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 human No.1 포스트 휴먼 No.1 Post human No.2 포스트 휴먼 No.2

이단展 / LEEDAN / 李丹 / mixed media   2012_1106 ▶︎ 2012_1120

이단_Hubris #2_설치_180×500×400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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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107_수요일_05:00pm_에이블 파인아트 갤러리             2012_1106_화요일_05:00pm_한전아트센터 갤러리

후원 / 한국전력

2012_1107 ▶︎ 2012_1120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에이블 파인 아트 엔와이 갤러리 서울 ABLE FINE ART NY GALLERY SEOUL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Tel. +82.2.546.3057 www.ablefineartny.com

2012_1106 ▶︎ 2012_1112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5:00pm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KEPCO ARTCENTER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 1관 Tel. +82.2.2105.8190~2 www.kepco.co.kr/gallery

환영적 모사물의 무아경 ● 불상 같은 종교적 도상과 괴기스럽게 분장한 작가가 조합되어 있는 이단의 전시 '포스트 휴먼'(전시부제)은 상식적으로 다가오는 '휴먼'의 정체에 관해 묻는다. 우선 동양의 여성 작가라는 3중의 겹 코드는 인간, 또는 개인에게 전제되어 있는 보편적 동일성의 편파성을 들추어낸다. 형식적으로, 컴퓨터를 활용한 조합의 기술은 인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종교적 도상과의 역학관계는 성/속의 경계 위에서 금기 위반의 충동이 분출되는 장이다. 외관상 불경스러워 보이는 도상들 때문에 전시를 중단해 달라는 종교계의 내용증명서도 종종 받곤 하는 작가는, 자신은 종교를 존중하며, 단지 예술 작품 제작을 넘어서 수행의 단계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금기의 위반은 금기만큼이나 종교적 감성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작가의 주장은 설득력 있다고 본다. 하지만 설득이란 것이 필요할 만큼 도상들이 자극적인 것은 사실이다. ● 이단의 작품에서 금기가 위반된 지점 중의 하나는 종교적 도상과 중첩된 도상이 바로 벗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심리학의 등장 이전에는 몸에 대한 인간의 관심을 높이고 구체화 시키는 역할을 종교가 해왔다. 여성의 몸은 교회, 신전, 절, 사당 모든 성스러운 공간의 원형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케네드 클락이 『누드의 역사』에서 말한 바 있듯이, 벗은(naked) 몸은 상징적 우주를 이루는 누드와 다르다. 잘생기거나 온화하게 생긴 젊은 남성이 주인공 역할을 맡곤 하는 전래의 종교적 도상 역시 벗은 몸이 대부분이지만, 누드라는 시각적 전통을 따라 재현된 인간은 벗고 있어도 이미 옷을 입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재현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누드는 다시 벌거숭이가 되었다. 벌거숭이는 동물이나 사물, 그것이 좀 더 인간적이라면 원죄로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주인공이 됨으로서 남/녀의 자리 바꾸기가 일어나는 이단의 작품은 도처에 이단(異端)적 요소가 있다.

이단_Hubris #3_설치_180×500×400cm_2012

작가가 모델이 된 도상에서 젖꼭지, 배꼽, 음부 같은 민감한 신체 부위는 장식으로 가려져 있지만, 그러한 눈가림 때문에 더 강조되는 역설이 있다. 조각이나 회화가 아니라, 컴퓨터에 기반 한 작업방식은 자극의 강도를 더 높이게 된다. 모든 것을 수렴시키고 있는 컴퓨터에는 인간이든 뭐든 기준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성의 차이는 현실에서보다 훨씬 더 강조된다. 코드는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차이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고, 하나의 차원만이 있는 곳에서 차이는 눈에 띄기 위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전래의 종교적 도상이 중후할수록 그것과 상호작용 하는 또 다른 층은 생경하게 다가올 것이다. 가령 이단의 마네킹은 누드가 해부학을 통해 표현하는 인간의 성격을 관절의 구부림과 분장만으로 해결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10가지 다른 성격을 표현하려면 과장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자신 속에 들어있는 또 다른 자신들을 특화하는 이단의 방식이다. ● 강북과 강남의 두 전시장에서 나뉘어 전시될 「hubris」 시리즈 10개는 노랑, 초록, 파랑, 빨강 등 온갖 색깔과 스타일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며, 담배까지 물려 놓은 얼굴 화장과 바디 페인팅, 국부의 장식이 자극적으로 보인다. 나신의 젊은 여성의 분장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함으로서 섹시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전략 보다는 원시 종족들의 분장처럼 강렬하다. 그것들은 본질 위에 무엇인가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본질과 하나가 된 표면이다. 가면은 그자체로 얼굴이다. 그것들은 연극배우의 분장처럼 이물감을 주는데, 적절한 거리설정을 전제로 한 과장된 장치는 거리의 폐지로 인해 있는 그대로 쇄도하게 된다. 불상이 등장하는 입체작품에서 거리는 무한히 멀어진다. 거기에는 손톱만한 여자들이 갖가지 포즈를 취하고 들어앉아 있다. 불상을 이루는 픽셀 같은 작은 단위를 가득 채우는 것은 분장한 작가가 이러저러한 동작을 취한 사진들을 오려붙인 것이다.

