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lag Station, Photograph

Committal Dimensions - The Flag Station, Conceptual Art展   2012_1109 ▶︎ 2012_1219 / 월요일 휴관

이갑철

초대일시 / 2012_1109_금요일_06:00pm

The Flag Station, Photograph 전시기간 / 2012_1109 ▶︎ 2012_1125 참여작가 / 이갑철_박홍순_노순택   Committal Dimensions - The Flag Station, Conceptual Art 전시기간 / 2012_1130 ▶︎ 2012_1219 참여작가 / 홍명섭_구현모_허구영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The Flag Station"은 80년대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는 한국 현대미술현장의 구체적 개념과 유형의 분기점을 찾는 것에서 출발하며 아래와 같은 질문을 통해 쿤스트독의 '한국 현대미술 역사읽기'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 8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양식적 문맥은 존재하는가? / 시대와 사회, 계층과 미술의 유형을 관통하는 예술/예술가의 태도는 무엇인가? / 예술가의 작업에서 자의적 해석이 지닌 특권(!?)을 수용하면서, 한국 현대미술 현장에서 예술의 문화사회적 역사성을 진단한다면 우리는 어디(예술가와 예술작품)를 바라 볼 수 있는가? ● 프로젝트의 첫 번째 전시로 사진영역에서 이갑철, 노순택, 박홍순이 참여하며, 비평가 정현이 대화와 작가연구를 통해 함께 합니다. ■ 쿤스트독 갤러리

