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展 / SONGCHANG / 宋昌 / drawing.painting   2012_1114 ▶︎ 2012_1127

송창_드로잉_종이에 먹_79×11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106k | 송창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16_금요일_05:00pm

화집발간 기념展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분단 이후-송창과 분단 현실의 풍경화 - 1. 트라우마 ● 송창은 버리지 못하는 것을 끌어안고 살아온 화가다. 세대의 업이란 게 이렇게 큰 것이로구나! 한 세대가 한 세대를 벗어나는 것의 힘겨움이 이렇게 크고 무겁고 또 무거운 것이로구나! 나는 탄식한다. 그는 그 업을 끌어안고 그 업에 눌린 채, 그 업과 투쟁하면서 일생을 살아온 화가다. ● 그 업이란 게 무엇인가. 좌우 대립과 전쟁과 분단이라는 이 땅의 업. 여기에 고향이 장성인 그의 땅 전라도의 업이 또 겹친다. 그리고 80년대의 사회과학적, 민중미술적 각성과 그리고 그것과 다소 버걱거리며 유지해온 반추상회화적 회화의 숭고(崇高) 사이의 주름, 그는 그 주름을 접고 펴고 펴고 접기를 반복하며 이 땅에 새겨진 분단의 눈물과 귀신들린 삶의 자취를 화폭에 담아왔다. ● 먼저 분단의 업을 말해보자. 전쟁과 분단! 참으로 크고도 무거운 업이다. 한 백 년짜리 업이 아닐까. 100년 동안의 고독은 저 라틴의 가브리엘 마르께스만의 것이 아니다. 이 땅이 그렇다. 이 땅에 살았던 우리의 조상이, 그 조상의 자식인 우리가 그렇다. 한반도는 일종의 유형(流刑)의 땅일지도 모른다. 분단이라는 형벌을 받고 있는 유형의 땅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그래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형기를 알 수 없는 수형인(受刑人)의 삶을 살게 되는 셈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수형인의 삶을 살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수형인이 아닌 삶을 알지 못한다. 분단 상황은 분단시대 이후 이 땅에서 태어나서 이 땅에서 교육받고 이 땅에서 사랑을 하고 이 땅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이 땅 사람들에게 익숙한 끔찍함이요 끔찍한 익숙함이다. 분단 상황 하에서 벌어지는 모든 끔찍함, 모든 참혹함, 모든 협잡, 모든 저급함, 모든 폭력,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일생이 된다. 이것은 거의 집단린치에 가까운 일상이요, 삶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린치를 가하면서 또 린치 당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 그 '알아채지 못함'이야말로 우리가 실은 깊은 내상을 입었다는 증거이리라. 예술가, 송창의 작업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아픔, 그 아픔으로부터 필히 파생될 수밖에 없는 트라우마로부터. ● 송창 작업의 출발은 전라도다. 지역적으로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의미로서의 전라도 땅. 어렸을 때 그의 그의 고향과 그의 집안이 겪어야 했던 좌우 이념의 대립을 말하는 것이다. 송창은 1952년 전남 장성 생이다. 노령산맥이 만들어낸 골짜기와 그 골짜기가 내주는 젖줄을 삶의 근거로 삼은 담양, 장성, 고창, 영광 등으로 연결된 평야지대가 그의 삶의 첫 배경이다. 가족이 겪어야했던 좌우 이념 대립 속의 고난의 삶의 역정. 아버지는 원래 전라북도 태인(평야지대. 고부 바로 아래)에 사셨는데 한국전쟁 때 장성의 깊은 산골로 피난 와서 정착하였는데 그것이 나중에 오히려 화근이 됐다. 낮에는 토벌대에 밤에는 산사람들에게, 특히 '주의자'였던 숙부 문제로 더욱 크게 시달리면서 가산을 탕진했고 집안이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다. 그는 말한다. "시대적 상황과 주변 환경이 성장기 나의 정서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특히 전라도라는 지역특성과 풍토성이 갖는 의미는 내게 아주 크다. 52년, 전쟁이 채 끝나기 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전쟁의 아픔을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유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며 일상 속에 스며든, 전쟁으로 인한 가난과 고통을 낱낱히 지켜 보았다.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국가와 사회로부터 가해진 폭력은 다양한 정책과 루트를 타고 숨겨지고 가려지고 덮어지고 묻어졌다. 전쟁과 이념대립으로 인한 상처는 상처로 인식되지도 못할 정도로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그래서 그 실체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작가 인터뷰, 2012) ● 저 우직한 사내 송창은, 그 고운 심성의 한 예술가는 누가 지어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은, 아니 다분히 적대적인 뉴앙스를 풍기는, 저급하고도 야비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틀림없는 그 이름, '절라디언'이다. 이 기막히고 억장 무너지는 유형의 땅 한반도에는 그러니까 '절라디언'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 유형의 땅 안의 또 하나의 '게토'가 있고 그곳이 바로 전라도인 것이고, '아픔을 아픔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인지능력을 망실한' 불쌍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틀림없는 '절라디언' 중의 한사람인 송창이, 이 대책 없이 우직하고도 고운 사내가 이 이중의 폭력구조 속에서 해낼 수 있는 작업은 그리하여, 아픔을 아픔으로 환기시키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 분단이 초래한 집단적 외상과 심리적 내상. 좌우 대립 속 동족 상잔의 트라우마. 송창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깊은지 탄식을 하게 된다. 그 트라우마 속에 살아왔고 그것을 아직도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회화로 포착해내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그 작업의 햇수가 이제 30년을 넘으려 한다. 여기엔 너무나 반복되어서 아주 곰삭은 듯한 끔찍한 그 무엇이 있고 나는 그것에 가슴이 애린다. 억장이 무너진다. 분단을 그린 화가, 역사의식이 있는 화가라는 미사여구보다 슬픔이 앞서고 탄식이 나온다. ● 그러나 나를 울게 하는 것이 그의 작업의 주제인 분단 현실의 일상성 그 자체인 것만은 아니다. 분단 시대를 사는 화가로서의 그의 업이, 그리고 그 업의 모호함과 불운이 나를 또다시 울린다. 그렇다 정작 나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그 업의 모호함과 지지부진함, 분단의 각성과 회화적 숭고 사이의 질척한 땅을 텃밭으로 하는 그의 화업의 고독하고 모호한 제스처다. 그 모호함은 분단 문제가 실제로 아직도 우리의 목을 죄고 있으면서도 시대는 이미 탈 냉전의 시대가 된 이 땅의 현실의 그 모호한 이중성과 닮은 것이기도 하다. 세계사적으로는 이미 끝난 것인데 아직도 귀신처럼 살아서 우리의 목을 죄는 것이 냉전의 현실이요 분단 문제인 것이며 그것은 아직도 이 땅에 살아 음험하고 교활하게 작동하며 우리의 삶을 비루하게 만들고 있다. 