이단_Memento mori_디지털 C 프린트_200×141cm_2011

여성 도상들은 표피를 온통 잠식한 또 다른 표피들이다. 표면 안쪽은 모사 물처럼 텅 비어있을 것이다. 등신대이든 동전만한 크기이든 인간을 인간답게 보이게 하는 심리적, 물리적 거리는 폐지되었다. 입체작품 「hubris」 시리즈에서 누군가에 의해 조정되는 꼭두각시 같은 모습은 개인에게 전제된 자율성을 허구적인 것으로 만든다. 인간은 더 이상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어느 작품에나 등장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어떤 중심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환영적 모사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중심의 상실을 굳이 애도하지 않는다. 유령처럼 편재하는 분신은 팔랑거리며 이곳저곳에 출몰하는 나비처럼 경쾌하다. 복제와 속도라는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컴퓨터의 속성이 활용 되어 도처에 편재하는 자아의 분신, 또는 분열적 자아가 생산되는데, 그것은 자기를 비울 것을 촉구하는 종교의 추구와 다를 바도 없다. ● 섬짓한 분장에 유모어를 가세시키곤 하는 담배 연기는 희생물을 태워 그 연기로 천상의 존재와 소통하는 고대 종교의 전통부터 몽환적 체험을 야기하는 하위문화의 유희를 떠오르게 하지만, 작가로부터 들은 말은 예상 밖이다. 실제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그녀는 자신의 활동에 딴지를 거는 이들이 많아서, 아방가르드가 적군을 물리칠 때 '물러가라!'는 의미로 연기를 피우는데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앞이나 위를 향한 선조적 질서로서의 진보가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오랜만에 듣는 전위라는 말은, 직선이 아니라 휘어진 시간을 질주하는 현대예술가의 면모를 알려준다. 진보가 아니라 퇴행 또는 역행으로 보이는 작품 속 주인공들은 호불호가 강한 자기 본성대로 일단 가고보자는 선택이 낳은 결과이다. 그렇게 분출된 작품들은 때로 조악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리저리 재고 모서리를 둥글려 타인은커녕 자신에게조차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지나치게 잘 조율된 작품보다는 솔직하게 다가온다. 그것이 그녀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과 거부감을 동시에 일으키는 요인이다.

이단_Quantity of matter#300_디지털 C 프린트_150×131cm_2010

이단은 자기 이익을 위해 한치 앞을 다투는 세상에서, 기약도 없이 매달려야 하는 작업이란, 무모하면서도 자신의 진정한 성장을 가능하게 해주는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점에서 이단은 현실적이고 냉소적이기보다는, 순진하고 열정적인 작가이다. 그러한 진지함이 작가로 하여금 예상 밖의 선택을 추동해왔다는 점이 특이하다. 벽에 붙어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그림처럼 만들어진 사진이다. 전시의 주된 방법론인 사진과 포토샵으로 하는 조합의 기술은 미대를 나오고 나서, 건축공학을 또 전공하면서 친숙해진 매체이다. 그리고 한국 건축사를 공부하면서 불상과도 친해졌다. 하루 차이를 두고 두 공간에서 열리는 전시에는 서양미술사의 명작도 합성의 바탕 화면으로 종종 등장하지만, 탱화 같은 불교적 전통의 도상이 더 많다. 그것들은 절에 걸린 탱화의 사이즈로 출력되어 있다. 그것은 작업이라는 것이 단순한 미의 창조를 넘어서, 깨달음을 줘야한다는 작가의 확신으로부터 왔다. ● 미술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수단이고 깨달음의 통로여야 하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나 그 분신들이 주인공으로 나서게 된다. 사간동의 에이블 파인아트 갤러리에서는 자신의 몸을 떠서 만든 마네킹인 「hubris」 시리즈 3개와 FRP로 만든 입체 작품이 놓여있고, 포토샵 출력 작업들이 걸려있다. 분장한 얼굴 가득히 잡혀 있고 눈동자에는 동자 상이 박혀있는 작품「face book #1」은 금속성의 사이보그적인 얼굴과 오래된 목각인형 같은 도상의 조합이 이색적이다. 원시주의와 미래주의는 잘 어울린다. 작품 「memento mori」에서는 발 사이에 해골 끼고 서 있는 여자 뒤에 불상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죽음이라는 주제이다. 서양의 시각적 전통에서 여성은 죽음을 강하게 떠올리지만, 작품 속 여성은 불상의 호위를 받으며 죽음 위에 군림한다. 분홍머리에 담배 물고 있는 여자 뒤에 수많은 여성상들이 제의적인 자세로 배치되어 있는 작품 「post human no.2」에는 자신의 무수한 분신들을 응원군으로 삼아 당당하게 서있는 작가의 모습이 있다.