기록 바깥의 기억, 존재 이전의 사라짐에 대하여쉴새 없이 밀려드는 (텔레비전, 스트리밍 비디오, 영화의) 이미지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는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진이 가장 자극적이다. (수잔 손탁) / 쇤베르그는 박테리아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1930년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 "라디오는 적이다. 참을 수 없는 이 적은 불행히도 그와 저항하는 모든 것들과 저항하며 주저함 없이 전진한다.", 라디오는 "우리가 음악을 인지할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음악이 듣고 싶은지 묻지 않은 채로 음악을 쏟아 낸다", 결과적으로 음악은 단순한 소음, 수많은 소음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밀란 쿤데라) / "사라짐의 문제이지 고갈, 소멸, 또는 몰살의 문제가 아니다. 자원의 고갈, 종의 멸종은 물리적 과정이거나 자연적 현상일 따름이다. 바로 거기에 차이가 있다. 인류는 분명 자연 법칙과는 아무 상관없는 특수한 사라짐의 방식을 발명한 유일 종이다. 어쩌면 사라짐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 보드리야르) ● 기록성은 사진의 운명이었다. 그것은 사진기술의 탄생과 함께 등장했으나 기록의 가치가 저널리즘과 조우하자 그 만남은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고정된 틀이 되었고, 우리들 가운데 사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의 기록성은 끔찍한 사건을 증명하는 최고의 매체로써 역사의 증거물로 스스로 역사가 되어 버렸다. 수잔 손탁은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로서의 사진이 상상력을 빈곤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사진 매체가 상상력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손탁은 사진 이미지와 윤리에 대한 토로를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현실 감각의 손상이었다. 과잉 이미지의 시대이지만 결국 사진은 세계의 단면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이 한계는 반대로 사진을 어떻게 다루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로 넘어간다. 하지만 손탁은 정확히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시사한 그림자를 통한 인식의 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진이 단순히 자아의 인식을 반영하는 매체로 호기심에 머물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증폭하는 매체로서의 가능성이 그녀가 요구하려는 바였을 터이다. ● 하지만 현대사회의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는 한낱 인스턴트 커피처럼 실시간으로 전송된 후 곧바로 폐기되는 시대이다. 이미지를 대하는 윤리적 기준 또한 모호하다. 영화 속 살인 장면이나 전투 장면은 특별한 검열 없이 방송되지만 흡연 장면만큼은 반드시 검열의 대상이 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고 모든 폭력이 용인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도처에 폭력의 이미지가 남용되고 있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관심한 편이다. 이미지에 관한 철학적 바탕의 희박함의 원인을 누구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이제 사진과 이미지는 숭배나 경외의 대상이라기보다 소비와 유희의 대상이란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사진과 예술의 만남은 일종의 타블로가 되어 기호의 집합체로, 동시대의 비판적 증거물로,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얘기하듯 '인덱스'가 되어 독해의 대상이 된다. 대개의 기록 사진은 독해의 틀 안에서 해석되고 분석되곤 한다. 그러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로베르 두아노의 기록 사진을 단순히 독해의 대상이라 부르긴 어려울 듯하다. 그것은 기록 이전에 보는 사람의 '잠재된 기억'(문화적이거나 역사적인)을 건드린다. ● 현대 기록 사진은 역사 이후의 흔적들 (전쟁의 상흔과 이데올로기의 잔여물, 과잉 생산에 따른 환경 폐해 및 과잉 개발, 세계화의 이면 등), 초자본주의 시대의 심리적 사회적 징후를 무표정하게 포착하는 냉정한 사진 (베허 부부의 사진 또는 정물화 한 인물사진 등), 은밀한 사적 삶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인티머시의 출현 등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풍경 사진의 경향도 발견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연히 작가의 관점에 있지만 사진 표현의 방식이 더 중요하다. 과학 기술의 진보는 물론이고 인화와 이미지를 전시로 옮겨 공간화, 물질화 하는 방법론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현대 사진은 관점을 새롭게 만들어낸다기 보다 이미 존재하던 관념적이거나 개념적 형상 또는 이미지를 실재로부터 발췌하거나 완성하는 데에 더 큰 즐거움을 찾는 듯하다. 물론 아마추어와 전문가 사이의 사진 작가와 시장은 여전히 극적인 풍경이나 누드 사진에 열중하지만 이는 기록 사진과는 그 궤를 달리 하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이 세속화 된 기록 사진들 혹은 회화적 형식을 사진으로 재현한 경우는 앵글 안에서 여전히 '아름다움이란 환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 여기서의 기록은 영속함을 추구한다. 절대로 사그라지지 않는 젊음, 빛, 영광을 남기려는 태도가 바로 역사 시대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역사 이후의 시대, 과연 기록 사진은 무엇을 '기록'하려 하는 걸까? ● 사진의 포착한 찰나는 소유할 수 없는 시간을 붙잡아 순간을 영원으로 박제화 한다고 믿었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술적 특성을 제외하고 실재 속에서 한 순간을 선택하는 행위 속에는 틀림없이 불가해한 신비로움이 있다. 보드리야르는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이제 이러한 신비마저 사라져 버렸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필름 카메라의 한계이자 신비의 순간인 대상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순간만큼은 사진가도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빛과 그림자의 연금술, 인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학적 연금술이 사라진 동시대가 시뮬라시옹의 철학가 보드리야르에게는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닌 듯하다. 그는 심지어 디지털 정보로 생산된 이미지는 이미지가 되기에는 모자란 것이라 말한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이미지로 (숙성될) 과정을 겪지 못했다는 것이다. ● 사라지기 위한 이미지 되기 기록 사진이라고 해서 현장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설사 그것이 보도사진이라 해도 현장성 이외에도 정치적 관점과 윤리적 태도가 강하게 내재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도 사진의 이미지는 정치적 함의를 통해 세상에 유통되고 이른바 프랑스적 인류애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속에는 불가피하게 서구인의 인류학적 관점 또한 굳게 자리잡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보도 사진과 달리 기록 사진은 그보다 넓은 영역을 아우른다. 사소한 개인적 일상부터 역사의 흔적까지, 웅장한 기념비적 사건부터 사회학적 현상에 이르는 다양한 소재와 대상이 기록 사진의 영역 안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기록 사진이 보드리야르가 언급한 '이미지'가 되지는 않는다. 보드리야르의 사진과 이미지의 관계는 다소 순수한 사진의 정체성에 기대고 있기에, 손탁의 사진에 관한 의견에 비해 다소 이분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보드리야르가 얘기한 사진이 실재를 증명하는 아날로그적 이미지 매체가 대상의 죽음과 필연적으로 만난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은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 이미지의 상상력 자체, 그 근본적인 '환상'은 이제 끝이다. 왜냐하면 컴퓨터 합성 작업에서는, 지시 대상으로의 환원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현실 자체도 '가상의 현실성'으로서 즉각적으로 생성되기에 실제로 일어날 여지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서 얘기한 폭력적 이미지와 흡연 이미지를 대하는 사회적 검열의 기준을 떠올려 보자. 반면 "아날로그적 이미지는 객체에 대한 주체의 직접적 현재함을 증언했다. 그것은 우리가 맞이하게 될 궁극적 분산과 디지털적 파도에 대한 마지막 유예였다." ● 노순택, 박홍순, 이갑철의 기록 사진은 여전히 아날로그 기술을 사용해 꾸준히 기록 사진의 영토 안에서 작업을 진행 중이다. 단지 아날로그 사진을 찍는다고 무조건적으로 현재의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세 사진작가들의 행보는 현장성을 대상으로 한 사진이 '거기-있음'이란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다. 기록의 남용과 사진의 과잉 시대에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만큼 현대미술로서의 사진이란 패턴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우직하게 현실에 포획된 이미지가 아닌 '실재'의 시적 '추적자'를 통해 한국적 기록 사진의 단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갑철
이갑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기록 – 이갑철 ● 이갑철의 사진은 연대기적 시간 밖에 위치한다. 성과 속 사이의 경계를 직관적으로 포착한 사진은 일상의 일부를 하나의 사건으로 작동시킨다. 크로핑 없이 완성된 사진은 동물적인 감각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서로 분리된 또는 무관한 대상들과의 도상학적 관계를 자연스레 유도한다. 그의 사진은 읽는 사진이며 동시에 시적 언어로서의 이미지에 가깝다. 특히 1990년 이후의 "충돌과 반동" 연작에 담긴 현실은 사회적 이슈가 아닌 연대기적 시간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 –무당, 제의, 스님, 인간과 동물, 자연과 인간-의 주술적이고 초자연적인 삶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사진이 구체적인 정보보다는 추상적인 관계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중심에서 벗어난 기슭에서의 삶은 도시의 삶과 달리 초월적 삶, 산악신앙을 가진 원초적 삶 속에 카메라 프레임이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공격적으로 슈팅을 한다고 표현을 한 적도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내게 그의 사진은 대상을 포착하기보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주변의 일부를 직관적으로 발췌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발췌한 일부가 서서히 사건으로 나타난다. 아마 이갑철 자신도 촬영을 한 후 그 사건이 아련히 구체화 되는 과정을 관찰하며 이미지 속 사건을 독해하는 첫 번째 관객의 즐거움을 만끽했을 것이다. 이 같이 이미지가 되는 과정을 기록이란 시간적,·분류학적 해석보다는 이미지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과정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이갑철의 작업이 기록이기보다 기억이란 추상을 형상화하는 사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노순택
노순택
노순택

