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dowless / artless / mindless creeping pieces; 몸-시간의 존재방식

홍명섭展 / HONGMYUNGSEOP / 洪明燮 / mixed media   2012_1108 ▶︎ 2012_1227 / 월요일 휴관

홍명섭_링반데룽/원상방황_렌티큘러_가변크기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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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108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홍명섭의 작업: 의미에 저항한다. 감각을 통해. ● 예술의 의미와 가치? 예술작품에는 어두운 삶과 세상을 밝게 변화시키는 어떤 계시가 담겨 있으리라 기대하는 고정관념이 생기게 된 데에는, 예술을 정신적 승화(sublimation)의 결정체로 정의하고 물신화시켜 온 서구 근대 예술가들, 문인, 철학자들의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이에 더해 오늘날 후기자본주의의 예술상품화 시스템은 예술작품의 재화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상상 가능한 모든 미학과 도덕적 사상들이 예술작품 속에 담겨져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데 대성공을 이루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평론가들이 한탄하듯, 예술은 상품문화에 대응하기 보다는 최고의 상품적 가치를 구현하는 사치(럭셔리)의 세계로 진입해 버린지 오래이다. 사치로서의 예술은 기본적으로 '천재적 창조의 의미'에서부터 '인류평화와 인권', '정치사회개혁과 유토피아의 희망', 심지어 '글로벌 신자유주의와 상품자본주의의 타도라는 자아비판' 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담지 못하는 의미가 없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 약 10년간 지구촌의 온갖 비엔날레와 국제전들은 그런 달콤한 '의미의 사치'이 극을 달리며, 의미가 물신(fetish)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예술들의 패션쇼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예술작품이 그 어떤 깊은 의미를 내부에 보존하리라는 이 '심층적 읽기'(depth reading), 작가 홍명섭이 "살균된 느낌의 무게학, 혹은 방부의 정치학"이라고 적절히 비판한 바로 그것은, 마치 영험한 귀신이 예술작품 속에 강림해 있으리라 믿는 경우처럼 신학주의적인 사유이다. 그것이 정치사회비판에 대한 것이건 일상과 개인의 삶에 대한 것이건 간에 예술작품을 온갖 의미와 주제로 치장하는 것은, 사실상 작품과 관객 사이의 '정신-신체적인 교환', '시간-공간적인 교환', '작품이라는 대상과 관객 사이의 이질적 접합'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림을 의미한다. 의미는 그만큼 세계를 기호로 대체시키는 이성중심주의와 지성주의의 산물이다.

홍명섭_링반데룽/원상방황_렌티큘러_가변크기_2012

'비정형'(formless)개념을 통해 예술에서의 형태(form)와 의미의 결합을 공격한 사상가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가 마네의 「올랭피아」(1863)에서 발견해 낸 진정한 전복적 힘이 무엇이었던가? 마네의 당대에는 "티치아노 등 기존 대가들의 명작을 빌어와 밤거리 창녀의 민망한 노출증적 초상으로 패러디한 불쾌한 도발"이라는 식의 평이 지배적이었고, 20세기의 모더니스트 형식주의자들은 깊이감이 결여된 마네의 평면적 공간이 회화적 평면성이라고 하는 매체적 조건의 전조라며 그 작품의 가치를 옹호하려 했다. 전자가 회화의 '주제'(subject)에 갇혀있고, 후자가 회화의 '형식'에 갇혀있는 관점이라면, 바타이유의 관점은 마네의 그림이 의도적으로 불성실한 회화적 묘사를 통해 '회화' 자체를 공격하는 행위였으며, 그럼으로써 회화가 지닌 의미론적 기능(말하자면 주제subject를 환기하는 기능) 자체를 와해시키는 '脫승화(desublimation)의 전략'이었다고 보는 태도였다. ● 마르셀 뒤샹의 작품 「주어진」(Etant données, 1945 - 1966)은 겨우 다리를 활짝 벌린 여자 석고상과 가스등 정도로 교양있는 미술관 관객에게 어중간한 도발을 하는 것이 목적인 그런 초라한 상상력에서 나온 작품이었던가?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말하듯이, 그 작품에는 사물을 대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정의(定義)와 의미를 부여하는 관객의 시선을, 대상에의 '과도한 몰입' 즉 감각의 과도함을 통해 와해시키려는 전략을 내포되어 있다. 「올랭피아」와 「주어진」의 공통점은 모두 물질적 신체적 감각의 과도함을 통해 의미의 결정을 지연, 분열시키고 불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며, 바로 이 점이 홍명섭의 작업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바이기도 하다. ● 홍명섭에게는 '난해한 개념미술가'라는 엉뚱한 라벨이 오랜 기간 고정관념처럼 따라 다녀왔다. 사물에 개념과 의미의 측면이 수반되는건 필연적이겠지만, 개념미술을 단지 조셉 코주스(Josef Kosuth)의 경우처럼 사변적 관념이 곧 예술작품의 존재형식이다라는 식으로 정의한다면, 홍명섭은 그러한 개념미술의 정반대 지점에 위치한 작가가 된다. 홍명섭의 작업은 개념의 형식을 준수한다는 의미에서의 '개념적' 혹은 '개념내부적'(intra-conceptual) 작업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개념초과적'(extra-conceptual)인 작업이고, 이는 바타이유의 표현을 응용하면 '개념성의 방출'(expenditure of the conceptual)이라고도 불러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개념성의 방출을 이루어내는 힘은 물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감각" 심지어 들뢰즈가 베이컨의 회화에서 언급한 "감각의 맹렬함"(violence of sensation)이다.

