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_복제된 형상구조 속 전복의 미학

관용展 / Guan Yong / 管勇 / painting.sculpture   2013_0125 ▶︎ 2013_0221 / 일,공휴일 휴관

관용_Narcissist_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11~2

초대일시 / 2013_0125_금요일_05:30pm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Space A,B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관용_아이러니_복제된 형상구조 속 전복의 미학 Guan Yong_Irony_The Overthrow of Aesthetics 管勇_反讽_推翻的美学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 또꽤닮았소. //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거울/이상 작,1933)

관용_ICE CREAM_캔버스에 유채_160×130cm_2011~2

1. 욕망의 제국에서 ● 일반적으로 인간은 출생 이후 자아가 인식되기 전부터 줄곧 추상적이고 원대한 목표를 세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물론 이러한 목표와 이상은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는데 꼭 이상과 목표가 거대해야 할까?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의 목표점이 위대해야 할까? 이것이 대체 무슨 소린가! 하지만 필자는 인생살이나 예술활동에 있어 그렇게 위대하거나 거대한 추상적인 목표만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 인생이란 인생에서 나오는 질문 하나하나에 응답해 나가는 과정이며, 예술 또한 창작과정에서 생기는 의문이나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하나 연구하면서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많은 동시대인들이 이러한 사고과정을 간과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아마 잠시도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주지 않는 현대인의 삶 때문에 그 중요한 가치를 간과하게 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다가 간혹, 문득문득, 자주 '자신은 누구인가?' 라는 다소 엉뚱한 방식으로 정체성과 맞닥뜨리곤 한다. 이는 인간의 욕망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쉴새 없이 몰고 가고 있는 현 물질사회에서 더욱 더 그러하다. 일례로 과거의 경우 개인의 욕망은 지극히 소박했는데, 아마도 이것은 이미 선택된 인간들만이 그들 사이의 욕망 쟁투전을 벌였고, 이들간의 사건들이 역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비교적 평등하게)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욕망이 끊임없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회주의권이었던 국가들이 왜 자본주의적 노선을 걷고 있는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자리를 내어 준 것은 결국 인간의 욕망을 발산시킬 수 있느냐가 핵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회주의가 일정수준까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긴 하였으나,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무한대로 내달리게 했다는 점에서 탐욕적인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구도까지 갈 필요 없이, 도시와 지방간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전보다 더 도시가 발달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유, 혹은 지방도시들이 도시화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모습은 도시가 인간의 욕망을 대변해주고, 해결해주며, 아울러 끊임없이 욕망을 소비시켜준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마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관용_Meditations_캔버스에 유채_180×220cm_2011

사실 이러한 욕망의 문제는 사랑 그리고 인간성의 문제와 더불어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보편적인 문제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의 제국에서 끊임없이 욕구충족을 위해 목을 메는, 때로는 욕망을 성취하고 혹은 실패하거나 종국에는 욕망에 굴복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가상현실과 현실간의 괴리를 해소하지 못하고 자아분열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다소 인간의 욕망과 갈등에 대한 일반적인 논이 길게 서술된 바 없지만,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로 인간은 멈추지 않는 욕망에 도전을 당하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드러난 사회 속 인간군상의 얼굴들, 그리고 그 속에 드러난 인간의 탐욕과 자아의 괴리감 등이 현 시대, 즉 로켓 우주선처럼 쏜살같이 변하는 세상에선 더욱 더 첨예한 주제가 되어가고 있고, 이는 다름 아닌 현실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관용은 그 어떠한 시대보다도 많은 격변을 재빠른 속도로 체험하고 있는 중국에서 나고 자란 동시대 작가이다. 무수한 중국현대 정치 경제사를 논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감각적으로 이 부분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매우 흥미로운 시도를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현시대의 아이러니적 상황과 가치관의 혼란과 괴리감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업이 아닌 그의 작업실을 모티브로 하여 삶과 예술의 기원을 찾고자 했다는 점이다.

