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작가 4인의 발견

강운_정채희_배석빈_정은숙展   2012_1124 ▶ 2012_1216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1124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강운展

논밭예술학교_논,밭갤러리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118번지 예술마을 헤이리 Tel. +82.31.945.2720 www.farmingisart.com www.논밭예술학교.kr

정채희展

아트스페이스 With Artist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 81 Tel. +82.31.944.2236~7 blog.naver.com/withartists

배석빈展

아트팩토리 ART FACTORY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134번지 헤이리 Tel. +82.31.957.1054 www.artfactory4u.com

정은숙展

리앤박 갤러리 Lee&Park gallery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522번지 예술마을 헤이리 Tel. +82.31.957.7521 leenparkgallery.com

『중견작가-4인의 발견』展은 2009년『9인의 발견』展을 시작으로 헤이리 내 갤러리들이 함께 추진하는 공동전시이다. ● 본 전시는 문화 전반에 파고드는 상업주의에 떠밀려 예술의 순수성이 상실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앞에 예술작업의 진정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화단의 중견작가들을 대상으로 참여갤러리들의 정체성에 맞는 작가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작가적 역량을 집중 재조명해 보고자 기획한 전시이다. ● 화단의 인기작가라는 달콤한 수식어보다는 진지한 예술철학을 바탕으로 올곧게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중견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그들의 작가적 정신과 예술 창작 열정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끝으로 우리 화단의 무게감 있는 중견작가들의 전시를 개최함으로써 관람객에게도 수준 높은 미술향수 기회를 제공하고, 동시에 문화지구 헤이리의 문화 예술적 이미지를 대내외적으로 홍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

정은숙_F-summer_도자기에 잉크_90×90cm_2012 정은숙_Figure S-75_도자기에 잉크_30×30cm_2012_부분 정은숙_Figure S-75_도자기에 잉크_30×30cm_2012_부분
정은숙_S-e4_도자기에 잉크_30×30cm_2012 정은숙_Figure O_도자기에 잉크_90×90cm_2012 정은숙_S-d25_도자기에 잉크_30×30cm_2012

인물 표현은 원시 시대부터 종교적 의미, 교화적 역할, 권위의 상징을 위하여 이어져 왔다. 이것은 정신적 세계의 표출이거나 사회적 관계를 성취하기 위한 상징적 도구로 아름답게 표현된 것이다. 인체는 자연의 일부로서 그 표현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디어아트 기술을 접목시켜 세라믹 화면에 여성을 주제로 한 인물화와 함께 화선지에 운필(運筆)을 살려 표현된 누드화가 보여질 것이다. 전통적인 흑과 백의 모노톤 기법과 더불어 다양한 색채의 반복적인 패턴은 작품의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이로 인해 작품들이 관람자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정은숙

배석빈_건너편_캔버스에 유채_162×131.5cm_2012 배석빈_등1_종이에 아크릴채색_105×75cm_2011 배석빈_확대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12

