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cguffin Desire

권여현展 / KWONYEOHYUN / 權汝鉉 / painting   2013_0307 ▶︎ 2013_0428 / 월요일 휴관

권여현_코나투스의 숲 Conatus forest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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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307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혼성의 숲, 이성과 욕망 사이로 틈입하기 ● 권여현은 전방위의 작가이다. 1980년대 작가로 데뷔한 이래 그는 회화, 사진, 드로잉, 입체, 설치, 퍼포먼스, 영상을 넘나들며 엄청난 작품을 쏟아내었다. 그의 거침없는 생산력은 국내외에서 가진 30여 차례에 이르는 개인전을 통해 이미 입증되었다. 그의 이 왕성한 생산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농담처럼 그의 특이한 습관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했다. 말하자면 눈으로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받으며 다른 손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식이다. 이 말은 그의 모든 감각기관이 외부세계로 향해 열려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눈, 코, 입, 귀는 물론 혀, 손과 발, 피부 등 모든 신체를 동원해 현상과 본질, 자아와 타자를 보고 듣고 느끼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이런 점은 그가 욕심이 아주 많은 작가임을 밝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언젠가 나는 그의 회화를 보며 '이미지의 공화국'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지금 다시 그의 작품을 보니 그가 작품 속에서 운영하는 세계는 공화국이 아니라 연방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도 이미지는 물론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인문학이 서로의 입과 꼬리를 물고 있는 거대한 조합으로서의 연방 말이다. 그 근거로서 그의 작품에서 다양성과 혼종성이 특히 두드러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풍부하면서 다면적이고, 또한 다변(多辯)이기도 한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것은 혼성의 병렬이자 중첩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 미술을 지배했던 순혈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이지만 잡종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으로는 해방지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그림은 과잉되고 복잡하며 열정적이면서도 냉정하다.

권여현_Rhizome waterfall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2

최근에 완성한「코나투스의 숲」이란 작품을 예로 들어 보자. 배경은 장소가 불특정한 숲이다. 이 숲에 거주하는 존재는 우로보로스(ουροβóρος)라 불리는 뱀이다. 이 뱀은 마치 신수(神樹)처럼 화면의 중심을 수직으로 가르며 분할하고 있는 나무를 칭칭 감고 있다. 타원형으로 똬리를 튼 뱀의 영역 속에 인간이 있다. 머리카락이 뱀으로 이루어진 메두사의 머리를 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헤르마프로디테의 모습을 한 스피노자(Baruch Spinoza)가 이 비밀의 숲에서 에덴동산의 최초의 인간처럼 벌거벗은 채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 옆에서 뱀이 아가리로 집어삼키려고 하는 인물은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이다. 그 아래에서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얼굴만 슬쩍 내밀고 있고 국보83호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이 느닷없이 출몰하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매혹적인 춤을 추고 있는 인도의 무희가 등장하고 아래에 당나귀의 네 발에서 뿌리가 자라고 있다. 이미지 자체로는 초현실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그러나 화면 아래 부분의 문자는 이 꿈같은 이미지가 엮고 있는 구조에 대한 냉정하고 지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우로보로스란 뱀을 받치고 있는 것은 롤랑 바르트가 1967년에 출간한『모드의 체계(SYSTÈME DE LA MODE)』이란 책이다. 그 아래에는 라틴어로 '코나투스', 그리스어로 '우로보로스'라고 적힌 책이 놓여 있다. 이 지경이라면 이 그림은 이제 더 이상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 되고 만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미지로 쓴 철학전서(哲學典書)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까. 게다가 끊어지지 않고 순환하는 구조를 상징하는 기호까지 등장하고 있으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회화는 해석되는 것이지 설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법처럼 이 난해한 이 이미지의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동원하고 있는 개념들을 하나하나 짚어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기술하지 않은 하나의 이미지가 이 그림의 의미를 해석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물에 포획 당한 채 누워있는 저 젊은 여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게다가 그녀는 벌거벗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아니면 최면에 걸린 것인가.

