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타이미지 그림나눔

2012_1114 ▶︎ 2012_1120

류장복_2012.6.1 1600 섭지코지에서_종이에 컬러 브러쉬펜_15.3×30.6cm_2012

초대일시 / 2012_1114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남_김수영_김숙현_김영주_류장복 문미옥_우나용_이근수_이우현_이지원 정장훈_주효숙_지현_한혜성_홍경화

주최 / 타이미지 그림나눔(cafe.naver.com/grimnanoo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경인미술관 Kyung-In Museum of Fine Art 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11-4(관훈동 30-1번지) 3관 Tel. +82.2.733.4448 www.kyunginart.co.kr

2012 그림나눔 ● '이미'와 '아직' / 사이에 그림이 있다. / 그림은 또 다른 자연이다. / 일획의 활기가 그림의 숨이다. / 응시의 눈에 접히고, 관조의 눈에 펴진다, / 벌레의 눈으로 표면을 더듬어라. / 우린, / 그림을 그린다. ● 타이미지 화가는 여럿의 주민화가들로 구성됩니다. 자유로운 혼자는 동시에 고립된 개인이기에 따로 또 함께 합니다. 타이미지 화가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자연과의 만남을 그림으로 그리는 사생 프로젝트로 마을그리기를 합니다. 계절과 하루와 순간이 담긴 그림 속에서 우리의 기억은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타이미지 화가는 좋은 그림의 가치를 지향합니다. 살아있는 감각과 응시와 관조의 덕목으로 날것의 자연향기를 피우고자 합니다. ● 그림이 소유의 대상이기에 앞서 소통의 수단입니다. 그림은 벽에 걸려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마을도서관에 내가 그린 마을그림을 걸어두어 마을사람들이 늘 감상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나를 위한 수신의 방편으로 내가 그린 그림이 남을 즐겁게 한다면 그림 나눔이 가능합니다. 그림 나눔은 나를 위해 너를 위할 수 있는 소통으로서 타이미지 화가의 주된 전시활동입니다. ● 2008-2009년 사생모임 '시가늘'을 전신으로 '타이미지 아카데미'가 생겼고, 2010년 첫 정기전을 치렀습니다. 이후 아카데미 내 '타이미지 여행그림'은 마을그리기 프로젝트를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바람 따라 물 따라 산과 들로 자연과 사람을 찾아 그림을 그렸던 것들을 한데 모아 그림 나눔을 위한 전시를 열게 되었습니다. 몹시 기쁩니다.

김남_섭지코지에서_종이에 유채_17.1×25.5cm_2012
김수영_바람에 얹혀_리넨에 유채_60.6×72.7cm_2012

초여름에 섭지코지2011.5.30 월. 새벽에 일어나 짐을 챙겼다. 오랜만에 떠나는 사생여행이다. 여행가방의 바퀴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15년도 더 되었다. 그래도 그림을 넣어오기에 딱딱한 이 가방이 적격이다. 삐걱거리는 가방을 끌고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예정보다 십 여분 늦게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육중한 기체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공허함에 머릿속이 하얗다. 창밖으로 구름을 보고서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 이륙 과정을 머릿속으로 되돌려보았다. 커다란 비행체가 미끄러지듯이 서서히 직선 활주로에 다가서면 그때부터 급가속하여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을 일으켜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렇게 쏘아 올린 비행체는 한동안 경사를 이루다가 다시 수평을 되찾는다. 고요해진다. 그런데 이는 추론일 뿐 확인할 수 있는 건 오직 눈앞의 광경이다. ● 처음에 눈을 맞추었던 너는 서서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를 지나쳐서 뒤로 흘러갔다. 시선은 내게로 돌려져 혼자가 된다. 그러던 어느 순간 세상이 멈추는가 싶더니 숙주의 몸체가 사정없이 흔들렸고, 이내 빠르게 공기를 가르고 나아갔다. 가까운 모든 사물은 바람의 소리가 되어 사라졌다. 개체는 유체로 대체되어 갔다. 나는 고립되었다. 그때 저 멀리 지평선이 보였다. 지평선은 내 앞쪽으로 천천히 기울었다. 푸른 대지가 어항의 물처럼 차올랐다가 빠져나갔다. 금속성의 쇳소리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모두 사그라졌다. 창공이 바다로 변하더니, 다시 구름으로 뒤덮였다. 창밖으로 구름바다가 고요하게 펼쳐졌다.

