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탑

최양희展 / CHOIYANGHEE / 崔陽喜 / painting   2013_0319 ▶︎ 2013_0331 / 월요일 휴관

최양희_움직이는 탑 1281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_227.3×181.8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최양희 블로그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7:30pm / 월요일 휴관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SEONGNAM ARTS CENTER 경기도 성남 분당구 야탑동 757번지(성남대로 808) Tel. +82.31.783.8142~6 www.snart.or.kr

기억과 상상의 풍경 ● 그림의 구조가 그리 간단명료하지 않다. 화면은 분명 사각의 프레임에 자리하나 자장에 이끌린 TV 화면처럼 상하좌우로 찌그러지고 흔들린다. 흔들리다 못해 흩어져 버리고, 흩어지다 못해 화면에서 사라지고, 사라진 흔적마저 지워졌다. 몇몇은 일상적인, 몇몇은 신화적인, 몇몇은 환상적인 도상들이 여기저기에 서성거리거나 나뒹굴고 있다. 그것들은 재현을 가장하고 있지만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하나하나의 정체성도 의문스럽지만 그들 간의 관계 또한 사뭇 의뭉스럽다. 페가수스와 캥거루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 오토바이와 백조는 서로 어떻게 소통할까? 생태학적, 생물학적, 분류학적, 심리학적, 도구적, 역사적, 신화적 관련성을 상기해보지만 이 또한 그리 간단치 않다. 최양희의 작품은 이렇듯 상투적 시각이나 동일한 문맥, 혹은 단순히 하나의 행간으로 읽혀지지는 않는다. 이 도상들은 외연의 관계, 형식의 울타리로부터 해방된 듯 어떤 시공의 질서에도 귀속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양희가 제시하는 도상들은 해석이나 서사적 문맥을 넘어 작가 자신의 심상내지는 두뇌 저편에 자리하는 의미작용의 실체들이다. 작가는 이를 '기억과 경험, 생각과 상상의 기록'이라 기술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서사가 가능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의 그림에서 일정한 서사를 읽어내기란 그리 용이하지 않다. 서사는 서사이지만 시간은 가역이 가능하고 공간은 균질적이지 않은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리얼리즘 작가들의 끔직한 서사'는 최양희의 그림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화면에서 시간은 비틀거리고 공간은 그림자를 잃었다.

최양희_우리 다시 만나는 날에-peace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_162.2×260.6cm_2009~11

물론 작가의 언급처럼 기억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언어 중 하나는 '기록'이다. 기록은 다양한 차원에서 연구될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인간 기억의 한계에 기인한다. 인간은 기억의 불완전성과 망각에 맞서 '기록'이라는 기억의 보조수단을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기'와 '쓰기'이다. 기억과 기록, 그리기와 쓰기가 동서 공히 유사한 언어표현과 관념을 갖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기억은 머리에 새겨지고, 기록도 점토판이나 종이에 새겨(etch)진다. 기억에 각인된 것도, 기록하고 싶은 것도 명기해야(imprint) 한다. 기억에서 잊어버린 것도, 기록에서 삭제된 것도 지워진(erase) 것이다. 메타포적 특성을 갖는 인상(impression) 또한 기억과 기록의 의미에서 유래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나아가 예술이 도구의 역사임을 고려한다면 기록의 도구, 즉 기억의 보조수단인 그리기와 쓰기가 갖는 인상이 예술의 시원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예술은 기억 정보의 저장과 재생을 위해 발명된 방법과 도구를 자양분으로 삼는다. 예컨대 회화는 기억을 지닌 거울일 수 있으며, 사진은 화학적 기억일 수 있다. 물론 현재는 더 다양한 도구들의 개발과 발전으로 기록의 영역, 혹은 표현의 영역 역시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최양희가 기억을 물화시키는 방법으로 손에 의한 감각의 구현을 고집하는 것은 기억의 직접성과 순수성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여전히 '그리기'와 '쓰기'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최양희_움직이는 탑-When Alone Agai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_193.9×130.3cm_2012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최양희의 작업은 기억과 기록의 상관관계, 기억과 망각의 길항관계 자체에 불온한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의 작품은 작가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사건들의 기록이자 '되새김질'이다. 하지만 그 되새김질에서 각각의 이미지들은 파편적이고, 사건은 단편적이다. 이런 분절적인 느낌은 마치 기억에서 끄집어낸 서로 다른 상황들이 어떤 상관관계도 없이 동시에 연속적으로 제시되는 모양새다. 역설적이지만 최양희가 이런 파편화된 이미지들에 집착함으로써 지향하는 바는 꾸밈이 없는 순수한 기억의 발현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꾸밈없다는 것은 때론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돌이켜 보다가 일순간 아이의 순수한 눈망울로 과거의 시점에서 현재를 꿈꾸어보는 시선을 의미하니 말이다. 그의 작품에서 임의적 서술방식, 특히 연대기적인 순서와 상황의 연계가 무시되는 파편화 과정을 통해 산포된 이미지들은 의외로 기억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드러나도록 하는 한편 작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도록 한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극도로 억제되어 있다. 작가의 목소리가 억제되어 있다는 것은 기억의 왜곡이나 조작이 없고 단속적이지만 어떤 첨삭도 없는 기록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작가가 그 파편들 사이의 빈자리를 자신의 목소리로 채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여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것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상상의 기록일 뿐이다. 작가는 무심하게 기억의 사본들을 들춰내고 상상의 기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화면 위에 쏟아낸 사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개입한 흔적을 겨우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사물들은 작가가 감상자에게 직접 제공하는 정보로서 작가의 기억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화면에 묘사된 상황은 작가의 기억에 반영된 바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예컨대 어릴 적 한두 번은 읽었음직한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 종이접기로 만들어진 동물들과 바람개비, 벽에 마구잡이로 그려진 낙서, 과와 속을 알 수 없는 식물 이미지, 동화 속의 고성이 그것들이다. 시기와 장소는 중요치 않다. 시공을 넘나드는 이미지들의 아상블라쥬라 할 수 있다. 의도된 제스처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미지의 불연속성은 유일하게 전체를 아우르는 화면의 기층에 채색된 검푸른 색채와 유기체의 형상을 띠는 마름돌들의 유영과 잘 어울리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화면 전체의 이미지에서 작가의 기억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최양희가 명확한 형상과 사건의 전개를 통해 기억을 기록하는 대신 사건과 사물을 파편화시킴으로써 기억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억의 복구와 회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억의 단편적 특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최양희_신들의 고향 1210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_70.7×90.9cm_2012 최양희_신들의 고향 12107,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_70.7×90.9cm_2012
최양희_신들의 고향 1211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_116.8×91cm_2012