권여현_신화의 신전 The shrine of Myth_사진에 유채_98×154.2cm_2013

권여현은 최근에 제작한 작품을 관류하는 키워드로 코나투스(conatus), 영원회귀, 모나드(monad), 나선형 순환구조, 양가성, 거울상 단계, 응시, 실재계의 찡그림, -맥거핀(macguffin), 욕망, 이데올로기가 아닌 헤게모니 등을 제시하고 있다. 위에 언급한 작품의 제목과도 연관되는 코나투스는 물론 스피노자가 말했던 '자아를 보존, 발전, 완성하려는 욕구이자 의지'이다. 따라서 제목이 지시하는 의미 그대로 따라간다면「코나투스의 숲」은 생이 지속되는 세계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정치체제를 통해 최고의 코나투스를 발휘할 수 있는 있다고 했으므로 이 숲은 흑암과 혼돈의 세계가 아니라 조화로운 관계로 이루어진 세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화면은 혼란스럽고 거친 붓질의 흔적이 두드러지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결코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우로보로스와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줄기에 감겨 있다. 아가리로 꼬리를 물고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는 우로보로스는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은 다시 시작과 연결된다는 의미에서 윤회사상 또는 영원성을 상징한다. ● 사실 고대 사회에서 자연현상과 그 지역의 기후조건에 따라 이런 종류의 신화는 많은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탐무즈(Tammuz)와 이슈타르(Ishtar) 여신에 얽힌 신화는 건기와 우기란 계절에 낳은 순환구조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해가 서쪽으로 지는 현상, 달이 차면 기우는 현상을 관찰하며 탄생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상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는 현상을 보며 자연의 순환원리에 대해 인식했던 인간은 마침내 불변하는 영원성의 문제까지 상상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것을 상형으로 표현했다. 예컨대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라(Ra)는 호루스처럼 사람의 몸에 매의 머리를 한 상상의 동물이자 신으로서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붉은 태양의 테두리를 뱀이 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뱀의 탈피를 관찰하며 그것에서 낡은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얻는다고 생각하여 탄생과 죽음의 결합을 계속 순환하는 부활을 상징하는 우로보로스를 만들어냈다. 시간의 항구성에 대한 은유는 초기 그리스도교파의 하나인 그노시스파에게도 계승되었다. 그들은 아가리로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를 세계가 모두 하나라는 관념을 표현하는데 활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활용했다. 중세 연금술에서는 우로보로스를 처음과 끝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파악하여 형이상학적 기호인 'O'으로 표현된 '현자의 돌'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여겼다. 이렇게 볼 때 우로보로스는 창조, 영원, 무한, 불사, 완전성은 물론 변화를 의미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코나투스의 숲」은 영원히 반복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권여현_Ophelia and Net hunte_캔버스에 UV 프린트_89.4×130.3cm_2012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성장을 위해 알의 껍데기를 깨고 천사이자 악마로서 아브락사스(Abraxas)란 이름을 지닌 신을 향해 날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결코 우로보로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즉 죽음이 비영속적인 삶으로부터 영속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반복의 구조 속으로 회귀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권여현은 화면 속에 둥근 원을 그리며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은 물론 니체와 스피노자를 호출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권여현이 제시한 키워드의 하나인 '영원회귀'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이기도 하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야말로 디오니소스적 탄생의 순간을 의미하지 않는가. 독실한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신을 죽여 버린 그는 자기의지를 지닌 완전한 존재인 초인을 맞이하여 선악의 피안을 넘어서고자 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영원회귀는 디오니소스적 상태에서 자아를 잊어버리고 초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탄생하는 그 '순간'이다. 그 순간에 형이상학적 예술도 태어난다. 그렇다면 권여현이 그려놓은 코나투스의 숲은 영원하고 안정된 지상낙원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활성공간이다. 순간들이 요동치고 있으므로 드라마가 발생하며 유지의 욕구인 코나투스 또한 활성화된다. 그러나 운명의 사슬인 우로보로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니체와 스피노자의 우연하고도 이상한 만남 또한 그물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물은 정신이나 육체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연결하는 장치이다. 따라서 그물은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이거나 인타라망(因陀羅網)으로 볼 수도 있다. 연기는 태어나고 죽는 인간의 실존을 불교적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스듬하게 누운 채 잠들어있는 여성의 신체를 감고 있는 그물, 요염한 춤을 추고 있는 무희 압살라를 휘감고 있는 그물이 원인과 결과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그의 작품을 논리적인 구조로 해석하려고 할 경우 그가 걸어놓은 덫에 걸려들고 만다. 왜냐하면 이 그물은 단순히 이미지를 포획하는 도구가 아니라 일종의 미끼이기 때문이다. 미끼라! 그러고 보니 그가 제시한 키워드 중의 하나가 바로 속임수, 미끼를 의미하는 맥거핀이지 않는가. 공포영화의 거장인 히치콕 감독이 사용한 영화기법이기도 한 맥거핀은 작품 줄거리에는 영향을 주지 않지만, 관객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묶어 둠으로써 공포감이나 의문을 자아내게 만드는 영화 구성상의 속임수를 의미한다. 그래서 니체,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데리다, 금동반가사유상과 압살라가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한 '낯설게 하기', 즉 데페이즈망(depaysement)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작품 속의 이미지를 독해하기 위해 철학책을 뒤적거려야 했던 우리는 그가 만들어놓은 코나투스의 숲이란 혼성의 연방에서 조난당한 꼴이다. ● 이런 눈속임은 많은 작품에 나타난다.「잔 다르크의 숲」에서 잔 다르크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그녀는 메두사이거나 환호하는 원더우먼에게 보란 듯이 오스카 트로피를 높이 들고 우쭐대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녀의 어깨에 올빼미가 앉아있다고 해서 미네르바와 동일시하면 우리는 권여현이 걸어놓은 맥거핀의 포로가 되고 만다. 앙리 루소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상상의 숲을 연상시키는 남방의 풍경 속에 느닷없이 소나무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잔 다르크의 충복처럼 등장하고 있는 개만큼이나 이상하다. 이 개는 뒤러(Albrecht Dürer)의 판화에서 죽음과 악마의 유혹을 받으면서도 씩씩하게 진군하고 있는 기사를 따르고 있는 개를 연상시키지만 잔 다르크와 논리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잔 다르크의 왼손을 떠받치고 있는 마장가제트란 로봇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그의 작품에서 중심은 주변에 의해 미끄러지고 있으며, 은유는 본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권여현_Young Ophelia_캔버스에 UV 프린트_60.6×72.7cm_2012