사라진 기억을 되찾는 기록 – 노순택 ● 노순택의 사진은 역사 이후의 시대에 관한 시적 보고서처럼 보인다. 광주, 5.18 그리고 망월동은 한국현대사의 상흔이자 오늘을 이끈 결정적 순간이다. 광주에 대한 수많은 헌사와 추억, 고통을 재현하는 추모의 현상은 여전히 넘치지만 또한 여전히 모자란 것은 왜일까? 노순택의 정치적 사진들은 실제로 매우 시적 감흥으로 충만한 이미지다. 그러나 5.18은 역사로 종결된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21세기는 역사의 시대가 아닌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고 이 기록들은 정보화되어 측량되는 분류학의 시대다. 역사 이후의 시대에 역사의 한 켠을 차지한 기념비적 상흔을 다시 재현한다는 건 작가로서 그리고 동시대인으로 웬만한 사명감이 없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역시 사진 매체가 가진 기호로서의 속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아픈 기억을 굳이 되살리는 것이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노순택의 사진이 과거를 재현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광주의 사건이 아직 역사로 박제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의 사진이 광주를 회상하고 치유하려는 차원의 접근을 펼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반대로 그는 '망각'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민주화의 열기와 1980년의 사건 이후 급격한 민주화의 현상은 현재형의 사건이었던 광주의 이야기를 완결하고자 곧바로 기념화로 이동했기에 적어도 공적으로 광주는 '역사'가 되어버렸다고 작가는 해석한다. 역사화는 망각이란 기제로 작동할 수밖에 없고, 광주의 슬픔은 고스란히 개인과 가족의 몫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그는 광주의 기억을 직접적으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망각의 바다에 빠진 광주의 후유증은 노순택의 시선을 동시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공정한 삶의 현장으로 이동한다. 사뭇 보도 사진의 형식처럼 보이는 그의 사진은 이질적인 현장들을 담은 이미지들의 조합, 설치에 의해 의미를 추상화하기도 하고 관점을 입체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아마도 사진과 기록의 관계가 지시하는 진실의 보도나 이데올로기의 이미지로 귀결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강제해고, 강제추방, 강정마을과 같은 작금의 사회적 이슈를 사진에 담지만 궁극적으로 이 사진 이미지들에 의해 나타내고 싶은 것은 권력에 의한 규범의 조작이자 개발의 논리에 의해 자행되는 인간애의 파괴라는 광주 이후의 징후를 알려주고자 하는 것 같다. 사라진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제도 밖으로 추방당한 게 아니라 제도화에 의해 추상화 된 기억이고, 노순택은 추상화 된 기억의 봉인을 풀어 역사의 모순 속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다.