세상과 거리두기, 자아의 비평적 내려놓기 - 1. 사유의 드넓은 스펙트럼 ● 영원과 유한한 시간에 대한 묵상,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세계의 연결고리들, 사유와 실존의 상관성 또는 긴장... 배석빈이 관계하는 세계의 스펙트럼은 넓다. 관념과 일상이, 리얼리티와 상상이, 공간과 공간의 해체가 모두 이 세계에 개입한다. 문명과 교란된 문명이 공존하고, 도시와 도시에 대한 염증이 중첩된다. 그리고 분석적 지각과 상념, 무기력과 조심스러운 활력이, 우울감과 끈질긴 희망의 심리학이 수시로 교차한다. 심경의 격의 없는 고백이 있는가 하면, 우주와 존재의 근원과 현존에 대한 심오한 해석이 있다. ● 배석빈의 회화 산책은「중력」에 관한 사유에서「학교버스」같은 일상의 에피소드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그 여정은「화무십일홍」을 거쳐「카르마」연작으로 까지 이어진다. 그의 최근작들은 '알지 못 하는 세계에 관한 것들'에 다가서고 있다. 아마 초월적 차원의 추구이거나 그저 인식 너머의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향수일 수도 있다. 언젠가 2011년에 있었던『드로잉전-붙잡다』展에서. 배석빈은 자신의 세계를 일컬어 '체험하는 세계에 관한 근원적 해석'으로 함축한 바 있다. ● 배석빈의 사유(思惟)의 궤적은 베일 뒤로 스스로를 감추려는 듯, 암시적 수준의 발화(發話)를 결코 넘어서지 않으며, 자주 모호하며 열려 있다. 분명한 건 그가 정치, 이념적 상황이나 사회 부조리를 들춰내는 것만큼이나 실재와 무관한 관념적 사유에 붙박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배석빈은 어느 쪽에도 전적으로 귀속되어 있지 않다.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세계로 선뜻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자리로 선별된 세계를 호출하고 불러들인다. 그는 끊임없이, 그리고 때론 고통스럽게 자신의 구획을 실현하는, 까다롭고 예민한 경계인이며, 결코 손쉬운 가담자, 고분고분한 시민이 아니다. 그는 내부자, 수행원, 시키는 대로 하는 자, 음험한 가담자가 아니다. 그는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다가서지 않는다. ● 배석빈의 조형언어도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소묘와 색채를 넘나들고, 이미지와 그것의 거부 사이를 오간다. 형태는 현저하게 축약되고, 단순화된다. 굵고 뚜렷한 선이 형태에 윤곽을 제공하고, 흘러내리는 안료는 그 형태에 반투명한 톤을 부여한다. 형태는 형상적이기도 하고 추상적이기도 하다. 1993년의「바깥세상」연작이나「필운동 집, 1993」,「안양교도소, 1993」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들 작품에는 단 하나의 퍼스펙티브가 존재하며, 이야기는 훨씬 더 서술적이다. 1997년 이후 점차 경직된 직선들은 자유분방하게 굽거나 뒤틀리고 흐트러진 톤에 의해 부분적으로 지워지거나 해체된다. 그리고 그 위로 제스처, 몸짓, 곧 행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흘러내린 물감 위로, 역력히 의도적인 터치들이 중첩된다. 격한 표현과 내밀한 절제가 중층구조를 구성한다. 기하학적 질서와 표현적 아노미, 톤과 선, 원색과 모노크롬이 공존한다. ● 과정이 진행될수록 이 세계는 열린다. 의미는 확정되어 굳어지는 대신 더 개방된다. 판단의 기준은 모노크롬인가 색채인가가 아니다. 안료의 해체적 흘러내리기냐 형태의 투시도적 엄밀성이냐도 핵심사안일 수는 없다. 고전주의적인가 낭만주의적인가도 아니고, 진실인가 거짓인가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체 내의 일체의 요소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개성, 곧 '그 자체성'이다. 진정한 예술적 개성의 특성인, 그보다 더 작은 요인들로 분해되거나 미분되지 않는 궁극의 존재성이다. 바로 그것에 의해 예술의 정신적 가치, 곧 이성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실리적인 여타의 인간 활동과는 다른 예술의 가치가 확보되는 개성!

배석빈_카르마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12 배석빈_중력_캔버스에 유채_162×131.5cm_2012 배석빈_화산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12

2. 세상과의 비평적 마주하기 ● 하지만, 2008년 '생각의 무게'라는 주제로 가졌던 전시에 자신이 썼던 것처럼, 배석빈은 '없는 상태'로 나아가고자 한다. '인식의 주체가 제거되는' 곳, '내가 소멸되는' 그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가장 우선 소멸되어야 할 나의 차원은 감각이다. 그리고 보는 이에게 즐거움과 활기와 재미를 제공하는 회화, 매혹적인 감상과 시선을 유인하는 자극에 바쳐진 회화를 내려놓는 것이다. 비만한 자아, 감각과 표현의 향연은 배석빈에게는 퇴폐요 향락이다. 피티림 소로킨(1889~1968)을 따르면, 그 막바지는 '이윤을 남기려는 의도'와 '후폐한 상업주의'다. ● 그러므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배석빈의 회화는 자신에게 부단히 등 돌리는 그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그 자신만의 세계라고 말이다. 여기서 형태는 현저하게 축약되고, 단순화됨으로써만 구체화된다. 이미지는 그 부단한 지워짐에 의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왜 지워짐인가? 그가 회화적으로 시도한 사유의 모델들은 대체적으로 '현재의 경험과 상식, 소통이 가능한 보편적이고 낮은 차원에서 구체화하는 데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기 뒤에 자주 지우기가 따라붙는 이유이고, 명료함이 그것을 교란하는 선의 난맥으로 덮이곤 하는 까닭이다. ● 배석빈의 2006년 작「미술전문가를 위한 그림」은 그에게 '미술전문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이 작품은 흰 종이에 무색의 엠보싱으로 쓰여지고, 위 아래와 좌우가 이중으로 뒤집어진 것으로, 마치 '읽기'가 아니라, 오히려 '읽기를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과의 비평적 마주하기'라는 배석빈의 접근이 잘 반영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 배석빈은 어느 면으로 보나 완연한 중견의 작가다. 학문적 여정과 이후의 경력, 부단한 창작과 발표, 연배 등에서 부단히 그렇게 해왔다. 예컨대 지난 1992년 이후 그는 내용과 그 언어에 대한 지적이고 긴밀한 탐사와 관련된, 매우 일관성 있는 열두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사회의 통상적이고 관례화된 여정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만을 채택해 고유한 방법론을 추구해 왔다. 거기엔 우선 직업적인 화가라는 제도적 범주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거나,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소위 직업적인 평론을 의뢰하지 않으며 메이저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들락거리지 않는 것이 포함되었다. 전시도록은 간략한 브로셔나 우편엽서로 대체되었다. 자신의 행보에 대한 과장과 포장이 당연시되고, 화려한 카탈로그가 성공예감이 되는 시대에 그는 그런 욕망의 도상학과는 무관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 배석빈에게 화가의 소임이란 세상을 미화하거나 자신의 주체를 과장해 도덕적 교훈을 전하는 미의 사제가 되는 게 결코 아니다. 그것은 반대로 자아를 현저히 줄인 채 기꺼이 세계로 조금씩 다가서는 것이다. ■ 심상용

