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 Mandala

전인경展 / JEONINKYUNG / 全仁敬 / painting   2012_1114 ▶︎ 2012_1127

전인경_만다라 1209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300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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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11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아라아트센터 AR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26(견지동 85-24번지) Tel. +82.(0)2.733.1981 www.araart.co.kr

시바(Shiva)의 춤과 담아(譚峨)의 만다라 ● 시류(時流)를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가는 좋은 작가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고 그래서 기쁜 법이다. 현직에 있는 동안 전시 서문을 쓰지 않기로 한 결심을 이번에 어렵게 꺾는 이유는, 도대체 당대의 시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과, 그 시류에 초연하게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면면들을 찾아내는 것도 내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들 중 하나가 담아(譚峨) 전인경이다. ● 티벳 불교의 도상에 많이 나타나는 만다라(Mandala)는, 좌우대칭의 균형과 절제된 조화미와 중심을 향한 다중구조가 이루어내는, 시각화된 성스러움과 우주적 진리의 전일성(全一性)이 보는 이를 적멸(寂滅)의 평화와 행복으로 인도하는 특별한 도상이다. 전인경의 만다라적(的) 도상을 과연 '만다라'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던지며 이 글을 시작한다. ● 원래 서양화를 전공한 전인경이 삶에서 격심한 어려움을 겪다가 우연히 불화(佛畵)로 일가를 이룬 인간문화재 만봉스님과 연이 닿아 그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치열한 네 해를 지내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가 원래부터 즐겨 다루었던 우주적 원(圓)도상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되는데 어느 날 우연히 전형적인 불교 만다라 도상에 접하여 그것이 전해주는 형언할 수 없는 심리적 안정감에 압도되는 충격을 경험한다. 그 후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탐험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2008년 『담아 이야기, 담아의 꿈』전을 가졌고 이제 사년 만에 『빛의 질 속으로』전을 열게 되었다.

전인경_만다라 12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120cm_2012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경구가 있다. 담아 전인경은, 자신이 그리는 그림이지만 그 그림이 다시 자신을 성숙하게 하고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깨우쳐준다고 술회한다. 그에게 그림은 '침묵의 선생님'인 것이다.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힘들어도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여 평화를 얻고 그 속으로 차분하게 침잠하곤 한다. 그의 머릿속은 늘 수많은 도상과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화폭에 풀어내는 과정에서 내적 이미지로서의 원래 도상의 형과 색이 바뀌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매우 흥미로운 과정으로 스스로 그것을 즐긴다고 하니 그것은 영회(影繪; 무의식 상태에서 잠재되어 있던 것이 자신도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도상으로 그려짐) 현상에 다름 아닌 듯하다. ● 아직 표현되지 않은 이미지가 안에 원래 있고, 표현 과정에서 그것이 바뀌는 경우에도 자연스럽게 변주되니까, 그는 그림을 망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일상 속에서 마음 안의 도상 그 심상(心象)을 놓치거나 잊어버리는 순간도 거의 없다고 한다. 늘 지속되는 심상에의 천착. 그것은 어떤 사람이 주는 어떤 즐거움보다 유혹적이라고 한다. 도상과의 씨름은 한결같이 기쁨과, 행복감,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생 화가다. ● 예닐곱 번씩 정확히 같은 패턴으로 중첩시켜야 하는 채색 과정은 시간과 공이 엄청나게 드는 완성을 향해 가는 고행의 도정이다. 그 과정에서의 필수적인 기다림은 엄격한 틀 속에서 극한까지 인내를 요하는, 잡념이 사라진 무심(無心)의 상태를 견지해야만 하는 정신수련과 같은 과정이다. 원래 만다라는 명상의 대상이자 만다라 제작의 작업과정 자체가 명상이기도 하다. 여기서 전인경의 도상이 만다라 도상인가 하는 첫머리의 질문에 대한 일차적인 답이 나온다. 그 도상적 특징은 차치하고, 과정 자체가 명상이요 수련인 바 전인경의 작업은 전형적인 만다라 작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 만봉스님의 문하생이 되어 불교를 알게 되고 그에 매료되었지만 그는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이지 않다. 다만 우주적, 근원적 도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원래 그에게 내면화된 철학적, 성찰적 성향이 활발히 작동되고 '담아 스타일'의 작업으로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시각(視覺)의 철학자다. 그의 도상에도 대체로 만다라적 특징인 '중심'이 있고 그것이 실제 도상에서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도 관념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는 만다라 도상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대신 티벳 만다라 도상첩을 통하여 우주적 영원성에 직관적으로 접하며 의식 내면의 창고에 자신만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도상을 축척시켜 나아갔다. 원형(圓形), 방형(方形), 다양다기한 도상, 생성, 소멸, 유전(流轉)의 도상, 소우주이자 블랙홀인 자궁의 도상들이 무궁무진하게 거기에 뭉글댄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세상에 실재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평생의 과업이다.