그렇다면 그는 이 혼란의 숲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태어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결론은 너무 소박하고 일차원적인 결론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이 혼성의 이미지를 통해 존재란 명증한 논리로 규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양가성은 그것을 해명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존재와 부재, 주체와 객체, 이데아와 현상, 선과 악과 같은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접근할수록 그의 작품은 우리의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가 불가지론의 심연을 헤엄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늘 그랬듯이 그는 작품을 통해 항상 뭔가 주장해왔다. 특이하게도 권여현은 항상 자기논리 또는 원칙을 세우고 작품을 발표해 왔다. 그런 점에서 권여현은 아주 지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실존철학이었다. 그것을 회화로 구현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여섯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견고한 배경과 얇게 그려진 인간 / 둘째, 부분적 추상과 전체적 구상 / 셋째, 단계적인 제작과정 / 넷째, 각 부분의 다른 양식들 / 다섯째, 드로잉의 원리 -과감한 두고, 날카로운 직선, 강렬한 광선, 전혀 다른 공간의 조합 / 여섯째, 전면 이질적인 추상적 형식은 색채와 내용에 의해 통합된다. (1987년 개인전『실존공간-n』과『Form and Content-n』) 물론 위의 원칙은 자신이 추구하던 실존철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이지만 그 행간에서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 바로 손이다. 손으로 그리기는 그가 한 때 다양한 계층과 부류의 인간으로 분장, 연기한 모습을 촬영한 사진작업을 제외한다면 항상 작업의 중심을 차지하여 왔다. 자신의 손에 대한 지극한 애착과 믿음은 그의 빼어나게 잘생긴 외모와 그에 대응하는 외모 콤플렉스(이게 무언인지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금방 눈치 챌 것이다)가 나르시시즘의 원천이었듯이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가「구도자」란 영상을 제작하며 했던 퍼포먼스의 부산물로서 멋진 사진작업이 하나 탄생했다. 바닥에 캔버스를 깔아놓고 온 몸으로 화면 위의 물감을 휘젓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그의 손은 마구 뒤섞인 물감이 주름마다 스며들어 '우연하게도' 고원의 자외선에 노출된 채 성지를 향해 오체투지를 하며 나아가고 있는 순례자의 거칠고 때가 낀 손과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영상을 보지 않고 이 깍지 낀 손만 본다면 그것이 권여현의 손인지, 구도자의 손인지, 아니면 평생 땅을 일궈온 농부의 주름진 손을 촬영한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이다. 나는 이 사진작업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을 떠올리게 된다.「구도자」에서든 그가 최근에 제작한「맥거핀 욕망 혹은 네트 헌터」란 영상에서 그가 바닥에 깔아놓은 캔버스 위에 온 몸을 던져 허우적거리는 강렬한 퍼포먼스를 했기 때문에 폴록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폴록이 물감을 뿌려놓은 거대한 캔버스만 본다. 그러나 그가 작업실 바닥에 캔버스를 깔아놓고 안료를 흠뻑 적신 막대기와도 같은 붓을 휘두르고 있는 사진 속의 그 손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물감을 뿌리고 있는 폴록의 손은 그리기란 오래된 원칙에 대한 반란이자 해방을 보여준다. 권여현은 아예 화폭 속으로 온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격렬한 행위의 결과인 화폭과 함께 물감으로 얼룩진 주름진 손도 버젓이 전시했다. 여기에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권여현은 폴록보다 훨씬 더 자신의 손을 예찬하고 심지어 숭배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회화에서도 그의 손에 의해 물감의 물질성은 고양되고 화면은 기운생동한다. 사전에 계획되고 연출된 화면구성은 이 순간 비등하는 에너지에 의해 돌멩이가 던져진 수면처럼 출렁거리며, 그의 붓질은 마치 접신상태의 샤먼처럼 '신들린 광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의 트랜스(trance) 상태는 실제로 아주 짧다. 그러기에 그의 머리는 너무 복잡하고 참조해야 할 것도 너무 많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이성과 무의식을 버무리는 것, 이른바 '미장아빔(mise en abyme)'이란 기법이다. 회화의 맥락에서 이미지 속에 다른 이미지를 섞어 넣는 이 기법은 고도의 연출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는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처럼 혼성의 연속이자 반복이지만 그것도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만 볼 때 그렇다.

