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804f | 김도경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21_수요일_05: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6:0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11 (관훈동 195번지) Tel. +82.(0)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시간의 흐름에 빠르고 느림이 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일상에서, 시간의 빠르기에 대한 인지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개인만이 인지하는 속도계가 운영되고 있지 않을까란 상상을 해봅니다. 주어진 인생의 시간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사실적 시간의 흐름이 공평히 적용되는 것에 보면, 개인의 인지에 따라 시간의 빠르기는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지로 인한 사유와 행동의 괴리로, 흘러가는 시간이 가끔 무섭기도 하고, 때로는 시간이 마냥 흘러서 수동적인 행위의 종착됨으로 인해 인지를 외면하고자 할 때도 있습니다. ● 객관적으로 보여지는 시간의 틀 안에 시간의 빠르기에 대한 인지를 주관적으로 기록하였고, 빠르게 혹은 느리게 인식되었던 물리적 복합체는 마치 실타래처럼 엉키어 표현되어지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여러 사람들의 걸음의 관찰과 기록은 그들이 어떠한 시간의 인지를 한 것인지에 대하여 상상하게 작업하였습니다. ● 시간의 흐름, 흐름에 빠르기에 관한 인지. 인지함으로써, 저에게 요즘, 작업이 소중하고, 절실하게 생각됩니다. 여기(2012.현재,서울), 연필을 잡고, 제가 지금 서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그리고 만들며 이야기하려 합니다. ■ 김도경
김도경의 작업-삶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지점들, 시간과 일상, 미로와 퍼즐 ● 흔히 예술을 열린 개념이라고 한다. 개념이 열린 탓에 예술에 대한 정의도 분분하다. 이처럼 열린 개념이며 분분한 정의를 뒤로 하고 근원적인 물음을 물어볼 수가 있겠다. 일종의 현상학적 에포케에 해당하는 의식의 영도지점에서 예술의 정의를 재설정하고 재정립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선입견의 지평 밖에서 예술은 무엇일 수 있는가. 아마도 예술의 근원, 예술의 원형, 예술의 본질로 부를 만한 무엇이 될 터인데(의식의 영도 지점에서 다시금 원형이며 본질을 호출한다는 아이러니!), 저마다 주어진 삶의 시간을 낱낱이 헤아리고 기록하고 반추하는 자기 강박적 행위가 여기에 부합할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삶과 구분되지 않는 예술, 삶으로부터 길어 올린 예술, 예술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삶에 천착한 예술이며 행위가 가능해질 것이다. 김도경이 시간이란 주제에 천착하고 시간이란 주제를 공 굴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그리고 시간은 일상과 같이 간다. 시간이 일상 속으로 흐르는 것. 그리고 알다시피 일상은 반복되면서 반복되지가 않는다. 외관상 똑 같은 시간이며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사실 반복되는 시간이며 일상은 없다. 물은 흐른다. 그리고 시간도 흐른다. 물은 흐르는 탓에 똑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시간 역시 흐르는 탓에 똑 같은 시간을 두 번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반복되는(사실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뿐인) 일상과 반복되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표현으로 붙잡고 아우를 수가 있는가. 바로 차이를 내포한 반복으로 붙잡고 아우를 수가 있다. 김도경이 시간이란 주제(그리고 일상이란 부제)를 표현으로 붙잡고 아우르는 방법이다.