요컨대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분단현실의 이 이중성과 은폐성이다. 끝이 없는 끝, 악마의 옷을 입지 않은 악마, 상가집이자 시장인 것, 낡음과 상이(傷痍)의 공존, 익숙한 불행 같은 것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송창이라는 화가의 삶과 작업의 내용을 보면 곧 그의 일생의 작업의 흐름과 현재의 작업 그리고 여기에 화가로서의 세속적 성공 문제(잘 나가는 화가냐 아니냐라는 문제)까지 겹쳐서 보면, 분단 문제의 은페성에 기인한 이중성과 모호함이 여기서도 꼭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분단 트라우마의 특징은 그것이 은폐와 망각의 기제를 통하여 계속 억압되는 기억이라는 점에 있다. 억압되지 않으면 상처가 되지 않으며 상처가 되기 위하여는 계속 망각에 길들여져야 하는 것이 한반도에서의 분단 트라우마의 특징이다. 통치권력과 미디어와 문화산업은 그 점을 교묘히 이용하며 그 상처를 어둠 속에서 영속시킨다. 그 은폐에 의해 분단 트라우마는 더 깊어지고 '자연화'된다. 우리 모두 그 자연화에 길들여져 있다. 다시 말해 끝나지 않은 끝의 모호함과 현실의 비현실성에 너무나 익숙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버렸다. 탈-냉전은 어느 정도는 탈-권위를 통해 분단문제를 보는 열려진 시각을 가져오긴 했다. 그러나 그 열려짐이 분단문제의 전향적이고 민주적인 해결, 현실적인 해결로 곧 바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 이런 지연의 효과는 파괴적일 수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현실의 비현실화를 초래하면서 우리 모두를 사람 골 가게 하는 무력증에 빠트리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피건데 '분단 풍경화가' 송창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분단 극복이 아니라 분단 유지 그리고 표피적인 탈-냉전의 교묘한 은폐술과 이중성으로 인한 현실의 비현실화라는 지금 시대의 대세에 밀려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던 땅이 흔들리고 떠내려가면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할까. 물론 이것은 송창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고 이른바 80년대 작가들, 특히 민중미술 작가들 대부분이 겪어야 했던 시대의 불운이기도 하다. 아무튼 송창 역시 이 같은 시대의 불운에 밀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거의 상이(傷痍)와 흡사한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그가 아닌가 하는 처연한 생각이 잠시 스친다. ● 그런데 이 같은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양면적인 생각에 잠긴다. 두 가지 모두 그가 화가라는 운명에 관계된 것이다. 하나는 네거티브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감동이다. 앞의 것부터 얘기하면 이렇다. 아,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 큰 바위덩이가 있다니! 그러나 아무리 분단의 업에 짓눌린 화가라 하드라도 그는 얼마나 답답한 화가인가. 정말 요즘 시쳇말로 개념이 없는 화가다! 탈-냉전이 언제인데 아직도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단 말인가. 아니 객관적으로 보자. 역사적으로 말하면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약 20년이 되지 않았는가. ● 뒤의 것을 얘기하면 이렇다. 그것은 송창의 작업이 지닌 일관성과 깊이, 그의 작업의 질적 수준과 회화적 숭고(崇高)에 관련된 것이다. 송창은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필치의 작가다. " '임술년' 동인들 중에서 송창의 그림의 주제나 표현방식은 특이했다. 대다수 극사실주의 방식을 차용한 냉랭하고 비정한 도시의 사물이나 사회현상의 이미지를 풍자 비유 상징하던 경향에 비하여 송창은 강렬한 주관적 감정을 담은 표현주의적 방식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여기에다 악마적인 환상이라고 할 만큼 괴기스럽고 음산하고 공포와 전율감이 가득 찬 비극적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원동석, 1991) 이것은 그의 첫 10년에 대체로 들어맞는 얘기다. 그 이후 그의 작업은 그것보다는 좀 더 평이해지고 표현주의적, 반추상화적 회화의 맛이 심화된 작업으로 나아갔다. 그의 작업은 점점 더 풍부한 마티에르와 색감을 대담하고 농밀하게 구사하는 풍경화로 발전해갔다. 이 대목에서 주의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작업에 주제(분단 풍경)와 연관된 혹은 주제를 압도하는 회화 자체의 숭고미가 항상 있었다는 점이다. 송창의 작업 속에서 이 숭고미와 분단의 아픔은 한 몸으로 녹여져 있다. 그의 작업에서 숭고라는 이 회화 미학적 품격은 중요하며 별도의 주목을 요한다.

송창_드로잉_종이에 아크릴채색_100×70cm_2012

2. 분단 현실의 풍경화 ● 송창은 1982년-87년 간 '임술년'그룹전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주로 개인전을 통해 작품발표를 해왔다. 첫 개인전은 1986년이었고 그 후 지금까지 전부 열두 번 개인전을 열었다. 송창 회화의 생애적 흐름을 살피면 몇 개의 덩어리로 묶을 수 있다. ● (1) 첫 번째 덩어리는 1978년 초기작「농악」사리즈에서부터 82년 이후「매립지」연작과 84년부터 89년까지 '분단 현실의 풍경'을 그린 시기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84-89년 간의 분단 현실 풍경들이다. 이 연작은 그 이후 10여년 간 더 이어진다. 그러나 양상이 좀 다르다. 분단현실을 소재적으로 드러내는 구상적, 기호적 기표들이 줄어들고 풍경 자체와 그것을 다루는 표현주의적, 반추상적 붓질과 마티에르가 더욱 두드러지는 시기이다. 그 시기는 1990년에서 2002년까지로 볼 수 있다. ● (2) 위 흐름에 병행하여 1997년「기억의 숲-소나무」(설치 및 사진)전 전후로 역사의 기억과 망각이란 주제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보인 시기가 있다. ● (3) 2003년 이후 현재까지는 작가가 분단 주제로부터 풀려져 나와 자연의 흐름과 생태를 더 관조적으로 자유롭게 풍경을 그린 시기다. 이 가운데는 2010년「침묵」연작도 포함된다. ● 이 가운데 1984-89년에 이르는 '분단 현실'을 그린 작업들은 그의 전 작업 중 가장 뚜렷하고 힘이 있는 작업으로서, 분단 현실의 여러 모습을 비교적 구체적인 소재와 내용을 갖고 형상화한 작업들이다. 그가 이런 분단 풍경을 처음 발표한 것은 1984년의 '임술년' 그룹전에서였다. 그에 앞서 1982년 '임술년' 창립전에서 그는「매립지」연작들을 전시했었다.「매립지」연작들은 그가 1979년 서울 근교의 한 학교(성남시 송림고등학교의 전신인 성도중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출퇴근하면서 독산동 근처 시흥 산동네, 강남(아직 개발 전이었고 난민들의 천막촌이 있었다), 난지도 등 도시 변두리와 그곳에 모여드는 철거민과 빈민, 유랑인 등의 무서운 생활 상황,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험악한 삶을 눈여겨 보면서 그것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작업한 것들이다. 황량한 매립지의 풍경을 배경으로 격앙된 인간군상의 제스쳐가 기념비적인 거창한 스케일과 분방한 필치로 그려진 작업들이다. 