박홍순_백두대간-자병산 #06,1998_74×148cm_1999
박홍순_백두대간-함백산 #01,1998_젤라틴 실버 프린트_75×148cm_1999
박홍순_한강-강원도 정선군 동강 #04,1999_96×120cm, 180×220cm

기억을 위한 기록 – 박홍순 ● 백두대간을 종주한다는 목표와 국토횡단과 같은 의지는 내겐 다소 생경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자기 극복을 위한 단련의 차원이거나 영웅적 행동이라면 더더욱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박홍순이 국토를 횡단하려는 의도는 어느 쯤에 위치하는 것인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강원도 출신인 그에게 산은 단순히 정복하거나 취미의 대상이 아닌 삶의 터였을 것이다. 그의 사진을 자세히 바라보면 단순히 관조를 위한 산도 아니고 그렇다고 낭만주의 화풍의 숭고함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또한 신앙의 차원으로 바라보는 산도 아니다. 그는 개발에 의해 점점 훼손 되어가는 산의 상태를 주목한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기 전에 풍경은 존재하지 않았다. 산을 우러러보던 시대가 있었고, 아직도 산은 영험 한 대상으로 대자연의 신비는 유효하다. 그러나 일본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이 루소의 알프스 산 여정기에 의해 유럽인들이 산행을 하기 시작했다는 지적처럼 새로운 인식의 틀이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경외의 대상이었던 산이 부르주아지의 영웅적 취미의 일부가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최근 전 국민적 패션 아이템이 되어버린 아웃도어룩 시장의 팽창은 산행이란 행위가 정신적 태도보다 문화적 태도로 전환되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즉 자연이 풍경이 되는 건 바로 개념의 발명에 의해서이며, 풍경이란 개념은 불가피하게 자연에 가해진 인위적 폭력을 내포하기도 한다. 최근 현대회화에서 자주 표현주의적 낭만적 풍경이나 심리적 불안을 과장한 묵시록적 풍경화가 자주 목격된다. 이를 시대적 징후를 바탕으로 한 사회심리학적 풍경으로 본다면, 박홍순의 풍경 사진은 자연을 과장하지 않는다. 백두대간이란 줄기의 지형도를 따라가고 있지만 그는 지도학자라기보다 현재 한국의 산하가 겪고 있는 상태를 진단한다. 다소 냉철한 접근처럼 보이지만 막상 그의 사진을 보면 개념적 선입관은 달라진다. 의도적인 것은 아닌 듯 보이나 박흥순의 시선이 머문 산하는 개발의 상처 속에서 여전히 소박하고 포근한 질감을 놓치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시작은 망가지는 자연을 본 분노와 위기감 때문이었을 것이고, 이런 사실을 사회운동의 차원과 다른 입장에서 기억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바라본 산하는 늙은 부모를 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식의 상처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품을 수 밖에 없는 눈길이 담겨 있다. 그가 기록하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마저도 기억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아닐까? ■ 정현