작가의 일상은 작업실에서 시작된다. 작업실은 작가의 둥지이며 작업의 산실이다. 작가는 이런 작업실 공간에 놓인 테이블이며 구조물 그대로 사진으로 찍고 에칭으로 옮겼다. 흡사 일기 내지 일지와도 같은 기록된 사진을 높낮이에 차이를 두어 쌓는 것으로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차이를 내포한 반복이라는 일상의 꼴이며 됨됨이를 상형했다. 사진의 높낮이는 왜 어떻게 다른가. 사진의 높낮이가 다른 근거는 무엇인가. 그날그날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서 높낮이가 결정되고 달라진다. 일종의 바이오그래프로 볼 수가 있겠다. 일상은 변함이 없지만(적어도 외관상 그렇게 보이지만) 일상이 작가와 만나지면서 변질된다. 일상의 지평과 작가의 지평, 객관의 지평과 주관의 지평이 상호 융합되면서 반복되는 일상 속에 차이를 만들어낸다. ● 그리고 작가는 매일같이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기보다는(이를테면 문화생활로 자리 잡은 한 경우? 그래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볼 수 있는 한 경우?) 그 행위가 일상적 행위이고, 그런 탓에 일상을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마시고 남은 컵을 주물로 떠냈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래서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무쇠처럼 견고한 기념비적 인상으로 일상을 기념하고 싶었다(미라나 조상으로 덧없는 존재에 영원성의 아우라를 부여한 이집트의 파라오까지는 아니더라도). ● 그런가하면 작가는 각각 합판과 철판과 직물을 소재로 또 다른 바이오그래프를 형상화한다. 평면 형태로 제안된 합판과 철판과 직물의 표면에는 자잘하고 섬세한 모눈들이 모판처럼 각인되어져 있는데, 아마도 모눈으로 나타난 반복패턴이 반복적인 일상을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모눈 위에 그날그날의 감정을 표기해 작가의 감정 상태를 유추해볼 수 있게 했다. 바이오그래프이면서 일종의 감성지도랄 수 있겠다. 감성지수를 표기하고 기록한 것인 만큼, 각각 합판과 철판 그리고 직물로 나타난 소재 고유의 물성이나 질료적 성질 역시 이런 감성의 질감이며 성분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소재 저마다의 재질에 따라 안온한 감정이나(합판), 차갑고 명징한 논리(철판), 그리고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우호적인 기분(직물)과 같은 그날그날의 감정과 기분의 질감을 질료를 빌려 표현하고 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래프와는 또 다른 감성지표로 아우를 수가 있을 터이다. ● 그리고 바이오그래프는 연필 드로잉을 실크스크린으로 옮긴 일련의 판화로 변주되고 심화된다. 각각 드로잉한 선의 강약에, 점차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음영에, 그리고 무채색과 유채색의 대비가 만들어내는 섬세하고 미묘한 차이에 감정의 기복과 변화를 담았다. 내친 김에 여기서 무채색을 무의식에 대한 그리고 유채색을 의식에 대한 상징 색으로 볼 수가 있겠고, 따라서 유채색과 무채색의 대비를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을 표상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사사로운 감정이나 기분의 됨됨이가 꼭 그럴 것이다(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과 간섭). 이렇듯 작가는 예컨대 기쁠 때와 슬플 때 그리고 우울할 때와 같은 그날그날의 감정과 기분을 기록하고 표기한 일종의 생리지도 내지 바이오그래피 내지 바이오 맵을 예시해준다. ● 이런 일련의 생활감정은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며, 그 이면에는 일상과 더불어 흐르는 시간에 대한 반성 내지 강박이 놓여 있다. 이를테면 실타래를 풀고 감기를 반복해 보여주는 영상작업에서 일상은 각각 감기와 풀기로 상징되는 긴장과 이완이 연속되면서 순환하는 반복으로 이뤄진다(일상의 기복? 일상의 주기?). 여기에 실타래 자체가 갖는 시간과 기다림과 흐름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더해져 일상의 의미를 강화한다. 이를테면 흐르는 시간과 기다리는 일상과 같은 의미를 강조하는 것(여기서 불현듯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이처럼 작가의 작업의 밑바닥에는 시간에 대한 반성과 일상에 대한 강박적 기록이 깔려있다. 그 반성과 기록이 강박적인 것은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려는 모종의 기획이 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 존재확인이라는 프로젝트를 감행하게 해주는 과정이며 방편이랄 수 있겠다. 시간을 기록하고 일상을 기록하는 일련의 작업들과 같으면서 다른, 그렇게 존재론적 자의식이며 문제의식을 보다 직접적으로(아님 우회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경우가 발자국(엄밀하게는 신발자국)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이다. ● 사람들이 바닥에 깔린 종이를 밟고 지나간다(사실은 발자국을 종이에 프린트해 재구성한 것). 그렇게 밟고 지나가면서 종이에 발자국을 남긴다. 그 자국을 보면 신발 밑창에 Go라는 영문자가 깨알처럼 쓰여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Go라는 영문자가 의미하는 것처럼 아무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하튼 삶은 진행되고 있는 것이 맞아. 더욱이 보다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이런 자기 목적적이거나 목적 지향적 삶이 어쩌면 증명되지 않은 막연한 신념이거나 자기최면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 좀 거창하게는 진화론이나 발전사관, 그리고 최소한 자기 목적적인 삶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게 하면서(삶에 목적이 없을 수도 있다?) 