이것들은 2년 후 그의「분단 풍경」연작들에 이르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작업들이다. ● 불과 2년 사이지만「매립지」연작과 '분단 풍경' 연작들 사이에는 중요한 도약이 있다. 1986년 10월 민미협이 운영하는 인사동의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송창의 첫 개인전은 바로 그 도약을 보여준 전시였다. 그가 분단의 풍경 혹은 분단의 '냄새'를 저돌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그리는 화가라는 평판을 얻게 된 것이 바로 이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그 작업들은 신선하고 강열했다. 무엇보다 우선 소재들이 구체적이고 다양했다. 그것들은 이제까지 자주 보던 분단이나 통일 관련 전시회들의 상투적 소재들을 뛰어넘는 구체성과 체험적 일상성이 있고 더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이 전시 이후 수년간 더 지속된 같은 계열의 작업까지 포함하면 그 소재들은 다음과 같다. ● 유원지 풍경 연작:「유원지 공놀이」「유원지 풍경」「효자동 풍경」(이상 '84) / 기념비, 전쟁기념조형물, 전적지 견학 등을 소재로 한 것:「소풍길에서」「야유회에서」「용사상」(이상 '85)「문산견학」('86) 등 / 군대생활의 애환을 다룬 것;「점심II」「눈물」(이상 '86),「고향생각」('88),「고지의 병사」('90) 등/ 민통선이나 접경지역의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그린 것:「파도리에서」('85),「민통선의 농번기」「바라보기」「연천의 아픔」「분단의 논」「파도리 해수욕장」(이상 '86),「부러진 곡굉이」('88),「어머니의 꽃」('89)「어머니」('90) 등 / 강대국에 의한 분단의 역사를 직접 소재로 다룬 것:「일기예보」('86),「웰컴 투 광주」「점령군」「판문점」(이상 모두 '88)/ 사격장, 훈련장 등 작전구역을 다룬 것:「사격장에서」「상사리고개」「영천사격장」「우리들의 훈련장」「작전구역」「부러진 총) (이상 모두 '86) 등/ 민통선 안의 풍경들:「분단의 논」,「사격장 아이들」,「임진강 오리사냥」(이상 '86),「지뢰밭」('87) 등/ 군사문화와 억압적 체제에 대한 공포를 소재로 한 것;「삼청교육대」「인간개조」「하면 된다」(이상 '87),「봉 체조」,「권좌」(이상 '88) / DMZ생태계의 초현실적 풍경:「D.M.Z.」「개구리의 운명」(이상 '87)

송창_드로잉_종이에 아크릴채색_110×79cm_2012

이렇게 다양한 소재들이 그의 작업 속에서 거칠고 저돌적이고 격정적인 필치와 색채감으로 다루어졌다. 그 필체와 색감과 재질감은 기본적으로 표현주의적이었다. 여기엔 주관적인 감정으로 대상을 녹여내는 활달함과 자유로움이 있었고 그리고 강열함과 대범함이 있었다. 이 1986년 개인전 카탈로그의 서문에서 나는 그의 작업을 본 나의 소회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그 분단 풍경들은) 동족상잔의 전쟁이 할퀴고 간 분단국가의 국토에 널려있는 저 쇠붙이들과 자연의 대비, 또는 국방의 틀과 소비문화적 일상의 대비를 통해서, 저 지뢰밭과, 철조망과 초소와 사격장의 허수아비과녁, 38선 경계석, 군사기념비 등 전쟁과 분단의 유산인 이 모든 불행의 가건물, 매설물, 설치물 등과 그것들에 포위된 채 그것들이 표상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구조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저 불안한, 거의 불가능한 삶의 얼굴, 결국은 아마도 미칠 수밖에 없을 인간의 참담한 몰골을 보여준다. (「밭에서」의 여인의 얼굴과「한탄강변에서」의 소년의 얼굴, 거의 브뤼겔이나 오토 딕스적인 그 치매(痴呆)의 얼굴과 상이(傷夷)의 얼굴을 보라.*) 이 얼굴을 통해 종국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분단의 구조가 결국은 죽음의 구조라는 것일 것이다. 단순한 초소의 풍경에서 - 우리의 산야 전체가 작전지구이다 - 우리는 쇠붙이의 위협 속에서 그것과 공존하면서 생존을 영위해야하는 우리의 삶, 저 귀신 씌운 기막힌 삶, 내면화된 광기와 길들여진 공포의 삶의 냄새를 맡는다. 음습한 것, 무서운 것, 자동반사적인 것, 우리의 뇌수 뒤쪽에 편자처럼 박혀있는 쇠붙이. 결국 송창이 그리는 것은 이러한 생존의 냄새이고 그 소외이며 그 냄새는 공습경보의 사이렌 속에서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우리의 자율신경 속에 거의 늘 숨어있고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 "송창의 그림을 우리 삶의 분단의 구조, 그 냄새를 그린 풍경화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쇠붙이로 포위된 산야의 풍경은 비단 분단의 풍경이자 냄새일 뿐만 아니라, 소외로 찌들고 망가진 시민들 개개인의 내면의 풍경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의 현란함이나 번잡스러움 또는 생활의 고달픔으로 그 풍경을, 냄새를, 공포의 대부분을 잊고 산다 해도 그것은 늘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라도 선명히 다시 되살아나는, 마치, 조상신이 제사상에 나타나듯 거의 그렇게도 틀림없는 집단의 신으로, 귀신으로 군림하여 일상의 질서를 다스리고 우리는 언제라도 그 귀신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추석의 귀향, 중추명절의 고향성묘와 같은 그런 귀향이 아니라 그 반대쪽에 있는 또 하나의 귀향이다. 이 귀향이 도달하는 곳, 그곳은 영원한 상갓집이다. '먼저 보는 자가 먼저 쏘는' 자동반사적 죽음의 윤리, 분단의 윤리가 다스리는 집안이다." ● 90년에 들어와서 그는 풍경 그 자체로도 얼마든지 이 거대한 주제를 담아내고 녹여낼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풍경,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의식과 감정을 모두 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이후 송창의 작업은 점점 더 풍부한 마티에르와 색감을 대담하고 농밀하게 구사하는 풍경화로 발전해갔다. '분단 풍경을 그리는 화가'이자 '회화의 맛을 낼 줄 아는 화가, 대상을 자기감정의 용광로 속에 녹여낼 줄 아는 화가, 붓놀림이 크고 질감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줄 아는 화가'(유홍준)라는 주목을 미술계로부터 받게 된다. ● "아무런 의미를 지닐 리 없는 붉은색 또는 누런색 붓칠이 더해지면서 황량한 풍경에는 쓰라림, 적막감, 살벌함, 막막함 같은 감정이 유발되면서 작가의, 또는 관객의 정서반응을 촉발시킨다. 그것은 처연한 풍경 속에서 하나의 엑센트가 되어 우리가 그의 풍경화를 사랑할 수 있도록 끌어들이는 결정적인 매력의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화면의 구성에서 S자형으로 굽어 흐르는 강물을 즐겨 표현하고 부감법이나 반대로 고원법의 시각을 구사하여 넓게 내려다보거나 바짝 치켜 올려다 보는 풍경, 즉 감정의 울림이 강하게 진동하는 화면의 동감을 즐겨 택한 것으로써 그는 안타까움이나 해방감을 담아내곤 한다. 그 모두가 조형요소의 울림으로 연출한 분단시대의 감정들이다."(유홍준, 1991) ● 송창의 작업은 대체로 구상과 비구상을 가로지르는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터치와 풍부한 색채감으로 강열한 주관적 감정을 담아낸 표현주의적 화풍의 그림이다. 이 작업들의 일관된 모티브는 앞서 말했듯이 분단 현실의 풍경이다. 그런데 계속 분단에 연관된 작업의 모티브나 명제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그 모티브를 사실적, 구상화적으로 드러내는 그림이 아니다. 오히려 활달하고 자유로운 필치의 표현주의와 추상 회화적 질을 물씬 풍기는 그림들이다. ● 그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중첩적이다. 우선 주제의 구상성(현실성과 지시적 언어성 혹은 상징성)이 있고 그리고 표현의 추상적(표현주의적, 추상표현주의적) 회화성이 있다. 