관용_Memory Side_캔버스에 유채_150×250cm_2012

2. 아이러니 ● 현시대의 삶에 있어서 우리는 여러 형태로 쏟아져 나오는 윤리의식의 부재, 가치규범의 불안정, 그리고 가상 현실과 현실의 괴리적 상황을 종종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현대인들을 자아분열적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이것이 당장은 가시적인 현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무서운 파급력을 가지고 여러 가지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들은 우리가 거울 뒤로, 혹은 거울 옆으로 숨는다고 해서 나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아이러니적 상황은 유사성이 관습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상황들 속에서 그 유사성의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관용의 작업에 있어서 바로 이점들이 최근 작업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고, 특히 이번 전시에서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의 작품에 나타난 '거리'정신이다. 여기서 거리란 자아와 세계 사이의 외적 거리인 동시에 분열된 자아 사이의 내적 거리도 포함되며, 이런 점에서 관용의 작품은 아이러니의 비서정적 성격을 본질로 한다고 볼 수 있겠다. ● 우리는 관용의 초기작품에서 그 싹을 볼 수 있었다. 2000년도에 제작한 「和历史有关的风景 Connection Landscape to History」 작품은 2개의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폭은 흑백으로 초원에서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고, 다른 한 폭은 컬러로 마치 예수가 황무지의 땅에 선구자로 내려오는 듯한 양식으로 마오쩌동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이 재미있는 것은 흑백과 컬러의 대치, 그리고 현재 실재한 화가와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중국의 영웅인 마오쩌동의 대치라는 점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아마도 화가의 모습이 컬러로, 마오의 모습이 흑백으로 그려졌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부분을 이상과 현실이라는 기반 아래 반어적으로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이분법적인 표상에서 과거는 흑백, 현재는 컬러라는 것이 상식이지만, 현실에서 느끼는 이상향의 거리감이 오히려 과거 기억의 영화로운 부분이나 영웅적 요소보다 크다는 점을 반어적 색채와 구도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작가는 이 그림에서 전복된 구조를 통하여 현 사회상을 비판하고 있는 기지의 싹을 보인다.

관용_Unfinished Painting_캔버스에 유채_220×190cm_2012 관용_Large Studio_캔버스에 유채_190×220cm_2012

이후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끊임없이 도출이 되고 있는데, 초기의 작품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조금은 추상적 개념으로 접근했다면, 이 후의 작업은 지식인의 외관에 아둔한 인물의 이미지를 중첩시켜 점차적으로 현실에 근접하여 작업을 풀어나갔다. 2003년부터 2007년 사이 관용은 뚱뚱하고 둔한 이미지의 지식인들을 그렸다. 당시 관용은 기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반복적으로 회의(懷疑)하고,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시대인들의 수동성과 우매함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사회와 규율과의 갈등을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묘사와 결합하여 표현했다. 주제의 대부분은 서양의 고전명화의 장면을 차용하여 현 시대의 중국인이 겪고 있는 모순적 상황을 「Classic」씨리즈로 보여주었으며, 구체적으로 「실어증」, 「학대」와 같은 표제로 선보였다. 이 시기의 작품 대부분은 역설적인 상황대치극 양상을 보인다. 작가는 당시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문화와 역사에 대해 의심하는, 그렇지만 뭔가 우스꽝스러운 인물을 표현하고 싶었으며, 또한 진지하고 엄숙한 종교적인 분위기이면서 심각하면서 불안한 인물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작품 이미지의 모델이 되었던 것은 "zhou zhou"라는 지적 장애가 있었지만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뛰어나게 지휘했던 인물로, 그는 이 인물을 통해서 모순적인 현 상황을 풍자하고자 하였다. 후반기에 들면서 작가는 더욱 더 주제를 좁혀 나아간다. 물론 모순적인 상황대치극이라는 기법을 유지하면서, 그가 겪은 문화적 경험과 사회적 현실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의 주제를 진지하게 느끼고 지각하면서 말이다. 이후 관용은 개인과 사회라는 대치적 관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내면세계와 외면세계를 대립구조 양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관용_Floating and Spalling of the Color_캔버스에 유채_150×200cm_2012