일상의 기반을 흔들어놓는다. ● 무슨 말이냐 하면 Go라는 영문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람들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발자국이 재구성된 꼴은 오리무중이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사실은 어쩌면 오리무중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재구성된 꼴이 미로를 연상시키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유독 필자에게만 그렇게 읽히는가?). 어쩌면 삶은 목적이 없는 오리무중의 미로일지도 모른다. 너무 비관적인가. 때론 그저 살아지는 것이 더 삶다울 수도 있고 삶이라는 진실에 더 근접한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삶에는 해답도 해법도 없지가 않은가. ● 그리고 작가는 같은 개념을 적용해 다른 작업으로 변주한다. 그 표면에 발자국이 프린트된 정사각형으로 자른 작은 나무토막을 소재로 한 작업인데, 사람들은 발자국이 프린트된 나무토막을 무슨 레고나 퍼즐처럼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짜 맞추고 재구성해볼 수가 있다. 그렇게 나무토막(사실은 발자국)을 짜 맞추면서 저마다 살아온 삶의 족적을 반추해볼 수가 있고, 살아갈 삶의 족적을 예비하고 연습해볼 수가 있다. 관객참여를 유도해 작업의 운신을 넓힌 이 작업은 삶의 양가성을 드러낸다. 즉 잘 짜인 퍼즐처럼 삶은 기계적이고 필연적인 계기에 의해 살아진다. 그리고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퍼즐처럼 삶은 우연한 계기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퍼즐은 필연을 증명하기도 하고 우연을 증언하기도 한다. 그래서 퍼즐은 무슨 삶이라는 이름의 주사위 같기도 하다(주사위도 퍼즐도 미로도 삶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상징의 지점들일 것). ● 다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시간을 헤아린다는 처음의 문제제기로 돌아가 보자. 그 행위는 일종의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강박적인 행위란 점에서 정체성 문제와 통하고 존재의 증명 문제와도 통한다. 이를테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이 말은 사실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인식될 수는 있어도 인식과 동시에 증명될 수는 없다. 인식과 증명이 어긋나는 것. 말하자면 지금 여기에 있다는 인식된 사실은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그곳이라는 과거시제를 통해서만 증명될 수가 있다(인식된 사실이라는 과거형의 기술이 암시하듯). 이처럼 그때 그곳으로 변질된 한에서만 지금 여기를 증명할 수가 있다는 점에 존재의 아이러니가 있고, 그 자체 예술이 아이러니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여하튼 지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가고 있는 것이 맞다면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혹 사실은 되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되돌려진 지점은 시점과 같은가, 아님 다른가. 각각 시간과 일상, 미로와 퍼즐을 매개로 한 김도경의 작업은 이런, 그 자체 존재론적인 문제의식에 결부된 인식론적인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 고충환
'Would it exist slow and fast in the passing of time?' In everyday life, perception about speed of passing of time seems to be flexible depending on the situation. It is thought that the invisible personal speedometer would be operated by each individual. Although given the time in a life might be different, actual passing of time objectively same to every single person, however ,with the perception of individual, the speed might be different. With the gap between thought and practice caused by the perception, 'passing of time' sometimes comes to me as a fear, and also expected to just spend and be finally finished passively neglecting the perception. ● The perception was subjectively recorded and shown in the objective frame. The existing objects which are recognized fast or slow become more and more complex. Also, observation and recording of other people's physical movement gave me a chance to inference and expect the person's perception with the speed of time. ● The passing of time. and perception of it. With this perception, doing 'My Working' became more precious and desperately these days. Here (2012,Present, Seoul), holding a pencil, I am trying to tell you my story with drawings and sculptures. ■ KIMDOKYOUNG
Vol.20121125c | 김도경展 / KIMDOKYOUNG / 金都逕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