홍명섭_러닝레일로드/슬리퍼로드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2

홍명섭은 1977년 미술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줄곧 "사물과 예술이 지니는 의미가 어떻게 구축되고 해체되는가"라는 포스트모던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해 왔다. 홍명섭은 '예술적으로 유의미(significant)한 사물'이 성립하는 바로 그 경계를 탐구했다. 그 경계는 말하자면 의미의 주변, 의미를 초과하고 의미 이외의 요소들이 기생(para-site)하는 장소이며, 작가의 표현을 빌면 '작품(work)의 他者', 또는 '개념의 바깥'이라고 불리우는 장소이다: "내 작업을 통해서 나타나는 개념들 또는 내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내 작업 세계를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발굴된 개념들을 다시 사용하여 내 작업을 더욱 삐걱거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결국 삶의 감각을 변화시키고 확장하게 하는 힘으로서, 개념의 바깥을 지각(각성)시키고자 함이다" (-작업 노트). ● 홍명섭이 이번 OCI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3개의 대형 설치작들은 그러한 '작품의 타자'에 대한 것이다. 이 전시는 '회고전'의 성격과는 전적으로 무관하고 작가는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홍명섭에게 그러한 컨셉의 전시는 전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무의미한 생각에 불과하다. 작업을 종합, 통일, 회고한다는 시도는 '예술의 영혼', '작가의 스타일' 등, 바로 그가 배격하는 환상을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는 어떤 정신도, 영혼도 없다! 그의 전시행위는 영혼의 표현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출현하는 일종의 신경증적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의 증상 같은 것이고 관객 역시 그러한 증상적 감각에 동참하기를 권유받는다. ● 이번 홍명섭 개인전의 이해하기 위한 핵심어를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감각이다. 물질이 주는 감각, 몸을 통해 느껴지는 시간과 공간, 시각, 촉각, 후각 등 모든 감각 말이다. 그는 말한다: "몸의 주체가 물질과 나의 현존감각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몸이 바뀌어지는 경험을 통해 달라진 생명환경을 사유해 낼 수 있도록 한다. (...) 일상적 인식의 틀과 걷도는 시지각과 몸 감각의 충돌들, 몸의 일상적 인식에 저항하는 중력의 반란, 내 몸의 감각이 새로운 보철을 체험하듯 낯선 변종의 감각으로 이끈다" (작업노트 中).