허구영_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_나의 석사학위 논문을 태우고 남은재, 바구니, 계란_가변크기_2012

개념의 육화로서의 작업, 또는 태도 ● 쿤스트 독 갤러리의 연례 프로젝트 'The Flag Station', 그 두 번째 전시에 참여한 구현모, 허구영, 홍명섭의 'Committal Dimensions' 전의 작품들은 개념적 성향을 가졌지만(또는 개념주의 작가라고 분류되곤 하지만), 그들의 작품 속에 내장된 개념은 막연하고 추상적이지 않다. 매장, 공약의 의미도 있는 단어 'Committal'로 말을 지어내자면, 그들은 서로 모여서 어떤 한 개념의 깃발을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공약을 묻어버린다. 개념을 없애버린다거나 처음부터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작품에 묻어버린다. 개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앞 선 표어가 아니라, 맨 나중에 올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코드들이 겹겹으로 떠다니는 시대, 작품으로 육화된 개념, 육안으로 본 현실과 육성만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개념은 대개 본질을 추구한다. 그러나 본질(인간의 본질, 역사의 본질, 회화의 본질....)이 너무 많이 논구되고 언급되어, 더 이상 본질이 본질로 다가오지 않는다. 단지 본질이라는 것을 정의하고 설파해야 할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 또한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길을 열심히 가면 된다. ● 그러나 예술은 개념이 추구하는 바의 그 '본질' 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재미있으며 생동감 있는 게임이다. 작업이란 머리를 쥐어 짜내는 논리적 끝말잇기가 아니라, 더불어 같이 놀고 싶은 유혹을 발산하는 독특한 게임의 창안이다. 물론 이 게임은 보편화되어 사회적 규칙이나 시대의 패러다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술은 단지 시작할 뿐, 그 열매를 스스로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그 규칙을 스스로 공표하지 않는다. 더듬거리며 나아갈 뿐인 부드러운 덩굴 손 같은 예술의 첨단은 견고한 조직화와는 거리가 멀다. 개념이란 무덤의 묘비처럼, 모든 것이 다 지나간 후에나 정의될 수 있다. 하던 일 멈추고 자기 정의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행위는 작업이 잘 안 되고 있음, 또는 할 수 없음을 자인하는 셈이다. 더구나 그것이 자기반성조차도 아닌, 지배적 체계에 각을 맞추려는 순응과 타협의 몸짓이라면 더욱 씁쓸해진다. 예술은 어떻게 시작 된지 모를 어떤 것을 열심히 작동시킬 뿐이다. 왜 그것을 그런 식으로 하고 싶었는가는 작품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것이 뭔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애써 작업이란 것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현대예술은 재현이 아니다. 개념화를 위해 멈춘 순간이 아니라, 끝없이 작동 중인 것에 진짜 개념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 이 전시의 세 작가의 작품은 매우 다르다. 억지로 공통점을 찾기 보다는 차이를 통한 연결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이다. 가장 단순하게 이 셋을 기하학적 패턴과 비교하고 싶다. 유리컵을 대나무 모양으로 줄줄이 연결시킨 허구영의 작품이 선적이라면, 거대한 스테인레스 봉을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한 홍명섭의 작품은 둥글게 굽어있다. 일상의 한 모퉁이나 바람 타는 나무의 어지러운 궤적을 따라가게 하는 구현모의 작품은 흩어져 있다. 선의 끝과 끝이 만나면 원이 되고, 그것을 구기면 카오스 패턴이 된다. 그러나 공통점도 느껴진다. 허구영의 작품에서 성장을 추동하는 선적 흐름 사이에 끼어있는 재, 영원회귀나 윤회를 생각하게 하는 홍명섭의 원, 일상의 시공간을 늘려 놓거나 섞어 놓고 고독한 유폐의 공간을 연출한 구현모의 작품에서 죽음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죽음은 삶의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삶 한가운데 자리 잡은 죽음이다. 바타이유의 말처럼 죽지 않은 채 삶의 끝자락을 체험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예술이다. 가장 강렬하고 고양된 삶을 살아가는 작가에게 죽음은 늘 가까이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 항은 작품 속에서 하나가 된다.

