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홍展 / PARKJINHONG / 朴鎭鴻 / painting   2013_0304 ▶︎ 2013_0317

박진홍_얼굴 1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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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304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cafe.daum.net/gallerydam

살아있는 거울에서 생멸하는 얼굴 ● 모든 것이 얼어붙는 혹독한 거울,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활동을 아늑한 실내 모드로 전환하고 있는 즈음, 안임에도 불구하고 바깥일 수밖에 없는 작업실에서 그림에만 매진하는 화가는 자발적이면서도 타발적인 유배자와 다름없다. 작품이 그를 놓아주기 이전까지는 끝도 없이 작업에 몰두해야 할 화실은 보이지 않는 창살로 둘러쳐진 감옥이 된다. 살아도 거기에서 살고 죽어도 거기에서 죽는, 거의 막장 같은 곳이 겨울 작업실이다. 인간적 온기와는 거리가 먼 냉랭한 유형지의 공기는 작업에 대한 열정을 순간적으로 동결시킨다. 동결이란 휴식이나 정지가 아닌, 순간적으로 이루어질 결정화를 말한다. 캔버스 안에서 우글거리는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형상들은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의 포획과 그 흔적들을 증거 한다. 알아보기 힘들만큼 깡마른 작가의 모습에서 즉각적으로 떠올린 유배자라는 비유조차도 상투적으로 다가온다. ● 사회로부터 끈 떨어진 예술가를 신화화했던, 대표적인 근대 미학의 이데올로기인 '저주받은 화가' 딱 그 모습이다. 통계 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상투적인 표현이라도 현실 속에서 그에 딱 맞는 작가나 작품의 예를 발견할 때 신기할 수밖에 없다. 진짜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구나. 일찍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아채고 그것에만 매진해왔으며, 남들보다 그림을 더 사랑한 죄밖에 없지만, 바로 그 이유로 세상은 그를 바깥으로 유배되어야 할 죄인으로 만든다. 화려한 스펙터클을 다루는 시각성과 코드화되고 매뉴얼화 된 것들을 단지 선택할 뿐인 손가락이 아니라, 몸과 손이 하는 일인 회화는 사양길에 접어든 직업군들처럼 그 자체로 외롭고 힘든 길에 속해 있다. 그만큼 무늬만 화가인 이들도 많다. 굳이 그림으로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그림으로 반복하는 부류들이 회화라는 아직도 가능성이 있는 분야를 맥 빠지고 구태의연한 것으로 만들곤 한다. ● 이러한 '직업적' 어려움 때문에 작가이면서 OO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박진홍은 화가 말고는 어떠한 정체성도 떠올리기 힘든 희귀종에 속해 있다. 필요하다면 그는 차라리 막노동을 한다. 그림 외의 길은 없다는 것, 어중간한 타협을 부를 수도 있는 여타의 우회로를 원천적으로 배제해 버린 그의 극단적 선택은, 남들은 모르는 그만의 콤플렉스 때문인지 쓸데없는 고집인지 바보 같은 순정인지 화가로서의 자신감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외롭고도 무모한 선택과 도전은 종종 돌파를 가능하게 했다. 물감으로 얼룩진 작업실 벽을 배경으로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왔다갔다하는 그의 모습은 공간 전체를 초상화로 만든다. 그것은 박진홍이 열 번도 넘는 개인전 동안, 줄 곧 자화상을 기본으로 하는 형상을 보여 왔기에 생겨난 인상일 것이다. 왜 자화상인가. 그에게 자화상은 진도 나가듯이, 유행 타듯이 한 번 쯤 시도 해보는 여러 장르중의 하나가 아니다.

