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 X로서의 세계_결정의 서막

차혜림展 / CHAHYELIM / 車惠林 / painting   2012_1121 ▶︎ 2012_1209

차혜림_보유하고 있는 밤들_캔버스에 유채_72.8×50.1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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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121_수요일_07:00pm_갤러리라운지 비하이브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2:00pm~06:00pm

1부 / 2012_1121 ▶︎ 2012_1209

갤러리라운지 비하이브 BEㆍHIVE 서울 강남구 청담동 78-5번지 Tel. +82.2.3446.3713~4 www.artbehive.com

2부 / 2012_1122 ▶︎ 2012_1201

리안갤러리 서울 LEEAHN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48-7번지 로데오 프라자 Tel. +82.2.512.2243 www.leeahngallery.com

차혜림_중간그림 ● 작가의 그림은 사실적이고 매끄러운 형상들 사이로 무언가 의뭉스러운 의미들을 갖고 있는 것만 같아 응당 읽혀져야 할 텍스트처럼 다가오지만, 좀처럼 읽혀지지 않는 텍스트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저 형상적인 것들이 감각에 전하는 것들을 온전히 받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인데 잘 그려진 사실적인 형상들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낯선 느낌들, 이국적인 화풍도 그렇지만 화면 속 인물들의 낯선 행위들로 인해 편치만은 않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그림도 사실 조곤조곤 따지고 보면 불가해하긴 마찬가지일터이다. 그림의 존재가 현실의 존재를 대신할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작가가 품었음직한 혹은 작가가 상상하고 감각했을 저 무정형의 것들을, 다시 작가의 그리기라는 신체적인 감각들로 전환시켜 일으키는 감각작용의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작가가 사유하고 감각했을 어떤 힘들은 물론 그림을 그리는 순간순간 작용하는 여러 가지 질료들의 작용이나 그 진동들을 포함한 작용들 말이다. 더구나 이 과정에 따른 여러 변수들, 이를테면 작가의 다면적인 기억 작용이나 습관, 상상들까지 고려한다면, 작가가 이를 얼마간 통어한다하지만 그림이란 결국 예기치 않은 형상들, 혹은 그 감각들과의 만남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 과정은 잠재적인 것들 혹은 분화되지 않은 것들로 넘쳐나는 것들이기에 복잡성은 더 가중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림은 이러한 미지의 불가해한 것들과의 만남이고 이를 대하는 우리의 인식의 어떤 한계, 사유의 무기력함 속에서 힘들게 잉태된 작가의 감각작용들과의 이접적인 충격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나와는 다른 타자, 그렇게 외부적인 것과의 낯선 조우이기에 어떤 쾌감들마저, 혹은 도달하고 싶은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불가해한 매력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림이라는 저 오래된 존재들 말이다. 작가의 그림도 이렇게 묘하고 복잡한 지점들을 경과하면서 작동한다. 사실적인 형상들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저 뻔한 현실의 세상들과는 조금은 거리를 둔 방향들로 향해있는 것 같고, 동시에 작가 자기 자신의 지극히 내밀한 것들로 향해 있는 것 같은 느낌들이기에 그 첫 만남은 어색하지만 동시에 호기심을 잡아끄는 것이다. 편치 않다는 것은 결국 어떤 힘들이 작용을 한다는 것들이고, 무언가 말을 걸어오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어떤 알 수 없는 기호처럼 무언가를 끊임없이 지시하고,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지시대상이 명확하고 분명하지 않기에 조금은 고약하고 불편할 뿐이지만, 이미지로 작용하는 한 무언가 말을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없어 보인다. 다만 이미지와 기호작용 사이의 심연과도 같은 문제될 뿐이겠지만. 더구나 작가의 경우 여기에 어떤 반전들까지 숨기고 있는 것 같기에 알 수 없는 궁금증마저 자아낸다. ● 작가의 그림은 언뜻 외국 영화의 한 장면이나 스냅사진을 보는 것처럼, 낯선 장소 속의 인물들이 엮어내는 현실의 한 부분을 담아낸 이미지들로 다가오는데, 무엇보다도 잘 그려진 사실성 짙은 형상 표현들이 먼저 시선을 잡아끈다. 하지만 인물들의 크기가 왜곡, 과장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화면 속 인물들이 저마다 각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함들조차 다 나름의 맥락과 이유들이 있는 것들이라 추측하게 된다. 하지만 특정한 맥락이나 단서들 없이는 직접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을 듣자면, 현실과 가상의 공간들, 때로는 작가가 우연히 마주한 현실의 공간 속에서 관찰되고 발견된 것들이기도 하고, 아니면 영화나 인터넷, 이론들에서 착상한 것들이란다. 작가는 이렇게 부단히 작가가 마주한 세상의 잡다한 것들에서 정보를 취하고, 각각에 작가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그림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속시킨다. 