The Flag Station, Photograph, Committal Dimensions - The Flag Station, Conceptual Art展_ 쿤스트독 갤러리_2012

허구영의 작품 「불사조는 재로부터 나올 것인가?」는 제목부터 묵시록적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스타일은 묵직하기 보다는 경쾌하다. 여러 종류의 투명 유리컵이 전시장의 하얀 벽에 기댄 채 종류 별로 열을 짓고 마디를 이루며, 대나무나 수초처럼 자라난다. 컵이라는 단위구조 외에 결절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컵 안에 조금씩 들어있는 재이다. 학위논문을 태운 재라고 한다. 재의 실체는 이론과 작업간의 긴장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학위논문은 태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학위논문에 그가 어떤 의미와 감정의 무게를 실었든 간에, 작업할 시간을 갉아 먹으며 골치 아프게 생산되었을 그 과제물은 블랙 유모어의 형식으로나마 작품에 기여한다. 켜켜이 쌓인 컵들은 그렇게 마신 술 또한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나마 작업의 뮤즈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다른 쪽 벽에는 시험관을 사선으로 배열하고 재 이외에 물도 넣었다. 녹지 않는 재는 떠있거나 가라앉아 이물감이 있다. ● 맥주 컵이나 소주 컵과 달리 시험관은 보다 중성적인 용기로 다가온다. 그것은 줄지어 연결된 모습이 아니라, 각자 존재하며 중력과 무관하게 붕 떠 있는 모습이다. 내용물 역시 다른 컵들처럼 용기의 형태나 중력과 어우러져 제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어중간한 형태이다. 시험관 속의 물에 떠 있거나 침전된 재는 말 그대로 실험 예술처럼 보인다. 실험은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묵직한 실재를 괄호치고 형식적 요소 간의 조합에 치중한다. 실험은 그 개념이 무거울 뿐, 생산물, 더 정확히는 표본은 가벼울 수밖에 없다. 한편 작가는 전시장 입구와 2층 계단 입구에 재를 묻힌 감자더미들을 쌓아 정물처럼 보이게 했다. 투명한 용기 안의 재는 마치 종이 위에 잉크로 쓰여 진 기호처럼 보이는데, 전시장 이곳저곳에 세 그룹으로 나뉘어 배치된 허구영의 작품은 의사소통의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으로부터 노동을 통해 생산된 대상인 감자를 감싸는 재는 상징적 유사물에 해당된다. ● 그것은 한 무더기의 감자를 그린 정물화와 닮아있는 유비의 형식이다. 일련의 단위구조가 선형적으로 조합된 투명한 컵들은 기호의 단계이다. 기호는 지시대상을 자못 투명하게 반영하며, 고전적인 언어학이 전제하듯, 기호와 대상은 아직 흩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시대상을 투명하게 반영, 지시하는 재현의 언어, 선형적인 언어이다. 그것들의 궤적은 명료하고 예측가능하다. 한편 사선으로 붙여진 시험관들과 그 안에서 물 때문에 지저분하게 엉겨 붙은 재들은 더 이상 대상이나 의미를 투명하게 비추지 못한다. 내용물이 쏟아져 내릴 듯 어슷하게 기울어져 있는 불안한 양식은 현대 언어학의 가설처럼 대상/기호(기의/기표)간의 임의적 관계를 예시한다. 허구영의 작품은 미술의 역사와도 무관할 수 없는 소통의 전사를 재치 있게 표현한다. 그러나 그 역사가 해피엔딩을 향하는 진보는 아니다. 마디마디에 맺혀있는 재는 그 단선적 흐름에 내재된 잔인한 진실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The Flag Station, Photograph, Committal Dimensions - The Flag Station, Conceptual Art展_ 쿤스트독 갤러리_2012