전인경_만다라 1201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150cm_2012

담아의 도상을 분석하여 보자. 원형, 또는 내접하는 원형과 방형을 기본형으로 하며 대체로 중심이 있고 기본적으로 대칭 구도를 지니고 있어 전형적인 만다라의 도상을 취하되 고래(古來) 만다라의 전형적 정태성을 버리고 정중동(靜中動), 정일(靜逸)함 속에서 미묘한 역동성(力動性)을 드러낸다. 그 역동성 때문에, 다양한 크기의 원, 삼각형, 사각형, 반원, 호(弧) 등 기하학적 도상이나, 조각, 끈, 띠, 물풀모양, 고리모양의 기본 도상이나, 수파문(水波紋), 선문(線紋), 엽문(葉紋), 당초문(唐草紋), 연화문(蓮花紋) 등이 규칙적으로나 불규칙적으로 이어지고 뭉쳐지고 퍼지거나 흩어지는 그의 도상은, 지속적으로 변화되는 움직임 중 어느 한 찰나가 포착된 느낌을 준다. ● 중심이 없는 선형적(線型的) 도상도 있는데 그것은 대체로 유동적 방향성을 가지고 떠오르거나 가라앉거나 수평으로 흘러간다. 어떤 것은 핏줄 속을 떠가는 피톨들의 움직임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수조 안에서 발생되는 공기방울 같기도 하여 이 역시 정일(靜逸)함 속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 모든 색은 빛의 반사로 감지되지만, 전인경의 색은 유달리 조사되는 빛의 광도(光度), 휘도(輝度)에 따라 천변만화한다. 적절히 혼합된 펄(pearl) 계열 안료의 반사 효과가, 보색대비, 유사대비, 한난대비 등의 대비 효과와 함께 나타나는 작품의 경우, 심연(深淵)에서 자체 발광하는 광원이 내장(內裝)된 듯 보인다. ● 그의 만다라적 도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 대로 대칭성과 규칙성이 깨어져 있고 부정형적이고 불규칙적인 움직임의 한 순간이 포착된 듯하되 그것은 한결같이 역동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다기(多岐)한 변주(變奏) 속에서 세부는 자유롭게 흩어지고 퍼지지만 실은 큰 틀 범위 안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고래(古來)의 전형적 만다라를 아악(雅樂)이나 고전음악에 비유한다면 담아의 만다라적 도상은 산조(散調), 카덴자, 재즈에 비유할 수 있겠다. ● 여기서 미학자 심광현이 제시한 분석 틀의 도움을 받겠다. 그는 우리 문화, 예술, 자연경관의 특징을 규정하기 위하여 '프랙탈 흥(興)의 미학'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불규칙성이 유사하게 반복되는 경우 무질서 속에 깊은 질서가 느껴지는 바 이는 곧 자연스러움이며 '프랙탈'(fractal; 고르지 않지만 자기유사성을 갖는 기하도형) 개념으로 그 특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인경_만다라 1201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120cm_2012