마티에르, 터치, 색채의 구상성과 추상성이라는 이 갈림길이 혹은 두 개의 길의 중첩성이 그의 회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처음에는 주제의 구상성이 작품에 흥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물론 그가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자연주의적이거나 사실적인 방식이 아니고 거칠고 저돌적인 표현주의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이 거칠음에도 불구하고 주제의 구체성과 현실성은 작품에 생동감과 흥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어떻게 보면 (이를테면「유원지」연작에서와 같이) 주제의 속악하고 일상적인 차원과 표현형식의 저돌성과 거칠음은 한 몸이며 서로 분리시키기 어렵다. 이것은 그가 구사하는 표현주의적 저돌성과 거칠음은 주제에 대한 그의 주관적 감흥(아마도 더 정확히는 분단현실이 초래한 내상의 깊이)이 선택한 표현의 전략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의 분단 풍경화 중 1984년에서 90년대 말까지 이르는 시기의 비교적 초기작들에서 맛볼 수 있는 표현의 강열한 선도(鮮度)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의 회화적 역량이 90년대에 들어서서는 위에 잠시 언급한 바처럼 더욱 원숙하고 농밀하게 회화적인 깊이를 획득하고 있다고 평가되기는 하지만, 그 전에 1984년에서 90년대 말까지 이르는 시기의 이 초기작들과 비교하면 주제의 직접적 구체성과 현실성이 많이 가려지거나 완화되고 간접화되고 있는데 이 점은 크게 아쉬운 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 그러나 이 같은 직접성과 간접성의 단계적 차이 혹은 주제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송창의 작업은 분단의 문제를 떠난 적이 없어 보인다. 후기의 작업에 올수록 분단 현실의 직접적 환기력은 억제되는 경향이 있다. 이전에 비해 형태와 구도 상의 변형은 축소되며, 화면은 전형적인 표현주의적 풍경화의 양상을 띠며 반복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이영욱이 지적한 것처럼 "그의 그림은 매우 단순해지며 직접적으로 된다. 관객들은 이제 가능한 한 여타 소도구들과 장치의 매개 없이 주체와 대상의 최대한의 만남을 구현한 풍경에 대면하게 된다. 아마도 그는 더욱 근원적인 분단 풍경화를 시도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근원적' 풍경화는 왠지 이전의 활력과 생동감을 잃어버리고 막막한 느낌, 어딘가 침잠의 늪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이영욱 1997) 분단 주제의 현실적 환기력은 더욱 낮게 낀 안개처럼 점차 풍경의 바닥으로 가라앉고 회고적이고 곰삭은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대지와 일체가 되어버리고 있는 듯한 감이 든다. 그의 몸과 정신 속으로 분단의 외상이 점차 깊은 내상으로 곰삭아 들어가고 있는 것의 반증일까. ● 아무튼 이 같은 변화를 동반하며 송창의 분단 풍경 작업은 30여년 동안 길게는 거의 40년에 걸쳐(그는 지금 60 나이다) 느리고 둔중한 발걸음을 갑갑하리만큼의 반복성을 느끼게 하며 지속되어왔다. 그것은 또한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꿋꿋함일 수 있고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특히 탈냉전의 새로운 흐름을 거머쥐지 못하는 갑갑함이 감촉된다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지점에서 분단시대를 산 화가로서 그의 일생의 작업의 성공과 실패의 지점 혹은 난관의 정체를 살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또한 그의 화가로서의 질이 무엇이며 또한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송창_드로잉_종이에 아크릴채색, 먹_100×70.2cm_2012

3. 멈춰진 풍경 ● 1990년 이후 송창의 그림은 변화한다. 화면상에서 상황이 사라지고 소재가 되는 풍경 그 자체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이런 양상은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도 계속 이어진다. ● 작품의 소재나 주제를 알려주는 것은 작품 제목들이다. 우선「금강산 가던 철길」,「대광리 철책선」,「민통선 들녘」,「임진각에서 송악산까지」,「휴전선 가는 길」,「북창」,「식을 수 없는 강」,「철원 노동당사」,「석양」,「철원평야」(이상 1990),「철의 삼각지」,「임진강」(이상 1991),「설한풍」(1992)처럼 분단된 땅의 산야를 그린 것들이 있는데, 철책선 있는 휴전선이나 민통선 들녘 풍경, 부숴진 철교의 교각이나 멈춰선 철도나 철원 노동당사 같은, 폐허와 멈춤의 풍경이 주로 등장한다.「임진 나루터」,「메아리」(이상 1986),「인간」(1988), 「노송-철원에서」,「소나무」,「항상 떫지 않은 솔잎」(이상 1990),「역사의 증언」(1992) 등처럼 다소 은유적 제목의 풍경도 있고,「연천-통일염원」,「동해-통일염원」,「임진각-통일염원」(이상 93)처럼 '통일염원'이란 부제를 공통적으로 가진 풍경화들도 있다. 또한 「동백섬에서」,「4월의 강변」(이상 1993),「임진강의 하늬 바람 1, 2, 3」,「임진 갯벌 물고기」(이상 1995)처럼 계절의 풍경이나 생태적인 소재를 다룬 것도 있다. ● 이것들은 앞서 임술년 2회전과 86년 개인전에서 보였던「유원지 공놀이」,「용사상」,「영천사격장」,「우리들의 훈련장」,「눈물」,「상사리 고개」등처럼 사건과 행동 혹은 상황적 요소가 있는 것이나「판문점」,「점령군」,「웰컴 투 광주」등처럼 역사적 사실의 구체적 환기가 있는 작업들과는 많이 다른 작업이다. 대부분의 풍경은 앞서 얘기했듯이 제목을 빼면 그냥 이 땅의 산하를 그린, 두터운 재질감과 거칠은 붓질의 좀 음울하고 무거운 반(半)추상 풍경화처럼 보인다. 형태는 두툼하고 거칠은 재질감과 터치 속으로 가라앉아 있거나 거의 사라져 보인다. ● 송창의 풍경은 마음의 그림이다. 그의 풍경 그림이 무겁고 거친 것은 그의 마음속에 분단 현실의 폭력성에 대한 의식이 깊고 무겁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속의 풍경은 눈의 시각성보다는 기억과 냄새와 촉각으로 구성해내는 풍경에 가깝다. 그것은 밖으로 열려진 풍경이 아니라 안으로 휘감아 도는 풍경이다. 송창의 분단 풍경은 우물 속 메아리처럼 출구를 갖지 못한 풍경이다. 그의 풍경에서 깊은 고독과 단절이 배어나오는 것이 그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트라우마의 풍경이고 분노와 상실감의 풍경이며, 분단 현실의 모순과 은폐성 간의 괴리로 탈진해가는 영혼의 메아리가 습한 안개처럼, 낮은 연기처럼 휘감아 도는 이 땅의 풍경이다. 분단의 폭력성과 야비함이라는 그 음울한 동굴을 휘돌아 빠져나온 영혼의 메아리, 이 땅의 모든 산자와 죽은 자 그리고 살아있지도 죽지도 못하는 중음신들의 메아리가 잦아들어가 있는 풍경. 그 신음하는 영혼의 메아리가 반추상적 회화의 숭고(崇高)로 걸러 나온 것 아마도 그것이 송창의 풍경 그림들이 아닐까. ● 19세기 중엽 비평가 토레는 바르비종파에 대해 언급하면서 "구성이란 재현된 사물이 그것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 속에서 우리의 영혼에 일어나는 메아리를 담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화가이자 작가인 줄리언 벨은 이 말을 인용하며 이것이 1880년대에 모네가 했던 말, 곧 "풍경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사물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뿐이다." 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모네에게 대기란 기상현상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토레가 말하는 '메아리'를 일으키는 매체이다. 