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작동 縐嘗作動

정직성展 / JEONGZIKSEONG / 正直性 / painting   2012_1103 ▶︎ 2012_1125

정직성_20124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259.1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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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110_토요일_05:00pm

영은 아티스트 프로젝트_5th Relay Exhibition

후원 / 경기도_경기도 광주시

관람시간 / 10:00am~06:00pm

영은미술관 Young Eun Museum of Contemporary Art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8-1번지 제4전시장 Tel. +82.31.761.0137 www.youngeunmuseum.org

영은미술관의 다섯 번째 릴레이 전시로 정직성 작가의 『추상작동 縐嘗作動 Chusang Jakdong』展을 개최한다. 이 전시는 작가의 열 번째 개인전이기도 하다. 작가는 급격한 개발이라는 한국적인 도시환경 속의 특수한 공간 질서에 주목하여 추상의 형태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가는 거주자가 생존을 위해 임시방편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조들, 다양하고 자율생장적인 공간 질서에 주목한다. 작가는 이러한 현실의 리얼리티에 뿌리를 두되 보이는 것의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 두 발로 걸으며 공간을 체험하는 몸의 이동을 창작근간으로 하되 추상의 형식으로 대담하게 나아가는 작가의 회화 논리는 민중미술과 형식주의 미술, 두 진영간 뿌리 깊은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 속에서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그 자체의 본성으로써 아름다운 형태인 추상 미술이 그 자체의 본성 바깥의 드러남이라는 것을 작가는 역동적이고 강렬하며 구조적인 회화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 우리는 작가의 독창적인 작품들을 통해, 빠른 경제성장과 자본주의화에 따른 속도와 압력 속에 매몰되지 않는 건강하고 유연한 미학적 주체를 즐겁게 상상할 수 있다. 우리 삶의 총체성에 대한 추상미술의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는 이번 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공간, 혹은 도시 공간 속 다양한 질서를 반추하고 향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영은미술관