전인경의 만다라적 도상에서 나타나는 적당한 불규칙성과 구불텅한 전개는 역동적인 다채로움과 생기(生氣)를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기운생동(氣韻生動)이며 기(氣)의 프랙탈한 운행 속에서의 자유로움인바 그것이 곧 '풍류(風流)'라는 것이다. 신은경은 '풍류심'의 하위범주들을 흥계(興系), 한계(恨界), 무심계(無心系)로 구별하였다. 무심(無心)은 초월적 경지에서, 흥(興)의 절정은 엑스터시의 경지에서 '자아 소멸'을 수반한다. 심광현의 지적대로 무심(無心)은 탈속(脫俗)의 미(美)요 흥(興)은 세속(世俗)의 미다. 무심의 미가 고래(古來)의 만다라에서 구현되는 그것이라면, 전인경의 만다라적 도상에서는 '형식적인 아름다움과 감각적인 쾌감이 어우러져 숭고미에 가까운 역동성을 아우르는 폭넓고 깊고 유동적인 흥(興)의 미'가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 '프랙탈 흥(興)의 문화'인 것이다. 이 개념에서 '흥'은 기운생동하며 상승하는 자기조직적인 에너지와 감정을, '프랙탈'은 흥의 역동적인 작동 양상을 정확하게 표현해 준다. ● 한(限)은 원망과 슬픔의 감정이 접히고 스며들어 곰삭은 정서인데 그것이 풀리면서 역동적으로 고양되는 기쁨의 정서가 바로 흥(興)이다. 한과 흥은 음과 양의 관계처럼 프랙탈하게 맞물려 있어 억눌려 있던 한은 엄청난 강도와 크기로 흥이 되어 솟구친다. 전인경에게 있어 원망, 회한, 탄식 등의 정감이 뒤섞인 한은 흥으로 승화된 듯하다. 그는 늘 웃고 한결같이 명랑하다. 작업을 통해 한을 남김없이 흥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에게 작업은 곧 필수불가결한 생명줄 같은 것이며 그의 작품은 한이 배태되어 흥으로 출산된 비생물학적 생명체, 그러니까 '자식'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 무심의 미학이 고요한 정적 같은 망아(亡我)의 경지를 연상시킨다면 흥의 미학은 주체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흥(興)'이라는 용어는 역동적이며 즐거움이 솟구칠 때 일어나 외부로 넘쳐나가는 기운의 프랙탈한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천지만물의 한가운데에서 양기와 음기가 서로 꽉 맞물려 끊임없이 운행하는 역동적 모양새는 천지자연과 감응해 주객합일을 이루는 즐거움이 생동감 있게 넘쳐흘러 프랙탈한 운동을 이루는 양상인데 전인경의 도상 대부분에서 그 생동감이 읽힌다. ● 만다라는 명상의 결과물 또는 명상의 대상이다. 전인경의 만다라적 도상은 기학적(氣學的) 직관에 입각한 풍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흥취가 솟아나온 결과물이다. 거기에는 몰입(沒入)이 필수요 절대적 조건이다. 몰입을 통하여 비감(悲感)을 다 탕진하고 난 뒤의 홀가분함과 이완감이 흥겨운 즐거움으로 바뀌어 흥(興)의 미감이 프랙탈한 변주를 통해 작품으로 구현된다. 이것이 전인경이 그의 한을 흥으로 완벽하게 감추는 삶의 비방(秘方)이리라.