박진홍_얼굴 2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3

밑도 끝도 없는 헌신을 요구하는 끝없는 과정으로서의 작업, 그것을 받아들인 운명적 선택 속에서 자아만이 중심을 잡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그에게는 낭만주의적 화가의 면모가 발견된다. 그러나 자아를 절대시하는 낭만주의의 오류는 되풀이하지 않는다. 회화라는 거울에 비추어진 그의 자아는 낭만적 총체성이라는 통합 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를 비추는 거울은 이미 조각나 있다. 단지 그 자신을 재현한 것은 아닌 무수한 반복과 차이 속에서, 이 강한 중심은 여러 개의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보여준다. 알아볼 수 있거나 추측될 수 있는 화면 한가운데의 강력한 상은 바로 그 자신이지만, 그것은 그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수렴될 수 있는 넉넉한 장(場)을 얼굴화 한 것이다. 대부분 자기 손바닥만한 얼굴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가변적이고 광대하게 다가오는 영역이다. ● 소우주=대우주라는 신학적이고도 고전적인 유비가 말하듯이, 세계는 얼굴이고 얼굴은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얼굴은 완전히 자기 속에 넣었을 때 풀어낼 수 있을 따름인 회화와 잘 어울린다. 회화란 잠시 눈이나 입에 담았다가 뱉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질적인 변환을 요구한다. 호흡하듯 밥 먹듯 자연스럽게 흡수를 하든, 그것이 안 되면 몸을 찢어내고 집어넣든 어쨌든 몸 내부에 들어있거나 들어온 것이 아니면 진정 작품으로 빼낼 수가 없다. 회화에서 체화는 필요충분조건이다. 땀, 눈물, 핏물 같은 체액과 구별될 수 없는 질척한 매체를 사용하는 회화는 이러한 체화의 과정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재현에 기반 하는 생산적 활동처럼 가시적으로 증명되기 힘든 체화는 적지 않은 희생을 요구한다. 작가는 분명히 생의 중심에 예술을 놓았건만, 사회적으로는 주변화 되었다. 그러한 타자화가 일반 사회가 아니라, 미술계 내부에서도 반복 재생산된다는 점이 심각하다. ● 학교와 멀찍한 곳에서 일찍이 고립되어 작업했던 그에게 접하기 힘들었던 갖가지 이론들은 작업에 무슨 떼 수나 단축 코스라도 되는 양 유혹하지만, 작업 중인 이가 아니라면 이론에 있을지 없을지 모를 그 결정적 방법이란 것도 자기화 되기 힘들다. 작업 중이지 않은 이에게 이론은 단지 이론일 뿐이며, 기껏해야 지배적 체계가 길목마다 덫처럼 만들어놓고 요구하는 공인인증서의 발급과정에 불과하다. 뒤늦게 '선진국'을 따라 물샐틈없는 체계화를 서두르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나 통용되는 그렇고 그런 증명서들과 그는 거리가 멀다. 그의 작품들은 결국은 돈으로 진척되기 마련인 사회적 주체화의 과정과는 낯선 야생성을 간직한다. 학교 및 학교적인 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박진홍은 제도화된 미술계에서 '유망 작가'로 나아가는데 치명적일 수 있는 '결격 사유'를 오로지 그리기라는 본질적 행위로만 환원시켰다.