정직성_201248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259.1cm_2012

추상작동縐嘗作動어떤 변화_추상충동? 올해 작가에겐 여러 가지로 많은 변화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전부터 추상의 그것을 한 품에 견지한 작가이긴 했지만 추상충동이라해야 할까, 이른바 본격화된 추상화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만 여느 추상화의 그것처럼 이러한 변화가 꽤나 많은 사연과 여정 속에서 여러 생화학적인 산고의 과정 속에서 도달된 것들이고, 그렇기에 단순하지 않아 보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다 원숙해진 작가로서의 출발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징후처럼 느껴진다. 고고학이나 계보학의 서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발자취 정도를 더듬어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볼 수 있도록 하자. ● 기억하기에 정직성 작가의 작업은 무척이나 의식적이고 개념적인, 그러나 회화였다. 작가의 작업은 지금, 여기를 둘러싼 경직된 사회의 구조들에 대한 회화적인 항변이었고, 서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과정에 사회를 둘러싼 온갖 현실적인 것들, 때로는 개념적인 것들과 동시대 담론들이 녹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지난한 삶의 궤적들 또한 담아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지만. 여하튼, 못난 사회적 현실을 둘러싼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현실 공간의 불편부당함에 대한 분명한 독법(讀法)과 문제설정(problematic)의 시선이었던 것 같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이를테면 '전략으로서의 개념적인 회화'라 할 만한 것들을 펼쳐냈다. 옳지 못한 세상에 대한 일정한 비판의 시선들과 사유를 드리우는 작업들이라 할 수 있는데, 대체로 현실인식의 긴장감 있는 끈들을 놓지 않으려 하는 맥락과 함께였다. 이 과정에서 인식론적 그물망들이라 할 수 있는 여러 동시대 이론들의 흔적들이 보이긴 하지만, 이조차도 현실의 복잡다단함과 그 미세한 결들을 붙잡기 위한 방편으로서 자리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미 주어진 것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세상을 보려하고, 다가서려는 것이다. 아니 다르게 감각하려 했던 것이라 해두자. 추상의 전략이 필요했던 한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 작가가 시선을 향하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 우리를 둘러싼 현실 공간이었다. 작가는 균질하고 추상적인 공간성 대신 체험으로서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장소성, 혹은 반장소성의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면에서 정태적인 공간의 논리를 횡단하는 시간성의 전략을 천착한 회화를 지속해온 것이다. 이는 우리를 그럴듯한 환영으로 짓누르고 있는 저 요란한 자본주의의 스펙타클 한 공간 이미지를 재독해하고, 작가의 말처럼 도시공간의 내적복합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와 연동된 구체적인 삶의 질감과 차이 있는 세부에 대한 강조는 이를 회화적 버전으로 실현해야 하는 작가에게 있어 적절하고 유효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내용상으로 보자면 지극히 개념적이고 담론적인 독법이지만 작가의 실천은 구체적이었고 감각적이었다. 한편에서는 도시주의 심리학적 실천으로 현실적 효과를 발휘하는 모그룹의 일원으로서,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실천과 연동된 화가로서의 삶이 결합된 것이었는데, 작가의 회화적 실천은 이러한 맥락에 더해 개인의 내밀화된 감각상의 선호도 한몫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천(賤)하나 아름다운 자본의 공간화에 반(反)하는 작가의 선택은 걷기와 같은 신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었지만 무의지적인 감각작용이나 무관심적인 태도에 의해 우연히 조응하는 것들, 도시화의 틈새나 이면의 공간에 대한 발견들로 이어졌다. 개념적인 시선이었지만 그 시선으로 작가가 포착하려 한 것은 한 하늘아래 잡다한 것들이 뒤섞여 있는 이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살가운 것들, 정감 있는 것들, 자생적인 차이의 감각들로 향한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들 현실의 구조화된 틈새에 자리하는 예기치 않은 상황들, 우연성, 의외성, 아이러니, 돌발성 같은 변수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감각하고 이를 화폭에 담아내려 했었다. 하지만 이를 다시 구조화시키려 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물론 이때의 구조는 현실의 구조와는 다를 것이다. 정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는 이를 '무정형 구축'이라 개념화시키려 했고, 이를 스스로 자라나는 생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긍정의 플로를 드러내려 했다. 결국 작가의 그림은 이러한 구조의 감각을 복원하여 살아있는 형상들을 재구축하는 것이 된다. 단순한 안티 항으로서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려는 적극적인 생산적인 기운을 긍정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현실의 구조화된 틈새에 자리하여, 그 너머의 존재들을 말하는 바깥의 사유라 할 만한 것들이라 할만하다. 다시 말해 정태적이지 않은 생성과 변화의 흐름을 붙잡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의외성, 예기치 않은 순간들을 담아내기 위해 작가는 때로는 무의식적이고 자동기술적인 방법론 같은 것들 또한 차용하는데, 이는 구조화된 언어 너머의 회화적인 몸짓이며 감각의 복원과 형상적인 것(the figural)에 대한 천착이라 할 수 있다. 구조의 이면에 자리하는 보이지 않은 것들, 그 잠재적인 변화와 생성의 힘들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런 현실의 미묘한 상황과 변수들에 대한 사유를 작가로서 감각적인 방식으로 펼쳐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다하지만 작가가 부여잡은 구조화의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또 다른) 질서의 논리일수도 있다. 이를테면 구조화의 역설이라 할 만한 것들인데, 이런 점들이 작가에게 결국은 또 다른 강박으로 작용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래서 만약 작가의 작업에 변화가 있었다면 이러한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 다시 말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질서의 논리로 포섭시키고, 이를 화폭에 담아내야 하는 그 부담감으로부터 탈피하려 한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정직성_20124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259.1cm_2012