대략 2010년 후반부터 관용의 작업에서는 새로운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즉 거울을 이용한 이미지가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의 상황극적인 화면구조를 탈피하여 화면은 상하 혹은 좌우로 분절되어 시공간이 일치하지 않는 장면들이 속속 등장한다. 화면을 언뜻 보아 넘기면 그저 이전과 같은 책과 인물의 비슷비슷한 나열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마치 중간과정과 단계가 생략되거나 절개 된 것과 같이 시공간의 차가 보여지며, 순간 관람자에게 잠시 혼란을 느끼게 한다. 초기 작품에서부터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사회와 개인간의 대립구조를 민감한 관점으로 견지하고 있었던 관용의 작업은 2011년 작품「The Gray, 灰色」에서 외적 자아와 내적 자아의 대립구조의 시작점을 알리면서 필자가 상기에 언급한 '자아와 세계 사이의 외적 거리인 동시에 분열된 자아 사이의 내적 거리감'이 화면에 출현하게 된다. 이전의 작업이 비교적 단순하게 두 가지의 상황이 극의 형식을 띠면서 한 화면에 등장하여 1:1의 매칭식으로 작품을 구성했다면, 2011년의 「The Gray, 灰色」작품에서 관용은 한층 복잡해진 시공간의 구조 개념을 끌어들여 화면을 완성시키고 있다. 처음 이 작품을 보면 아마도 지극히 평면적인 서가에 두 인물이 끼워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며,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 하나의 서가처럼 보였던 것이 상하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등장인물의 시선인데, 화면의 왼편에 위치한 남성의 시선은 그의 오른 편의 남성으로 향하고 있고, 시선을 받고 있는 남성의 시선은 다름아닌 우리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시선은 관용이 명기한 작품명인「회색」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회색」작업은 관용의 최근작인 「Narcissist, 나르시스트」로 심화된다. 이 작품에서 서재는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지그재그로 속도감을 가진 서재가 화면을 부유하고 있고, 그 사이로 안정적인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지만, 실은 그의 표정은 매우 상기되어 있으며, 시선은 불안정하다. 우리는 작가가 「회색」작품에서 보여준 일차원적인 분절이 「나르시스트」의 작품에 와서는 다차원적인 시공간의 교차를 통해 위태로운 각도로 보여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르시시트」에서는 「회색」의 작품과는 다르게, 인물들이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 상태와 같은 공간과 시간의 차도 없으며, 또한 「회색」의 작품처럼 시선들에 의한 감시나 견제를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조금의 여유나 눈치를 보는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있다. 「나르시스트」에서 작중인물은 마치 서재모양의 쾌속열차가 광풍과 같은 속력을 가지고 무차별적으로 스쳐 지나가 버려 정작 작품 속 주인공은 얼이 빠져 멍한 상태로 남겨져 있는 듯 하다. 서두에서 논한 바같이, 작가는 현시대와 문화 그리고 이 복잡하고 다단한 욕망의 제국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들의 자화상에 의문을 던지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제의식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거울개념을 차용하여 한층 견고하게 발전한다. 즉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세계를 포함하여, 작가자신을 스스로 비춰 보면서, 자아와 세계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사이의 갈등과 괴리감이 종국에는 자아분열에 이르게 되는 현시대를 암시적이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담고자 했다.

관용_Pen_스테인리스 스틸에 래커_185×158×130cm_2007

3. 베이컨의 화실로 돌아와서 ● 일련의 작업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후기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존재감과 자아에 대한 물음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여기에서 멈추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관용의 작업에서는 무수한 기표들이 부유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물성에 대한 것이다. 그의 신작에서 우리는 물감퇴적물이 이곳 저곳에 부유하거나 그림의 하단부분이 마치 화가의 빠렛트처럼 엉겨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물감퇴적물은 아마도 아무 쓸모 없는 다 먹고 소비하고 배출한 쓰레기나 똥으로 보여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작가는 이를 모든 에너지의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시장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이미 소외되거나 사장된 이러한 개념을 작가는 다시 화폭에 중심 소재로 사용하면서 잉여물의 가치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느 시인의 시구인 '꽃은 똥처럼 향기로와, 똥은 꽃처럼 향기롭게, 삶과 죽음을 태우는 불꽃'과 같은 반어적 기법으로 작가의 시대정신을 부각시키는 부분이라 볼 수 있다. ● 사실 작업에 물감퇴적물을 화면에 도입시킨 것은 필자가 보기에 베이컨의 작업실을 연구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관용은 쓰레기 집합장과 같은 베이컨의 작업실에서 많은 힘과 에너지를 느꼈다고 한다. 일생 동안 청소 한 번 하지 않은 베이컨의 작업실은 아마도 그 예술가의 삶의 현장이 그대로 담긴 역사유물로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관용이 여러 층의 서가를 각국의 문화, 시대, 민족의 사고가 뒤섞이고 축적된 집합체로 본 것처럼, 베이컨의 작업실 또한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시대와 문화 그리고 예술사상이 뒤엉켜진 오브제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문화, 예술, 시대, 정신 등의 집합체인 서가와 작가의 작업실이라는 오브제의 차이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걸러진 것과 걸러지지 않은 것, 추상성과 구체성이라는 대치 점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작가 관용이 이러한 차이점을 인지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작가적인 감각으로 이 시대의 소외된 정신과 가치를 대작가가 남긴 고뇌의 집합장인 더러운(?) 작업실에서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베이컨의 작업실 작품은 이제 단순한 재현에서 끝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거울장치를 이용하여 관용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즉 일관적으로 시도했던 현실과 이상간의 거리감으로 인한 자아분열에 이르는 과정이 이제 잉여적 물성과 같은 물감퇴적물로 인해 현실 속 나와 내면 속의 나와의 괴리를 무너뜨리고 화합의 손짓을… 그러나 종국에서 작가는 여전히 화합되지 않는 자아를 말하고 있다. ■ 김미령

Vol.20130125b | 관용展 / Guan Yong / 管勇 / painting.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