모네는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는 사물의 기록자가 아니라 '감흥' 즉 영혼의 자극을 표현하는 자로 생각했다."라는 것이다. (줄리언 벨, 『회화란 무엇인가』p.6, 한길 아트, 한길사, 1998년) ● 송창의 회화는 바로 이 '자연이 불러일으키는 영혼의 메아리' 혹은 '영혼의 자극'을 그리는 화가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송창은 스펙터클의 반대쪽에 있는 작가다. 그의 회화는 소비적 시각성의 반대쪽에, 자본주의적 시각성과 반대쪽에 위치한다. 그는 멈춤의 작가다. 그의 회화적 스펙터클은 둔중하고 내향적이다. 같은 임술년 작가들 중 황재형이나 이종구 같은 작가들과 다소의 차이도 그것일지도 모른다. 표현주의적 사실성이든 포스트모던적 사실성이든, 주제와 상관없이 이 두 작가가 다 사실주의적 범주에 든다면 송창은 그것은 사실주의보다는 반추상적, 추상표현주의적 회화의 정서에 더 가깝다. 혹은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마이드너, 코코슈카, 놀데, 키르히너의 표현주의적 터치에 더 상관되는 회화라고 할 수 있다. ● 송창의 그림은 마음의 그림이다. 이것은 그가 풍경 속에서 영혼의 메아리를 듣는 작가라는 뜻이다. 그는 정직한 작가이다. 여기 그의 마음을 울리는 영혼의 메아리가 있다. 김규동 시인의 '북녘에서 온 어머님 편지'의 전문이다(황동일,『분단, 그 크고 무거운 화두』, 1994에서 재인용). ● 꿈에 네가 왔더라 / 스물세 살 때 훌쩍 떠난 네가 / 마흔 일곱 살 나그네 되어 / 네가 왔더라 / 살아 생전에 만나라도 보았으면 / 허구한 날 근심만 하던 / 네가 왔더라 / 너는 울기만 하더라 / 내 무릎에 머리를 묻고 / 한 마디 말도 없이 / 어린애처럼 그저 울기만 하더라 / 목놓아 울기만 하더라 / 네가 어쩌면 그처럼 여위었느냐 / 멀고 먼 날들을 죽지 않고 살아서 / 네가 나를 찾아 정말 왔더라 / 너는 내게 말하더라 / 다시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 눈물 어린 두 눈이 그렇게 말하더라 / 말하더라

송창_드로잉_종이에 아크릴채색_79×109.5cm_2012

4.「기억하는 자의 곤혹스러움」혹은 망각에 대한 투쟁 ● 송창은 오랫동안 그가 임술년 동인에 참여한 82년을 기점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이미 30년째 오직 분단 현실을 주제로 삼아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 작업의 일관성과 지속, 그 갑갑하리만큼의 반복과 집착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 답은 분단 문제의 특수성, 곧 분단 문제에 대한 기억의 위기라는 문제와 연관지울 때 풀릴 수 있다. "8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의 송창의 작업은 바로 기억의 위기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이 시기 그의 작업 방식은 기본적으로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드는 그리고 회고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분단 현실에 대해 자기 복원된 기억의 절실함을 대치시키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는 한마디로 기억을 고수하고, 망각이 강력한 만큼이나 기억의 강력함을 제시하는 회화적 전략을 취했다. 자아와 풍경, 기억과 풍경의 일치를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제시하려는 그의 '근원적인' 분단풍경화는 이러한 전략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던 듯하다고 이영욱은 지적한다. ● 이영욱은 "상처에 대한 집착은 혹은 그 시대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부지불식간에 현재에서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를 보는 즉 과거를 현재로 오인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라는 말로 그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했다. "기억은 그것이 충분히 현재화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나름의 장치를 필요로 한다... 사실 송창은 계속해서 그리고 끈질기고 우직하게 기억을 고수하는 혹은 그 고수 방식을 강화하는 방향을 취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억을 흐리게 하는 장막을 걷어내려 했으며, 더욱 더 근원적이며 원형적인 기억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이 기억의 순수한 가시화를 꾀했다. 따라서 분단의 냄새를 형상화하려 한 그의 노력은 그로부터 객관성을 증발시키고 추상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점차 과거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풍경과 자아의 일치는 현재의 풍경에 대한 자아의 일치가 아니라 자아의 기억에 입각하여 현재 풍경을 접수하는 성격을 띠어갔다. 현실 속의 분단은 점차 이전과는 다른 냄새 다른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했으나 그는 그것에 접근하지 못했다... 물론 기억의 절실함은 망각을 해소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통로를 찾으려는 방향을 취하지 않았다. 그의 화면은 그의 자아로 넘쳐났으며, 그의 기억으로 뒤덮였다. 즉 그의 화면에는 거리가 없었다. 그리고 해석을 위한 여지, 공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화면은 화면 밖으로 열리지 못하며, 화면 안으로 충분히 가라앉지도 못한다. 그것은 어딘가 주관의 흔적들로 가득찬 채 의도와는 달리 회고의 풍정을 일으킨다." (이영욱, 1997) ● 1997년 송창은 서울 광교에 위치한 동아갤러리에서 "기억의 숲 - 소나무"란 설치 작업 전시를 한다. 설치작업이라는 것 자체가 송창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요 실험이었다. 그는 그 도전을 과감히 실현에 옮겼다. 그것은 방금 이영욱이 말한 '기억의 위기'에 대한 송창 작가 나름의 대응의 시도이자 자기변신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작업의 골자는 '소나무'라는 물성에다 '역사'라고 하는 상징성을 부여한 작업이다. (이하는 전시의 기획자의 글)마치 주물을 뜨듯 대나무로 성형을 하고 그 위에 한지를 붙인 뒤 채색을 가하는 복잡한 공정을 통해서 소나무의 형상을 구체화했고 여기에 분단 이전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회화와 사진, 판화기법, 설치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접합시킨 전시였다. 설치공간을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1실은 직접 제작한 소나무의 여러 형태들을 거꾸로 매달았는데 전체적으로 둥그렇게 원형의 구도 속에 배치. 그 원형의 덩어리 중에는 김구, 이승만, 맥아더, 스탈린 초상화, 해방의 기쁨, 신탁반대운동, 오끼나와 원폭 투하, 북한군, 안창호, 젊은 날의 김일성, 휴전협정, 5.16과 박정희 등 분단 주변의 역사적 사건들을 담은 31개의 이미지들이 잘려진 소나무 둥치 위에 나이테처럼 새겨 있다. 2실은 1실과 같은 설치작업의 형태로 어렸을 적 고향 장성의 소나무 숲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작품이다. 3실은 92년부터 지금까지 작업한 평면작품으로서 역사적 사건들을 재현적 풍경으로 담아낸 것으로, 80년대에서부터 줄곧 이어지는 작업 형태들이다.