김숙현_겨울_종이에 컬러잉크_21×28.6cm_2011
김영주_양평_종이에 수채_26.5×36cm_2012

제주공항을 두고 한 바퀴 선회했다. 활주로가 번잡스러운가 보다. 창밖의 창공에 하얀 물거품이 일었다. UFO? 선채가 기울어 나타난 제주의 푸른 바다를 떠가는 배였다. 땅바닥에 바짝 붙어사는 벌레 같은 눈이 모처럼 중력을 벗어나 호강한다. 지평선이 솟아 내 앞으로 모든 사물이 일어섰다. 바람을 모아 소리를 키워 하강했다. 바람 빠진 공처럼 쭈그러드는 느낌이다. 어떤 언어도 닮지 않은 짐승의 소리가 크게 일고 선체는 멈춰 섰다. ● 오후 3시쯤 숙소로 정한 휘닉스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온화한 갈색조와 시원한 회색조의 벽감으로 실내는 안정되어 있었다. 벽에 그림들이 하나 둘 눈에 띄었다. 하나하나의 수준이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내의 안감과 톤을 맞추려한 흔적이 엿보였다. 천박한 언밸런스의 뻔뻔함이 여긴 없다. 다행이었다. 그림의 주제와 상관없이 벽지처럼 처리된 것 같아 아쉬웠지만 아쉬움은 절망보다 희망에 가깝지 않은가. ●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바다를 향해 확 트인 낮은 언덕을 걸었다. 등대가 바라보이는 풀밭에 주저앉았다. 그래, 여기쯤에서 바다를 보고 있다가 일몰을 그려보자. 봉긋한 동산 아래 천연의 기암이 물 위로 솟아났다. 사물의 윤곽에 붙들리지 않고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아가려는 시선이 몸에 배지 않아 여전히 서툴다. 바위의 질감을 더듬어 시선을 쌓아 올렸다. 먼 바다가 푸르고 부딪치는 파도가 새하얗다. (1833) (1848) (1900) 엷은 구름으로 흐린 날씨 탓에 황혼의 기운을 못 느꼈다. 습한 바닷바람으로 한기가 느껴졌을 무렵에 등 뒤로 붉은 노을이 구름 사이를 물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서서 연필로 노을의 기운을 좇아 보았지만 미미하기만 했다. (1919)