권여현_Macguffin Desire_캔버스에 UV 프린트_89.4×130.3cm_2012

그는 화가이기도 하지만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이기도 하다. 위장술은 그의 회화에서도 잘 발휘된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미술사의 잘 알려진 명작들이 잘려나간 채 차용되고 있음을 본다. 미술사는 그에게 많은 소재를 제공하는 보물창고이자 원천이다.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것이 미끼임을, 그가 걸어놓은 맥거핀의 함정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정작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미술사적 정보나 신화체계에 대한 지식과 해석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원작에 대한 패러디라고 규정하는 것도 만족스러운 결론은 아니다. 내용을 인식할 수 있는 원작이 그의 작품 속에서 화자로서 말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화자의 부재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리무중이고 미궁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기는 간격이 그의 작품이 지닌 특이성이다. 그의 작품은 켜켜이 중첩되고, 또 한편으로 수평적으로 병렬된 이미지와 이미지, 화포와 물감 사이에 놓여있다. 결론을 예측할 수 있는 복선을 기대하지 말라. 그것조차 해체하는 것이 그의 작품이 추구하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베이컨(Francis Bacon)의 그림에서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의 초상과 에이젠시타인(Sergei M. Eisenstein)의「전함포템킨」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물론 원작은 베이컨의 회화를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베이컨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이미지의 원형을 연상시키는 형태가 아니라 피나 땀과도 같은 분비물이었고 격렬한 붓질로 드러나는 욕망이었다. 베이컨은 작업의 모티브를 찾기 위해 수집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이미지들을 수집했다. 대부분은 시사잡지에 게재된 사진이었지만 말이다. 권여현은 모티브를 미술사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위에 철학의 담론을 덧씌운다. 그가 참조하고 있는 철학자는 자크 라캉과 같은 정신분석학자, 질 들뢰즈나 데리다와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는 물론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니체 등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풍부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봐야 할지, 그의 작품에서 철학사를 읽어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다. 하여튼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모티브들은 모든 곳으로부터 온다. 철학적 담론, 신화, 종교, 과학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그의 현학취향을 반영한다. 내가 그의 작품을 봐야 하는지 것인지 읽어야 하는지 난감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화든 철학이든 다 같이 존재의 문제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거룩한 말씀도 존재를 해명하기 위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실존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1990년대의 직설적 감성과 직설적 화법을 통해 병약하여 신열을 앓고 있으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의해 작동되는 자아를 천착하던 그는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마침내 자기존재를 부유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의 작품을 관류해왔던 주제가 존재, 특히 자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지 않는가. 이러한 일관성을 주목해 볼 때 그가 어떤 미끼를 던지고 이미지의 덫을 놓든 그 저변에 사회적 존재, 역사 속의 존재, 주체로서의 존재문제에 천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코기토(Cogito) 이전의 상태, 즉 의심하는 자아이다. 즉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렇다. 의심도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의심은 당연히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또는 진리라고 강변된 것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어쩌면 회의주의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앉아 그것이 과연 그럴까 라고 사색만 한 것은 아니다.