추상의 논리, 전략 ● 여기서 추상의 논리, 혹은 추상의 전략이라 할 만한 것들과 다시 만난다. 추상은 주어진 현실 세계를 있는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정신의 과정을 통해 이를 축약, 단순화하는 과정을 거친 미술의 논리이다. 단순화라는 꽤나 복잡한 논리를 통해 가시적인 세계를 (경우에 따라서는 비가시적인 세계를) 다시 가시화시키는 '논리적 작용'인 것이다. 그렇기에 추상은 통념처럼 그저 대상에 대한 단순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그저 단순화시킨 추상의 과정도 역사적으로는 있긴 했지만 적어도 동시대 현대회화의 논리는 대체로 그러한 역사적 흐름들을 다시 (재)전용하는 과정을 거치기 일쑤이다. 그렇기에 동시대 회화에서 추상의 전략은 복잡다단한 세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관념처럼, 대상에 대한 본질적이고 환원적인 접근을 통해 이를 다른 형태로 변형하는 사고의 과정을 수반한다. 세상에 대한 감각적 작용이나 특정한 태도로 전유하기도 하는 것 같다. 예전과 동일한 점이 있다면 이러한 추상의 논리이기에 추상은 일종의 철학적 사유의 하나로서 기능했다는 점이다. 세계를 작가적인 방식으로 느끼고, 해석하고, 행위 하는 하나의 논리라는 점에서 말이다. 세상과 긴장감 있게 연결된 작가의 시선, 사유, 태도가 응축된 것이기에 추상 속에는 복잡한 세계의 단순화뿐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자리하는 작가의 역설과 모순, 긴장감이 함께 자리하기 마련이다. 추상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려하는 자유로운 시선의 전략과 행위가 묻어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작가가 선택했던 추상은 대체로 이러한 긍정적인 추상의 전략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많은 우회를 통해 작가는 추상이 가진 여러 역사적인 오류와 과오들에도 불구하고, 추상이 가진 보다 밀도 있는 자유로움의 시선을 비로소 긍정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 이러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근작들에서 예전 작업에서 볼 수 있는 추상의 방식들, 곧 작가의 화명(畵名)과 같은 질서정연하고 바른 화풍과 달리 훨씬 더 자유로운 힘의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감하고 힘 있는 붓놀림에서 자유로움이 묻어나오는가 하면 이전의 단조로운 색감은 훨씬 다채로워져서 심경의 변화마저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훨씬 더 유연해지고 여유로워진 것들의 흐름들을 그림에서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긍정적이고 유연한 사유와 에너지를 읽어낼 수 있기도 하지만, 더 복잡해진 내밀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유연하고 호방한 화풍 속에 무언가를 애써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여전하다. 그래서 여전히 추상은 보는 이들에게는 음흉스럽고 고약하기만 한 그리기의 방식들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저간의 작가의 맥락이나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작가의 경우엔 좀 더 복잡한데, 여기에 어떤 의미심장한 변화마저 더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 때문이다. 화면에서 전해오는 시원한 붓 터치가 활력 넘치는 움직임을 빚어내고 있지만 유동하는 저 형상들이 그간의 그림의 이력들을 고려해볼 때 왠지 남다르게 다가왔던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추상은 아직 완성형의 그것이 아닌 어떤 변화의 과정 속에 놓여있다고 보았기 때문인 듯싶다. 과연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정직성_20125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259.1cm_2012