주로 그림 속 인물들의 특정한 행위들이거나 장면의 구성, 배치, 오브제들을 통해서 어떤 특정한 의미들을 부여하는 식이다. 작가에 의해 연출된 그림 이야기이고, 형상들로 말이다. 하지만 이를 그림으로 옮겨내는 방식은 작가의 상상과 사유가 교차된 것인데다 여러 층위로 꼬여져 있고, 무엇보다도 다른 맥락들 속에서 재정향되는 것이기에 그 의미작용은 복잡하기만 하다.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원정보가 가진 맥락과 의미에 더해 작가가 다시 (재)매개화시키고, 복잡화시킨 스토리텔링에 의해 더 많은 다성의 이야기들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얼마간의 방식은 자리하는 것 같은데, 그 단서들 중의 하나가 그림 속 인물들의 행위들이고, 작가가 미장센화 시킨 각각의 단서들, 장치들이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장면들이지만 하나하나 세밀하게 그 존재의 이유라 할 수 있는 의미들이 작가에 의해 다시 부여된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그 세부의 동작들과 요소들이 가진 의미들을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쉽지 않은 속내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다시 작가는 이런 복잡한 현실의 그것들을 연상시키는 여러 층위의 이야기들을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면서 만들어가고 있기에 쉽지만은 않다. 더구나 그림을 둘러싼 현실과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림 안에서도 이처럼 끊임없이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꼬리를 물고 연쇄되어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고, 그 한 단면들 또한 비정합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기에 일견 부조리처럼 보여 지기도 한다. 현실의 익숙한 그것들로 다가오지만 좀처럼 알 수 없는 우리 내 실존의 어떤 상황들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의 그림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개방적인 구조를 가지지만 동시에 지극히 폐쇄적인 방식으로 자기만의 공간들을 부단히 생성하고 있는 것이고, 그 안에 들어선 순간 미로처럼 헤매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헤매는 과정 자체가 작가의 그림을 대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 그림의 맥락이 되는 것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대체로 현실로부터 가져온 것들이긴 하지만 대체로 가상공간이라 할 수 있는 영화, 인터넷 미디어 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정보들에 대한 개인적 기억들과 의미 부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하지만 이를 그림으로 연결접속(connection)하는 방식이 단순하지 않다. 이접(disjunction)과 통접(conjunction)을 넘나드는 식이라 해야 할 것 같은데 대체로 서로 간의 연결고리가 없는 것들을 자의적으로 병치시켜가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에 가깝다. 작가는 여기서 세상의 온갖 정보를 가지고 이를 (재)조립하는 매개자,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오늘날의 작가들이 처한 일반적인 입장과 태도들일 수도 있겠지만, 차혜림 작가의 경우 이런 중재자의 역할의 비중이 상당히 큰 편이다. 이러한 면모는 여느 작가들과 다르게 작가의 그림이 위치하는 시대적인 의미들과 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로 작용하기도 한다. 새롭게 무언가를 여전히 창조해야 하는 그런 오래된 작가의 모습이 아니라 정보 과잉의 시대에 미디어의 가상공간과 현실을 넘나들며 떠도는 정보를 끊임없이 해석하고, 매개하여 이를 다시 비선형적 연결로 접속시키는 오늘 날의 달라진 작가 혹은 동시대 회화의 기능 말이다. 작가에 의해 이렇게 매개되고 조립된 이미지들은 세상의 그것들과 서로 닮지 않은 상사성(similitude)의 무한한 게임으로 이어진다. 시작도 끝도 없이 다른 의미로 무한히 이어지는 이런 과정을 통해 작가 고유의 차이화 된 공간을 생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방식이 전체적으로 지금 세상의 논리와 역설적으로 닮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사건들이 부단히 생성되면서 자라나고 확장하는 지금 시대의 논리들, 동시대 회화의 어떤 양상들 말이다. 하지만 단지 이렇게 세상이 복잡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직시하는 것만이 작가 역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작가 역시도 이를 이미 알아채고 있었던 것 같고 어떤 작전의 논리가 개입된다. ● 작가의 그림 속에는 늘 삼각편대라 할 수 있는 지시자 혹은 관찰자, 동조자, 행위자가 등장하면서 이 복잡한 알고리듬으로 가득 찬 세계를 풀어 헤치려 노력한다. 그림 속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인물들은 각기 나름의 역할들이 부여되어 있다. 포착하고 기록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무언가를 지시하고. 행위 하는 사람 식으로, 아니면 그림 속의 행위에서도 이러한 역할들이 설정되어 있는데, 땅을 캐내고 녹음을 하고, 기록을 하고, 사진을 찍고, 촬영하는 등의 역할들이 그런 것들이다. 