문미옥_하늘바람_리넨에 유채_65.1×90.9cm_2012
우나용_창밖으로_종이에 목탄_53×77cm

저녁식사를 마친 후 벽에 그림을 모아 놓고 사람들은 둘러앉았다. A4 크기의 작은 스케치북과 몰스킨 수첩에 그린 그림이 저마다 다르다. 낮에 비행기 안에서 눈앞의 사물이 가까이 다가오고 또 멀어져 갔던 것에 대한 상념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시선의 거리에 따른 차이가 있다. 눈앞에 사물이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면 비일상적인 수준에서 정체가 분간된다. 일상의 수준에서 사물대상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시선과 마주친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너무 멀리 사라지지 않는 거리에 일상의 사물이 있다. 우리의 눈은 그 정도의 거리를 왕복하며 기억에 의존하여 사물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그런데 비일상적 수준에서 사물대상은 화가의 눈에 비친다. 너무 가깝거나 너무 먼 거리다. 눈앞에 사물을 더듬어 볼 때 그 사물대상과 나는 하나가 된다. 나뭇잎 하나하나를 더듬어 볼 때 흔들리는 이파리의 미세한 떨림을 화가는 감지한다. 또 저 멀리 아득한 풍경을 물끄러미 볼 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화가는 발견할 수 있다. 응시와 관조의 차이다. 사물과 하나가 되어 감각하는 응시의 눈과 있는 그대로 사물을 비추어 내는 관조의 눈이다. 그런데 응시와 관조의 시선이 동시에 작동하는 수준이 있다. 이를테면 고요한 진공상태에서 순간 포착이 지속되는 어떤 지경이다. 탄광촌 철암에서 눈 내리는 설경을 목탄으로 그리고 있을 때였다. 목탄을 내치며 선묘가 이루어지는 어는 순간에 뭍에 나온 팔뚝만한 물고기처럼 움직이는 내 팔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였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격렬했지만 관자에게 뭔가를 강요하지 않았다. 응시와 관조의 시선을 오가는 화가의 눈에 자연은 온전하다. 관광객의 불안한 눈에 자연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 밤이 되었다. 흐린 날씨에 가로등도 별로 없어 도무지 깜깜했다. 글라스 하우스 앞 꽃밭까지 걸어갔다. 바람 부는 절벽 아래 파도조차 희미했다. 목탄을 집어 들어들고 무릎 꿇는 자세를 취했다. 앞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검은 피부 위로 미끄러져 서서히 일어났다. 다시 사라졌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선 바로 코앞에서 세차게 부는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름 모를 꽃의 줄기를 좇았다. 와중에 파도 하나를 붙들었다. 찔끔 하얗게 파도가 일었다. 그 뒤로 바다는 마냥 검게 빛났다. (2322) 오른 쪽을 보았다. 기암아래 파도가 쉼 없이 부서졌다. (2330)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멀리 파도가 대오를 맞춰 일제히 밀려온다. 밤하늘과 밤바다, 파도와 식물이 하나로 천지를 움직거렸다. (2338) 파도는 기어이 뭍에 올라 하얀 거품을 토해냈다. (2348) 숙소에 돌아와 그림의 먼 바다를 이리저리 다독거리다 새벽 3시쯤 뭉게구름 속으로 사라지듯 잠들었다.

이근수_섭지코지_종이에 목탄_29.5×41.5cm_2012
이우현_나무바다_리넨에 유채_72.7×90.9cm_2012

2011.5.31 화. ● 로비의 한편에 있는 뷔페식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꽤 붐볐다. 다 어디 있었을까. 사생도구를 주섬주섬 헝겊가방에 챙겨 넣고 로비에 다시 모였다. 25인승 임대버스를 타고 비자림을 향해 달렸다. 날은 흐릿했다. 기사 아저씨는 부지런히 제주 이야기를 했다. 제주에는 고, 부, 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데 각각 파랑, 초록, 주황의 지붕으로 구분된 집에서 산다더니, 뻥이란다. 비용이 많이 드는 초가지붕 보다 함석지붕이 눈에 많이 띄었다. 햇빛과 바람으로 세월이 더해진 색이 무척 고와 보였다. 맑은 공기 때문인가, 도시에서는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색감이었다. 도로는 한산했다. 야트막한 돌담이 많다. 집이건 밭이건 돌담을 둘러쳤다. 돌담에 돌만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손으로 밀면 굴러 떨어질까,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바람이 잘 통하기 때문이다. 돌담은 안과 밖을 오히려 연결했다. ● 평대리 비자림에 도착했다. 주목과에 속한 비자나무가 꽉 우거져 있었다. 잘 닥은 산책길에 새들이 지저귀었다. 이방인을 맞이하여 짐짓 소란스럽다. 우람한 나무 위로 가느다란 가지 사이마다 터진 하늘이 손에 닿을 듯하다. 거인이 되어 천연우림 속을 거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길가에 비켜서서 종이를 꺼냈다. 길 위로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허공을 날라 다녔다. 자유롭다. 그림도 자유롭다. 숲에 서 있는 내가 그림 속으로 보이는 듯하다. (1209) (1230) 선흘리 할머니 식당을 찾았다. 감귤 막걸리를 반주로 두부전골을 먹었다. 과일향기 나는 막걸리와 두부의 깊은 맛이 어우러졌다. 뒷마당에 찰진 고목이 정겨운데 앞마당에 야자수가 뻘쭘하다. (1409) 다시 이동했다. 조천리 어촌 마을에 들어섰다. 부두를 거닐었다. 거무튀튀한 돌로 지은 거대한 빨래터가 시선을 끌었다. 옅은 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바닷가라 그런지 강한 빛이 느껴졌다. 배 한척이 보였다. 전등을 줄줄이 매달아 놓은 고기잡이 '엔젤'호다. 흔들리는 물 표면의 번짐에 현혹되어 시작된 긋기가 바람을 따라 속도를 더해갔다. 까매졌다. (1511) 먼 바다 위로 구름이 망실망실 피어올랐다. 잿빛 하늘 아래 흐린 바다가 멀겋다. 그 사이에 도시의 질감이 기다랗게 끼어들었다. (1605)