이렇듯 최양희의 작품에 꾸준히 흐르는 하나의 특질은 감상자에게 서술적, 재현적, 지시적인 연결이 철저하게 배제된 모호한 지각의 경험을 유발시킨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사물들은 명사로서 지각되는 것이 아닌 동사로서 움직일 뿐인 과정에 속한다. 굳이 동사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명사로 나아가는 명사형에 가까운 형상들이다. 결국 그의 그림에서 기억은 고착된 죽은 이미지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다. 탑은 벽돌들이 불규칙하게 횡행하여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했고 인간도 아직 인간이기에는 결핍의 형상이며, 나아가 다른 모든 형상들 역시 중력을 거스르며 공간을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화면이 우주의 카오스를 연상시키는 것도 이 무중력의 형상들 때문이다. 사물들이 화면 위를 부유한다는 것은 그의 기억이 견고한 땅에 뿌리내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과 기록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미화와 왜곡 등을 통한 보완의 전략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정형화된 이 보완의 개입을 무시하거나 의식하지 못한다. 까닭에 우리는 기억의 정확도를 확신하면서 그리기와 쓰기를 통한 기록을 맹신한다. 그렇지만 완벽한 기억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며, 단지 의사 기억(결국은 상상)을 분식하여 기록하면서 스스로 자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기억의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진술은 허위에 불과하다. 최양희의 작품은 이 허위를 반성적으로 재고하고 의문부호를 다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반성을 '놀이'로 전환하여 기록은 기록이되 상상의 기록으로 치닫게 한다. 최양희 작품의 진면목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그의 기억은 연속적인 서사이기를 거부하면서, 그의 그림이 단순한 대상의 기록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환기하고 상상을 충동질하는 것으로 치환시키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사물을 그리지 말고, 그것이 빚어내는 효과를 그려라'라는 말라르메의 이상과 많이 닮아 있다.

최양희_좋은 세포7.7.7.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53cm_2013
최양희_Today_부분 최양희_Toda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3

최양희의 기억과 상상의 풍경들은 작가의 의식 안에 꿈틀대는 꿈, 즉 '집짓는 사람'에 대한 시각적 은유이기도 하다. 어릴 적 블록 쌓기에서 시작된 사각의 벽돌들은 대기와 함께 구불거리고 검푸른 하늘을 유영하는 도상들은 폭발하는 우주의 별들과 함께 흘러간다. 우리 눈앞에서 쑥쑥 자라나는 사각의 벽돌들은 유기체 같은 유연함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소용돌이치면서 또 다른 변신을 획책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벽돌의 유기체는 탑이, 벽이, 인간이 되었다가 산산이 대기 속으로 용해되기도 한다. 이는 무기물과 유기체의 이중의 알레고리를 기억과 상상의 절묘한 리듬으로 노래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설령 거기에서 작가의 환상만을 본다 할지라도, 시작은 분명 기억의 단편이라는 점이 변하지는 않는다. 탑은 건축물에 속하지만 인간이 살지 않는 건축물이다. 따라서 탑은 기원이나 염원 등의 상징성으로 그 본연의 역할을 소화한다. 인간을 위한 방풍, 방습, 보온, 사생활 보호 등의 폐쇄성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결국 「움직이는 탑」은 기억의 현장으로서 건축물이 열려 있는 상태다. 나아가 최양희는 파편화 기법을 응용하여 기억의 현장에서 조차 그 대상을 조각내어 펼쳐 놓았다. 따라서 작가의 심상이 잘 드러난 건축물은 건물이 아니라 벽돌로 둘러싸인 상상의 통로다. 이 통로를 통해 우리는 세계를 휘돌다가 우주로 나아가 「신들의 고향」에 이르러 초신성의 폭발을 목도한다. 폭발로 인하여 열린 탑의 주변은 하얗게, 노랗게 발광하면서 더 이상 어떤 형체도 찾아볼 수 없다. 별의 생성과 소멸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기억의 기록이란 오래된 형식적 관념에 하나의 붕괴가 일어났다. 기억의 기록에서 일어난 이 구조적 변이와 최양희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파편적, 유동적 도상들 간의 유사관계는 너무나 현저하다. 그것은 연대기적 일관성과 통일성의 파괴, 명확하고 기하학적인 구조의 분쇄에서 확인된다. 닫힌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장이다. 이 세계에선 그 누구도 인식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 자유로우며, 누구도 기억의 상실감으로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동참하느냐는 않느냐는 감상자의 몫으로 남는다. 원한다면 언제든 화면에 들어설 수 있다. 사막으로, 평원으로, 광대한 우주로, .... ■ 유근오

Vol.20130319j | 최양희展 / CHOIYANGHEE / 崔陽喜 / painting