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Modern Shamanistic City Maps

듀크 최展 / Duke's Choi / drawing   2013_0112 ▶︎ 2013_0124

듀크 최_Planetary Energy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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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118_금요일_05:00pm

Opening reception 30~60분마다 알루미늄 악기로 연주되는 실험적인 사운드와 2012년 몽골과 한국에서 작업하며 영감을 받았던 카르그라 라고 하는 독특한 창법과 노래가 공연됩니다.

관람시간 / 02:00pm~06:00pm

갤러리 두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2가 14-59번지 2층(문래우체국 옆) Tel. +82.10.4940.3035 cafe.naver.com/gallerydoodle

현대적 노마드(nomad), 듀크 최 ● (노마드 nomad: '유목민', '유랑자'의 뜻으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se)가 언급하면서 현대 철학적 개념을 갖게 된 용어. 노마디즘은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일정한 자리에 정착하지 않고 옮겨 다니며 창조적 삶을 영위하는 일체의 방식을 말한다. 이는 현대사회의 여러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우리들 대부분이 각자를 정의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물론 누구나가 항상 '나는 ○○이다'라고 떠들고 다니지는 않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물건을 갖고 있기 마련이고 혹은 그러한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지갑 속에 있는 명함, 좋아하는 취향의 소품들, 누구의 엄마, 아빠, 누구의 아내, 남편, 직업 등등. 그 중에서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자기 존재의 근간을 정의해 주는 중요한 아이덴티티(정체성)이다. 다른 정체성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인 반면, 성별이나 혈통, 태어난 국가는 선택권 없이 주어지는 정체성이다.

듀크 최_Growth 1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그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지금 갤러리 두들에서 전시하고 있는 듀크 최(Duke Choi) 말이다. 예술가의 작품에서는 이러저러한 정체성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드러나게 마련인데, 듀크의 작품에서, 그리고 그의 행보에서 드러나는 정체성은 다중적이거나 혹은 유동적이다. 그가 남성이고 예술가라는 것에 대해서는 일단 차치하기로 하자. 그가 작품을 통해, 그리고 그의 삶을 통해 고민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듀크 최_Growth 2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미국에서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재미교포인 그는 스스로 '한국계 미국인'이자,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니다'라고 했다. 북한 출신인 부모님을 두고 있는 그는 미국에서 크게 형성된 한국인 커뮤니티와도 소통의 단절을 겪었던 듯하다. 완벽한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 커뮤니티에도 속하지 못한 그는 스스로의 위치를 제3자로 두고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회를 객관적인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그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런 그가 오히려 주목하게 된 것은 한국인이 몽골인과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인 출신이면서도 한국인일 수조차 없던 그가 더 근원적인 뿌리에 천착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기 정체성의 근원을 더욱 깊이 파고듦으로서 스스로를 정의함과 동시에 자신을 자유로운 상태로 두려함일 것이다. 스스로 노마드(nomad)가 될 것을 자처한 그가 한국을 첫 유목지로 택했다. 그 옛날의 노마드가 가축을 먹일 목초지를 찾아 유랑했다면,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 유랑을 시작한 것이다.

듀크 최_Growth 3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그의 개인사에 대해 이렇게 장황설을 늘어놓는 이유는, 그의 이러한 배경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언뜻 보아 동양화, 그 중에서도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그의 작품은 동양화인가? 이번 전시의 작품들을 한국에 와서 접하게 된 전통한지와 먹으로 그렸지만, 그는 그것들이 전통적인 동양화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칼아츠(CalArts)를 졸업하고 LA에서 도시풍경을 전통적인 서양화풍으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직선과 무채색의 도시풍경에 싫증이 났고, 그는 그 형태를 해체하여 화면에 잔뜩 펼치기 시작했다. 복잡한 선들이 어지럽게 휘감기며 펼쳐져 퍼져나가고 그 안에 섬세하게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사람인 듯, 풍경인 듯, 혹은 도심 속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불화(佛畵) 같기도 하고 부적을 여러 장 연이은 듯 보이기도 한다.

듀크 최_The Eagle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그러나 또한 그의 그림은 그 기원을 '불교'에도 '주술신앙'에도 두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산과 강이 있는 '자연 풍경'도, '도시 풍경'도 아니다. 그것은 '자연(nature)'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자연'이란 도시와 대치되는 자연이 아니다. 도시도 아니다. 그 모든 것, 인간이 사는 세상을 말한다. 그는 그의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그의 그림을 '유심론(唯心論 spiritualism)' (유심론 唯心論 spritualism: 유물론(唯物論)에 대비되며, 이 세상의 궁극적 존재를 비물질적인 정신으로 보고, 그로부터 생명을 가정하며 유기적 자연관을 표방하는 철학적 입장.)적이라고 한다.

듀크 최_Third Eye_한지에 잉크_70×136cm_2012

그는 사물을 보고난 후, 그 사물의 이미지를 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잭슨 폴록의 오토마티즘적 드로잉과 같은 무의식적 발현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스스로 무엇을 그리는지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는 동시에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것들은 그의 정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미지는 사람도 될 수 있고, 부처도 될 수 있으며 그가 다니는 동네의 길도 될 수 있고, 도시도, 숲도 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명확히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자연'이며 그의 정신으로부터 나온다. 화폭에 붓이 처음으로 닿는 순간, 그의 정신으로부터 실타래처럼 뽑아져 나와 자라나는 선들은 하나의 축이 되고 그 축을 중심으로 어느 한 쪽에 이미지가 부여되면 다른 쪽에도 그에 상응하는 이미지가 자리하게 된다. 그의 선들은 유기적으로 얽히고 자라나면서 작품 전체에 살아 움직이듯 퍼져나가며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언뜻 정신없어 보이고, 무의식적 발현처럼 보이는 그의 선적 드로잉 회화가,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어떤 질서에 의해 전체와 부분이 유기적으로 통제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듀크 최_Totems_한지에 잉크_70×170cm_2012

그의 노마디즘은 회화에만 천착하지도 않는다.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자신의 행보에서까지 그의 삶 전체가 노마디즘을 표현해내고 있다. 그에게 물었다. 한국에 얼마나 머무를 거냐고. 약 10년쯤? 그리고 그 다음엔? 몽골로 간단다. 그가 자신의 유랑에서 무엇을 찾게 될지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히 아무것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 것도 확신할 수는 없다. 유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근원을 찾아 유랑하며 자유로운 정신과 창조적인 삶을 영위하는 그는, 현대가 낳은 전형적인 노마드일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고 이해함으로써 근원에 대한 끝 모를 노스탤지어를 가지고 자유롭게 유랑하는 그의 정신에 우리 자신을 대입시켜 그 아름다운 여행에 조금이나마 동참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늘 묶여있어서 떠나고 싶다고 갈망하는 우리 현대인들이 그의 예술여정에 동참함으로써 그가 느끼는 자유를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2013년 1월 양평에서) ■ 이승신

Vol.20130112c | 듀크 최展 / Duke's Choi / 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