정채희_緣, 2012-1_옻칠 기법_100×120cm_2012 정채희_緣, 2008-10_옻칠 기법_100×120cm_2008 정채희_緣, 2008-9_옻칠 기법_100×120cm_2008

정채희-자연과의 교감과 조화를 꿈꾸는 옻칠과 자개 ● 단호하게 어두운, 깊은 심연 같은 검은 옻칠이 표면을 덮고 있다. 까만 하늘같고 어두운 밤 같고 아찔한 바다 속이나 캄캄한 지하의 갱도 같은 것이다. 어둠과 검정은 불임과 절멸의 세계, 비가시적 세계다. 외부를 판독하던 시선들이 이내 사라진 자리에 심상의 이미지가 뇌와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순간이다. 역설적이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이 단호한 어둠과 검정이 오히려 자유로운 연상과 상상력을 가능케 한다. 작가 역시 그러했으리라. 돌이켜보면 선사시대인들은 어두운 동굴 벽을 맞닥뜨리면서 비로소 기억의 이미지, 보고 싶은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었다. 재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상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기억의 이미지를 뽑아낸다. 신기한 이미지 생성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마음에서, 정신에서 보았던 것들, 보고 싶었던 것들이 자라나는 놀라운 체험! 그것이 미술의 시작이다. ● 나로서는 이 검정 옻칠로 덮인 신비스런 화면 안에서 오히려 더 많은 상상의 여지를 펼친다. 작가 또한 그렇게 연상되고 부풀어 오르는 여러 이미지들을 올려놓았다. 붙여놓았다. 물감이나 붓질을 대신해 자개와 계란 껍질이 옷칠과 함께 숨을 쉰다. 옷칠이나 자개, 계란껍질 또한 자연이자 생명체며 인공의 것과는 다른 매력적인 질감과 물성을 선사해주는 재료들이다. 그러니까 자개니 옻칠은 천연의 자연에서 추출한 것들이자 자연 그대로의 생명체들이다. 그것들은 생명을 지닌 존재들이다. 아득한 시간과 세월, 역사의 일상을 기억하고 간직한 나무와 조개, 알들이 이룬 물성과 무늬, 색상과 빛들이 그려놓은, 만들어놓은 그림이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의 존재가 가늠하기 어려운 자연의 힘이자 본성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얻고자 하고 배우고자 하는, 그러나 가닿을 수 없는 신비로움의 정체다. ● (@-1)촉각적 화면을 돌올하게 일으켜 세워주는 이 저부조회화는 오브제회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만이 만들어내는 아름답고 신비스런 색상과 질감이 자아내는 판타지. 작가의 자개나 옻칠은 단순한 전통기법의 응용이나 번안에 머물기 보다는 그러한 재료 자체에서 연유하는 자연과 생명의 연관성 내지는 그 교감을 자신의 내적인 정서와 연결시켜 절실한 이미지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써내려가고 있다는 지점에서 반짝인다. 재료와 자신의 존재를 부단히 동화시키고 녹여나가는 연금술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그 재료들이 한결같이 완벽한 생명체들인데 그것들을 해체하고 파편화시켜 다시 무엇인가 새로운 존재로 환생시킨다는 점에서 사뭇 윤회적이랄까, 순환론적인 구도가 읽혀진다는 것이다. 다분히 연기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자개나 계란, 옷칠은 해와 달, 산과 나무, 인간과 새, 사과와 호박 등으로 거듭 나고 반복해서 출몰한다. 생명의 영원한 순환을 연상시킨다. 하나이면서 다른 것이고 무수한 것이자 결국 하나인 것이다. 생명은 그렇게 연루되고 얽혀있다. 더불어 오랜 시간의 노동에 의해서, 아울러 재료들을 붙이고 안료가 칠해지고 그것을 갈아내고 다시 가다듬어지는 여러 과정이 쌓고 쌓여서 깊어지는 변화의 여정 속에서 이미지는 문득 살아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우연이자 시간과 인간의 힘과 의지를 넘어서는 자연의 부름에 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같은 맥락에서 재료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위 ◁ 정채희_緣, 2008-13_옻칠 기법_120×80cm_2008 중간 ◁ 정채희_緣, 2008-11_옻칠 기법_80×120cm_2008 아래 ◁ 정채희_작업과정 ▷ 정채희_緣, 2012-2_옻칠 기법_114×35.5cm_2012