이단_Uncountable beads of sweat #1_디지털 C 프린트_200×165cm_2012

평면과 입체로 구현된 「uncountable beads of sweat」 시리즈는 불상 안에 작가가 포즈를 취하고 찍은 수백 커트의 사진을 펀치로 동글게 잘라서 붙였다. 셀 수 없는 땀방울은 작품으로 응집되지만, 부분들에 내재된 이질성은 총체성을 위협한다. 나뉠 수 없는 성스러운 중심은 프랙털도형처럼 차원을 달리하여 반복하는 구조로 인해, 끊어진 목걸이의 구슬처럼 해체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동질성의 몸체를 이루는 이질성의 면모를 드러낸다. 면적이 넓은 한전아트 갤러리에서는 「hubris」 시리즈가 7개 배치되고 그 주위로 출력된 작품들이 걸린다. 「millenary buddha painting」 시리즈는 탱화의 도상들에 분장한 자신의 이미지를 조합하였으며, 「post human」 시리즈는 서양명화에 크고 작은 자신의 이미지를 배치한다. 작품 「post human #5」에서 앉아있는 보살상 앞에 앉아있는 노랑머리 여자는 발바닥이 보일 정도로 벌리고 앉은 자세 때문에 외설적으로 보인다. ● 동네 사진관에 크게 걸려 있곤 하는 돌사진에서 여자아이는 결코 남자아이 같은 자세로 찍혀있지 않듯이, 이단의 작품이 주는 생경함은 상당 부분 성별 고정 관념이 투사된 시각적 이데올로기에 역행함으로서 야기된다. 마찬가지의 관습에 의해, 여성은 도 닦기를 통해 물리쳐져야 하는 허상적 존재이지, 도 닦기의 주체가 될 수 없었음도 분명하다. 여성은 육체이지 정신일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육체인 여성이 정신이고자 한다면, 그녀는 '자연스러움'을 잃고 히스테리가 발동될 것이다. 부처상이나 돌비석과 함께 조합된 「quantity of matter」 시리즈는 확장, 또는 확산되는 이미지의 중심에 자신을 배치한다. 작품 「quantity of matter #504」 은발머리에 빨간 손발톱을 한 기괴한 분장의 여자가 담배물고 앉아있다. 그녀는 동서양의 어떠한 성상의 보조도 없이 단독으로 클로즈업되어 있다. 다소 풀이 죽은 듯한 표정으로 쭈그리고 앉은 여자의 국부를 가리는 작은 동자상은 마치 중세시대의 정조대처럼 생겼다. 폭소를 자아내는 이 작품은 웃음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끌어낸다. 그러나 이단의 작품이 웃음을 목표로 한 것 같지는 않다.

이단_Uncountable beads of sweat #2(Left, Front, Back)_FRP에 사진_100×65×45cm_2012

가릴래야 가려지지지 않는 이 비어있는 중심은. 그 반대의 것, 즉 종교를 비롯한 인간의 중요한 문화적 현상의 충만한 중심을 이루어왔던 본질과 실체에 대해 자문한다. '포스트 휴먼'이라는 전시부제는 그 이전의 중심이었을 인간을 호출한다. 근대까지도 인간에게는 신의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미셀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에 의하면, 휴머니즘이 발흥한 르네상스 시대에도 앎의 대상은 여전히 신이었다. 앎의 대상이 신이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의 재현의 일종의 신인(神人)으로서, 신적 질서의 구현으로 나타났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라 신인으로서, 신적 질서를 구현하였고, 이것은 누드나 건축적 구조 속에 보편 질서의 상징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누드나 건축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규칙이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르네상스가 유비의 중심을 인간으로 보았기에 유사성의 형식에 있어서 말과 사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 그러나 말과 사물의 통일은 이단이 주요 도구로 사용하는 컴퓨터의 시대에 깨져 버린다.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실재와 연관되지 않는 코드들의 무한 증식할 수 있는 곳이다. 자기지시적인 언어가 만들어내는 파생실재들이 실재를 대체해 나가는 현실에서, 말과 사물 간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도 넓어진다. 여기에서도 인간은 말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상징적 구조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언어이며, 인간은 그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작가가 호출하는 동서양의 성스러운 도상들에 다시 인간을 끼워 맞추려 할 때 생기는 어긋남과 낙차가 있다. 과도한 분장의 여성 나체는 완전성의 척도로서의 인간이라는 상징적 우주에 균열을 낸다. 생경한 장식과의 접속으로 더욱 불어진 인체의 틈들은 불협화음을 내며 갈라진다. 그러나 신인이라는 상징적 질서의 해체는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성스러운 아우라까지 내포한 인간중심적 목적론이 '인간'과 사소한 차이를 가진 타자들을 얼마나 배제하고 억압하고 지배해왔는가를 생각해 볼 때 그러하다.