홍명섭_러닝레일로드/슬리퍼로드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2

전시작들인 「Running Railroad—Running Sound Road」(2012), 「Waterproof」(2012), 「몸-시간의 존재방식」(2012)은 하나같이 관객으로 하여금 거의 스포츠에 가까운 신체운동을 유도한다. 「Running Railroad—Running Sound Road」의 경우는, 레일 형태의 테이프드로잉이 전시공간의 네 벽을 횡단하고, 또 이를 따라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바람소리 같은 음향이 입체적으로 운동하면서 모호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시공간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시공간 속에서 관객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겪게 된다. 이에 더해 관객은 무거운 '무쇠 슬리퍼'를 신고 힘겹게 중력에 저항하며 시각과 몸이 결합된 운동을 수행하게 된다. 관객은 더 이상 육신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영혼'의 망루 위에서 세계를 관조하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아니라, '몸-시간-공간'의 복합체, 달리 말해 '드로잉과 무쇠신발이 되기'라는 변신의 과정을 경험한다. 이 과정 속에서 사물에 대한 인식은 총체적으로 교란된다. 순수한 시각에 몸이 더해지고 순수한 공간에 시간이 개입되고 순수한 형태가 비정형적으로 무너지고 사물의 질서정연한 의미들이 교란되는 것이다: "일상적 인식의 틀과 겉도는 시지각과 몸 감각의 충돌들, 몸의 일상적 인식에 저항하는 중력의 반란, 내 몸의 감각이 새로운 보철을 체험하듯 낯선 변종의 감각으로 이끈다"(작업노트 中). ● 시지각은 이제 생리학(physiology)에 의해 침범받는다. 의미를 추구하는 정신적 지성에 대조해 볼 때, 생리학은 말초적 피부감각, 근육, 통증, 피곤, 스포츠적 활동에 대한 것이다. 무쇠신발을 신고 힘겹게 레일과 음향의 궤적을 따라가는 비 관습적 체험 속에서 순수시각적 이미지라는 개념은 허구로 드러난다. 대신 그것은 '시각적-몸적 체험'이라는 창발적 경험으로 변화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업들은 뒤샹의 유명한 「회전판 작업」(Rotorelief)과 「빈혈증 영화」(Anemic Cinema)의 계보를 잇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뒤샹의 작업은 순수한 시각개념의 비판과 아울러 시각-몸의 결합을 예증하는 작업이다. 이미지를 모터로 회전시킴으로써 시지각을 생리학적 경험으로 변화시킨 뒤샹의 작업에 대해,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시각의 육화"(corporealization of vision)라고 표현하며, 이것이 모더니즘의 순수시각이라는 개념에 대한 전형적인 전복의 전략임을 말한 바 있다. 시각이란 개념에 이미 '몸의 억압'이 개입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몸을 되살려 시각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곧 서구 근대문화를 지배하는 시각중심주의의 전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정신, 형태, 의미라는 항목, 그리고 몸, 감각, 히스테리라는 이 두개의 항목 사이에는 밀접한 상호작용이 항상 일어난다. 전자는 후자를 통제, 억압하는 반면 후자는 전자를 혼돈에 빠뜨리고 거세한다. 후자의 항목, 즉 몸의 히스테리는 그것이 과도할 때 필연적으로 '의미훼손적'이고 '탈의미적'인 특징을 지닌다. 예를 들어 뒤샹의 「주어진」에서, 문의 구멍을 통해 내부의 벌거벗은 여체를 과하게 몰입하며 응시한다는 행위는 사실 대상을 바라보는게 아니라 대상에게 자신의 내부를 내어주는 것, 대상 그 자체가 되는 것, 결국 대상 자체가 됨으로써 대상의 의미를 빼앗기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리오타르는 말하기를, 작품 「주어진」에서 남성관객이 그 구멍을 통해 몰입할 때 그 다리 벌린 여자의 '보지가 된다'라고 했다: "He who sees is a cunt"). "이미 권력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시선에 항거하는 불경스러움이 만들어 낼 균열과 혼돈, 우리의 감각과 몸을 불화로 이끌 소음 자체"(-작업 노트)라는 홍명섭의 언급에서, 우리는 그가 예술을 지탱하는 '상징적 질서'를 몸의 감각을 통해서 해체하는 것이 최종목표였음을 알수 있다.