작가의 작업은 새로운 껍질, 기이한 피부로 드러난다. 압도한다. 물감이나 붓질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효과이자 느낌이다. 자연이면서 극도의 인공성에 의해 마감된 매끈한 표면이면서 동시에 가늠할 수 없는 심리적 구멍을 내고 있는 옻칠의 검정 바탕 위로 자개와 계란 껍질들이 잘게 부서져 이미지를 재현한다. 본래의 형체와 꼴에서 벗어나 해체되고 파편화되거나 조각조각으생명체들과 함께 영성의 대화를 통해 신비스런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자전적인 서사를 풍경화로 재현한다. 그것은 상상된 자연풍경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자연, 뭇생명들이 몸을 섞는 대칭적 사유가 펼쳐지는 장이다. 로 찢겨진 것들이 작가의 손길에 의해 불려나와 자연과 생명체를 떠올려준다.작가는 그 그런 면에서 그것은 산수화를 닮았다. 산수화란 실제 하는 자연풍경을 모티브로 하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 상상되어진 자연을 구현한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한 어떤 경지를 간추려 놓은 것이다. 이상적인 자연이자 그 자연과 교감하고 그 내부를 엿본 정신의 자락을 펼쳐 놓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풍경 역시 그러한 상상되어진 자연이자 자연과 교감되어 남겨진, 응고된 결정적인 이미지들이다. 부드러운 능선과 저 멀리 산봉우리가 얼핏 드러나고 짙은 청색과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짙은 산과 대지 사이로 풀과 나무, 잎사귀와 사람의 형상이 몸을 내미는 장면이다. 혹은 넓게 펼쳐진 대지에 봉분 같은 산봉우리, 다양한 사람들의 몸을 떠올리는 유선형의 형태가 융기한 장면도 있다. 대지에서 부풀어 오른 이 형태들은 다분히 여성적 신체와 연관된 감수성 및 에코페미니즘적 시선도 엿보게 하는 면이다. 더러 호박이나 사과의 피부 위를 자개와 계란껍질로 덮어나간 입체물도 있다. 자연, 식물 생명체에 기생해 새로운 껍질로 환생하고 있는 또 다른 낯선 생명체, 생명의 모방이다. 생각해보면 생명현상을 모방하는 것이 모든 예술활동의 근원이다. 석고로 떠낸 사과들의 피부에 색이 올라가고 자잘하게 균열이 간 계란껍질이 부착되어 성형되어 있다. 차가운 물질에 생명이 불어 넣어졌다. 한 알의 단호한 생명, 자연위에 무수한 시간의 흔적과 기억의 흔적이 엉겨있다. 자연과 함께 나누는 내밀한 독백이나 정서의 편린이 서정적으로 수놓아져 있다는 인상이다. 이전에도 여전한 주제였지만 근작에는 이러한 관심의 농도가 무척 진해졌다. 그것은 작가의 삶의 환경에 의한 것으로서 이른바 자연과의 친연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자연과의 교감인 동시에 자연적 재료와의 교감이 그녀의 작업을 지탱시키는 척추다. 사실 작업이란 주제나 의도와 함께 특정 재료에 대한 이해와 체득, 교감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전후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문제다. 아울러 그 같은 교감 내지 정서적 교호를 관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도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우리는 이 작업 앞에서 작가가 신비스런 자연과 나누었고 꿈꾸고 대화하며 또한 상상했던 그 모든 것들을 조용히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 ■ 박영택