박진홍_얼굴 3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3

박진홍은 자신을 풀어내기, 그리고 오직 자신만을 매개로 풀어내는 일이 자연스럽다. 물론 그 또한 피카소, 자코메티, 코코슈카, 보나르 같은 대가들을 좋아하지만, 그 스스로 그러한 그림을 그리는 시점에서 전거들을 탐구한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추상적 매개 없이 화가의 언어로 화가의 언어를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그 점에서 그는 일찍이 그림을 시작한 재주 있는 화가이기 이전에, 그리고 수 십 년 동안 어느 하나를 뚝심 있게 그려온 화가이기 이전에 준비된 작가로 다가온다. 작가가 가져야할 진정한 야망은 어떤 이론을 작품에 적용하는 재현적 행위 보다는, 작품으로부터 새로운 이론을 파생시킬 수 있는 생성적 행위에 방점을 찍는 일이다. 그림이 곧 실존인 작가에게 자화상은 각별한 선택이다. 그 작은 공간에 오밀조밀 배치된 잠재적이고도 명시적인 기관들의 미묘한 역학관계는 작은 변화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얼굴만큼이나 크지 않은 박진홍의 캔버스는 그 전체가 얼굴로 작동한다. ● 요컨대 그의 작품은 캔버스에 얼굴을 재현하거나 표현하거나 변형시킨 것은 아니다. 타자와 소통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인간에게 얼굴 읽기는 굳이 예술 작품이라는 매개 없이도 매순간 일어나는 거의 본능적 과정이다. 그래서 얼굴은 비록 큰 화면이 아니더라도, 강렬하고도 민감한 표현을 원하는 화가에게 선택과 집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박진홍의 작품에서 얼굴로 간주된 밀도 있고 민감한 영역에는 단지 그 자신으로의 회귀라는 자기 지시적이고 자기참조적인 불모의 행위이거나, 무한대의 되돌이표로 들려오는 공허한 독백은 없다. 한 얼굴에는 다수의 풍경들이 우글거리고 군상들의 다양한 소리들이 웅성거린다. 관객은 어떤 공명 속에서 낚시꾼처럼 매순간 달라질 어떤 조합을 낚아챌 수 있다. 매순간 변화하는 민감한 얼굴 표면처럼 산재하는 풍경들 역시 변화한다. 그 자신을 들여다보는 살아있는 거울은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작가가 꼭 집어서 자화상이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인도 아닌, 아이도 아닌, 외국인도 아닌 그의 작업 속 형상은 자화상으로 읽혀진다. 프러시안 블루로 깔아놓은 바탕에는 어슴프레하게 빛나는 거울에 비친 것 같은 낯선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평소에 거울을 잘 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자리 옆에는 뿌연 거울이 하나 걸려 있다. 만약 그의 무의식에 거울이 있다면, 그것에 내포된 나르시시즘은 끝내 자기에 이르지 못했기에 죽음을 맞았던 나르시소스의 신화와 연관될 것이다. 유한한 삶을 비추는 거울은 작가에게 작업이라는 끝없는 과정을 촉구하지만, 작업에 몰입할수록 삶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워지는 역설은 어쩔 수 없다. 거울이라는 물건은 완벽한 상에 대한 기원적 모델을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플라톤적, 신학적) 기구이며, 라깡의 논문『나의 기능을 형성하는 거울의 단계』에서 개진되듯이 자아의 심리학과도 밀접하다. 반사상 없이는 결코 스스로를 바라볼 수 없는 얼굴을 주제로 하며, 자기상의 불안정성을 극대화하는 박진홍의 작품 역시 거울이라는 오래된 주제와 밀접하다.