홍명섭은 스테인레스 봉으로 만든 거대한 둥근 원을 설치했는데, 그는 여기에 「만질 수 있는」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붙였다. 천정이 높은 전시장의 끝과 끝을 잇는 듯한 큰 규모를 가지며, 바닥에 살짝 닿아 관객이 만지면, 금속 원의 장력에 따라 미동이 발생한다. 워낙 크기 때문에 원은 한눈에 쏙 들어오지 않으며, 관객은 건축적 스케일을 가진 구조물의 그 안팎을 드나들 수 있다. 원은 텅 빈 중심이 아니라, 더듬어 감지할 수 있는 외곽들을 일깨운다. 거대한 원은 주관에 대응하는 객관적 대상으로 저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몸과 공간을 의식하게 한다. 미술관에 흔히 있는 '눈으로만 보시오!'라는 경고는 간데없고, 그의 작품 제목은 만져보기를 은근히 독려하는 듯하다. 이 원은 자아, 하늘, 신성, 완전성, 무한 등등을 상징하는 형이상학적인 원, 가령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에 있을 법한 실재의 원형으로서의 관념적 도형이 아니다. ● 그런 개념들까지 포함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의 원은 천사의 머리 위나 성인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정신적인 원이기 보다는, 우리의 몸과 함께 운동하는 훌라우프나 굴렁쇠 같은 원, 또는 메아리나 수면 위의 파장에서 보여 지는 원, 요컨대 끝없이 움직이며 육화된 원과 더욱 가깝다. 실제 공간을 초월하지 않는 이 원은 관념적인 환영을 물리친다. 관념적 소유의 기미가 보이면 그의 작품은 빛의 속도로 미끄러져 간다. 그의 원이 굳이 무엇인가를 상징한다면 시각적 관념이 아니라 몸과 엮이는 공간이다.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를 가지는 점의 집합 같은, 원에 대한 기하학적인 정의가 있을 것이다. 중심과 주변의 투명한 관계에 의거한 원에 대한 이러한 공리적 정의는, 홍명섭의 작품에서 실제 공간에 드리워진 거대한 규모로 인해 불투명해진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만져볼 수 있을 따름인 그 작품은 고전적 조각에 전제된, 전체와 부분간의 유기적 관계를 모호하게 한다. ●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현대 조각의 흐름을, 기하학적으로 고안된 공간의 구성에서, 인간의 지각에 의존하는 불투명성과 실제 시간 속에서의 지속의 경험으로 간파했듯이 말이다. 이에 따르면 현대조각은 정적이고 관념화된 매체로부터 시간적이고 물질적인 매체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의 몸은 만물의 척도가 되는, 신인동성동형론적이고 기념비적인 기둥이 아니라, 어떠한 분명한 좌표도 없이 마주한 공간을 통과하는 시간적 흐름으로서의 몸이다. 그의 작품은 어떤 한순간에 작품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지각을 요구한다. 현상학 역시 현대조각과 마찬가지로 선험적 의미가 아닌, 경험과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의미를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작품은 인식의 대상이기보다는 공존, 또는 교류의 장이다. 주관과 객관은 서로를 향해 개방된다. 메를로 퐁티가 말했듯이, '세계에 대한 신체의, 그리고 신체에 대한 세계의 이러한 상호적 움켜쥠'이 바로 지각의 기반이 된다.