「한강철교」,「잃어버린 땅」,「흐르지 않는 강」,「일그러진 풍경」등등의 제목을 갖는 이 작품들은 1·2실의 설치형태에서 갖지 못한 회화로서의 존재성을 확인시켜 준다 (이관훈, 1997). ● 사실 소나무는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그의 작업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 바 있다. 아마 그는 자신의 기억의 원천, 끝내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원형을 소나무에서 찾아낸 듯하다. 송창 자신의 말에 의하면 고향 마을로 접어드는 길 어귀의 소나무 숲, 그 숲과 그 곳의 수많은 사연들이 분단에 대한 자신의 최초이자 가장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 이때 주목할만한 소재가 바로 '소나무' 였는데, 이는 장소가 그리고 장소성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소재가 기억하는 역사적인 사건에서 비롯한다. 작가는 그저 어린 시절 단순히 집 주변 환경으로만 알고 있었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알고 보니 좌․우 이념의 대립 속에서 당시 그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이 밤낮으로 번갈아 불려나가 고초를 겪었고 집단 살육을 당했던 사건의 현장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후 그에게 소나무는 잊을 수 없는 일종의 외상적 기억(traumatic memory)같은 것으로 남았고 세월을 버텨가며 출몰하는 원형적 이미지가 된다. 송창의 작업에 소나무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97년의 이 설치작업은 이 원형적인 기억의 대상을 구체적 설치 작업으로 공간 속에 물질적, 직접적 재현으로 제시한 작업인 셈이다. 이 작업은 그가 이제까지 해온 분단현실의 현장들을 풍경으로 그려왔던 작업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장에 대한 개념을 보다 새롭게 외연적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설치한 소나무 둥치들의 단면에 분단에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의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재현하여 설치하거나 혹은 벽면에도 그런 역사적 도상들을 (역사적 사실들의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 투쟁'처럼) 재현 설치한 것이 바로 그런 외연적 확대의 시도였던 셈이다. 평면 작업 속에서도 이 '소나무'라는 원형의 이미지는 분단의 역사적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이자, 분단에 관련된 일반적이고 역사적인 다큐멘트 이미지들 위에 실크스크린 프린트로 중첩시킴으로서 공개되고 공인된 역사적 사건들을 '거리화'하면서 여기에 새로운 심리적ㆍ성찰적 공간을 틈입 시키는, 그리고 새로운 미학적 효과를 얻어내는, 작업의 장치로 활용된다. ● 이런 식 작업의 출발을 알리는 작업으로서 위 설치작업전에 전시된 바로 그 전 해의 작품인「기억하는 자의 곤혹스러움」(1996)을 각별히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가로 길이가 4m가 넘는 대형 화폭에 펼쳐진 이 작품에는 현재 한강과 그 주변의 풍경이 허여멀금하고 부옇게 펼쳐져 있고, 그 위로 6·25 때 끊어졌던 제 1 한강교의 사진이 커다란 실루에트 그림자처럼 현재의 강폭을 가로지르며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중첩되어 얹혀진 광경을 보여준다. 곧 앞서 얘기한 소나무-기억 전의 설치작업과 실크스크린 작업의 의도와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작업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가 의도한 '소나무'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그의 공간개념을 여실히 보여준다. 과거의 내용을 분위기로 드러내는 방식이기 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전혀 다른 시간의 기억을 공간 속에 접합한 방식이다. 이는 현재에서 '낯선 기억'이 '구체적이고 익숙한' 기억의 현장과 삐걱대며 조우하는 현장이기" 때문일 것이다(최윤정, 2008). 나는 이 작품 앞에서 어떤 막막함과 불편한 감정, 약간 기이한 감정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은 최윤정이 위 말에 덧붙여 했던 "여기서 마주할 수 있는 체험은 역사적인 기록도 아니요, 그저 사연 어린 슬픈 유령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하고 싶다."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 그러나 송창이 했던 이런 실험(곧 "회화라는 그의 손에 가장 익숙하였던 요소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재료와 매체에 대한 접근을 통해 형식적인 실험들을 감행하였던 것. 말하자면 설치적인 조형요소,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 사진, 더불어 그가 선택한 입체적인 재료를 통해 질감을 강화시키고 이에 회화적인 분위기를 덧입히는 식으로 했던 실험과 모색)은 그 자체로 값진 것이었다고 하겠다. 다만 그것이 더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쉽다.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단순히 조형적 실험이나 재료나 매체의 형식적 실험 이상의 차원에서의 이야기이다. 오히려 송창이 스스로 제대로 던져야했던 질문에 관련된 것 그리고 그리하여 제대로 출구를 찾아야했던 문제와 관련된다. ● "미술이 역사와 현실을 수납하고 귀환시키는 방식은 기억의 강요라기보다는 차라리 기억과의 돌연한 만남의 방식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진 어떤 질서정연한 연속선을 발견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실과 역사의 잔해와 흔적들로부터 불현듯 솟아나오는 현재를 만나는 방식, 열림과 상승의 방식이다. 여기서 질문의 구조가 발생하며, 상처는 상처로 드러난다. 나는 송창의 지둔한 작업, 어찌 보면 80년대를 겪은 사람들의 한 전형적인 궤적을 보이는 그 작업이 이제 스스로에게 매우 어려운, 혹은 어렵게 얻어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이영욱, 1997) 라는 이영욱의 말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지적으로 들린다. 중요한 것은 역사와 현재가 보다 예기치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는 일이고 이를 위해선 자신을 바깥쪽으로, 좀 더 현실의 다양한 이질성과 복잡성 속으로 과감히 열어젖히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라고 하겠다. 송창의 그 이후의 궤적을 보면 이 질문 제기와 출구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기억-소나무』展에 대한 과도한 투자와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의 후유증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덕분에 다음 작업 시기로 가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게 된 것 같다. 송창은 거의 4년 가까이 붓을 놓다시피 지낸다. 그러다가 다시 풍경 그림으로 복귀한다.