박진홍_얼굴 4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3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거울의 역사』에서, 라깡의 논의를 따라 거울에 비친 상에 대한 의식의 발달은 상징적 활동의 발달과 통합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거울을 매개로 자신의 단일성을 준비하는 아이에게 깨진 거울의 만화경적인 광채는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 다양한 자아를 드러내 보인다. 거울은 상상력의 강력한 동인이면서 동시에 자아의 통합을 위협하는 분열과 환상의 요인이 된다. 인간은 타인이 자신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노출되어 있다. 게다가 반사상은 약하고 일시적이며 변덕스럽다. 의식이 약해지거나 비스듬한 시선만으로도 반사상은 그 익숙한 동일성을 상실한다. 거울은 인간의 의식에 자기 육체의 상을 보여주면서 수많은 투사와 상상적 동일시의 자리를 제공해 준다. 모든 얼굴 중에서 자신의 얼굴은 바로 우리가 가장 아는 것이 없는 얼굴이다. 보네는 현대의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하며, 사람들이 자기의 모습을 상당히 부정확하게 알고 있음이 밝힌다. 매 작품이 다르며 한 형상에도 또 다른 형상이 잠재해 있는 박진홍의 자화상 역시, 변화무쌍한 자기상과 밀접하다. ● 보네에 의하면 혼란스럽지 않은 자기상이라 해도 자신에 완전히 적응할 수는 없으며, 자기상은 언제나 낯섦의 위상을 어느 정도 간직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상은 해부학적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도 아니며, 사회적 존재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고정되지 않고 변하는 투사이며 순간의 칼날이 고정시키는 정교한 개념이다. 반사상은 언제나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욕망에 가려 단 한 번도 완벽하지 못했다. 주체를 객체로, 안을 밖으로 만드는 작업은 얼굴의 모습을 바꿔놓고 닮음을 손상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은 자신을 보는 모든 시선의 조건이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볼 수 있게 되어야 하며, 자신에게 스스로 낯선 이방인이 되어 아무도 예기치 못하는 곳에서 자기 자신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이타성의 영역에서 포착된다. 하지만 바로 그때 낯섦은 주체를 위협한다. 모방의 수동적 거울이 아니라, 변형의 능동적 거울인 것이다. ● 거울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이상적으로 그렇게 되어야할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자신이면서 동시에 흐들거리는 넝마조각, 제갈 곳을 못 찾은 귀신, 떠도는 유령들, 토막 난 시체처럼도 보이는 박진홍의 초상 역시, 관객으로 하여금 보네가 지적한 반사상의 이중성을 마주하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 우주처럼 심연처럼 짙은 푸르름 속에 드러나 있는 형상은 정확히 증명사진의 구도이다. 얼굴 부분이 위치한 곳에 있는 것은 헝겊 같은 뭉치이다. 그는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칠판 위에 분필로 쓴 글씨보다는 그것을 지울 때 나오는 흔적들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그 헝겊 뭉치 같은 형상은 자신을 더욱 투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표면을 닦지만, 닦을수록 지저분한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는 불투명한 거울을 연상시킨다. 마찬가지로 그의 초상에서 존재와 흔적을 구별하기 힘들다. 여러 갈래의 조각들이 뭉쳐진 덩어리 같은 형상들은 배경과 명확한 경계를 짓기보다는 제각각인 끝나풀들을 휘날린다.