작가 자신의 세계 내에서의 다양한 역할들이고, 분신들 같은 존재들인 셈이다. 그렇기에 그림 속에 표현된 인물들의 미세한 행위나 태도들이 중요해진다. 그런 면에서 이들 각각은 나름대로 세상과 사회라는 복잡다단한 구조 속에서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는 작인들(agent)들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세상에 대한 다중적인 관계들을 대행해주는 역할일수도 있겠다. 작가의 복화술에 의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요소들인 것이다. 하지만 각기 다른 역할들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얼마간의 지향성(directional)은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지향성 안테나나 마이크의 기능 같은 것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림에서 종종 등장하는 운석 사냥꾼이나 땅을 파는, 혹은 벽을 넘는 사람의 행위들이 그런 것들일 것이다. 미지의 세계로 끊임없이 파고 들어가려 하는 이러한 역할이야 말로 작가가 세상에 대해 던지는 의문들이자 호기심들 같은 것들일 것이다. 마치 생은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작가는 부단히 현실 속에서 그 현실 저편의 것들을 향해 이동(transfer)하려 한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에서 '이동, 전환(transfer)'는 의미심장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벽들이나 창문들은 그런 면에서 원더월(wonder wall), 이를테면 다른 세계로 넘나들 수 있는 통로들로 기능한다. 벽은 닫혀있는 구조를 이루지만 동시에 열려있는 가능성으로도 역할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학적 수식들이나 쉼표, 마침표 등도 이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게 이편에서 저편으로, 다시 꼬리를 문 또 저편에서 또 다른 이편으로의 끊임없는 이동을 지시하는 것이다. 때로는 어느 한 공간 속에서 머물기도 하지만 그림 속의 행위자들의 역할 수행과 이미지, 기호가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서 부단히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는 이와 같이 의미화 된 작동을 수행하는 다수의 단서들이 도처에 숨어 있다. 앞서 말한 행위자들 말이다. 지금 당장에는 알 수 없지만 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자리하기에 작가의 그림은 동시에 부단히 열려있는 풍부한 텍스트로 작용한다. 그림 읽기의 긴장감을 부여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림 속 낯선 공간들이 그런 것처럼 이들 단서들도 그 안에서의 열린 가능성으로 의뭉스럽게 자리하면서 또 다른 어떤 공간으로 부단히 전환하라고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들 이동이 지시하는 궁극의 대상이란 자리하지 않는다. 다만 그 방향성만을 지시할 뿐, 그것이 어디에, 어떤 공간임을 애써 드러내지 않는다. 초현실주의의 그것처럼 현실 너머의 것들을 굳이 가시화시키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애초에 그러한 곳에 대한 실재적인 관심 같은 것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치 그러한 세계가 자리한다면 현실 속의 어느 한 켠이거나 한 개인의 내면의 세계, 작업의 공간은 아닐까라고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작업은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말하는 주름(pli)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부단히 외부로 향해 나아가지만 결국은 안으로 끊임없이 접혀지는 작용 말이다. 주름 짓는 다는 것은 이렇게 포개짐과 접힘을 반복하면서, 그러한 서로 엇갈리는 길항작용의 반복 속에서 차이와 생성의 사건을 의미화 시키는 논리이다. 유한 속에 무한이 담겨지고 다시 무한 속에 유한을 잉태하는 삶의 논리가 그런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작업 세계 또한 그렇게 다가온다. 부단히 현실 혹은 가상의 세상은 물론 그 안에서 다른 공간들을 지시하고 있지만 (마땅히 지시하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부단히 미끄러지면서. 그렇게 탈중심화 되어 가고 있는 주체와 접속된 내면의 어떤 공간으로 쉼 없이 다가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위해 많은 공간들을 넘나들면서 우회한다. 작가가 넘나들고 있는 공간들은 비단 그림 안에서의 또 다른 공간들만이 아니다. 글쓰기에서 그림으로 다시 오브제와 설치, 현실 공간을 계속해서 가로지르면서 작업 세계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그러한 이동 중인 세계의 한 단면들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서로 미로처럼 서로 꼬인 채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연결되어 있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단서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단서 속에서의 인물들의 행위, 단서들, 장면들은 그 자체로 하이퍼링크처럼 작동하여, 다시 다른 공간, 작업들로 이동시킨다. 