이단_Hubris #1,2,3,4,5,6,7,8,9_148×85×28cm

포스트 모던 시대의 인간상이라 할 수 있는 포스트 휴먼은 비동일성(nonidentity)을 강조한다. 철학자 코제브는 '역사 이후로 넘어서는 문턱을 건너고 나면, 인간성(humanity)은 사라지고, 대신 경박성의 시대, 유희와 조롱의 시대가 시작한다'고 말한 바 있다. 도처에 균열과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이단의 작품은 통일성이나 자율성이라는 가치에 집중된 개인을 분해한다. 동서양의 성스러운 도상을 동원하여 통합하려면 할수록 흩어질 뿐이다. 인간적 동일성에 내재된 투명한 조화는 차이들의 전쟁이 일어나는 장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점에서, 진정한 평화의 전제조건이 된다. 선적 진보를 향해 전진해왔던 역사의 끝자락(post history)에서, 인간적 보편성 또한 비교될 수 없는 차이의 개인으로 중심 이동 한다. 이단이 활용하는 포토샵이라는 조합의 도구는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만물을 텍스트로 간주하는데, 텍스트의 세계에서는 주체/객체라는 이분법이 해체된다. 여러 동작을 요구하는 회화와 달리 단조로운 자세로 행해지는 컴퓨터 작업은 마취와도 같은 몰입을 요구한다. 이단의 작품에는 이러한 몰입적 체험이 있다. ● 자연이 아닌 매체화 된 우주에서 살아가게 된 현대인에게 몰입은 맹목으로부터 깨달음에 이르는 다양한 종교적 체험과 연결될 수 있다. 루시앙 프로이트와 프랜시스 베이컨을 좋아한다는 작가는 현실계와 직접 관련될 본격적 회화를 나중에는 꼭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컴퓨터는 철학에 있어서 구조주의나 후기 구조주의 만큼이나 인간이라는 중심을 해체시킨다. 신이 죽었다고 말하면서 인간도 더불어 죽인 니이체는 포스트 휴머니즘 사상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의 니이체주의자 미셸 푸코는 인식론적 인간주의를 공격한다. 지식의 고고학에 의하면 '인간은 곧 사라질 최근의 발명품'이다. 푸코는 인간주의가 이데올로기임을 간파하고, 사고의 지반으로서 인간을 말소하려고 했다. 그는 인간중심주의를 해부하기 위해 주체 자체가 권력의 대상, 개인적 윤리의 대상, 앎의 대상으로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왔음을 밝힌다. 그는 자신의 고고학적 방법을 통하여 주체성을 체계적으로 분해함으로서 보편적 이성과 이성 중심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려 했다. ●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작품을 다시 보면, 주체란 것이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예술은 주체의 감정이나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며, 객관적 현실을 반영한다는 미학 역시 유효하지 않다. 현대의 예술 작품은 결코 인간이 주체가 될 수 없는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기존의 자의적 관습이 전복되는 장이다. 캐서린 벨지는 (후기)구조주의 예술이론을 연구한 저서 『비평적 실천』에서 초월적인 기의인 신, 인간, 정신이 의문시되었다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비전에 따르면, 예술은 인간의 경험과 관념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주체성의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이 언어이다. 언어는 투명하지 않고 개인과 사물들의 세계를 구성한다. 예술은 현실의 등가물로서 되어가는 과정 그자체인 것이다. 인간 또한 과정 중의 주체이다. 다양한 언어 중에서, 컴퓨터의 언어를 적극 구사하는 이단의 '포스트 휴먼' 전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주체와 분열된 텍스트를 통한 해체구성(deconstruction)의 단면을 보여준다. ■ 이선영

Vol.20121106a | 이단展 / LEEDAN / 李丹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