추상작동縐嘗作動 ● 사회 내에서 보이는 것들, 혹은 보여 지는 것들은 이미 정태적으로 구조화된 것들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에 온갖 권력의 힘마저 작동하니, 이에 대해 편치 않은 심정을 가진 작가로서는 이들 구조화된 현실의 이미지로부터의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방편 중의 하나가 추상의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 비루하고 몹쓸 현실로부터 가감 없이 덜어내는 그 행위만으로도 작가가 고민했음 직한 심경이 십분 이해되지만, 단순히 회피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 지기에 작가가 구상하는 추상의 전략에 대해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이전 작업들에도 추상적 요소는 있었지만, 2008년도 김진혜 갤러리에서의 『기계』전을 전후로 해서 추상이 더 적극적인 동인(動因)들로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전시에서도 기묘한 한국의 공간 형태라 할 수 있는 연립주택의 반복성 속에서 미세한 차이와 자율적 생산구조를 드러내려 한 시도는 여전하지만, 현실 공간에서 채집한 요소들을 재조립하고자 했던 방법론, 곧 그림이 가지고 있는 내적 구축의 논리 자체를 더 부각시켰다. 추상적 요소의 강조도 이와 연동된다. 이들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방향으로 이어지는 연결 공간들, 이를테면 계단이 난간이 되고 난간이 다시 벽이 되며 건물의 몸체가 다시 계단이 되고 천정이 되는 식의, 화폭에 시간의 흐름을 지속시킨 무정형 구축의 논리들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접근의 틀이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구조화의 구조화라 할 수 있는 이전의 논리 대신 기계 개념을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기계는 구조와 다를 뿐만 아니라 구조가 가진 정태적인 것들을 절단하고 가로지르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구조적으로 수립된 사물의 질서에 대한 절단의 체계인 것이다. 기계의 작동은 무작위적이고 잠정적인 것으로, 절단이 되었다가 다시 봉합되고 이어지면서 이질적인 요소의 체계, 다시 말해 변화와 생성의 힘으로 횡단하는, 현실의 심층적이고 복잡한 (비)체계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구조화의 역설을 넘어서는 논리인 셈이다. 동시에 힘의 흐름에 수반되는 무의식과 욕망의 논리마저 담아낸다. 삶의 우연성을 드러내는 자동기술적인 방법론과 만나는 것도 이런 지점에서인데, 기계의 작동이 무의지적이고 우연한 변수를 긍정하고. 그러한 기계적 움직임의 반복이 또 다른 차이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계의 작동 원리는 신체로 경험한 요소들을 재조립하고 이들 감각을 형상화시키려 했던 작가의 작업을 다른 식으로 도해할 수 있는 방법 틀이며, 앞서 말한 구조화의 역설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훨씬 더 유연하고, 역동적인, 그러면서도 그림의 내적인 작동 방식을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기계』전 이후 작가는 『작동』, 『가로지르고 멈춘다』, 『흐르는 기계』전 등으로 계열화 된 전시를 이어 나간다. 대신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더 추상적인 것으로 선회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터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계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작동이라 할 수 있는 동적이고 유기적인 흐름에 더 강조점을 둔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불가항력적인 구조나 힘에 대한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이나 이와 연동되는 자연발생적인 생장에 대한 관심은 이전부터 있었다고 본다면 작가의 변화란 단지 외적인 그림의 양상에서의 변화이거나, 그 부각 지점의 이동 정도로도 설명할 수 있다. 유동적인 흐름에 대한 선호는 이전 작업들에서도 충분히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미세한 변화의 양상이나 강조점의 이동은 그림에서 크게 드러나는 법이다. 근작들에 있어 즉흥적인 공간구축은 여전하지만, 이를 외화 시키는 방식에 있어 가감(加減)의 폭이 커졌고, 빈 공간들을 포함하여 자유롭고 여유로워진 화면 구사에서 작품 혹은 삶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 있어 어떤 근본적인 변화들이 감지된다. 예를 들어 화면의 움직임과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는데, 선, 형태, 색채 등의 사용이 과감해졌음은 물론, 서로간의 경계를 넘어 상관하고 침투하는 방식에서 한결 편해지고 유연한 느낌들이 전해진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자국들이나 선들도 그대로 둘 정도로 말이다. 이는 작가의 말처럼 '삶의 불확정성을 화면에 받아들일 때가 된' 것이라 판단하고 무언가를 정리하는 강박을 벗어나 작가가 느끼는 그 자체를 좀 더 자유롭게 구현하려 했기 때문인 듯싶다. 그런데, 단지 화면상의 변화뿐이었을까? 혹 세상과 삶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져서 그리고 좀 더 원숙해졌기에, 이제는 그 앞에 놓인 것들을 온전히 품어내어 이를 향유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추상미술은 어떤 면에서는 작가의 내적 복합성이 표현된 미술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미세한 감각들과 삶에 대한 태도들이 묻어 나오는 추상 미술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가는 이러한 반복적인 그리기의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차이의 감각을 생성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어떤 상황마저 흔적처럼 드러내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되물어보게 된다. "그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은 그림이 나에게 나를 가리키며, 어떤 분열도 어떤 강요된 의미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나 스스로 의미로서의 나를 구성하라고 요구한다." (피에르 술라주, 이미지와 의미, 정의진, 추상미술의 언어적 스테이트먼트의 어떤 필연성-피에르 술라주의 시적 회화론을 첨부하며, 인문예술잡지 F 2호, 문지문화원 사이, 2011 中에서) 세상의 예기치 않은 변수들과 예외적인 상황들을 기꺼이 보려 한 것이 결국 그러한 세상과 결부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향한 시선과도 중첩되었던 모양이다.