이지원_여름_종이에 수채_26×35cm_2012
정장훈_떠난자리_종이에 오일스틱_42×56cm_2012

해안을 따라 달렸다. 기사 아저씨는 에메랄드 물빛이 환상적인 해변이라며 굳이 차를 세웠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우린 길가에 줄줄이 늘어서 그림을 그렸다. 까만 돌과 하얀 모래를 배경으로 파르스름한 물색이 보석처럼 빛을 발했다. 멀리 풍력기가 팔랑개비처럼 돌아갔다. (1703) 차는 다시 해변을 달렸다. 졸음이 밀려왔다. 덜컹, 잠을 깼다. 바닷가에 면해 있는 전형적인 제주마을이다. 검은 돌담은 오래된 성곽처럼 이리저리 뻗어갔다. 도중에 블록 담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그래도 예스러웠다. 얕은 담과 낮은 지붕이 정겨웠다. (1748) 얼마 안가 제주의 보존마을에 다다랐다. 마을 입구에 돌담의 지름이 10여 미터가 넘는 둥그런 터가 있었다. 조천리에서 보았던 공동 빨래터와 비슷하다. 제주의 세월이 묻어있는 거무튀튀한 돌의 무채색은 알록달록한 지붕의 원색을 그리 촌스럽지 않게 받쳐주었다. 후드득, 비가 뿌렸다. (1826) 이제 어둠이 내렸다. 우린 기사 아저씨가 이끄는 대로 일출봉이 보이는 횟집의 창가에 자리 잡았다. 떡갈치조림과 소라회를 놓고 제주산 소주 '한라산'을 마셨다. 굵어진 빗방울이 창에 들이쳤다. 일출봉의 실루엣이 어린왕자의 모자그림과 닮았다. 뭘 집어넣을까. (1913) 숙소에 돌아와 오늘도 그림을 모아 놓고 사람들은 둘러앉았다. 모두의 그림에서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속도감은 빠름과 느림에 걸쳐 있다. 느리면 느린 대로 빠르면 빠른 대로 현장감이 있었다. 집착적인 선묘에 긴장어린 속도감이 있고 빠른 선묘에 허전한 제스처가 없다. 구속되지 않으려는 일획의 자유의지가 눈앞의 실물을 향해 작동할 때 끈 떨어진 풍선처럼 허황되지 않을 수 있다. ● 생동하는 일획의 공간조건은 투명성에 있다. 투명성은 불투명한 정도를 따른다. 불투명한 일획과 일획의 사이에 공간의 투명성이 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일획은 가장 작은 단위의 그림요소다. 일획의 머리에서 꼬리까지 변화가 무쌍하리만치 무한하다. 바이올린의 현을 어디쯤에서 '끊어주느냐'에 따라 음색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과 같다. 순도 높은 일획의 고유한 개성은 화가의 잠재적 개성을 담보한다. ● 또 일획은 다른 일획을 부른다. 획과 획이 쌓여 이런저런 모양을 지어낸다. 피아노 건반 위로 튀어 오른 음을 어떻게 '이어주느냐'에 따라 같은 곡이라도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것과 같다. 끊어지고 이어지는 일획이 모이고 흩어져 회회공간의 흐름을 생성한다. 회화공간의 흐름은 매번 다른 결과를 낳는다. 누가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매번 다르게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효숙_나무_리넨에 유채_72.7×90.9cm_2012
지현_섭지코지_리넨에 유채_45.5×60.6cm_2012