강운_3-26.물위를긋다_종이에 담채_140×70cm_2009 강운_3-16.물위를긋다_종이에 담채_101×68cm_2011
강운_4-8.공기와 꿈_캔버스에 한지_182×227_2012 강운_4-9.공기와 꿈_캔버스에 한지_182×227_2012 강운_4-4.공기와 꿈_캔버스에 한지_227×182cm_2011

강운의 작업에 대한 단상 ● 작가 강운은 딱 비엔날레 세대다. 광주에서 작업하면서도 서울을 대등한 지역성으로 인식할 수 있었고, 지방에서 작업하면서도 국제적인 조류에 밝으며, 동시대의 다국적 작가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러한 점들은 그의 선배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문화적 환경이고, 어찌 보면 그는 이런 혜택을 받은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세대는 '포스트 89'로 지칭되는 역사적인 전환들, 탈냉전, 탈이데올로기, 글로벌리즘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이다. 비록 근 20여 년이나 된 비엔날레가 어쩔 수 없이 퇴행적 진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이들은 서울을 거치지 않고도 지역과 글로벌의 연결지점들을 다양한 층위에서, 다이렉트로 고민할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한 대인시장은 인사동보다 재미있었고 더 리얼하게 국제적이었다. 비엔날레가 만든 의미 있는 풍경들이고 긍정적인 분위기들이다. 강운이 접한 이러한 환경들, 지역성과 국제성을 동시에 점검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잉태된 그의 작업들은 그래서인지 선배들보다 밝고 힘차고 그 무엇에도 주눅 들지 않는 자신만의 당당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아니까 따라하거나 휩쓸리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자신 있게 자기만의 색깔을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다. ● 얼핏 보면 구름을 그린 그의 그림들은 너무 슈퍼피셜하거나 슈퍼플랫한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뒤돌아서면... 꼭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된다. 황공망이 어느 글에선가 말한 '화중풍수'가 그 속에 있어서다. 말 그대로 구름을 가지고 하늘 속에 풍수를 배치해 놓은 것이다. '기의 이동으로 인해 생긴 것이 바람이요, 기가 응집하여 형체를 이룬 것이 물이다.' 나는 미술사학자도 아니고 더구나 옛 선인들의 글귀를 인용하길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의 구름을 처음 본 10여 년 전부터 품어온 생각이다. 그 경험 이후로 나는 황공망의 글과 그림들을 다시 찾아서 본적이 있는데 강운의 구름보다 탁하고 무겁고 작위적이어서, 황공망이 얘기한 '화중풍수'는 적어도 황공망 자신보다도 강운의 작업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씩 나는 강운의 구름 앞에서 한없이 정갈해지고 비워지는 나를 느낀다. ● '한 번의 붓질로 우주를 담고, 만 번의 붓질로 자연을 품는다.'는 '석도화론'은 말도 안되는 상상력의 점핑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붓을 한번이라도 잡아보고 준을 한번이라도 쳐본 동양의 작가들에게는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 논리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능히 그럴 수도 있다. 더군다나 그것이 소승이건 대승이건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모습, '하화중생 상구보리(아래로는 중생을 구원하고, 위로는 도를 구한다)'와 연결될 때 화가는 수도승과 한 점 다름이 없다. 석도 자신도 승려였다. 일획화를 시도한 강운의 최근작에서 석도를 보았고, 그의 골상이 나한과 닮았음을 느꼈다. '물위를 긋는' 일획화와, 풍수를 연상시키는 구름은 '상구보리 하화중생'과 댓귀다. 풍수가 결국 현세의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중생의 삶과 닿아있다면, 일획은 현실을 벗어나려는 해탈과 연결된다. 그렇게 치면 강운은 이미 부처의 상좌 정도는 될 것이다. 전 세계의 억센 비엔날레 작가들이 다 모인 광주에서, 그의 그림은 그 속에서 피어오른 연꽃처럼 더욱 담백하고 청아했다. 나이가 좀 더 들면 그와 나는 같은 암자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 윤재갑

Vol.20121124a | 중견작가 4인의 발견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