연약하고 흔하며 사소한 존재인 풀을 예술적 제재로 삼아 그것이 자연의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천체(天體)들과 다름없는 우주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가 풀잎을 묘사할 때 가시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내재된 생명력에 주목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풀을 비롯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 같은 본질에서 나온 것임을 인식하고 작은 존재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윤진숙_풀-그 틈으로부터_한지에 먹, 분채_70×140cm_2012

윤진숙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경험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는 자연의 소박한 진실 앞에서조차 인간은 그 본질을 알아보고 알아듣는 지혜를 가지지 못한다. 이에 그의 회화는 우리가 흔히 자연과 현실로 알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을 자세히 바라보라고 말한다. 윤진숙의 작업을 보는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세계에 대한 표현이나 진술로 여기지 않고 세계를 겸손하고 면밀한 태도로 관찰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작가에게 관찰한다는 것은 존재들의 상호관계를 찾아내는 것을 뜻한다. 이 작업은 감각적인 지각과 지각에 의해 포착된 것을 분석하는 지적인 능력을 동시에 요구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객 역시 일상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생각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대해 애정 어린 마음을 갖는 것 역시 필수적이다. 조금만 다른 눈으로 보면 길가의 작은 풀, 그것을 관찰하는 작가, 풀잎과 작가와 함께 하는 이 세상의 존재들은 모두 자신만의 소우주를 소유하는 작은 기적이다. ● 세상을 대하는 겸손함은 윤진숙의 작업 곳곳에서 나타난다. 작가는 존재와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에 답하고 보편적인 질서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거대한 진리도, 심오한 철학도 작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하나씩 관찰해나가는 과정 중에 있는 작은 존재일 뿐이라 말한다. 작가는 풀이 씨앗에서 나와 자라고, 존재하고, 견디며, 소멸하고, 새로운 변이가 일어나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의 심오함을 언급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만족이자 교만함의 충족이다. 인간에 의해 밟히고 잘려나가는 풀-식물-을 다룬다고 해서 작가가 환경오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강조하거나 강한 비판적 메시지를 드러내는 것 역시 아니다. 그것이 슬픈 사실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인 행위의 결과를 포기한다고 해서 낙오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생명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발로(發露)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연에서 인간을 제외한 어떤 존재도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안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기가 차지하는 역할을 과대평가한다. 인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활동들은 사실상 자연이 보기에는 그저 사소하고 우연한 일들일 뿐이다. (Michael Pollan. 2001. The Botany of Desire: A Plant's-eye View of The World. New York: Random House, p. xxi.)

윤진숙_풀-그 틈으로부터_한지에 먹, 분채_74×144cm_2012

식물-자연-에 대한 친밀성, 인간 주체의 탈특권화(de-privileging)와 탈중심화(de-centering)라는 점에서 윤진숙의 작업은 분명 생태주의(生態主義, ecologism)적 사고를 담아낸다. 오늘날 인간이 살고 있는 기하학적으로 구획된 빈틈없는 도시는 상당한 폭력성을 가진다. 문명은 완벽한 도시를 만든다는 명목 하에 자연을 파괴하고 이것은 인간 정신의 파괴로 이어져 현대인의 내적 문제로 야기한다. 틈새에 나는 작은 풀조차 견디지 못하고 제거해버리는 도시-인간-에게는 어떤 것도 바랄 수 없다. 리차드 루브(Richard Louv)가 말했듯 오늘날의 인간은 자연결핍증후군에 걸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윤진숙의 생태학이 거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작가적 관심은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으며 욕심 없고 소박하며 일상적이다. 생태학적 주제를 다루는 모든 예술 작업이 파괴된 자연과 그것의 회복 방안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반드시 환경이나 동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강력한 행동주의(activism)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요소들, 자연과 환경을 보다 관계론적으로 보고 느끼고 인식함으로써 작품을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근원적으로 생태주의를 실천하는 길이다. 작가는 오존층의 파괴, 생태계 파괴, 엘니뇨(El Niño)와 라니냐(La-Niña), 원전 사고와 같은 거대한 문제에만 집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현안들도 중요하지만 삶 속에서 작은 생명을 잊지 않고, 바라보고, 지켜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에 작가는 주체와 타자, 존재와 세상이 더 이상 둘이 아니며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작업에서 풀과 배경의 채색을 역전시킨다.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풀잎-주인공-이 채색되어 있지 않아 눈길을 끈다. 그는 주인공이 반드시 주목받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비워진 것이 더 큰 의미를 보유할 수도 있다. 위계와 경계가 사라진 그의 작품에서 형상과 배경, 존재와 세계가 진정으로 공존하고 조화를 이룬다. ● 윤진숙은 풀을 관찰하고 그리지만 풀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인간 세상을 돌아본다. 세계 전체를 읽어내고 생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그의 소박한 입장에서 인간은 자연의 작은 일부이고 미물도 인간과 함께 하는 존재이며 풀은 대우주를 이루는 하나의 소우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경이롭고 아름답다. 우리는 존재들의 자연스러운 충만함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쉬워 보이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진정 어려운 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을 알기에 작가는 오늘도 풀을 관찰하고 그린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말처럼 지혜란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 이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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