2011.6.1 수. ● 그림에 몰입하여 삼매경에 빠져야 노동을 벗어나 놀이에 이르는 경지를 맛볼 수 있다지만 막상 몸이 먼저 지친다. 어제 악천후에도 옆방의 일행은 야경 그리기를 감행했다. 이른 아침 섭지코지를 산책했다. 비가 그치고 해가 들었다. 언덕에서 어미 말과 새끼 말을 만났다. 서서 그들을 그렸다. 새끼 말이 다가와 내 옷자락을 물었다. 커다란 놈을 귀엽다고 쓰다듬어 보지만 어색하다. (0750) 바닷가 절벽 윗길을 따라 걸었다. 먼 바다 너머로 구름이 모여 들었다. 흐릿한 하늘에 동전만한 하얀 해가 빛줄기를 내뱉었다. 대자연의 숭고미가 저런 것일까. 솜털비늘처럼 미끈한 바다의 표면이 반짝거렸다. 맥주거품처럼 선돌 아래 파도가 부서져 내렸다. 가느다란 연필의 끄트머리를 가볍게 쥐고 하얀 종이 위를 한참 두드렸다. (0839) 바닷가로 내려섰다. 까만 돌무더기 중에 편평한 놈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눈앞에서 파도가 부서지자 넘실대는 바다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다. 까만 돌을 희롱하는 하얀 파도와 어느새 한 몸이 되었다. 이따금씩 먼 바다의 고요함이 힐끗 보였다. (0936) (0948) (0953)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글라스 하우스로 향했다. 도중에 안도 타다오가 건축한 지니어스 로사이 GENIUS LOCI를 둘러보았다. 그는 자연과 노출 콘크리트의 인공 벽이 만나 이루어지는 기하학적인 건축에 자연을 최대한 끌어들였다. 물과 꽃, 터진 하늘과 빛, 돌의 질감 따위가 반복되었다. 물은 고요히 하늘을 담아내거나 졸졸 시내처럼 벽을 타고 흐르고, 까만 돌과 해국이 지표의 질감을 만들었으며, 사각이나 원으로 하늘을 잘라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나오시마 섬을 생각나게 했다. 건축과 자연 사이에 거주하는 그림이나 조각의 수준 높은 외마디가 아쉬웠다. 여긴 화룡점정의 극적 환희가 없다. ● 글라스 하우스에 들어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커피와 케이크 한 조각으로 요기했다. 사방의 전면 창에 세로 줄무늬를 이룬 빔이 바다의 수평과 잘 어울렸다. 자연광선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안도타다오의 의지와 솜씨가 엿보였다.

한혜성_아침_종이에 수채_13×21cm_2011
홍경화_아늑한_종이에 컬러펜, 파스텔, 콘테_21×13cm_2011

졸음 가득한 눈으로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북적거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혼자를 자각하게 한다. 물끄러미, 그저 바라볼 때가 좋다. 시선은 비행기 창밖으로 모든 사물이 물러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활주로의 비행물체가 새처럼 보이더니, 창밖의 구름바다가 망막에 거품을 만들었다. (1523) (1524) (1608) 오후 5시를 앞두고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일행 중 한 사람은 파도를 그릴 때 있었던 일을 무용담 들려주듯이 실감나게 말했다. "아주 힘껏 파도 하나하나를 종이 위에 내리쳤다.. 옆에 갈색의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들고 문질렀다.. 종이가 헤졌다.. 또 다른 재료가 그 위로 내려앉았다." 나눌 수 없는 기쁨이나 고통처럼 자기만의 경험을 짧은 글로 써보면 어떨까. 그림과 글이 공명할 수 있도록. (2011. 6) ■ 류장복

Vol.20121114d | 2012 타이미지 그림나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