정직성_20125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259.1cm_2012

그래서 작가의 추상은 현실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고 그림인 동시에 삶에 대한 자신의 감각들과 태도마저 드러내는 궤적이고 흔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일종의 다이어그램(diagram)인 셈이다. 다이어그램은 현실의 힘들의 흐름을 도해하는 방식인데, 거시적인 구조의 방식이 아니라 무한히 작은 관계들, 감각적인 차이를 가시화시키면서 힘들의 역동적인 흐름, 곧 그 균열과 단절을 포함하여 유동적인 변이와 생성의 흐름을 드러낸다. 아울러 추상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어그램은 이미 다양한 층위로 고착하여 일관된 힘의 논리를 강요하는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이를 넘어서려는 비판과 생성의 시선의 흔적들을 담아낼 수 있게 된다. 불균형적이고 열린 체계이기 때문이다. 변이와 생성의 흐름에 놓인 것은 비단 현실의 세상만은 아니기에, 이는 작가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게 보자면 근작들에서 보여 지는 변화는,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세상과 작가 자신(의 감각)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을 일치시키는 과정으로 읽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삶의 그 생생하고 구체적인 것들을 붙잡으려는 애씀 말이다. 어떤 고정된 의미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이를 발견하고 포착하며 개방하려는 시도라는 면에서, 작가의 최근의 달라진 것 같은 횡보는 변화이기에 앞서 지속이고 연속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변곡점은 자리했다는 생각이다. 추상은 그런 면에서 현실은 물론 그와 결부되어 있는 자신의 감각상태마저 드러낼 수 있었던 효과적인 방법론이었다는 생각이고, 이를 추상작동(縐嘗作動)이라 칭해보는 것은 어떨까. 현실의 세부를 주름지게 하고(주름질 추縐), 이를 다시 시험하고 체험케 하여 맛을 음미하는(맛볼 상嘗) 그런 작동 말이다. 무한한 펼침과 접힘을 반목하는 주름 작용은 이질적인 요소들의 관계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인 동시에 그와 연동된 탈중심화 된 주체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작용 속에서 미학적 에토스를 가진 주체 형성 또한 가능해진다. 다면적인 감각으로 세상을 대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원적인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저 유동하는 액체의 흐름처럼 우연하고 유유히 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진중한 인식과 비판 대신 온전치 못하고 비루한 세상마저도 온몸으로 받아들여 이를 즐거운 유희와 저항으로 변환시키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동양화의 그것처럼 작가는 이를 그림 그리기의 과정을 통해 때로는 비워내고, 때로는 색과 형의 자유로운 유희를 통해 어떤 질서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태도로 재무장하여 살아있는 현실 공간을 그림으로 다시 조립, 구축해간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여전히 그림 그리기는 작가에게 '상황을 능동적으로 넘어서는 확대된 자유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작가와) 작가의 그림은 自然처럼, 더 완숙하고 너른 영역을 향해 스스로 그림이 되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자리하는 자기 자신의 현존에 대한 긍정과 세상을 향한 자유로움을 벡터로 삼았으니, 그것이 설령 여느 추상의 그것처럼 보인다 해도 개의치 않았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추상이 가진 어떤 깊이 있는 의미들을 작가가 이미 제대로 맛보았을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 민병직

정직성_20125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259.1cm_2012

2011-2013 Youngeun Artist Project 영은 아티스트 릴레이'展 ● 2000년 11월 개관한 영은미술관은 경기도 광주 경안천변의 수려한 자연 속에 자리하고 있는 현대미술관이자 즐거운 문화휴식공간으로, 작가지원을 위한 창작스튜디오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영은미술관은 지역을 기반으로 창작, 연구, 전시, 관람, 미술교육 등 창작과 소통이 유기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한다. 영은미술스튜디오는 미술관 개관과 함께 시작되어 김아타, 권오상, 육근병, 윤영석, 이한수, 지니서, 함연주, 황혜선 등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중견 및 유망 작가들이 거쳐 갔다. 아울러 6기가 입주한 2006년부터는 기존의 1년이던 입주기간을 2년으로 바꿔 보다 실질적이며, 장기적인 창작지원이 가능하도록 운영되고 있다. 현재 인세인박, 김순희, 김기훈, 이만나, 정직성, 신선주 장기작가 6명과 이외에 국내외 단기작가 5명이 8기 작가로 입주해 활동하고 있거나, 입주할 예정이다. ● 영은미술관에서는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지원프로그램인 '2011-2013 영은 아티스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영은아티스트 릴레이展』을 개최하고 있다. 매월 한 작가씩(장기 입주작가) 릴레이 개인展으로 이뤄지며, 영은창작스튜디오 장기입주작가(8기) 6명이 참여한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영은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보다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소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12년 4월부터 시작으로 2012년 12월까지 6명 작가의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또한 전시와 별도로 6월과 11월에는 평론가, 큐레이터 등 외부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동워크숍 및 오픈스튜디오도 열린다.

Vol.20121108h | 정직성展 / JEONGZIKSEONG / 正直性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