박진홍_얼굴 5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3

시리즈로 제작된 여러 초상을 나란히 두고 볼 때, 그것들은 어떻게 뒤적거려도 다시금 또 다른 얼굴로 변신하는 신기한 뭉치들이다. 그러나 어느 얼굴도 그 본질적 핵심을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얼굴로 추정되는 덩어리 안팎으로 뻗어 나온 선들은 어디에도 고정될 지지대를 찾지 못한 채 심연 속에 붕 떠 있다. 붓으로 그렸는지 나이프를 던졌는지 알 수 없는 선들은 그 복합적인 층위로 물질적 깊이가 있는 얼굴을 형성한다. 어떠한 코드화도 거부한 채 날것으로 제시된 선과 색채의 다발들이 만들어내는 얼굴은 심연 속에서 빛나는 미지의 행성 같기도 하고, 대지를 떠도는 군상들을 품은 풍경 같기도 하다. 중층적으로 만들어진 얼굴에는 그 안에 들어가서 배회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감이 있다. 모노톤이었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추가된 밝은 색은 어둠 속에서 발하는 섬광 같은 선들을 만들어 낸다. 섬광은 때로 관객의 눈을 찔러올 듯 공격적이다. 거울로 간주될 수 있는 이 어두운 표면에서 간접적으로 반사되는 빛은 직사광보다 더 위협적이다. ● 왜 배경을 그렇게 칠했냐고 물어보니 요즘 '지구탄생 45억년'이라는 다큐멘타리를 휴대폰으로 봤다고 대답한다. 여백같이 칠해진 프러시안 블루 가운데 별이 빛나는 것처럼 형상이 있다. 별은 캔버스로 구획된 한 화면에 하나씩만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배경 역시 공간감이 있는 붓 터치로 이루어진다. 형상이나 배경이나 저 깊숙한 속부터 앞까지 증층적인 공간으로 되어 있다. 자화상에 내포된 장치인 거울은 하나의 표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울 이면을 들락거릴 수 있는 미지의 영역을 암시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고정된 상에 안주하는 일상인들과 달리, 거울 안팎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는 이들이 바로 광인과 예술가들이다. 이 중층적 공간 속에서 공명이 일어난다. 여러 층위로 내던져진 선들은 색과 함께 미묘한 감정의 울림을 낳는다. 얼굴로 가정된 작은 면은 어떤 우연성일지라도 필연성으로 도약시키는 것이다. 평범한 풍경화에서 우연적으로 그어진 선은 그냥 선일뿐이지만, 초상에 뿌려진 사선은 어떤 강렬한 감정이 실린 상태를 연출할 수 있다. ● 가령, 한 초상에서 눈에 박힌 가시 같은 막대기는 예지에 번뜩이는 눈 빛 같기도 하다. 들끓는 카오스 속에서 코스모스를 건져낼 것을 요구하는 그의 초상에서 우연의 역할은 크다. 자신이라는 참조대상이 있지만, 그것은 주어진 자료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무의식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출발이나 기원은 늘상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오래된 담벼락의 벽에서 연상되는 것을 중시했는데, 그것은 분할된 상을 가상적으로 통합하는 거울이라는 영역에서 상상의 힘을 암시한다. 작품에서 우연성이 차지하는 위상은 모방과 재현이 아닌, 창안과 영감의 힘을 중시하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해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벽의 얼룩에 대한 생각이나 바로크 시대에 대리석 덩어리에 새겨진 오묘한 결에 주목하는 등의 예는 자연과 예술가의 관계를 보다 심층적으로 연결 짓는다. 자연의 외관을 흉내 내기보다는 자연이 하듯이 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연이 되는 것이다. ● 그 점에서 동양화의 정신과도 연결될 수 있지만, 박진홍의 작품 속 '자연'이나 '되기'는 화해에 기반 한 합일보다는 긴박한 대치의 무대에 가깝다. 세 폭으로 제시된 시리즈에서는 다각도로 초상을 제시한다. 왼쪽 날개그림은 옆모습이라는 실루엣이 보다 명확하다. 목 잘린 사람처럼 얼굴만 있으며,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어떤 토대와의 유대도 없다. 그것들은 깊은 바닥에서 잠시 떠올라 있는 것 같다. 격랑에 가득한 다른 작품과 달리, 고요한 인상을 주는 이 작품은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는 가로 세로 선들로 인해 마치 치명상을 입은 환자, 또는 순교자의 머리를 둘러싼 붕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풀어헤쳐져 자신의 적나라한 환부를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개체의 항상성이나 자기동일성을 지키지 못한 채 외부에 열려있는 이 취약한 경계, 즉 상처나 환부들은 또 다른 우주로 통하는 다수의 구멍들을 제시할 것이다.