전인경_만다라 1209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0×260cm_2012
전인경_만다라 1203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0cm_2012

전인경의 도상은 성과 속을 넘나들며 이중교호적이어서 에로틱하면서도 신령한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듯하다. 김지하는 신라의 풍류도와 연관시켜 우리 탈춤 마당을 '풍류장(風流場)'이라 명명하였다. 이 '풍류장'은 감각적 쾌락에 기초를 두면서도 성스러운 깨달음의 영역으로 연결되는 장소라는 것이다. 전인경은 만봉스님 문하생이었던 '티'를 내지 않는다. 있었을 법한 깨달음은 내면화되어 드러나지 않고, '시장(市場)으로 돌아온' 그는 때로는 현란하게 감각적으로 때로는 중후하고 신령스럽게 화폭 너머로부터 발광하는 빛만 남기고 있으니, 같은 맥락에서 전인경의 화폭은 하나의 '풍류장'이 되는 것이다. ● 김지하가 우리 탈춤 해석에서 언급한 성(聖), 속(俗)의 양자 중에 후자에 더 치우쳐 갸우뚱하게 기운 역동적 균형이, 전인경의 '풍류장'에서 감지되는 바, 전인경의 도상은 이중교호적 의미의 '흰 그늘' 미학(김지하)의 구현, 카오스 쪽으로 갸우뚱하게 기울어진 카오스모스(chaosmos) 미학의 구현이라고 하겠다. 담아의 도상에서 성(聖)과 속(俗)은 공존하고 갸우뚱하게 후자로 기울었지만, 서로 평화롭게 상승하고 상생한다. 그 갸우뚱한 기움은 지극히 감각적(感覺的)인 색채 때문인 듯하다. 그는 자신에게 색(色)에 대한 허영심이 있을 만큼 형태나 표현, 구도 등 다른 요소는 매우 절제하여도 색에 관하여서는 극도로 표현적이고 탐구적이고 실험적이며 한계를 두지 않는다고 술회한다. 이제 그 색은 기묘하게도 단순한 반사광 이상의 빛으로 변화한다. ● 고래의 만다라 도상이 거대한 상징체계이듯 빛이 충만한 전인경의 도상도 색채와 형태의 순수한 추상 조합이 아니라 현대 작가의 작품으로서는 흔치않게 의미(意味)와 상징(象徵)으로 채워진 도상 체계이어서 흥미롭다. 여기서 두 가지 작품으로 그것을 예시하겠다. ● 하나는 「만다라1」이다. 이것은 정방형의 도상이 좌우로 두 개 이어진 이폭화(diptych)이다. 조각조각의 절편형을 단위요소로 한 좌측 원(圓) 도상은 외연으로 증폭되는 에너지의 남성성을 상징하고 구슬 같은 작은 원형의 단위요소로 이루어진 우측 원(圓) 도상은 연약하고 치밀한 여성성을 상징하는 두 개의 수레바퀴 도상이다. 두 개의 수레바퀴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리 잡고 두 폭이 잇닿는 면에서는 이질의 두 원형상이 합쳐 이어져 사랑과 생산, 생성과 소멸의 궤를 굴러간다. 짙고 검은 현묘(玄妙)한 바탕 위에 펄(pearl) 가루 성분의 안료가 빛의 변화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정방형 대각선의 두배 반이나 세배의 거리에서 각 원형의 중심에 시선을 고정시켜 무심하게 응시하면 원형의 호(弧)들이 불규칙한 리듬으로 툭툭 움직이는 착시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도상의 역동성이 착시 현상으로 감지되는 것이다. ● 다른 하나는 「환(幻)maya11」이다. 어느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날 작가는 춘천 어느 포장마차에서 등불에 날아들어 앉은 엄청난 숫자의 하루살이 떼를 보게 된다. 그것은 마치 잎사귀 모양의 장식물들이 빼곡히 붙어있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그것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생명체라니.. 그리고 그것이 오늘 하루를 채 넘기지 못하는 덧없는 생명이라니... 나의 생명은 그것에 비해 마치 영원할 듯 그것을 측은히 보고 있는 미망(迷妄)은 또 무엇인가? 그는 후에 그 소름 돋던 느낌을 화폭에 형상화하게 되었고 병약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병원에서는 절대 쓰지 않는다는 레몬색을 주조로 택하게 된다. 이 엽문(葉紋) 레몬색의 방사형 원 도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정확하게 다가가는 처연한 생명의 애가(哀歌)요 비가(悲歌)가 되었다. 이 도상에 접하여 우리는 애이불상(哀而不傷)의 경지로 들어서게 된다.