홍명섭_waterproof_혼합재료_설치_2012

이번에 새로 시도한 렌티큘러 작업인 「몸-시간의 존재방식」(2012)과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 레지던스에서 시도한 「Waterproof」도 동일한 맥락에 위치한 작업이다. 관객의 발걸음, 이때 허공에서 발생하는 첨벙대는 물소리 음향은 우리의 의식을 채우고 있는 인식론적 질서 속에 균열을 일으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바로 사물의 친숙한 질서를 교란하는 낯설음, 즉 프로이트가 말한 '기괴함'(Unheimlich, uncanny)의 기분 같은 것이다. 기괴함의 정서가 정신분석학적으로 억압된 '실재의 예기치 않은 귀환' 또는 죽음충동의 엄습임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세계'라는 것은 실은 의식에 의해 지탱되는 '의미의 정치적 질서'에 불과한 것이고, 기괴함은 그것을 언제든지 와해시키는 무서운 '우연의 재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명섭의 작업에서의 생리학적 측면은 단지 몸의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믿음의 구조를 전복하는 전략인 셈이다. 작가 자신은 그것을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표현을 빌어 '불화'(mésentente, disagreement)라고 강조하곤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 작업이 일종의 불화를 촉발-촉진하기를 바란다. (...) 우리의 사유와 지각이 달라지고 새롭게 배치되는 타자적 지점을 향해 고정된 정체성의 인식에 교란을 주어 우리가 "누구인지"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꿈꾸는 체험을 관객에 의해 더불어 창출하고자 한다"(작업노트 中). 홍명섭이 말하는 불화는 물론 '사회적 불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회 내의 非사회적 작용'이고 , '사유 내에서의 非사유적인 작용', '예술 내에서의 실재의 작용' 같은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 나는 홍명섭이 중시하는 '타자'의 의미를 '전적으로 새롭거나, 전적으로 이질적이거나, 전적인 차이를 지닌 존재'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전적으로 좋은 존재'조차도 아니며, 가장 결정적인 점은 그것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적인 차이'는 전적인 동일성이라는 또 하나의 장르이고 개념일 뿐이다. 그것은 바타이유가 말한 방출(expenditure)이 철저히 제한되어 명확한 형태와 의미의 내부로 포섭되고 새로 정의된 또 다른 동일자에 불과하다. 나는 타자를 그 어떤 신천지에서 낭만주의적 해방을 가지고 도래하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둘러싼 이 뻔한 존재들 속에, 이 동일자 속에서 우연히 분출하는 기괴한 낯설음(바로 라깡이 '실재'the real라고 부른것)이라고 이해한다. 타자란 단지 갑자기 '낯설어진 존재', 이미 항상 '분열 해체되어 있어 정의불가한 존재', '자신의 장소를 가지지 않는 존재', 바타이유 식으로 표현하면 '존재 자체에 발생하는 우연의 재난, 존재의 넘침'이라고 이해한다. 타자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즉 동일하게 보존되고 이해될 수 있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일체의 '정치사회성'에 대해 저항적일 수 있고 또 그런 방식으로만 전복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저항(resistance)이 아니고 재난 혹은 테러라고 최근의 철학이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홍명섭의 작업이 어떻게 정치에 관여되는가 하는 방법론적 맥락이 드러난다.

홍명섭_waterproof_혼합재료_설치_2012

홍명섭 작업의 정치사회적 측면은 그 안에 내재한 어떤 정치사회적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들이 유도하는 낯선 느낌과 반응에 있다. 홍명섭은 "현실과 다른 미술이라기보다는 현실을 다르게 구축하고자하는 미학적 저항"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한 낯설음은 정치사회적 의식을 가진 주체 자체의 안정된 위상을 변질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홍명섭 작업의 정치사회적 의미는 결코 '명쾌한 표현'과 '기호학적 소통'이 아니라, 단지 모호한 알레고리, 즉 통합된 정치사회적 가치나 믿음의 허망함 정도로만 느껴질 뿐이다. ● 이 점에서 볼 때, 홍명섭의 작업을 마치 정치사회문제와 담을 쌓고 '순수한 미학적 탐구'로 도피한 예술로 보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예술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문제는 예술을 정치적 의미를 담은 대상으로만 보고 이를 주체의 현존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신학주의적, 계몽주의적 예술관이다. 홍명섭은 이 점에서도 명확한 입장을 밝힌다: "비판하는 주체는 빠져나온 상태가 되는 대상주의적 선상에서 비판의 대상을 주체와 떼어놓는 그런 입장과는 다른, 비판 대상에 앞서 그 비판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의 문제... 다른 말로 하자면, 비판의 눈은 비판의 대상과 분리 될 수 없다는 양식 같은 것이 억압된 국면처럼 철없어 보였다. (...) 내 작업에는 사회비판적 관심(반영)이나 정치적 내용이나 현실이 담길 수 있는 내부가 없다. 바깥 뿐인 내 작업은 그 자체의 작동 모습과 외부로 작용하는 어떤 감응이나 마찰을 유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작업의 시대와 세상에 대한 꿈이고 반응일 것이고, 그것이 내 작업의 정치적 모습/이유 일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 자신의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 그의 '작업이 지닌 정치적 태도'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고, 그 태도란 바로 '정치에 저항하는 태도'이다. 정확히 말해 '예술을 그 어떤 의미의 매개체로 예속시키는 정치'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저항의 전략은 바로 넘쳐흐르는 몸의 감각을 활용하는 것이다. 35년에 걸친 그의 전 작업은 언어의 법, 진리의 법, 정치의 법, 그 모든 '아버지의 법' 내부로 들어가고 그 내부로부터 넘치는 몸의 불경스러운 쾌락을 찾아내는 과정의 무한한 반복이어왔다. 그것은 평화로운 즐거움이 아니라, 오직 한계와 금지, 결여와 지연을 통해 얻어지는 모순적 쾌락을 반복적으로 추구하는 행위, 즉 라깡이 말한 '향락'(jouissance)이다. 그리고 작가 홍명섭의 모습은 바로 그 향락의 회로 속에서 고통스럽게 만족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 김원방

Vol.20121107g | 홍명섭展 / HONGMYUNGSEOP / 洪明燮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