권여현_rhizome forest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2

다중인격에 대한 열렬한 집착이 결국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 것이듯이 그는 이 회의를 통해 이미 오래 전부터 추구해왔던 혼성의 정당성에 대해 더 깊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존재의 사슬이자 욕망의 사슬이기도 한 우로보로스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수미일관하고 논리적인 구조로서가 아니라 그가 또 하나의 키워드로 제시한 앵프라맹스(inframince)처럼 미세한 틈, 그 사이를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앵프로맹스에서 이성과 감성, 무의식과 욕망, 자아와 타자는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겹쳐져 있다. 권여현의 작품에서도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이 되고, 식물이 기계와 공존하며 자아는 잔혹한 지배자이자 그물에 걸린 가련한 먹이로 등장한다. 이들을 연결하는 것은 거대하고 복잡한 뿌리, 그것이 리좀이든 인트라망이었든 무엇이었든 간에, 서로를 성장시키고 구속하는 구조이다. 이것이 매트릭스일까. 아니면 그것조차 맥거핀일까. ● 그가 만든 영화『맥거핀 욕망 혹은 네트 헌터』는 암시적이다. 과연 오필리아는 사랑하는 햄릿에게 버림받은 처참함 때문에 죽은 것일까. 혹은 실수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햄릿에게 복수하기 위해 죽음을 위장한 것일까. 이 영상의 결말 부분은 다소 의아하지만 헌터 마스터(hunter master)로 분장한 작가 자신이 오필리아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들판(이 장면에서 나는 에마뉘엘 안티유(Emanuelle Antille)의「천사의 캠프(Angel's Camp)를 떠올렸다)으로부터 헌터 마스터의 목을 자르는 장면(여기서 나는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의「유디트」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에 이르기까지 잘 짜인 각본과 레제(Fernand Léeger)의「기계적 발레(Le Ballet Mécanique)」에서 활용한 몽타주의 반복과도 같은 효과를 도입한 것은「구도자」와 비교하지만 진일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입부로부터 마지막 장면의 노래나 계속 화면을 어지럽히는 자막, 그것도 작가 자신의 철학적 언술을 적어놓은 글은 생경하고 설명적이다. 그러나 오필리아가 죽인 헌터 마스터가 가족임이 드러나고 물려받은 상자가 맥거핀임이 밝혀짐으로써 이 모든 서사가 인간이 지닌 콤플렉스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찬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필리아는 죽지 않았다. 그녀가 죽이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운명의 그물이었다. 어쩌면 그녀도 햄릿처럼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한 상태로 죽음의 순간을 지연시켰을 수도 있다. 물에 떠 있는 그 순간 그녀가 본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욕망하는 대타자이다. 죽음의 순간에 도달하는 주이상스를 느낄수록 실제의 죽음은 지연된다. 목이 잘려 살해당한 헌터 마스터는 부활해 헌터들에게 칼을 건넨다. 이것은 한 바탕 꿈인가. 아니면 이성과 욕망 사이에 난 균열의 틈으로 슬쩍 본, 그래서 응시가 활성화된 장면인가. 이 모든 것이 맥거핀임이 드러난 순간 영상은 가족사진으로 급속하게 되돌려진다. 다시 거친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이야기는 반복을 암시한다. 그렇듯 그의 현란하면서 복잡한 이야기도 그림을 통해, 퍼포먼스를 통해, 영상을 통해 계속 될 것이다. ■ 최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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