송창_드로잉_종이에 아크릴채색_141.2×161.5cm_2012

5.「남한강」의 바람결 ● 송창이 2002년경부터 해온 남한강 풍경은 분단 풍경을 넘어서 풍경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의 회귀를 보여주는 작업들이다. 이제 풍경은 역사적 주제를 말하는 장소, 역사적 서사를 기억하는 소재적 접근 대신에 그 자체로 주제로서 화면에 전면 부각되기 시작한다. 송창은 2002년경부터 남한강 일대의 풍경을 그려왔는데 2004년부터는 더욱 집중적으로 원주, 충주, 여주 등 여러 지점에서 본 남한강 풍광을 그렸다. 남한강을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집과 작업장으로부터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주목할 것은 남한강 그림을 경계로 그의 작업은 밝아지고 자유로와졌다는 점이다. 특히 2004년 이후 작업이 그러하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다. 우선 색감이 무척 밝아졌고 강의 사계가 생기 넘치게 표현되었다. 형상은 보다 분방해졌다. 무엇보다도 밝은 색채와 성글고 자유로운 필치로 색채의 파동이 크게 울려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그림들에서는 송창이 과거 분단의 풍경화에서 주제와 관련해 직접적 장치로 등장했던 비자연적요소들(표지판, 기호 등)이 사라지고 자연의 풍경 자체 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대작「남한강」(2005, 454.6×181.8cm)은 뚜렷한 구상적 형태가 없는 추상표현주의적인 올 오버(전면 회화)적 터치의 작품이다. 90년대의 무거운 풍경화보다 색채가 한결 밝아진 점이 눈에 띈다. 밝고 뚜렷한 색채의 올 오버적(전면적) 확장성은「남한강(원주에서)」와「봄-바람」(이상 2004) 같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작품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확인된다. 2003-2005년에 그린「양수리 풍경」과「남한강(충주)」도 부드럽고 유동적인 터치가 특히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다. 앞의 작품이 흘러내리는 듯 부드러운 터치의 추상회화적 양식 속에 아직도 90년대의 표현주의적 대지 풍경을 연상시키는 갈색의 톤을 갖고 있는 것에 반해, 뒤의 작품은 크림처럼 밝고 부드러운 색채의 터치가 화면을 편하고 무심하게 감싸는 스케치 풍의 풍경이다. 스케치풍의 가볍고 부드러운 터치는「물안개」(2005)와「솔 내음」(2007)에서 인상적으로 반복된다. 이 작품들은 모네가 말년에 그린「수련」연작과 비슷할 정도의 추상표현주의적인 부드러운 터치가 화면을 전면적으로 가득 채우면서 화면 바깥까지 확산되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곰실곰실한 부드러운 터치는「숲」(2003),「양수리 풍경」(2003-2005),「망각의 통로」(2004),「고목」(2005),「남한강(여주)」(2005),「고목」(2004)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인다. 이런 표현은 나중에 전지 크기 장지에 먹물로 그린 2008년의 드로잉들(2008)로 이전된다. ● 올 오버적 확산성의 효과는「이포나루」(2005)에서도 다시 한 번 더 인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남한강 소재의 작업 중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 중 하나인데 큰 스케일로 XXX(?) 방향에서 부감한 이 남한강 풍경에서 강한 물살의 움직임을 연상케 하는 얇은 붓질과 화면의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흐르는 대각선 구성이 풍경의 원근을 시원한 하나의 화면으로 통합하면서 푸른 빛 대기의 효과를 화면 바깥으로까지 확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거칠고 빠른 붓질로 타오르는 불길의 역동성을 단숨에 잡아낸「들불」(2004)에서도 그 효과는 유사하다. 이 작품은 이듬 해 같은 제목의 보다 큰 스케일의 작품으로 다시 반복해서 다루어졌다. 이 두 작품은「물안개」와 나란히 놓고 볼 때 그 감흥이 배가된다. 물안개이든 들불이든 스케치처럼 거칠고 빠른 필치의 상승하는 공기의 흐름과 그 움직임의 효과가 공통적인 작품이다. ● 송창은 이제 90년대의 무겁고 눅눅한 대지에 고여 있는 잿빛 불행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복사꽃」(2005), 「봄」,「붉은 백일홍」(이상 2007)처럼 액션 페인팅 류의 붓질과 드리핑(흘려 내림)을 보이는 밝은 색채의 꽃 그림 소품들도 그 분출과 해방의 감흥을 엿보게 한다. 모처럼 오랜만에 되찾은 계절의 리듬과 생명의 기쁨이 화가의 일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제 송창의 일상과 시선은 점차 인상주의자들의 그것과 닮은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04년의 스케치 풍 소품들(「남한강(원주에서)」,「봄-바람」,「새싹」, 그리고「야생화」연작들과 2006년의 드로잉들, 그리고 2007년의「달맞이꽃」,「목백일홍」,「복사꽃」,「야생화」,「오월」과 2010년의「길섶」,「뒷뜰」등 중품과 소품 크기의 작업들은 이러한 산책자의 일상적 행복과 관조자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작업들이다. 빛과 대기에대한 인상주의적 탐구를 보여주는 2007년의「아침」,「오후」,「이른 새벽」,「한낮」등 고목나무 연작도 마찬가지다. ● 송창의 남한강변 풍경에서 우리는 생명의 기쁨과 자연의 복원력을 보게 된다. 「기억하는 자의 곤혹스러움」혹은 망각에 대한 투쟁이「강변 풍경」연작들로, 생명의 기쁨과 자연의 복원력으로, 들꽃-들불-바람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흥미롭다. ● 이와 달리 고요하고 명상적인 것, 흐리고 스산하고 슬픈 느낌을 주는 풍경들도 있다.「이른 아침」(2006)과「새벽길」(2007) 그리고「땅거미」,「고요」,「바람부는 날」,「박제된 풍경」(이상 2010)이 그런 작업들이다. 흘러내리거나 녹아내린 필치의「DMZ의 여름)」(2010),「검은 눈물」(2009) 등은, 흐르지 않는 강의 뒤엉킨 흐름이나 녹슬은 풍경을 보여주는「임진벌에서-광주」,「흐르는 물처럼-광주」,「흐르지 않는 강」(이상 1997) 등처럼 역사에 대한 착잡한 심사와 비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풍경들이다. 그 착잡함은 2010년에 그려진 마모되고 풍화된 얼굴의「침묵」연작들이나 푸르딩딩한 검버섯 낀 돌덩이들 연작에서도 그대로 보여진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실루엣을 그린「기다림」도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 이 같은 상징적 방식의 표현은 남북간의 자유로운 교접과 잉태와 출산의 기쁨을 통해 통일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담은 작품인 3점의「태몽」연작에서 보다 명시적인 방식으로 되풀이된다.「새터민의 삶」(2011) 역시 같은 맥락의 바램을 담은 작품이다.