The Flag Station, Photograph, Committal Dimensions - The Flag Station, Conceptual Art展_ 쿤스트독 갤러리_2012

전시장 입구를 막아선 듯 세워진 구현모의 「농 집」은 어릴 때 숨어들던 그 작은 구석을 떠오르게 한다. 1평이 채 안 되는 작은 집, 또는 방은 한 사람이 들어가 앉으면 꽉 찬 느낌을 주는, 작가 말로 '모태 공간'과 비슷한 규모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입구에 놓여 있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공용공간은 아니다. 그러나 이 내밀한 집(방)은 그동안 여러 주인을 바꾸어가며 전전해 왔다. 끝없이 바깥으로 내둘려 진 그것은 요즘 말로 유목을 했다. 은폐, 또는 방랑을 대놓고 드러낸, 이 전시를 위해 전시장에 잠시 멈추어져 있는 이 공간은 안이면서 바깥이다. 그는 주어온 문으로부터 공간을 짜기 시작했다. 그것은 갇힘이나 들어앉음 보다는 들고나는 공간이며, 작은 유리창으로 비치는 태양빛이 안과 밖을 연결한다. 예술 또한 주변과 구별되는 내밀한 공간을 필요로 하지만, 합리적 개인주의가 전제하는, 소유에 기반 하는 사적 공간은 아니다. 고립을 통한 연결은 예술의 역설적 특징이다. 이러한 이상한 연결은 불안과 희열을 동시에 준다. ● 그의 작품에 내재한 양가감정은 2층의 영상작품들에서도 두드러진다. 바람에 움직이는 나무 영상이 느리게 돌아가다가 중간에 늘어진 배경 음악이 끼어듦으로서, 작품은 환상성과 괴기스러움 사이에서 요동친다. 나무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는 듯하다가, 자신을 이리저리 휘젓는 거센 힘에 몸살을 앓고, 때로 신이 내린 무당 같이 전율한다. 속도의 변환은 우주의 춤으로부터 히스테릭한 몸짓까지 다양한 계열로 변주된다. 이 몽환적이고 괴기스런 풍경에서 그가 끼어든 부분은 속도 조절 밖에 없다. 조물주가 지구의 자전축을 건드림으로서 각 지역의 기후가 달라진 것과 같은 효과이다. 구현모는 일상과 자연의 리듬을 재배치함으로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어떤 이질적 요소를 드러낸다. 관성에 따라 살아가기 마련인 상식적 인간은 조그만 질서감각의 교란에도 저항하게 되는데, 그가 쾌재를 부르며 발견했을 법한 이질적 요소를 지렛대처럼 활용하여 현실을 극적으로 변모시킨다. ● 전적으로 다르다기 보다는, 늘 있어왔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시각적 무의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일상은 기이한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구석의 또 하나의 영상 작품 「골목」은 카페에서 쳐다본 골목 풍경에 작은 거울하나를 개입시킴으로서, 일상의 규칙에 따라 잘 돌아가고 있었던 세계를 산산이 분열시킨다. 비디오 앞의 거울은 서로 반사하는 4개의 면을 한 화면에 동시에 배열한다. 실시간으로 편집되는 현실의 장면은 화면 안에 보이는 유리문이나 지나가는 차들의 반사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다. 속도와 각도를 약간 건드려 줌으로서 평화로운, 또는 지루한 현실은 다차원적으로 접혀진 주름을 펼쳐 보인다. 연속성은 단절되고, 단절되어 있던 것은 이어진다. 삶의 한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는 자연과 일상은 생경한 얼굴로 드러나며, 관객의 혼란은 열락으로 또는 그 반대로 계속 이동한다. 그의 작품은 질서와 무질서가 카오스모스로 하나가 되는 지점이 있다. ■ 이선영

참고문헌 - 수잔 손탁, "타인의 슬픔", 이후, 2003, 44쪽 - Milan Kundera, L'Ignorance,Folio,p.167(필자 역) -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원제: Pourquoi tout n'a-t-il pas déjà disparu? 왜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까?", 민음사, 13쪽 - 장 보드리야르, 같은 책, 59쪽 - 위의 책, 61쪽 - "멀리서 카우보이 모자를 쓴 무법자 풍의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서부극의 결투 장면을 연상한 나는, 원하는 사정거리 안에 그가 들어서자 잽싸게 방아쇠를 당겼다. 내가 사용한 카메라가 작아서 그리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는지, 그는 싱긋 웃고 지나갔다.", '거리의 양키들' 연작. 이태원, 서울, 1984, 이갑철 사진집, 열화당 사진문고, 201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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