전인경_만다라 1206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120cm_2012

1960년대에 활동했던 미국의 화가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는 말년에 오직 검은색 정방형의 회화에 몰두한다. 감상자가 이 회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몇 분이 지나야 그 안에 미세하게 구분되어 은은히 빛나는 아홉 개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십자형 도상을 식별할 수 있다. 극도로 감축된 조형적 수단으로 실재의 완전성과 숭고함을 표현해낸 이 도상은,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토마스 머튼 신부(Thomas Merton)가 친구 라인하르트로부터 선물 받은 작은 버전의 흑색회화에도 나타나는데, 이 그림을 기도방에 걸어놓고 관상(觀想)의 대상으로 삼았던 머튼은 세상에서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그림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일상으로부터 고양된 명상적 심적 상태를 유발해 주는 대상물, 정신적이고 영적이며 완전추상의 만다라는 이를 마주한 이가 정신적 몰입과 자아방기에 필요한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마음과 호흡의 변화까지 포함한 모든 현상을 무심하게 관조하는 과정을 위한 그 시간을 담아의 도상은 요구한다. ● 만다라의 중요 구성 요소인 기하학적 도상과 색채는 왕왕 '에너지를 통한 치유(energy healing)'의 기제로 작용한다. 스스로 만다라를 그렸던 저명한 정신의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은 만다라는 자신이 그리려고 해서 그려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나 절망적이었을 때 '그려진' 것이었다는 말이다. 치유의 기제였던 것이다. 전인경에게도 만다라는 위기와 절망의 시대에 운명처럼 다가온 자기치유의 비방이었던 것 같다. ● 담아의 만다라적 도상은 우주를 구상하는 미세한 원소 입자들의 영원한 움직임을 떠올려주어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가 말한 '우주적 무도(舞蹈)', '시바의 춤'을 연상시킨다. 동중정(動中靜), 정중동(靜中動), 운동, 변화, 유동(流動), 변역(變易)에 관한 강조는 동양 신비주의의 전통적 특징이며 신비주의적 세계관의 핵심적인 양상이었다. 업(業)을 일컫는 '카르마'는 우주 모든 현상의 활동적 또는 역동적 상호관계를 의미한다. 동양의 종교와 철학에서 세계는 운동, 유동, 변화에 의해 이해되고, 율동적이고 신성한 유희는 우주의 진화와 동일시된다. ● 힌두교에서 모든 생명은, 생성과 소멸, 죽음과 재생의 거대한 율동적 과정의 한 부분인데, 끊임없이 윤회를 계속하는 영원한 생사의 율동을 상징화한 것이 바로 '시바(Shiva)의 춤' 조각상이다. '시바의 춤' 상은 서로서로 용해되어 무한한 다양성을 만들어가는 에너지의 끊임없는 흐름의 가시적 구현인 것이다. 카프라가 드러낸 대로 수백년전 인도의 예술가가 우주적 무도를 춤추는 시바의 조각상으로 만들어내었고, 당대의 물리학자들이 현대 물리학으로 우주적 무도의 모형들을 묘사하였다면, 전인경은 색과 도형의 전일적 풍류장으로 우주적 통일성, 상호연관성, 그리고 역동성을 현대적 만다라로 가시화한다. ● 이제 글을 맺으며 "담아의 도상은 만다라인가"하는 첫머리 질문에 답을 할 때가 되었다. 그 독특한 역동성으로 특징 지워지는 담아(譚峨) 전인경의 만다라적 도상은 -이제 접미사 '적(的)'을 떼고- 과연 담아 스타일의 '만다라'이며, '오늘 여기' 버전의 '시바의 춤' 상(像)이라고 하겠다. 그의 미술세계에서 끝없는 변역(變易)과 발전을 기대한다. ■ 최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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