송창_드로잉_장지에 먹물_76×144cm_2006

송창의 2010년작「동토」와 2011년작「태양」은 그의 의식 속의 분단이라는 트라우마의 현재의 상황에 대한 흥미로운 암시일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 송창이 2009년 어떤 계기로 연해주를 여행하면서 우스리스크에서 본 풍광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구한말 함경도에 대기근이 들자 한인의 연해주 이주와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 망국의 한을 품고 나라를 구하고자 민족의 역량을 결집한 곳,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멀고먼 중앙아시아로 쫓겨 간 대 이주의 아픈 역사가 숨쉬는 곳이다.「동토」는 그 광활한 평원을 그린 작품들 중 하나다. 마침 하얗게 내린 눈으로 더욱 얼어붙은 느낌의 풍경 저 안쪽으로 고호의「까마귀가 나는 보리밭」풍경처럼 까마귀떼가 날고 있는 풍경이다. 박신의는 이 그림에 관해 이런 말을 했다. ● "마음 속에 각인된 '풍경'으로부터 역사의 냄새와 체취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여행을 통해 본 '풍경' 속에서 송창은 인간에 대한 성찰과 그 실존의 비극적 의미, 애수를 여느 때보다 더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풍경이 정치적 시각을 투사할 때 역사성이 명료해지는 것처럼, 상실과 결핍을 통해 그 풍경은 자신의 존재를 되찾아가는 것이다."(박신의, 2011) ●「태양」은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햇빛으로 얼어붙은 땅이 절반쯤 녹아 있는 상태의 풍경이다. 화면의 3분의 2 쯤 높이를 가로지르는 지평선 위로 햇살이 벋쳐오르고 있으나 태양은 명확하게 보이진 않는다. 그 대신 그 자리(혹은 그 약간 옆자리)에 커다란 두개골 하나가 3분의 2 쯤 지평선 위로 솟아 있는 다소 수수께끼 같은 기이한 풍경이다. 두 작품 모두 연해주 이주민들의 아픈 삶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공감과 안타까움을 담은 작품이란 점에서 공통된다. 송창의 작업 속에서 분단의 고통에 대한 감응력과 회화적 숭고는 한 몸으로 녹여져 있다. ● "트라우마적 사건들이 지니는 영향력은 시간적 지연 속에서 드러난다." 극복되기 어려운 트라우마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는다. 문영민이 자신이 기획한 한 미국 대학의 전시(『불일치-남한의 현대미술』, 2005)에 쓴 "폭력과 모더니티: 기억의 재각인"에 나오는 일절이다. ● "트라우마적 사건의 충격은 바로 그것의 뒤늦게 드러남에, 단순히 설명되는 것을 거부함에, 사건들의 독자적인 경험의 틀 바깥에서 모습을 드러내길 고집하는 데에 있다. 트라우마적 사건들이 지니는 영향력은 시간적 지연 속에서 드러난다. 발터 벤야민이 세계대전에 저항함으로서의 자살을 감행한 유년기의 친구들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는 파시스트적이며 민족주의적 단합을 지향하는 건축, 그리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를 건립해서 외상을 이념의 미명하에 승화하고 치유하는 것에 저항했다. 그러한 저항의 도구로 벤야민은 알레고리, 몽타쥬, 병치 등의 미학적 전략을 선호했다." ● 송창의 작업에서 제일 큰 역설은 새로운 역사 서술을 구축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노력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그가 생애의 궤적을 그려왔다는 점이다. 진정한 변화의 기대에 동참하지 않은 채. 혼자서 터덜터덜 망연하게 - 혹은 망연자실하게 - 그냥 화가라는 자신의 생애의 길을 걸어갔다는 점이다. 그가 반복해 그린 것은 자신의 주관화된 분단의 심상, 자기 내부의 주관성에 의해 반복되는 분단이라는 트라우마의 원형이었다. ● 송창의 분단 풍경화는 분단의 트라우마를 현실 속으로 불러내는 회화적 굿거리이자 역사의 망각에 대한 저항이었다. 처음에 그 굿은 격렬한 춤처럼 진행되었다. 나중에는 덜 시끄럽고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차츰 그것은 적막 속으로 부드럽게 잦아들었다. 그러면서 그 고독과 침잠 속에서 회화적 숭고가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한낮의 빛이 저녁의 부드러운 어둠 속으로 잦아들면서 별들이 하나 둘 빛을 발하듯이. 분단은 그의 내부에서 점차 회화 그 자체로 되어갔다. 이제 그것은 자신의 안쪽으로만 열리는 문이 되었다. 그것은 바깥의 동시대 현실의 움직이는 복잡계와의 접속으로부터 등을 돌린 고독한 오솔길이었다고 비유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변해야 한다는 언사가 지배하는 세태 속에서 송창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 버팀과 반복은 답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저항적인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송창의 작업에 정치성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분단을 그린 화가라는 데에서가 아니라 (이미 그 주제의 효과는 분단 현실의 현재적 모호성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생존을 버티어내고 있는 화가라는 사실 그것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송창의 그 우직함과 버팀이 아프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더워 보이기도 한다. 송창이라는 생존 자체가 그의 작업 자체보다 더 정치성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 성완경

Vol.20121112c | 송창展 / SONGCHANG / 宋昌 / drawing.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