박진홍_얼굴 6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3

가운데 작품은 휘저은 붓놀림이 만든 우연한 얼룩이 마치 눈구멍처럼 보인다. 텅 빈 눈동자는 물리적 혹은 정신적 거울이 아니고서는 결코 스스로를 볼 수 없는 시선의 취약함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러한 취약함을 욕망이나 환상, 상상이 공략한다. 자아의 통일 상은 견고한 정체성의 요구만큼이나 상상적이고 상징적(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구성은 이미 해체를 내포한다. 거울은 결코 투명하지 않다.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상에 순응하는 주체화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이 억압적 과정은 자아가 지배적 상징구조에 동화됨으로서 작동되는데, 그것은 지배적 제도나 언어에 대해 야생적 작가가 느끼는 불편함의 끝없는 원인을 제공한다. 가운데 작품은 좌우의 작품에 비해 가장 큰데, 마치 그 부분만 클로즈업 된 것 같은 강조점이 주어진다. 오른쪽 패널은 얼굴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겪어낸 넝마조각처럼 더욱 풀어진 채 나풀댄다. ● 화면의 중앙에 배치된 것은 사람 얼굴일 것이라는 관습적 시각만이 그것을 초상으로 보게 한다.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즘과 무관치 않는 그의 초상은 자기애가 사랑 뿐 아니라, 공격성과도 밀접하다는 심리학의 가설을 증명한다. 일상어에는 애증이라는 표현도 있다. 이러한 양면성에 대해 그의 지인은 '죽을려고 그리냐, 살려고 그리냐, 왜 귀신을 그리냐'고 충고했다. 그의 초상에는 적대적 환경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보호하고 감싸 안는 부드러운 붓질은 발견되지 않는다. 사방으로부터 들이닥치는 힘들에 속수무책이며, 주체도 그것들에 사납게 반응한다. 얼굴뭉치들이 다양하게 읽히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울리는 소리는 음울하다. 그러나 독백은 아니다. 소리는 침울함 속에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날카로운 비명 소리로 울려 퍼지기도 한다. 그림이라는 거울 속 상상의 자아는 대부분 스스로 만들어낸 싸움으로 온통 상처투성이이다. ● 그것은 어쩌면 그림에 관련된 전설에서도 종종 나오듯, 그림에서 빠져나온 분신이 현실 속에서 상처를 받고 다시 그림 속으로 되돌아감으로서 생겨난 상처일수도 있다. 거울이라는 것이 절단된 신체를 가상으로 통합시켜주는, 본질적으로 깨어진 표면이듯, 얼굴 도처에 새겨진 상처들은 깨진 거울의 상태를 나타낸다. 사회가 요구하는 보편적인 주체에 대한 그럴듯한 가상은 산산이 깨어지고, 본래의 해체된 주체와 몸뚱이가 그 모습을 음산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속도감 있는 선들은 얼굴과 그 형상이 전하는 말 또한 공중 분해한다. 헤쳐모인 선들은 다른 표정과 말로 거듭난다. 전체적으로는 미지의 풍경과 그 속에서 어지럽게 울려 퍼지는 메아리로 변주된다. 하나를 결정해서 그리는 것은 지루해하는 그에게 자기 얼굴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가장 확실한 듯 존재하는 자아는 모호해진다. 박진홍의 작품에서 자아는 다수의 타자들에 점령되어 있고, 일관되게 유지하는 구성만이 그것들이 자아의 궤적들임을 암시한다.

박진홍_얼굴 7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13

선의 속도에서 나오는 긴장감을 중시하는 그의 작품에서 빠르게 그어지거나 뿌려진 물감은 미세한 몸의 흔들림을 반영한다. 자기반영적인 그림이지만, 사진 찍듯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물 흐르듯이 자신을 내버려 두고 그 과정을 기록한다. 강력하고 깊이 있는 모노톤의 어둠 속에 가려지고 켜켜이 쌓아올린 비밀스런 형상은 색의 폭이 더욱 다양해진 요즘 작업에서 분출이 보다 빈번하다. 신비적 은폐로부터 발산으로의 전환은 다소간 공격적이다. 그만큼 그림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폭이 커졌다는 말이다. 즉흥적 몸에 실린 물감은 일회적인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직구를 캔버스에 날려 버린다. 그러나 단지 혼돈스럽고 무의미한 배설은 아니다. 5년 동안 1점을 완성하지 못한 적이 있을 정도로 끝없이 그리고 지우고 긁어내곤 하지만, 그 또한 완성도에 대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선과 색채와 알 수 없는 표정(형상)들이 퍼즐처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 막그어댄듯한 그의 초상에는 형상 안에 형상이, 색 안에 색이 미묘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러한 중층적 화면은 그리고 나면 만족도가 떨어져 그리고 긁어내기를 반복한 결과이다. 결코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전시 전날까지도 계속되곤 하며, 최종 전시만이 이 끝없는 수정을 마감시킨다. 그의 작품은 즉흥과 조율이 함께한다. 그것은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고양시키기 위해, 또는 반대로 필연성을 우연성으로 와해시키기 위한 작가의 조치이다. 반복과 흔적을 삭제하거나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가지고 가는, 그래서 흔적을 통해 형상을 구축해가는 박진홍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시간동안 행위를 한다고 생각한다.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지만, 완성을 가늠하기 힘든 작품 스타일에 작업량이 부족하다는 자책으로 늘 쫒기는 심정이다. 에너지를 쏟은 만큼, 시간을 투자한 만큼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오지 않을 때 그러한 강박관념은 커지지만, 그것은 그만큼 자기 할 일, 즉 자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반증이다. ■ 이선영

Vol.20130304a | 박진홍展 / PARKJINHONG / 朴鎭鴻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