하지만 무한을 향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쇄를 따라 또 다른 이미지들과 공간들을 계속해서 연결시키며 나아가려 하지만 결국은 유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가가 이러한 다중으로 접합된 공간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디지털의 가상공간처럼 복잡한 구조로 작동되지 않는 작업이라는 면에서 아날로그한 방법일 수밖에 없었을 뿐더러, 현실 속에서는 무한조차 유한을 통해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한을 머금고 있는 사유이고 상상이라 해도 작업 자체는 그저 그러한 유한한 국면과 단면들 일터이니 말이다. 그렇게 작가는 세상이 그런 것처럼 이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을 부단히 써내려간다. 그렇게 보자면 꽤나 수다스러운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코 직접적인 화법이 아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속내에 대해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수도자의 그것처럼 보이지 않은 세계, 사물의 이면으로 부단히 다가서려 하는 것이다. 그 부단한 과정 속에 작가의 작업이 자리한다. 아니 연동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이유로 중간 스토리(intermediate story)라는 말을 작가가 선호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계속적으로 유보되고 지연되는 이야기들, 목적지 없는 처음과 끝이 같은 여행의 경유지로부터 비롯되는 무한한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도 이를 살짝 빗대, '중간그림'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작가의 중간그림은 이처럼 정보와 이미지, 기호작용과 형상성의 그 사이에 자리하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지시하면서 미끄러진다. 그리고 다시 작가의 계열화된 또 다른 작업들이라 할 수 있는 오브제, 설치, 글쓰기의 공간 속으로 서로 맞물리고 넘나들게 하면서 차혜림식 작업 세계를 이룬다. 여러 층위의 공간들이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고 전환되면서 복수화 된 공간들이 서로 이질적으로 맞물려 있는 공간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지속되고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 작업의 쾌락 혹은 우연한 변수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발견되기도 한다. 서로 다르고 모순된 것들이 함께 이루어져 0이 되는 오일러의 공식처럼 무의미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가면서 다시 발견되는 의미들이 그런 것들일 것이다. 작가가 자처한 (재)매개자의 역할은 여기서 적극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우연하지만 구체적인 삶의 지반 속에서 마주하고, 새롭게 발견한 것들일 뿐만 아니라 이를 작업으로 재배치하는 과정 속에서 단지 의미 없는 변수들이 아니라 새롭게 의미가 부여된 상수들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상/현실 공간을 넘나드는 복잡한 공간성을 작업에 담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경우 현실의 구체적인 장소성에서 천착된 것들, 사적이고 내밀한 감수성에 의해 재배치된 공간들이기에 작업 특유의 상황논리는 물론 심미성의 차원마저 획득하게 된다. 단지 다차원의 공간이 절합(articulate)되어있기 때문에 호기심을 끄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구체적인 삶의 지반 속에서 발견되고 재배치된 공간들, 작가의 세상에 대한 사유의 단상들이 얼기설기 조립된 작업의 감성화 된 공간들이기에 관심을 끄는 것이다. ● 결국 작가에게 있어 그림은 이러한 작가적인 면모를 꽤나 잘 압축하고 있는 의미 있는 단서들이 아닌가 싶다. 글쓰기나 공간, 설치 작업의 펼치고 확장하는 방식에 비해 이를 묶어내고 접는 작업 과정에서 압축적이고 집약적인 면모들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 의미는 삶의 끝나지 않은 여행처럼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순환하지만, 작가의 그림은 관람객의 구체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면서, 앞으로 부단히 이어질 작가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한다. 멈춤은 결국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행을 위한 연결의 마디가 될 수 있는 것들이고, 그 여정에 있는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숨고르기일터이니 말이다. 결국 작가의 그림은, 또 다른 공간으로의 접속과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화면 속의 벽면이나 창문들처럼, 작가의 작업 세계 안에서 또 다르게 이어지는 새로운 세상들 그렇게 작가 자신의 내밀한 세계로 향해 있는 현실적인 접속 면들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형상들이 전하는 감각적인 즐거움 또한 함께 전하면서 말이다. ■ 민병직

Vol.20121120h | 차혜림展 / CHAHYELIM / 車惠林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